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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자료는 성씨와 본관의 한자표기를 돕기 위한 자료입니다. 따라서 본관의 종류에 있어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이미 통합된 구 본관이 한자표기의 참고를 위해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 | 姓 | 본관(本貫) |
가씨 | 賈氏 | 소주(蘇州) |
간씨 | 簡氏 | 가평(加平) |
갈씨 | 葛氏 | 남양(南陽) |
감씨 | 甘氏 | 회산(檜山) |
강씨 | 姜氏 | 금천(衿川) 진주(晉州) |
康氏 | 순천(順天) 신천(信川) 영강(永康) 용인(龍仁) 재령(載寧) 진주(晉州) | |
彊氏 | 진주(晉州) | |
개씨 | 介氏 | 여주(驪州) |
견씨 | 堅氏 | 천녕(川寧) |
甄氏 | 황간(黃磵) | |
경씨 | 慶氏 | 청주(淸州) |
景氏 | 태인(泰仁) 해주(海州) | |
계씨 | 桂氏 | 수안(遂安) |
고씨 | 高氏 | 개성(開城) 고흥(高興) 안동(安東) 용담(龍潭) 장흥(長興) 전주(全州) 제주(濟州) 횡성(橫城) |
곡씨 | 曲氏 | 면천(沔川) 용궁(龍宮) |
공씨 | 公氏 | 김포(金浦) |
孔氏 | 곡부(曲阜) | |
곽씨 | 郭氏 | 선산(善山) 의령(宜寧) 청주(淸州) 해미(海美) 현풍(玄風) |
구씨 | 丘氏 | 평해(平海) |
具氏 | 능성(綾城) 창원(昌原) | |
邱氏 | 은진(恩津) | |
국씨 | 鞠氏 | 담양(潭陽) |
궉씨 | 鴌氏 | 순창(淳昌) 선산(善山) |
권씨 | 權氏 | 안동(安東) 예천(醴泉) |
근씨 | 斤氏 | 청주(淸州) |
금씨 | 琴氏 | 봉화(奉化) |
기씨 | 奇氏 | 남원(南原) 덕양(德陽) 행주(幸州) |
길씨 | 吉氏 | 선산(善山) 해평(海平) |
김씨 | 金氏 | 강릉(江陵) 강서(江西) 강진(康津)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산(慶山)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교하(交河) 금산(錦山) 금산(金山) 금화(金化) 김녕(金寧) 김제(金堤) 김해(金海) 나주(羅州) 낙안(樂安) 남양(南陽) 남평(南平) 당악(唐岳) 당진(唐津) 대구(大邱) 덕수(德水) 도강(道康) 도주(道州) 동래(東萊) 명주(溟州) 무장(茂長) 문화(文化) 밀양(密陽) 배천(白川) 보령(保寧) 보은(報恩) 부안(扶安) 부평(富平) 분성(盆城)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서흥(瑞興) 선산(善山) 선성(宣城) 설성(雪城) 수안(遂安) 수원(水原) 순천(順天) 시흥(始興) 신주(愼州) 신천(信川) 아산(牙山) 안동(安東) 안로(安老)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근(楊根) 양산(梁山) 양주(楊州) 언양(彦陽) 여수(麗水) 연기(燕岐) 연안(延安) 영광(靈光) 영덕(盈德) 영동(永同) 영암(靈巖) 영양(英陽)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예천(醴泉) 오성(筽城) 오천(烏川) 옥천(沃川) 용궁(龍宮) 용담(龍潭) 우록(友鹿) 우봉(牛峰) 울산(蔚山) 웅천(熊川) 원주(原州) 월성(月城) 은율(殷栗) 의성(義城) 장연(長淵)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산(定山) 정주(貞州) 진도(珍島) 진례(進禮) 진잠(鎭岑) 진주(晉州) 진천(鎭川) 창원(昌原) 청도(淸道) 청주(淸州) 청풍(淸風) 춘양(春陽) 태원(太原) 파평(坡平) 풍산(豊山) 함창(咸昌) 해평(海平) 해풍(海豊) 희천(熙川) (113) |
나씨 | 羅氏 | 군위(軍威) 금성(錦城) 나주(羅州) 능성(綾城) 수성(壽城) 안정(安定) |
남씨 | 南氏 | 고성(固城) 영양(英陽) 영양(穎陽) 의령(宜寧) |
남궁씨 | 南宮氏 | 함열(咸悅) |
내씨 | 乃氏 | 개성(開城) |
노씨 | 盧氏 | 경주(慶州) 곡산(谷山) 광산(光山) 광주(光州) 교하(交河) 김해(金海) 만경(萬頃) 밀양(密陽) 신창(新昌) 안강(安康) 안동(安東) 의주(義州) 장연(長淵) 파주(坡州) 풍천(豊川) 해주(海州) (16) |
路氏 | 개성(開城) | |
魯氏 | 강화(江華) 광주(廣州) 밀양(密陽) 함평(咸平) | |
뇌씨 | 雷氏 | 교동(喬桐) |
단씨 | 段氏 | 연안(延安) |
당씨 | 唐氏 | 밀양(密陽) |
대씨 | 大氏 | 밀양(密陽) |
도씨 | 道氏 | 고성(固城) |
都氏 | 성주(星州) 팔거(八莒) | |
陶氏 | 풍양(豊壤) | |
독고씨 | 獨孤氏 | 남원(南原) |
돈씨 | 頓氏 | 목천(木川) |
동씨 | 董氏 | 광천(廣川) |
동방씨 | 東方氏 | 진주(晉州) |
두씨 | 杜氏 | 두릉(杜陵) 만경(萬頃) |
마씨 | 馬氏 | 목천(木川) 장흥(長興) |
麻氏 | 영평(永平) | |
만씨 | 萬氏 |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광주(廣州) 영풍(永覽) 익곡(翼谷) 진강(鎭江) 홍주(洪州) |
매씨 | 梅氏 | 충주(忠州) |
맹씨 | 孟氏 | 신창(新昌) |
명씨 | 明氏 | 서촉(西蜀) |
모씨 | 牟氏 | 함평(咸平) |
목씨 | 睦氏 | 사천(泗川) |
묵씨 | 墨氏 | 광령(廣寧) 요동(遼東) |
문씨 | 文氏 | 감천(甘泉) 강릉(江陵) 개령(開寧) 남평(南平) 명주(溟州) 안동(安東) 장연(長淵) 정선(旌善) 창원(昌原) 취성(鷲城) |
門氏 | 송림(松林) 인동(仁同) 인천(仁川) | |
미씨 | 米氏 | 재령(載寧) |
민씨 | 閔氏 | 여흥(驪興) |
박씨 | 朴氏 | 강릉(江陵) 개성(開城)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주(廣州) 구산(龜山) 군위(軍威) 나주(羅州) 노성(魯城) 면천(沔川) 무안(務安) 문의(文義) 밀양(密陽) 반남(潘南) 봉산(鳳山) 비안(比安)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순창(淳昌) 순천(順天) 여주(驪州) 영암(靈巖) 영해(寧海) 운봉(雲峰) 울산(蔚山) 웅진(熊津) 월성(月城) 은풍(殷豊) 음성(陰城) 음죽(陰竹)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전주(全州) 정선(旌善) 죽산(竹山) 진원(珍原) 창원(昌原) 춘천(春川)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인(泰仁) 평산(平山) 평주(平州) 평택(平澤) 함안(咸安) 함양(咸陽) (54) |
반씨 | 潘氏 | 거제(巨濟) 광산(光山) |
班氏 | 개성(開城) 고성(固城) 평해(平侮) | |
방씨 | 房氏 | 남양(南陽) 수원(水原) 용성(龍城) |
方氏 | 상주(尙州) 온양(溫陽) | |
龐氏 | 갈양(褐陽) 개성(開城) 대원(大原) | |
배씨 | 裵氏 | 경산(京山) 경주(慶州) 곤산(昆山) 김해(金海) 남해(南海) 달성(達城) 대구(大丘) 분성(盆城) 성주(星州) 영암(靈巖) 협계(俠溪) 흥해(興海) |
백씨 | 白氏 | 남포(藍浦) 대흥(大興) 수성(隋城) 수원(水原) 양산(梁山) 임천(林川) 직산(稷山) 태인(泰仁) 해미(海美) |
범씨 | 范氏 | 금성(錦城) |
변씨 | 卞氏 | 개성(開城) 밀양(密陽) 초계(草溪) 팔계(八溪) |
邊氏 | 원주(原州) 장연(長淵) 황주(黃州) | |
복씨 | 卜氏 | 면천(沔川) |
봉씨 | 奉氏 | 하음(河陰) |
鳳氏 | 경주(慶州) | |
부씨 | 夫氏 | 제주(濟州) |
빈씨 | 彬氏 | 담양(潭陽) 대구(大丘) |
빙씨 | 氷氏 | 경주(慶州) |
사씨 | 史氏 | 거창(居昌) 임강(臨江) 장사(長沙) 전주(全州) 진주(晋州) 청주(靑州) |
사공씨 | 司空氏 | 효령(孝令) |
상씨 | 尙氏 | 목천(木川) |
