가난에 관한 시 [2]
차례
가난 / 이시영
가난 / 노영희
가벼운 가난 / 정일근
가난의 빛 / 송찬호
가난의 변주곡 / 황규관
가난이 밟고 간 길 / 유진택
가난을 위하여 / 고재종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 배창환
황학동 안네 / 김해자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 김사인
가난 / 이시영
시 한편을 써서 좋아라며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건들건들 가로수 길을 걸으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서루운 가난뱅이 같더라.
- 이시영,『아르갈의 향기』(시와시학사, 2005)
가난 / 노영희
자갈밭에 노동으로 쓴 네 이름이다
밥술에 치떨리는 네 자존심이다
단칸방에 잠든 네 청춘이다
물지게를 지고 맞서던 네 하늘이다
고무신이 찢겨 울던 네 역사다
바람에 쫓겨가는 네 무명옷이다
보릿고개 노여움의 네 샛길이다
어머니가 쓰다듬던 네 솥뚜껑이다
벌판에 고꾸라진 네 무덤이다
장터에 소리치는 네 꿈이다
아이들의 웃음에 박힌 네 허무다
뱃머리 잡고 쓰러진 네 절망이다
군화가 짓밟은 네 앞가슴이다
- 노영희,『한 사람』(푸른숲, 1991)
가벼운 가난 / 정일근
밀양 산내면 초가을 사과밭 샛길로
등 굽은 당숙을 따라
등 굽혀 사과나무를 업고 벌초 가는 길
누가 누웠는지 모르는 무덤들을 찾아가는
일족의 빈 궤짝 같은 가난한 연대기의 무게가
익지 않은 사과 몇 알보다 가벼운 날.
- 정일근,『방!』(서정시학, 2013)
가난의 빛 / 송찬호
사내가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들을 차례차례 눕혔다
물먹은 잠수함처럼 아이들은 금세 방바닥 깊이 꺼져 들어갔다
그날 밤 그는 흰빵보다 더 포근하고 거대한 잠고래를 보았다
그는 촘촘한 그물을 가만가만 내렸다
그 빽빽한 가난에 걸려들면 무엇 하나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밤새도록 걷어올린
발 디디면 금방 꺼질 것 같은 조그만 섬들, 그의 아이들
그는 조심조심 그 징검다리를 밟고 건너가
그렇게 또 하룻밤 자고 되돌아갔다
물가에서 울고 있는 빈 항아리 같은 여자를 남겨 두고
기와 한 장 깨져도 비가 새듯
비늘 한 장 떨어진 창 너머 당신들의 방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가난의 빛이 눈부시게 흘러나왔습니다
- 송찬호,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
가난의 변주곡 / 황규관
지금껏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빚더미 가득한 집 싱크대는 아직도 줄줄 샌다
나는 그 원인을, 막힌
배수구에 버린 물이 역류하는 것이라
추측은 하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역류하는 건 고작 구정물뿐일 테니까
가난에도 문양이 있는 법이다
지금 겪는 이 시간은
어두컴컴하게 막힌 배수구와도 닮았지만
내 심장은 꺼지지 않은 사랑이
아직 움켜쥐고 있다
가지 못한 길이 남아 있는 오늘 밤에도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번민은 목마른 가뭄에도 우북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쁨이 내게는 있다
아침마다 꿈에서 울고 가는 새여
떠나버린 음악이 남긴 상흔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가난한 걸음으로 강가를 걷기로 했다
혼자만 듣는 신음을 더 앓기로 했다
- 황규관,『정오가 온다』(도서출판 삶창, 2015)
가난이 밟고 간 길 / 유진택
가난한 세월이 밟고 간 길 위에는
가난한 상표가 찍혀 있다
낡은 필름처럼 옛추억을 되돌려보면
누런 보리밭 이랑을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떠밀려 산비탈을 넘는 등 굽은 황소
질척이는 울음은 멍에에 매달려 먼 옛날을 부른다
가난을 감추려고
32인치 초대형 텔레비전을 사고
요술 같은 컴퓨터를 들여놓아도
내 책상머리에 꽂힌 시집은
토장국의 구수한 냄새만 풍긴다
읽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시골길과
