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권 시집 《눈은 어머니를 꿈꾸며 지상에 내려왔을까?》에서
<낳다와 열리다>
산포 작은댁 맨드라미 꽃벼슬 암탉은
신새벽 높다란 대나무 햇대에 올라
세 번이나 목청을 칼칼하게 돋우어서
동녘 하늘을 볼그레레 낳는다
아따, 아침이 왔부러당께에~!
그 통에
장작불에 뜨뜻했던 솜이부자리가 열리고
정제의 부뚜막이 무쇠솥 수중기로 푸웃 열리고
들녘의 어둠을 막아선 사립문짝이 열리고
골목 끝까지 작은 들창문들이 스스륵 열리고
싸리닭장문이 살금살금 열리고
작은 소쿠리에 달걀이 졸랑졸랑 열리고
노오란 노른자를 쏘옥 넘기는
작은댁 큰형의 목구멍이 대문보다 더 크게 열렸다
아침마다 햇노란 무등은
달걀 모양의 탱글탱글한 태양을 낳고
태양은 보드레레한 산포 작은댁을 낳고
산포 작은댁은 방학 때마다 어린 나를 다시 둥그렇게 낳았다
<조도미장원>
쑥 톳 우럭 장에 간재미 하네들이
몸뻬 다리를 꼬고 바닥을 보며 한나절 나란히 앉아 머리를 푸르게 말고 있다.
여긔 오문 시상 엄니들 야그 다 돌돌 말려서 빠마된당께라우
고구마 한 솥 나눠 먹은 노을 속 검은 날개 새 떼들은
흐린 유리창 밖 구불구불한 파도를 이고 주름진 고샅길을 잘도 넘어간다
<모과꽃>
딸이 셋인 양림동 최씨네 기와집 마당에
있는 듯 없는 듯 꽃이 하나 피어 있었네
흰 두루마기 어린 동생을 앉혀놓고
세 누이는 한 뼘 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풍로에 달군 젓가락으로 볶았다 그러고
미제 악수표 밀가루 수제비 잔뜩 끓여
저녁으로 한 양푼씩 먹고 자다
나는 이부자리에 지린내 지도를 물큰하게 그렸지
옆집 눈이 매운 아줌씨 집에 가서
대나무 키를 쓰고 부지깽이질과 소금 세례 처맞으며
엉엉 울고 고샅길 돌아 들어올 때
큰누이는 피식 웃으면서도 내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 주었네
나 밀까이죽 안 묵어! 목 부은 볼멘소리 할 때
두루마기 아기씨 우리 두루마기 아기씨
둘째 누이는 눈웃음으로 실컷 달래주었고
어느 봄날은 햇볕 드는 나무 창가에서
영랑시선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다
흰 컬러 교복의 여고생 막내누이와 같이 울먹였지
이 광경을 있는 듯 없는 듯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던 모과꽃
가끔은 울타리 옆에 서서 밖을 보다
까닭 없이 수줍어 볼이 살그레 붉어지던 누이꽃
오십 년도 다 지난 며칠 전
광주천변 노을길을 걷다 만난 작은 살분홍꽃
무등 햇빛이사알짝 그리움을 물들이고 간
모과꽃, 세누님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