서씨 | 徐氏 | 남양(南陽) 남평(南平) 달성(達城) 당성(唐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연산(連山) 이천(利川) 장성(長城) 절강(浙江) 평당(平當) |
서문씨 | 西門氏 | 안음(安陰) |
석씨 | 昔氏 | 월성(月城) |
石氏 | 양주(楊州) 충주(忠州) 해주(海州) 홍주(洪州) 화원(花園) | |
선씨 | 宣氏 | 보성(寶城) |
선우씨 | 鮮于氏 | 태원(太原) |
설씨 | 卨氏 | 경주(慶州) |
薛氏 | 경주(慶州) 순창(淳昌) | |
偰氏 | 경주(慶州) | |
섭씨 | 葉氏 | 경주(慶州) |
성씨 | 成氏 | 창녕(昌寧) |
소씨 | 蘇氏 | 진주(晉州) |
邵氏 | 가량(加良) 경주(慶州) 공주(公州) 남양(南陽) 인천(仁川) 전주(全州) 청산(責山) 평산(平山) | |
손씨 | 孫氏 | 경주(慶州) 나주(羅州) 밀양(密陽) 부평(富平) 수주(樹州) 안동(安東) 월성(月城) 일직(一直) 청주(淸州) 평해(平海) |
송씨 | 宋氏 | 김해(金海) 남양(南陽) 덕산(德山) 문경(聞慶) 서산(瑞山) 신평(新平) 야성(冶城) 양주(楊州) 여산(礪山) 연안(延安) 영주(榮州) 용성(龍城) 은진(恩津) 진천(鎭川) 청주(淸州) 합천(陜川) 홍산(鴻山) 홍주(洪州) (18) |
松氏 | 화순(和順) | |
수씨 | 水氏 | 김해(金海) 운제(雲梯) |
순씨 | 舜氏 | 임천(林川) 파주(坡州) |
荀氏 | 연곡(連谷) 임천(林川) 창원(昌原) 홍산(鴻山) | |
승씨 | 承氏 | 광산(光山) 연일(延日) |
昇氏 | 송도(松都) | |
시씨 | 施氏 | 절강(浙江) |
柴氏 | 금화(金化) 능향(綾鄕) 태인(泰仁) | |
신씨 | 愼氏 | 거창(居昌) |
申氏 | 고령(高靈) 아주(鵝洲)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은풍(殷豊) 죽산(竹山) 천안(天安) 평산(平山) | |
辛氏 | 영산(靈山) 영월(寧越) | |
심씨 | 沈氏 | 부유(富有) 삼척(三陟) 청송(靑松) 풍산(豊山) |
안씨 | 安氏 | 공산(公山) 광주(廣州) 동주(洞州) 순흥(順興) 안산(安山) 안성(安城) 죽산(竹山) 지곡(池谷) 충주(忠州) 탐진(耽津) 태원(太原) 흥녕(興寧) |
애씨 | 艾氏 | 연풍(延豊) 전주(全州) 한양(漢陽) |
야씨 | 夜氏 | 개성(開城) 봉성(峯城) 석천(石淺) 원평(原平) |
양씨 | 樑氏 | 남양(南陽) |
梁氏 | 남원(南原) 남해(南海) 제주(濟州) 청주(淸州) 충주(忠州) | |
楊氏 | 남원(南原) 밀양(密陽) 제주(濟州) 중화(中和) 청주(淸州) 하음(河陰) | |
陽氏 | 자요(慈遼) | |
어씨 | 魚氏 | 충주(忠州) 함양(咸陽) 함종(咸從) |
엄씨 | 嚴氏 | 경원(慶源) 영월(寧越) |
여씨 | 余氏 | 의령(宜寧) |
呂氏 | 곡산(谷山) 성주(星州) 함양(咸陽) | |
연씨 | 延氏 | 곡산(谷山) |
燕氏 | 곡산(谷山) 덕원(德原) 영평(永平) 전주(全州) 정평(定平) 평주(平州) | |
連氏 | 나주(羅州) 전주(全州) | |
염씨 | 廉氏 | 곡성(曲城) 봉성(峰城) 서원(瑞原) 파주(坡州) |
영씨 | 永氏 | 평해(平海) |
예씨 | 芮氏 | 남양(南陽) 부계(缶溪) 수원(水原) 의흥(義興) 청풍(淸風) |
오씨 | 伍氏 | 부흥(復興) |
吳氏 | 고창(高敞) 군위(軍威) 금성(金城) 나주(羅州) 낙안(樂安) 동복(同福) 두원(荳原) 보성(寶城) 연일(延日) 울산(蔚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평해(平海) 함양(咸陽) 함평(咸平) 해주(海州) 화순(和順) 흥양(興陽) | |
옥씨 | 玉氏 | 의령(宜寧) |
온씨 | 溫氏 | 봉성(鳳城) |
옹씨 | 邕氏 | 순창(淳昌) 옥천(玉川) |
雍氏 | 옹진(饔津) 파평(坡平) | |
왕씨 | 王氏 | 강릉(江陵) 개성(開城) 안동(安東) 제남(濟南) 청주(淸州) 해주(海州) |
용씨 | 龍氏 | 홍천(洪川) |
우씨 | 于氏 | 목천(木川) |
禹氏 | 단양(丹陽) | |
원씨 | 元氏 | 원주(原州) |
袁氏 | 비안(比安) | |
위씨 | 韋氏 | 강화(江華) |
魏氏 | 장흥(長興) | |
유씨 | 柳氏 | 경주(慶州) 고흥(高興) 문화(文化) 서산(瑞山) 선산(善山) 영광(靈光) 유주(儒州) 전주(全州) 정주(貞州) 진주(晉州) 풍산(豊山) 흥양(興陽) |
兪氏 | 강진(康津) 고령(高靈) 금산(金山) 기계(杞溪) 무안(務安) 인동(仁同) 창원(昌原) 천녕(川寧) | |
劉氏 | 강릉(江陵) 강화(江華) 거창(居昌) 문화(文化) 배천(白川) 중원(中原) 충주(忠州) 한양(漢陽) | |
庾氏 | 무송(茂松) | |
육씨 | 陸氏 | 옥천(沃川) |
윤씨 | 尹氏 | 기계(杞溪) 나주(羅州) 남원(南原) 무송(茂松) 서흥(瑞興) 양주(楊州) 영천(永川) 예천(醴泉) 옥과(玉果) 칠원(漆原) 파평(坡平) 포주(抱州)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해평(海平) |
은씨 | 殷氏 | 행주(幸州) |
음씨 | 陰氏 | 죽산(竹山) |
이씨 | 伊氏 | 은천(銀川) 태원(太原) |
李氏 | 가평(加平) 가평(嘉平) 강릉(江陵) 강양(江陽) 강진(康津) 강화(江華) 강흥(江興) 개성(開城) 견주(見州) 결성(結城) 경산(京山) 경원(慶源)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부(古阜)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금구(金溝) 금마(金馬) 금산(金山) 길주(吉州) 김포(金浦) 나주(羅州) 남평(南平) 농서(隴西) 단성(丹城) 단양(丹陽) 담양(潭陽) 대흥(大興) 덕산(德山) 덕수(德水) 덕영(德永) 덕은(德恩) 도안(道安) 문의(文義) 벽진(碧珍) 보령(保寧) 봉산(鳳山) 부안(扶安) 부여(扶餘) 부평(富平) 사천(泗川) 상산(商山) 서림(西林) 서산(瑞山) 서천(舒川) 설성(雪城) 성주(星州) 수안(遂安) 수원(水原) 수주(樹州) 순천(順天) 신평(新平) 아산(牙山)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산(梁山) 양성(陽城) 양주(楊州) 여주(驪州) 여흥(驪興) 연안(延安) 염주(鹽州) 영성(靈城) 영월(寧越) 영주(永州) 영주(瀛州)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옥구(沃溝) 온양(溫陽) 완산(完山) 용구(龍駒) 용궁(龍宮) 용인(龍仁) 우계(羽溪) 우봉(牛峰) 울산(蔚山) 원율(原栗) 원주(原州) 월성(月城) 음죽(陰竹) 익산(益山) 익양(益陽) 인제(麟蹄) 인주(仁州) 인천(仁川) 임강(臨江) 장기(長鬐) 장수(長水) 장천(長川) 재령(載寧) 적성(積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선(旌善) 정읍(井邑) 지평(砥平) 진보(眞寶) 진성(眞城) 진안(鎭安) 진위(振威) 진주(晉州) 진천(鎭川) 차성(車城) 창녕(昌寧) 천안(天安) 철성(鐵城) 청송(靑松) 청안(淸安) 청양(靑陽) 청주(淸州) 청해(靑海) 초산(楚山)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원(太原) 통진(通津) 평산(平山) 평양(平壤) 하빈(河濱) 한산(韓山) 함안(咸安) 함평(咸平) 홍주(洪州) 흥양(興陽) (132) | |
異氏 | 밀양(密陽) | |
인씨 | 印氏 | 교동(喬洞) 연안(延安) |
임씨 | 任氏 | 관산(冠山) 장흥(長興) 정안(定安) 평산(平山) 풍산(豊山) 풍천(豊川) |
林氏 | 경주(慶州) 금성(錦城) 길안(吉安) 나주(羅州) 보주(甫州) 부안(扶安) 선산(善山) 안동(安東) 안음(安陰) 안의(安義) 예천(醴泉) 옥구(沃溝) 옥야(沃野) 울진(蔚珍) 은진(恩津) 익산(益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조양(兆陽) 진천(鎭川) 평택(平澤) 풍천(豊川) 회진(會津) (23) | |
