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 재 인생길ㅡ“52년 만에 갚은 빚”
필자의 책장에는 오래전에 “별것 아니나 두고 보시옵소서”라는 친필을 담은 翠翁 유광렬박사님 시문집을 비롯해서
여러 선배님들의 고귀한 삶의 족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증언록과 자서전들이 여러 권 꽂혀있다.
이중에는 멀리서 특별히 문 명호회장님이 보내주신 여러분의 증언록이 있는가하면, 김 관해 박사님과 윤 영태 회장님이
손수 자신들의 자서전을 챙겨주시어 아름다운 생애를 늘 감사히 되새겨 보곤 한다.
어제 귀한 선배님의 자서전 한권을 또 증정 받았다.
崔 東均(430가정)선배라는 분께서 봉우 재라는 書名의 자서전을 쓰셨다.
필자는 그분과는 딱 한번 인사 나눈 게 전부인데, 그분의 足跡을 대하니 오랜 知己같은 생각이 들고 님의 純粹한 마음과
온갖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하늘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생애가 더없이 귀하게 다가온다.
어느 시인의 “인생의 저 나무처럼”이란 싯귀가 스쳐 떠오른다.
인생은 저 나무처럼
수없는 잎새 그 잎새의 하나로
촘촘한 가지 그 가지의 하나로
일상의 나날을 살아야하는
스스로의 충실
우주와 자연에 공허함이 없듯
인생의 삶이란
섭리에 순응하는
스스로 빈틈없는 충실
한사람의 인간
그 한사람의 인간은
먼지 자욱한 도시의 거리에
가로수가 되어 서있기도 하고
어느 산골 홀로 피는 꽃이어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오늘을 사는 충실
인생은 오직 살아가는 일들
그 일들이 비록 아무 쓸모없어도
우주와 자연의 섭리 안에
오늘을 사는 삶에 의 충실
松九 최 동균 선배의 삶이 그랬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오직 하늘만이 기억할 수 있는
진실과 스스로의 빈틈없는 충실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했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게 하리라....
그분의 글을 보노라면
서문에서부터 재미있는 전설이야기가 등장하여
귀가 더욱 솔깃해지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 퍽 여유 있는 재미가 넘쳐날듯 싶다.
님은 암울했던 시절 일제말엽에 태어났기에
그 무렵 누구나 그랬듯이
힘들고 팍팍했던, 또 그지없이 초라했던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이다 보니
어머니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다
문전 박대를 받아보기도 하고...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20리가 넘는 5일장을 과일이며 땔감들을 팔러 다닌 이야기...
그때도 괜찮은 집 아이들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들이 그렇게도 부러웠고...
멋진 양복입은 사람들을 보면
그런 옷 자신도 입어보고 싶었던 생각...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가 그림의 떡ㅡ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들이 입었던 피 묻은 군복을 사서
검은색 염색을 하여 양복대신 입었다는 이야기...
돈도 빽도 없고 누구하나 돌봐줄 사람 없기에
가족 전체가 동막에 들어가 머슴살이 했다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모두 눈물겨운 사연들이다.
송구 선배는 뜻 길에서도 남다른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그가 목회생활 하기 전
주로 사업대원으로 교회를 보살핀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당시 사업이란 말이 좋아 사업이지 구걸행각이었다.
필자역시 그런 생활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기에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며 읽어보는 느낌이었다.
연필 몇 자루 가방에 넣고 고 학생인 듯 가장하며
두메산골 시골마을까지 쫒아 다니며
때로는 잠잘 곳이 없어 여름철 소외양간 옆에 둥지를 틀었다가
악취와 모기떼에 시달리며 하얗게 날 새버린 사연...
어느 차가운 겨울 담배 건 초장에서
볏 집을 덮고 잠을 잤는가 하면
더 기막힌 것은 죽은 혼령과 잠을 자야했다니...
또 오징어를 잡아 보겠다고 속초까지 날라 가
배 멀미에 달랑 한 마리 잡아 올려 체면도 구기고...
어떤 때는 사업 중 아는 사람 만나
안다고 차마 말 못하고 거짓말 둘러대며
위기를 모면하는 처절한 사연들이 지면 가득하다.
님의 자서전 백미는 아무래도
<52년 만에 빚 갚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1952년도의 이야기다.
열네살 때 장에 갔다 오는 길에 돈 70원을 주웠단다.
돈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한참 가는데
자신과 같은 반 동창생인 여자 친구가 가던 길 돌아서서
돈 찾으러 오다 맞닥뜨리게 되었고...
혹시 돈 떨어 진거 못 보았느냐 묻는데
얼떨결에 못 봤다고 답하고 그냥 집에 와 버렸단다.
돌아와 생각하니 돈 잃은 친구생각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려줄 용기도 나질 않았다.
비겁하다는 비난과 나쁜 놈 취급당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눈 딱 감고 그냥 그 돈을 써버리고 말았다.
평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거짓말도 잘하고 부모를 속이기도 했지만
자신은 거짓말도 몰랐고 누굴 속일 줄도 몰랐었다.
그처럼 순수했던 그였기에 친구 돈을 돌려주지 못한
그날의 잘못은 평생을 두고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이 되고 말았다.
52년이 지난 어느 날ㅡ
친구를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밀었다.
이제라도 만나서 용서를 빌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다행이도 이종사촌 누나가 그 친구 사는 곳을 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 친구는 이미 60을 지난 나이인데다
모 교회 권사로 있는데, 남편과 사별한 후로
누구도 만나지 않으려는 완고한 뜻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꼭 만나야겠다는 간청을 하니 누나생각은
혹시라도 마음에 두는 여자 아닌가 그런 오해를 빚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걸 누나에게 밝히기도 난처하고...
하는 수 없이 편지를 써서 누나 편에 보냈다.
편지 속에는 1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동봉하고서...
돈이 많아서 그렇게 큰돈을 넣은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상 어려서 친구에게 끼쳤던 아픔의 상처를
그렇게라도 해서 보상해주고 싶었던 오직 그 한마음에서였다.
편지를 받았다는 답장도 받아보진 못했지만
증오와 저주의 마음들을 털고
이런 친구도 있었구나 그렇게만 여겨준다면 하는 생각뿐이었으리라...
세상인심은 한없이 각박해지고
남의 것도 언제든 욕심내며 사기치고 강탈도 하는데
그 철없던 어린 시절
어쩌면 대수롭지도 않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일을
뒤늦게라도 갚고야마는 그의 갸륵한 정신이
참으로 위대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며 내 가슴을 뭉클케 한다.
선배의 생애노정을 되돌아보며, 생각나는 시 한편을 올려본다.
後悔없는 人生/ 문 중섭
황혼 길에 접어든 인생이라면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날로 퇴색되어가는
추억을 되새기게 되나니
교만했던 젊은 날의 시절은
자신의 분수도 모르면서
하느님과 이웃과 가족들에게
불성실했던 아쉬운 마음을
더욱 가중케 하는 것은
누구나 당하는 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황혼 길에 접어든 인생이라면
저마다 實相無漏의 경지 속에
終生의 靈像을 감지하면서
새 희망도 함께 가지나니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보람있게 살아온 일들과
健實하게 살려는 아들딸들...
귀여운 손자 손녀들이 있어
인간적인 아쉬움을 극복케 하나니
이는 곧 聖神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황혼길에 접어든 인생이라면
지나간 일을 되새겨 보면서
언제인가는 가야할 길을
감지하고 대비해야 하나니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항상 敬畏하는 마음으로
信望愛의 三德을 닦아가며
보람에 찬 인생의 길을
後悔 없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