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9. 15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이 걸려 있는, 그러나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던 불모지 육상계가 오랜만에 들썩이고 있다. 계룡중 3학년 양예빈 선수의 ‘화려한 등장’ 탓이다. 그동안 스타플레이어 한 명이 단숨에 국내 불모지 종목을 인기 종목으로 살려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시아 선수는 자유형은 안 된다는 속설을 깨트리고 수영 자유형 400m에서 세계를 제패했던 박태환, 불모지 중의 불모지였던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 무대를 점령한 김연아, 여자골프 세계 최강국을 이끌어낸 박세리 등등.
양예빈은 지난 5월 전북 익산에서 벌어진 2019 소년체전 여자육상 1600m 계주에서 약 50m를 앞서 달리던 선수를 추월하는 장면이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면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양예빈은 그 대회 여중 200m와 400m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해 3관왕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자, ‘육상의 김연아’ ‘여중 볼트’ 또는 ‘계룡 여신’ 등으로 불리며 엄청난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양예빈은 7월29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문화체육장관기 제40회 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여중부 400m에서 55초29로 1990년 김동숙 선수가 세운 여중 400m 최고기록(55초60)을 29년 만에 0.31초 단축하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이젠 모든 매스컴의 취재 대상이 됐다. 55초29의 기록은 지난해 자신의 최고기록(57초51)과 비교하면 1년 만에 무려 2초22(거리상으로 약 15m)나 단축한 것이다.
▲ 양예빈(계룡중)이 7월29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제40회 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여자 중학교 400m 결선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 ⓒ 대한육상연맹 제공
“BTS 뷔 오빠 만나게 해 준대서 열심히 뛰었다”
양예빈은 200m 종목도 겸하고 있는데, 그 자신도 200m보다는 400m를 더 좋아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도 한국이나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 도전에서 400m가 더 현실적이란 지적이다. 내년부터는 400m 종목에 더욱 주력할 전망이다. 양예빈은 암사초등학교 5학년 때 멀리뛰기를 하면서 육상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지만 “내가 책임지고 열심히 잘하겠으니 지켜봐 달라”고 설득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래서 엄마와의 약속을 늘 가슴에 새기며 훈련을 하고 경기에 임하고 있다. 또한 부모 모두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어렵게 자신을 뒷바라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훈련을 하거나 경기에 임할 때 항상 고생하고 있는 부모님을 위해 달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양예빈이 가슴에 담아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가수 방탄소년단, 그중에서도 멤버 뷔(본명 김태형)다. 지난 7월 여중부 신기록을 세웠을 때도 “어머니와의 (잘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김은혜 코치가 좋은 기록을 세우면 뷔 오빠를 만나게 해 준다고 해서 힘을 더 낼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양예빈은 키가 아직 1m61cm밖에 안 된다.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려면 키가 더 커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언니 양예진(19세)도 키가 1m62cm고 , 부모(아버지 1m76cm, 어머니 1m64cm) 또한 그다지 큰 키가 아니기 때문에 국제적인 여자 400m 선수들의 보편적인 신장(1m75cm)까지 이르려면 특단의 대책(영양보충, 보조훈련 등)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여자 400m 종목에서 수년간 부동의 1위 선수인 바하마의 쇼네이 밀러-위보(25세, 1m81cm), 양예빈의 우상인 미국의 앨리슨 펠릭스(34세, 1m73cm) 등 세계적인 선수들은 키가 1m75㎝ 안팎이다. 양예빈은 앞으로 최소한 10cm 정도는 더 커야 피지컬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키에 비해 다리 길이(1m)가 길어 400m 선수로는 매우 이상적인 상·하체 비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예빈의 가장 뛰어난 장점은 역시 정신력이다. 양예빈을 지도하고 있는 김은혜 코치는 “마치 스펀지처럼 가르치는 것을 잘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중력이 뛰어나고,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다”고 말한다.
▲ 지난 5월 열린 전국소년체전 여중부 1600m 계주경기 결승선 통과 후 모습. 다른 선수들이 지쳐 쓰러져 있는 반면, 양예빈만 서 있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 ⓒ MBC 스포츠뉴스 캡쳐
세계 무대는 한국 여자육상의 절벽
한국 육상이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여자육상은 그동안 3명의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하는 데 그쳤다. 1970년대 여자 투포환의 백옥자, 1980년대 여자 높이뛰기의 김희선 그리고 여자 장거리 임춘애 선수 등이다. 백옥자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였고, 김희선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동메달, 그리고 임춘애는 서울아시안게임 800m, 1500m 그리고 3000m 3관왕을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세 명의 선수 모두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 도전했지만, 세계의 벽은 넘지 못했다. 임춘애는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최종주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기대와 달리 올림픽에선 세 종목 모두 예선 탈락했다. 백옥자는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15위에 머물렀다. 그나마 김희선은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육상 사상 처음으로 결승에 올랐지만 1m92cm의 기록으로 8위에 그쳤다.
양예빈의 현주소(55초29)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기준으로 성인·20세·18세 세 부문 가운데 18세에 속하는데, 2019년 아시아 18세 이하 선수 가운데 7위에 해당한다. 또한 현역 최고 선수인 쇼네이 밀러-위보의 2018 시즌 최고기록(48초97)에 6초32나 뒤진다. 하지만 양예빈은 이제 불과 만 15세다.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가 더 큰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년 시즌 기록이 매우 중요하다. 내년에는 고등학생이 되고, 키와 체중이 좋아지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신기록(2003년 이윤경 53초67)에 근접한 기록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메달권, 2024 파리올림픽 결승 진입, 그리고 최종적으로 2028 LA올림픽 메달권이라는 목표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양예빈은 이번 가을부터 내년 시즌 개막전까지 3가지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첫째는 기본기를 더욱 철저하게 다지는 것이다. 그동안 단거리인 200m와 400m 두 종목을 다 치르면서 400m에 특화된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다. 200m가 폭발적인 스피드가 필요하다면, 400m는 300m 이후부터 근육의 피로도가 절정에 이르고, 체내에 더욱 많은 산소 공급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에 맞는 훈련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체력을 보강해야 한다. 400m는 300m까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스피드를 낼 수 있지만, 마지막 100m는 체력과 정신력 싸움이다. 그래서 마지막 100m를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이 관건이다. 세 번째는 부상 방지다. 내년에 16살이 되는 그는, 신체적으로 변화가 많기 때문에 여자 스프린터들이 가장 부상을 많이 당하는 연령이다. 나이와 체격조건 그리고 종목에 맞는 맞춤훈련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양예빈의 올 시즌 마지막 대회는 9월26일부터 30일까지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지는 전국 초·중·고 춘계육상선수권대회다. 양예빈은 그 대회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400m 최고기록을 0.01초라도 단축하는 것이 목표다. 매 대회 0.01초를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다보면, 한국신기록, 아시아신기록은 물론 더 높은 기록도 깨트릴 것으로 믿고 있다.
기영노 /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