장씨 | 張氏 | 결성(結城) 구례(求禮) 나주(羅州) 단양(丹陽) 대원(大元) 덕수(德水) 목천(木川) 무안(務安) 부안(扶安) 순천(順天) 안동(安東) 예산(禮山) 옥구(沃溝) 옥산(玉山) 울진(蔚珍) 인동(仁同) 장연(長淵) 전주(全州) 지례(知禮) 진안(鎭安) 진천(鎭川) 청송(靑松) 평양(平壤) 풍덕(豊德) 해주(海州) 홍천(洪川) 흥덕(興德) 흥양(興陽) 흥해(興海) (29) |
章氏 | 거창(居昌) | |
莊氏 | 금천(衿川) 장연(長連) | |
蔣氏 | 아산(牙山) | |
전씨 | 全氏 | 감천(甘泉) 경산(慶山) 경주(慶州) 기장(機張) 나주(羅州) 부여(扶餘) 성주(星州) 옥산(玉山) 옥천(沃川) 완산(完山) 용궁(龍宮) 정선(旌善) 죽산(竹山) 천안(天安) 팔거(八莒) 평강(平康) 함창(咸昌) 황간(黃澗) |
田氏 | 개성(開城) 남양(南陽) 남원(南原) 담양(潭陽) 연안(延安) 영광(靈光) 우봉(牛峰) 태산(泰山) 평택(平澤) | |
錢氏 | 문경(聞慶) | |
점씨 | 占氏 | 한산(韓山) |
정씨 | 丁氏 | 금성(錦城) 나주(羅州) 압해(押海) 영광(靈光) 창녕(昌寧) 창원(昌原) |
程氏 | 하남(河南) | |
鄭氏 | 경주(慶州) 고성(固城) 광산(光山) 금성(錦城) 김포(金浦) 나주(羅州) 동래(東萊) 봉화(奉化) 삼가(三嘉) 서산(瑞山) 야성(野城) 연일(延日) 영덕(盈德) 영일(迎日) 온양(溫陽) 장기(長鬐) 장흥(長興) 전주(全州) 진주(晉州) 창녕(昌寧) 철산(鐵山) 청산(靑山) 청주(淸州) 초계(草溪) 팔계(八溪) 하동(河東) 함평(咸平) 합천(陜川) 해주(海州) | |
제씨 | 諸氏 | 칠원(漆原) |
제갈씨 | 諸葛氏 | 남양(南陽) |
조씨 | 曺氏 | 가흥(嘉興) 옥천(玉川) 용담(龍潭) 장흥(長興) 창녕(昌寧) 탐진(耽津) |
趙氏 | 광주(廣州) 김제(金堤) 배천(白川) 상주(尙州) 순창(淳昌) 양주(楊州) 옥과(玉果) 옥천(玉川) 임천(林川) 직산(稷山) 진보(眞寶) 창녕(昌寧)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평일(平一) 풍양(豊壤) 한산(韓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 |
종씨 | 宗氏 | 니파(泥彼) 모압(毛押) 인의(仁義) 임진(臨律) 통진(通津) 황원(黃原) |
鍾氏 | 두원(荳原) 영암(靈岩) 정의(旌義) 천안(天安) 통진(通津) 풍덕(豊德) 하음(河陰) | |
좌씨 | 左氏 | 청주(淸州) |
주씨 | 周氏 | 상산(商山) 상주(尙州) 안의(安義) 철원(鐵原) 초계(草溪) |
朱氏 |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장수(長水) 전주(全州) | |
준씨 | 俊氏 | 청주(淸州) |
지씨 | 智氏 | 봉산(鳳山) |
池氏 | 청주(淸州) 충주(忠州) | |
진씨 | 晉氏 | 기계(杞溪) 남원(南原) |
秦氏 | 중원(中原) 진주(晉州) 풍기(豊基) | |
陳氏 | 광동(廣東) 양산(梁山) 여양(驪陽) 청주(淸州) | |
차씨 | 車氏 | 연안(延安) |
창씨 | 倉氏 |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長城) |
昌氏 | 강릉(江陵) 공주(公州)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畏城) | |
채씨 | 菜氏 | 영양(穎陽) |
蔡氏 | 인천(仁川) 진천(鎭川) 평강(平康) | |
采氏 | 여산(礪山) | |
척씨 | 拓氏 | 곡산(谷山) |
천씨 | 千氏 | 금계(金溪) 영양(潁陽) |
天氏 | 연안(延安) 우봉(午峯) | |
초씨 | 楚氏 | 파릉(巴陵) |
肖氏 | 제주(濟州) | |
최씨 | 崔氏 | 간성(杆城)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성(鏡城) 경주(慶州) 계림(鷄林) 고부(古阜) 곡강(曲江) 공주(公州) 광주(廣州) 괴산(槐山) 나주(羅州) 낭주(郎州) 동주(東州) 등주(登州) 명주(溟州) 무주(茂朱) 부안(扶安) 삭녕(朔寧) 상원(祥原) 상주(尙州) 수성(隋城) 수원(水原) 승령(僧嶺) 아산(牙山) 양주(楊州) 양천(陽川) 여수(麗水) 연풍(延豊) 영암(靈巖) 영주(永州) 영천(永川) 영흥(永興) 완산(完山) 용강(龍崗) 용궁(龍宮) 용주(龍州) 우봉(牛峰) 원주(原州) 월성(月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직산(稷山) 창원(昌原) 천녕(川寧) 청송(靑松) 청주(淸州) 초계(草溪) 충원(忠原) 충주(忠州) 탐진(耽津) 통천(通川) 하동(河東) 한남(漢南) 해주(海州) 화순(和順) 황주(黃州) 회령(會寧) 흥해(興海) (60) |
추씨 | 秋氏 | 전주(全州) 추계(秋溪) |
탁씨 | 卓氏 | 광산(光山) |
탄씨 | 彈氏 | 진주(晋州) 해주(海州) |
태씨 | 太氏 | 남원(南原) 영순(永順) 협계(陜溪) |
판씨 | 判氏 | 해주(海州) |
팽씨 | 彭氏 | 용강(龍崗) 절강(浙江) |
편씨 | 片氏 | 금천(衿川) 절강(浙江) |
평씨 | 平氏 | 충주(忠州) |
포씨 | 包氏 | 풍덕(豊德) |
표씨 | 表氏 | 신창(新昌) |
풍씨 | 馮氏 | 임구(臨胊) |
피씨 | 皮氏 | 괴산(槐山) 홍천(洪川) |
필씨 | 弼氏 | 대흥(大興) |
하씨 | 夏氏 | 달성(達城) |
河氏 | 진주(晉州) | |
한씨 | 漢氏 | 충주(忠州) |
韓氏 | 곡산(谷山) 단주(湍州) 당진(唐津) 대흥(大興) 삼화(三和) 서원(西原) 신평(新平) 안변(安邊) 정평(定平) 청주(淸州) 한양(漢陽) | |
함씨 | 咸氏 | 강릉(江陵) 양근(楊根) 항양(恒陽) |
해씨 | 海氏 | 김해(金海) |
허씨 | 許氏 | 공암(孔巖) 김해(金海)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
현씨 | 玄氏 | 남원(南原) 성주(星州) 수원(水原) 순천(順天) 연주(延州) 창원(昌原) 천녕(川寧) 팔거(八莒) |
형씨 | 邢氏 | 진주(晉州) |
호씨 | 扈氏 | 보안(保安) 전주(全州) |
胡氏 | 토산(兎山) 파릉(巴陵) | |
홍씨 | 洪氏 | 남양(南陽) 당성(唐城) 부계(缶溪) 염주(鹽州) 청주(淸州) 풍산(豊山) 회인(懷仁) |
화씨 | 化氏 | 진주(晉州) |
황씨 | 黃氏 | 단양(丹陽) 덕산(德山) 상주(尙州) 성주(星州) 우주(紆州) 의창(義昌) 장수(長水) 제안(濟安) 창원(昌原) 평해(平海) 항주(杭州) 황주(黃州) 회덕(懷德) |
황보씨 | 皇甫氏 | 영천(永川) 황주(黃州) |
1. 한국 성씨의 역사[편집]
한국 성씨의 형태는 크게 남북국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두 글자로 된 성도 흔했다.[2] 그러나 이후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발해든 신라든 복성 문화가 쇠퇴하고[3] 고려부터는 본관도 도입되고 중국식의 한 글자로 된 단성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본관 + 단성'의 형태가 주류가 됐다. 다만 삼국시대에도 한반도에서 중국 문화를 가장 먼저 흡수한 고구려의 경우 복성보단 단성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백제의 경우도 국서 등을 보면 복성이라도 그냥 단성으로 줄여서 표기한 사례가 흔하다. 