등 굽은 황소의 그늘진 울음,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목말라하는 가난의 그리움이다
- 유진택,『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문학과지성사, 1996)
가난을 위하여 / 고재종
꼭두새벽, 넉점도 못됐는데
눈빛 비쳐든 창호문 새하얘서
맑게 깨어나는 정신, 서재에 들어
한기 뚝뚝 듣는 寒山詩 펼친다
봄에 논밭 갈아 가을에 씨 거두고
엄동삼동에 책 읽는 버릇
그 무슨 천금을 줘도 못 바꿀레라
내 비록 가문 들판, 몇줌 곡식 거둬
세안 양식에 못 미칠지라도
아내 몰래 쌀과 바꿔온 몇권의 시집들
벌써 책장이 너덜너덜 닳았음이여
그 서책 닳는 만큼 깨이는 넋인 양
헛간 장태에선 수탉울음 청청하고
창호에 비쳐든 눈빛은 하도 좋아
시 일편에 담고자 펜끝 세우니
늙은 아버진 벌써 고샅길 샘길 내느라
쓱쓱 눈 쓰는 소리 바쁘시다
옳거니, 세상의 진실과 아름다움은
숫눈 쌓인 날 제때 기침하여
사람 내왕할 길부터 내는 데 또 있는 것
책 덮고 급히 앞문을 차니
눈부셔라, 울 너머 큰 눈 얹힌 청대숲
그 휘적휘적 휘어진 대줄기에서
포르릉 눈 털며 일군의 새떼 치솟나니
마침내 나 사랑하리, 이 가난한 날들의
천지 사계 공으로 누리는 사치며
거기에 죄 한점 더하지 않는 꿈이랑.
- 고재종,『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 1995)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 배창환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큰 꽃은 큰 꽃을 달고
작은 꽃은 늦가을에 죽을 힘 다하여
작은 꽃이라도 피워 올린다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큰 사람은 큰 사람으로 살고
작은 사람은 젖 먹던 힘 다하여
아이도 낳고 돈도 벌면서
처마에 작은 연등 하나라도 애써 밝힌다
어떤 이는 돈을 남기고
어떤 이는 남부럽지 않을 자식을 남기지만
또 어떤 이는 가슴에 그늘 깊은 나무를 심고
따뜻한 시를 남기고, 뒷사람이 찾아 밟을
눈길 위에 곧은 발자국을 남긴다
해 뜨면 곧 녹아 사라져 없어질지라도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은 어둔 밤 귀갓길 골목 어귀에
낯익은 별무리 찾아 띄워 길을 밝히고
키 낮은 담장 아래 볕살 닿는 자리마다
시간의 긴 터널 건너온 여문 꽃씨를 뿌려 거둔다
- 배창환,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실천문학사, 2019)
황학동 안네 / 김해자
황학동 낡은 삼일아파트 24동 앞
서울다방 입구에서 차를 파는 여자
남편과 아비 없는 모녀 길거리에 버려진
그릇처럼 차대는 사장바닥에서
자나깨나 머리에 딸을 이고 다녔다는 여자
없는 남편 혁띠를 말채처럼 휘둘러 길을 뚫어간 여자
다방 부엌 구석 거울로 가린 쪽방에 어린 딸을 숨기고
아기 예수 꼭 안은 성모마리아 사진을 걸어
다방 안에 작은 성당을 차렸다는 여자
무덤처럼 컴컴한 골방에서 20년
게쉬타포에 쫓기는 안네처럼 살다 늙어간 여자
건물이 헐리고 타워팰리스가 들어선다는데 청계천엔
고기가 노는 맑은 물도 흐른다는데 손님 끊긴 지
오래인 다방 깨진 수족관엔
인조 물풀만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데
보상금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은 여자
쫓겨나면 구루마 위에 다방 차려도 좋고
공공근로도 괜찮다며 경쾌하게 웃는 여자
- 김해자, 『축제』(도서출판 애지, 2007)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 김사인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던 쉬파리들 있었네.
한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나는 된장이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개가 울밑에 숨겨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 김사인,『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출처] 시 모음 942. 「가난」|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