게다가 후삼국시대의 인명을 보면 신라 귀족층을 제외하고는 고려, 후백제 귀족 및 유력 호족층이라도 아예 성씨가 없는 고유명이 훨씬 많았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한국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지리지』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氏)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4]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성씨의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 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야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 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왕가 3성(박, 석, 김)과 6부의 성씨(최, 이, 정, 손, 배, 설), 그리고 한씨, 마씨, 전씨 등 기타 유래 성씨처럼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 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 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 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 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 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와『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중국식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남북국 말기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중국식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중국식 성씨가 대규모로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 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 해방과 신분 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다만 그 이전에도 성씨가 있던 양인이 죄를 짓거나 몰락해 노비가 되거나 부모중 한쪽이 양인이어서 이어줄 성씨가 있던 경우 천민이라도 성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특히 공노비의 경우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 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각 관청과 군현의 서리·기술직을 맡은 이족(吏族)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 또한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성종(姓種)상 백성성·촌성·향·소·부곡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 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고종 때의 갑오개혁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며 인구의 거의 전부가 성씨를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는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하고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일일이 손으로 기재하다가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어쨌든 이때 무성인이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담당 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였는가 하면,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다. 또 주위에 많은 김·이·박 등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함으로써 종전의 대성 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으로 정한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나라의 경우 전근대시대 귀족 혹은 유력계층의 성씨 독점→근대화 확립 후 일반 평민들의 작성(作姓)을 거쳐서 성씨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상술한 한국식 성씨를 정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는 한국의 성씨가 만들어진 배경에 기인하는데, 대개 아래로부터의 시민 혁명이 일어나 구체제가 청산되었거나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근대화가 진행되며 만들어진 다른 나라들의 성씨와는 다르게, 조선의 상민들은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인 전근대시대부터 조세를 피하고 군역을 면하기 위해서 족보를 사거나 위조했다. 당연히 신분제가 존속하는 중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봤자 전혀 이득이 없었기에 다른 양반의 성씨를 빌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 특히 보편적인 양반 성씨가 아닌 벽성을 빌리거나 창성했다간 상민 출신인 티가 팍팍 났기 때문에 더더욱 대성으로 몰리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법적인 신분제는 없어졌어도 신분제의 관습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민적법이 시행된 이후부터는 노비와 천민 계급까지 모두 성을 갖게 되었는데, 노비의 경우에는 주인의 성씨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5]
일제강점기 말에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이 추진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본식으로 성명을 고치는 사람은 있었고 창씨개명은 이를 전 조선인에게 '권장'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였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성이란 일생토록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했기에 친일/반일을 막론하고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웃지도 보지도 못할 허다한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은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가령 이가(李家)·김본(金本)·배정(裵井)·오산(吳山)·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을 표시하였는가 하면, 남양(南陽)·수원(水原)·경산(京山)·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가령, 파평 윤씨의 경우 평소(平沼, 히라누마)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 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 마키야마)이라 하였고, 청주 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 니시하라)[6]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남씨, 류씨 등은 이미 일본에도 있던 성씨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불이익 없이 넘어갔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婿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며 일제하의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씨명은 그 효력을 잃었다.
한편, 성자에 의한 한국 성의 수는 성씨 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250여개의 성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 陶谷叢說』에는 298성이 나오는 데 비하여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성세(姓勢)와 본관 수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김·이·박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수가 많았다. 이의현은 『도곡집』의 「도곡총설」에서 한국의 성 298성을 그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저성(著姓): 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12성).[7]
② 그 다음 저성: 吳·姜·沈·安·許·張·閔·任·南·徐·具·成·宋·兪·元·黃(16성).[8]
③ 그 다음 다음 저성: 曺·林·呂·梁·禹·羅·孫·盧·魚·睦·蔡·辛·丁·裵·孟·郭·卞·邊·愼·慶·白·全·康·嚴·高
(25성).[9]
④ 희성(稀姓): 田·玄·文·尙·河·蘇·池·奇·陳·庾·琴·吉·延·朱·周·廉·潘·房·方·孔·偰·王·劉·秦·卓·咸·楊·薛· 奉·太·馬·表·殷·余·卜·芮·牟·魯·玉·丘·宣 (41성).[10]
⑤ 그 다음 희성: 都·蔣·陸·魏·車·邢·韋·唐·仇·邕·明·莊·葉(섭)·皮·甘·鞠·承·公·石(19성).[11]
⑥ 벽성(僻姓): 印·昔·龔·杜·智·甄·於·晉·伍·拓·夜·賓·門·于·秋·桓·胡·雙·伊·榮·思·邵·貢·史·異·陶·龐·溫· 陰·龍·諸·夫·景·强·扈·錢·桂·簡(38성).[12]
⑦ 그 다음 벽성(貴姓): 段·彭·范·千·片·葛·頓·乃·間·路·平·馮·翁·童·鍾·酆·宗·江·蒙·董·陽·章·桑·萇·程· 荊·耿·敬·寗·京·荀·井·原·袁·萬·班·員·堅·騫·燕·時·傅·瞿·嵇·米·艾·梅·雷·柴·聶·包·何·和·賀·花·華·賈· 夏·麻·牛·僧·俊·曲·栢·翟·畢·谷·弓·種·邦·凉·良·芳·卿·刑·永·乘·登·昇·勝·信·順·侯·藩·端·鮮·芊·牙·水· 彌·吾·珠·斧·甫·部·素·附·凡·固·台·才·對·標·肖·那·瓜·化·壽·祐·價·尋·森·占·汎·克·郁·翌·宅·直·則·澤· 綠·赫·冊·濯·骨·燭·律·物·別·實·弼·合·乜·鴌·揚(136성).[13]
⑧ 복성(復姓): 南宮·皇甫·鮮于·石抹·扶餘·獨孤·令狐·東方·西門·司馬·司空(11성).[14]
이상 298성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250여 성과 『동국여지승람』 270여 성 및 그 뒤 귀화성이 모두 합산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소멸된 망성이 많이 포함되었다.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늘고 줄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래 현재까지 한국의 성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 姓解』에 의하면 한자 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한국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 성 가운데 김·이·박·최·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1. 성과 본관[편집]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하고 있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한국의 성씨 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성과 본관이 모두 같으면 동족이 된다. 다만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도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 동본과 이성이본 등 8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 같은)을 하였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 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조역의 필요상 일반 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한국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士族)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 조씨, 한(韓)은 청주 한씨, 심(沈)은 청송 심씨, 문(文)은 남평 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한국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1.2. 현황[편집]
다른 나라와 달리 전체의 10% 안 되는 성씨들이 전 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른 나라는 하나의 성이 인구의 1%를 넘는 경우가 드물고,[15] 1%를 넘는 경우에도 10%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 성씨라는 김씨는 인구의 20%에 육박하고, 김이박 3성이 전체 인구의 40%를 넘는다. '한양에서 돌을 던져 누가 맞으면 김이박 중 한명'이라는 농담도 있고, 오죽하면 동남아시아에도 소문이 나서 동남아 여행하는 한국 사람을 본 현지인 행상꾼이 '김사장님, 물건 싸요 사세요'를 외워서 외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 이렇게 된 것은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었을 때, 새로운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족보 위조, 동일 성씨 집단 부여와 같이 기존의 성씨에 편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희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주변으로부터 놀림을 받는 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결코 적지않아서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2008년에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자식의 성씨를 부친의 것이 아닌 모친의 것으로 물려줄 수 있게 되면서 희성을 물려받지 않는 사례도 나오는 중이니[16]세월이 흐르면서 안 그래도 적은 한국의 성씨는 더 적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으로 귀화한 프랑스 출신의 방송인 이다도시는 인구 5,000만이 넘는 나라에서 어떻게 성씨가 고작 300개 정도에 불과하냐[17]면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사실 우리 나라가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나라 일본, 중국의 성씨 수와 비교를 해보면 턱없이 적은 수의 성씨이다.
귀화인을 제외한 한국 성씨는 2003년 기준 286개이다출처.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중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씨를 제외하면 전 국민의 절반도 남지 않는다. 게다가 성씨 종류 자체도 심하게 적다.[18] 많이 쓰는 성씨만 해도 중국은 100~200개[19], 일본은 약 2100개로, 한국이 얼마나 성씨가 적은지 알 수 있다. 아울러 286개라는 숫자도 발음은 같아도 한자가 다른 성씨를 따로 집계한 것이고, 성씨를 한글로만 적었을 때는 100개를 조금 넘는 정도다. 이보다 더 심한 사례는 베트남밖에 없다.[20]
성씨 통계에 500개도 잡히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기준으로 그때부터 존재하고 있던 성씨만 조사에 넣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귀화계인 '존슨씨' 같은 것은 통계 순위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다만 조선족이나 재일 등의 한국계 외국인이 한자 성씨를 가지고 귀화할 경우 이런 경우는 귀국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통계에 새로 추가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성씨가 같은 사람이 자주 나타나며, 성만으로는 희귀 성씨가 아닌 이상 사람을 구별하기도 힘들다. 오죽하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라는 속담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성만으로 사람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경우는 뒤에 계급이나 직함이 붙는 경우(김 일병, 박 선생 등)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기존 한국인의 창성을 금지하는 법이 성씨의 희소함에 한몫을 하기도 한다. 뭐 덕분에 성을 뺀 이름이 일종의 대물림되지 않는 성씨(?) 같은 역할을 하기는 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한국인의 언어 사용에서 '성씨만으로 사람을 칭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위로 취급받는 편이다.[21] 사람을 '김씨', '박씨' 등으로 호칭하면 질 낮은 직장과 같이 구성원의 교양 수준이 떨어지는 곳에서 상대방을 함부로 막 부를때나 쓰는 용어라고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 성씨로만 부르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서양권이나, 친소관계에 따라서 오히려 성씨로 호칭하는 것이 격식을 차린 표현이 되는 일본과는 정반대다. 대신 그 반대급부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의 장벽이 위 두 문화권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전수부문에 따르면 5,582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지난 통계에 비해 급증하였는데[22], 이는 한자가 없는 성씨 4,075개까지 통계에 넣어 귀화성까지 추가된 것 때문이다.[23] 한자가 있는 성씨만 따져도 1507개로 5.27배로 폭증하였는데, 이는 중국, 일본계 귀화인이 원래의 성씨를 그대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성씨본관의 경우 36,744개로 김해 김씨가 전체 국민의 9%를 차지했고, 상위 10개 성씨가 전체 국민의 63.9%를 차지했다.#
북한으로부터의 월남, 6.25 전쟁,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그 정도는 약해졌지만, 한국에서도 어느 지방에서는 흔한 성씨가 다른 지방에서는 드물어지기도 한다. 특히 본관별로 본다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북 지역으로 차(車)씨, 강(康)씨는 대부분 황해도 지방, 계(桂)씨, 선우(鮮于)씨는 대부분 평안도 지방, 동(董)씨는 대부분 함경도 지방에 많으며, 이남 지역으로 권(權)씨, 박(朴)씨는 경상북도, 곽(郭)씨, 하(河)씨는 경상남도, 신(辛)씨, 함(咸)씨는 강원도, 가(賈)씨, 임(任)씨 맹(孟)씨는 충청남도, 변(卞)씨 어(魚)씨는 충청북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소(蘇)씨, 온(溫)씨는 전라북도, 정(丁)씨, 국(鞠)씨는 전라남도, 고(高)씨, 양(梁)씨는 제주도에 많다.
전산 오류로 인해 새로운 성씨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부분 한자 오기로 인해 생긴 성씨이며 이렇게 생긴 성씨들은 대개 집계될 때 한 자리 수 단위밖에 되지 않는다. 순씨 같은 경우 오기로 인해 분화된 성씨가 많다.
2. 문화적 수입품으로서의 한국 성씨[편집]
전부 중국식 성씨 아니냐는 태클을 종종 받기도 하지만, 일단 한국에 있는 주류 성씨들은 대부분 고유 계통이 맞다.
이를테면 신라의 왕성인 김씨와 박씨[24], 그리고 신라 건국 6성인 이씨, 최씨, 정씨(鄭), 손씨, 배씨, 설씨(薛), 그리고 허씨 등은 시조가 분명히 한인(韓人)이다. 하지만 시조가 한인이라고 그 성씨 자체가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 사람의 이름은 스페인식, 아이티 사람의 이름은 프랑스식 이름이나 성씨가 많다. 필리핀 사람이 고대부터 스페인어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원주민들이 멸종하여 스페인인만 남게 된 것도 아니다. 라모스·에스트라다·아키노 같은 스페인식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어쩌면 스페인 귀족 가문의 후예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토종 필리핀 사람이 단순히 성씨만 차용하였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인명기록을 찾아보면 알 수 있지만 1자 성씨는 중국과 가까워 문화적 영향을 받기 쉬웠던 고구려에서 우선적으로 시작하여 신라에 전파되었고, 백제의 경우는 1자와 2자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신라의 경우는 초기 비문에서는 부족명이나 존칭어까지 모두 이름에 합산하여 기재하는 등 좀 복잡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야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
물론 이는 일부 귀족층 한정이었고, 본격적으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중국식 성씨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된 건 다양한 호족들의 출신과 가문을 본관성씨 체계를 통해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고려시대부터였다. 발해의 경우는 말갈족이나 피지배층은 몰라도 사절단의 인명을 볼 때 지배층은 중국식 성씨 및 3자 이름을 사용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 중에는 박씨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발해로 건너가 정착한 사람도 일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현대 한국인의 성명은 (한자 번체로 써놓으면) 글자만 갖고는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국인과 닮게 되었다. 물론 이는 일본, 베트남 같은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도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사항이기는 하다. 약간 아이러니한 건 1자성+2자명은 오히려 중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정착했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1자를 가장 우월하게 봤기 때문에 삼국시대(중국)까지만 해도 1자성+1자명이 대세였다. 그 반면 한국의 경우 원래 중국식 성씨 문화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초창기 인명의 경우 주로 그냥 2자명으로만 표기하다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자 1자성 또한 수입되며 자연스럽게 1자성+2자명의 형태가 발생하였다.[25] 이후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남북조시대 이민족의 대규모 유입+강남 개발에 따른 인구 폭증 때문에 동명이인이 늘어나 2자명이 대세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적어도 당나라부터는 2자명이 확연히 대세가 되어 있다.
현대 한국의 성씨가 중국식이라는 것은 성씨가 거의 일반명사로서의 뜻이 없거나 알기 힘든 데서도 나타난다. 성씨도 결국 언어(굳이 한정하자면 낱말)이므로, 대개 일반명사에서 발전하거나 특수하게 한정되어 성씨로 쓰이기 마련인데, 한국의 성씨는 고유어 일반명사에서 나온 예가 극히 드물다.
"고허촌장 소별공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에서 웬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다가사서 보자 말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고 큰 알만 하나 남았다 (중략)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라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박씨가 박(식물) 모양의 알에서 박이라는 성씨를 지었다는, 한반도의 고유성이 틀림없음을 증명해주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26]
그러니까 배(裵)씨가 '배(梨)'나 '배(舟)'나 '배(腹)'와 관계가 있다거나, 이(李)씨가 '이(齒)'나 '이(蝨)'와 관계가 있는 게 확인되면 한반도 토착어에서 발전한 고유 성씨가 틀림없겠는데, 아무리 봐도 절대다수는 성으로 쓰인다는 것 이상의 언어적 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아 이거 중국에서 복붙해 온 모양이네" 하는 것이다.[27] 그 이상의 의미적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이들 글자가 어떤 일반적인 뜻에서 성으로 전이되었는지를 한문(중국어)를 통해 알아야 한다.[28]
당대의 인명을 보여주는 1차 사료(신라 금석문)를 보면 사람 이름이 성씨 없이 '출신지명 + 이름 + 관등명’ 순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출신지명이 부분적으로 성씨와 비슷한 기능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 이전에 성 없이 이름만 쓰이던 문화권은 얼마든지 있었고(터키나 페르시아가 비슷한 예) 여기에 그 사람의 직업이나 출신지를 덧붙여 동명인을 구별했던 걸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나마 백제의 경우에는 대성팔족이라는, 성씨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아무튼 삼국시대~남북국시대 때 중국식 성씨란 귀족들이 중국물 먹은 티를 내기 위한 과시용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 조에 들어서 과거제가 도입되면서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서 중국식 성씨 제도가 꾸준히 정착되었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다양한 호족들의 출신과 가문을 본관성씨체계를 통해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본관 성씨 체계가 빠르게 정착했다.
고려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각종 전란과 이로 인한 유망민의 증가 때문에 의미가 없어졌지만, 고려 초기만 해도 본관이라는 건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으며 함부로 이동하는 것이 금지될 정도였다. 물론 양인, 천민 같은 경우는 토착 인명을 줄곧 유지했으며, 조선 말기까지도 그러했다.
물론 사람 이름이 중국화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한국에서만 보이던 현상은 아니다. 인명, 지명이 한화(漢化)된 대표적인 예는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고 과거제를 실시했던 베트남이 있으며(여기 왕족은 리(李), 레(黎), 쩐(陳)같은 성을 칭했다.), 과거 중원을 지배하거나 할거했던 이민족 왕조인 요나라, 금나라, 서하와 멀리는 류큐 왕국도 왕족, 귀족층에서 중국풍의 이름을 썼던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청나라처럼 특수한 사례도 있다. 청나라 멸망 이후 만주족들은 한족 치하에서 역관광당하며 살면서 중국식 이름을 지을 때 성을 진(金)씨로 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것은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기오로에서 아이신이 금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씨개명 때 조선인들이 보였던 작씨법(作氏法)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비한족의 이름이 한문으로 적히면서 멋대로 잘리거나, 외국인이 편의상 중국식 이름을 짓기도 했다. 중국인으로서는 2~3음절의 짧은 인명을 선호했으므로, 익숙치 않은 외국인의 이름을 적을 때는 처음에는 한자로 음역하다가, 점점 줄여서 쓰는 것이 흔했다.
중국의 무슬림이나 유대인의 경우 셈어 계통 인명의 첫 글자를 따서 성씨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무함마드에서 나온 마馬씨, 하산에서 나온 합哈씨가 있다. 한국에서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를 '석호필'이라고 불러서 친숙하게 만드는 것과도 비슷한데, 이런 식으로 오언(Owen)은 오원(吳元)선생이 되고, 베델(Bethel)은 배설(裵說)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비교적 근대기 인물이라서 그렇지,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오언이 오원이 된 까닭을 알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에는 1음절에 중국과 겹치는 한자를 쓴 성이 주종이고, 두 글자 복성도(제갈, 남궁, 사공, 독고 등) 중국 귀화성이 주류이나, 역사적으로 성의 양상은 훨씬 다양했는데, 예를 들어 삼국시대 백제 인명에서는 독특한 복성 부여(扶餘)[29], 흑치(黑齒)[30], 사택(沙宅) 등의 사용이 보이며, 고구려 인명에 보이는 을지(乙支)나, 을(乙), 명림(明臨) 등 고구려 계통의 성도 보인다.
다만, 을지의 경우는 을+존칭의 접미사라는 설도 꽤 유력하며[31] 고구려 인명의 경우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음절 성씨를 사용하였다.[32] 따라서 복성을 가장 많이 사용한 건 백제였다.[33]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일본서기에 그의 이름이 "이리카스미"로 적혀 있어 연(淵)으로 적어놓고 훈독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러한 고구려, 백제계 성씨들은 신라가 병합한 이후로 거의 사라진 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단, 남북국시대에 당나라의 문화가 동아시아의 표준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발해 또한 중국식 문화를 수용하게 되어 중국식 1자 성씨를 지배층에서 주류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성씨의 대부분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세계를 세기 때문에[34] 사실상 고려시대부터 성씨제도가 정립되고, 이때 형성된 성씨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오늘날엔 이 문제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역사 왜곡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실제로 동북공정의 '중한간 성씨 고찰'이라는 항목에서 한국의 성씨 대부분이 한족 계열이라는 내용을 실었다가, 2006년 9월에 뉴스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정확하게 말해서 '족보' 상으로는 한국 성씨의 시조에 유명한 대륙 중원의 인물이 꽤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애초에 해당 족보 자체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게 절대다수인데다, 당시에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당대의 유명인을 시조로 삼는 일은 많았다. 특히 당대에 유명했던 인물 중에 대륙 중원의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많은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한반도 기원의 시조를 가진 한국인의 수가 대부분이다. 당장에 한반도 기원 시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김이박최 계열 4개만 계산해도 한국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학술적으로 보면 대륙계 시조들은 대다수가 숭조사업의 결과물로 날조된 것이기 때문에[35][36] 크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3. 귀화성(歸化姓)[편집]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씨 277개 중 130여개가 외래 귀화 성씨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외래 귀화 성씨의 절대다수는 중국계(한족계)를 시조로 둔다.[37]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외래 귀화 성씨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현대 귀화 성씨와 똑같이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시조는 당대에 유명했던 인물을 가문의 권위를 위해 허위로 설정한 것이 매우 많았고, 그런 족보는 교차검증이 안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본관, 성씨, 시조, 족보 등은 생물학적인 계보가 아닌 사회, 문화적인 계보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계/중원계가 아닌 시조도 일부 존재한다. 덕수 장씨(고려 충렬왕 때 한국에 귀화한 위구르계 장순룡이 시조), 화산 이씨(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이 시조), 김해 허씨(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이 연원이고, 시조는 가야 수로왕의 차남과 삼남이다.), 사성 김해 김씨(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순한 일본의 무장 김충선(일본명 사야가)이 시조), 경주 설씨(위구르계 귀화인인 설손(설장수의 아버지이며 설순의 할아버지)의 후손) 등. 이참(이한우)의 독일 이씨와 로버트 할리(하일)의 영도 하씨,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오주한)의 청양 오씨,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지정환)의 임실 지씨도 근래에 이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38] 다만 이들도 근대에 귀화하여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시조이거나, 다른 역사적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가능한 게 아니라면 시조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족보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39]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들이 성을 그대로 보존하는 경우, 귀화 성씨라고 해서 한국의 성씨로 인정된다. 2015년 기준으로 5000여개의 성씨 중 4000여개가 넘는 성씨가 현대에 와서 새로 만들어진 성씨이다. 다만 귀화할 때 이름을 등록하면서 새롭게 성씨를 만든 경우라, 본인만이 성씨를 보유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해당 인구는 매우 적다.
4. 조상이 같다고 보는 성씨들[편집]
본관은 다르지만 같은 조상을 모셔서 명목상 동성동본으로 삼는(또는 그렇게 간주하는) 성씨의 일람. 이성동본(異姓同本)이라 하기도 한다. 이곳에 가면 자신의 본관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동성동본금혼법이 있을 당시, 법적으로는 혼인이 금지되지 않았으나 인습에 의해 혼인을 하지 않았다.
• 신라계 김씨
신라의 김씨 왕조의 후손들이다. 일반적으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자들은 각 분관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울산 김씨, 경주 김씨, 의성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나주 김씨, (구)안동 김씨, 김녕 김씨,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전주 김씨, 청풍 김씨, 서흥 김씨 등으로 갈라진 케이스가 있다.[40] 이외에도 경순왕이 아니라 그 전 상계에서 방계로 갈라져 나온 강릉 김씨, 광산 김씨, 선산 김씨, 연안 김씨, 순천 김씨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김씨 일족 중 김해 김씨 다음으로 가장 많다.
• 신라계 박씨
신라의 박씨 왕조의 후손들. 중국에도 한족화한 신라방 출신의 후손들이 있다. 대부분 경명왕 계열, 그 중에서도 특히 밀양 박씨가 많지만, 경명왕의 다른 왕자나 혹은 경애왕계 등의 이본(異本)도 있으므로 일반화는 금물. 밀양 박씨는 단일파로 김해 김씨 다음으로 랭크되어 있는 것이 특이점[41]. 그리고 '朴'이라는 글자를 쓰는 성씨는 전 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에만 존재한다. 바꿔 말하자면 중국에는 이 성씨가 전통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인이 이 성씨라면 통일신라 때 중국으로 이주한 신라인의 후예이거나, 조선족이거나, 귀화한 후 한국식으로 이름을 개명한 경우다.
• 가야계 김씨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 진주 김씨 (시조 김원술)[42] 인천 이씨, 김해 허씨는 포함하고, 김해 김씨는 단일 본관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이기도 하다. 그 밖에 소가야를 건국한 김말로를 시조로 하는 고성 김씨, 고령가야 후손의 함창 김씨 가 있다.
• 사성 계열 김씨
김해 김씨-우록 김씨(김충선) (정유재란 때 귀화), 함박 김씨 (정유재란 때 귀화)[43]
• 제주 양(梁)씨, 고(高)씨, 부(夫)씨
세 성씨의 시조는 각각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라는 제주도 신화의 삼형제로, 같은 성씨 안에서는 아무리 본이 달라도 동성동본으로 생각한다[44].
• 충주 지(池)씨와 충주 어씨
원래 지(池)씨였던 어씨의 시조 어중익이 나중에 사성(賜姓)받은 경우.
• 영양 김씨와 남씨
시조 김충은 중국에서 사신으로 일본으로 가다 안록산의 난으로 신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신라왕에게 남민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서 그 후손들이 남씨를 따랐으나 일행에 있던 맏아들 김석중은 사성 전에 태어났기에 김씨를 그대로 썼다.
• 서촉 명씨와 창평 승(昇)씨
고려 말기에 귀화한 명승은 중국 사천에 대하(大夏)[45]라는 나라를 세운 왕인 명옥진의 아들이었는데, 명나라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자 명나라한테 망한 명씨 주원장에게 붙잡혀 고려로 유배당했다. 이 과정에서 명승의 아들 중 한 명인 명신이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집을 떠나 성을 자신의 아버지의 함자로 바꿨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조선 용포의 디자인을 짠 사람이 바로 명승과 함께 고려로 유배온 명승의 어머니라고 한다. 흠좀무. 용재총화에 나온 이야기로, 명승의 어머니는 짧게나마 황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곤룡포는 항목에도 나오듯이 명나라에서 기본 디자인과 샘플 의상을 보내준 그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야사로 봐야 할듯.
• 남양 제갈(諸葛)씨, 칠원 제(諸)씨, 남양 갈(葛)씨
제갈규(제갈량의 아버지)의 20대손 제갈공순이 신라 흥덕왕 때 귀화를 했는데(신라 미추왕 때 제갈규의 5대손 제갈충이 귀화를 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 고종 때 이들의 자손인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가 분성을 해서 형인 제갈홍은 제씨, 동생인 제갈형은 갈씨로 서로 갈라졌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 중 일부는 조선 고종 때 성씨 복원 운동으로 다시 제갈(諸葛)씨로 복성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들의 족보를 보면 조상 중에 제갈량이 있기 때문에 국내에 무후사가 있다.
• 진주 소씨와 경주 최씨
신라 초기 6촌(후의 6부) 중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의 아들 최대벌리가 최씨를 사성받아 그의 후손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다른 아들 소해리는 본래의 성을 이어 그의 후손 소알천이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되었다.
• 문화 류씨와 연안 차씨
류/차 논란 참조. 연안 차씨 족보에 따르면 연안 차씨의 시조는 신라 시대 귀족 차무일이며, 33대손 차승색이 신라 헌덕왕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헌덕왕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체포를 피하기 위해 류씨로 변성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38대손 류차달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공로로 원래 성인 차씨가 복원되어 첫째 아들에게는 차씨, 둘째 아들에게는 류씨를 물려주게 되었다고 한다연안 차씨측 주장. 반면에 문화 류씨 족보에 따르면 두 성씨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여문화 류씨측 주장 현재 두 가문 사이에 논쟁 중이다[46]. 허나 전주류씨는 차씨 복원설로 조상이 같다고 보고 있다.
• 청주 한(韓)씨 와 행주 기(奇)씨, 태원 선우(鮮于)씨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청주 한씨는 기자조선에서 연원한다고 하며, 마한 말기의 삼형제가 각각 성을 받아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계보는 실전되었고 실제로 각 성씨의 시조 기록은 고려 중기로 내려온다. 물론 이들이 진짜 기자의 후손인지는 미지수. 애초에 기자조선 자체가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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