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생명의 길을 만드시려
Text Pslm 16,1-11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현재 우리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다른 어떤 힘이 우리를 압박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스스로의 그릇된 선택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우리 국민이 정신을 차려서 바른 선택을 한다면 대부분의 위기 요소들은 해소될 수 있습니다. 불안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습니다. 이 성탄 시즌에 온 국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신을 번쩍 차리고 대오각성하여 회개한다면 오늘의 위기에서 벗어나 희망의 때가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그런 역사를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찾아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대강절 제 3주일에 함께 은혜 받을 말씀은 시16편을 본문으로 하는 ‘생명의 길을 만드시려’라는 말씀입니다.
2. 먼저, 1-4절 말씀을 봅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이 시의 저작자인 다윗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피한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과 같은 믿음,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그들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으니, 자신의 즐거움은 그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괴로옴만 더하는 것을 알기에 자신은 그런 신의 이름도,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도,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위기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장의 나만 편하고 좋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 생각은 현재 대한민국 전 계층에 두텁게 깔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좌편향된 국민들이 문제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60-70%의 국민을 좌빨이라고 규정하는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영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권의 선동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런 정치이념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는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아주 두텁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는 비혼주의로 나타나 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거부하는 ‘무출산주의’로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국가 기관부터 사기업과 각종 비영리단체까지 온통 경제 논리가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교회까지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모클레스의 검’(Sword of Damocles) 아래에 놓여 있는 형국입니다. 다모클레스(Damokles)는 기원전 4세기 전반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스스로 왕이라 칭하던 디오니시오스 2세의 측근이었던 인물입니다. 어느 날 디오니시오스는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불러놓고 말 꼬리 한 가닥에 매달린 칼 아래에 앉혔습니다. 자신의 권좌가 ‘언제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칼 밑에 있는 것처럼 위기와 불안 속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일이 로마의 명연설가 키케로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위기일발의 상황을 강조할 때,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1961년 9월 25일 UN 총회에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가 연설 중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다모클레스의 칼’로 비유하여 더욱 유명해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머리 위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검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다윗이 오늘의 말씀에서 외치고 있는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탄절에 오신 주님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난하면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축적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눅12,21)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배부를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5,1-12) 그런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런 사람들을 본받으려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이며 가장 천한 곳인 마굿간에, 가난한 부부의 가정에 오신 주님을 보십시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매여 불행하게 사는 인생들에게 참된 복이 무엇이며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길이 생명길이요 그 길이 행복의 길이라고 가르쳐주시려고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 주님이 바로 그런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그분이 열어주신 길을 믿고 그 길로 가야합니다.
3. 다음, 5-6절 말씀을 봅니다. “(5)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 약속된 아름다운 복을 가르쳐줍니다. 자신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겁박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자신의 산업으로 삼고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의 소득으로 삼는 사람은 아름다운 곳을 구역으로 받고 아름다운 기업으로 받는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환영하는 성탄의 주님은 이 진리를 인생들에게 가르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요1,12) 주님께서 주실 구역과 기업을 소망하며 성실하게 기름을 준비하면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는 지혜로운 열 처녀 반열에 들게 될 것입니다.(마25,10)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주어진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열매를 맺으면 주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마25,21&23)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도 믿음으로 주님 섬기듯 섬기면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마2 5,34)
혹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며 그 길이 험하다 할지라도 그 길은 생명길이기 때문에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믿었다면 견뎌내야 합니다. 견디고 있다면 아주 잘 하고 있는 일이니 중간에 멈추지 마셔야 합니다. 혹 어떤 이유로 멈추고 있다면 다시 일어나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여러번 넘어진다 하더라도 몇 번이든 다시 일어나 가야할 길입니다. 성탄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주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열어주시는 문, 만들어 주시는 길은 영광스러운 보상이 있는 길이 확실합니다. 분명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유명한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 한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행복하고 다음 날은 슬프며, 하루는 건강하고 다음 날은 아프며, 하루는 부자이고 다음 날은 가난하며, 그리고 하루는 살았는가 하면 다음 날에는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며, 목자이며, 바위이며, 요새이며, 피난처이며, 우리의 형제이며, 안내자이며,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문을 여시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집으로 오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롬 8,38-39)
여러분,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심으로 하늘의 문이요 전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 와 있는 것이며 그분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전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았는데 주님께서 바로 그 사다리가 되신 것입니다. 또한 모든 길이 막혀 있었을 때 야곱이 본 하늘과 통하는 문이 되셨습니다. 그 길 끝에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문을 열면 황홀하고 찬란한 어린 양 혼인 잔치가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잔치에서 꼭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4. 마지막으로, 7-11절은 생명의 길을 만들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고 따르며 헌신하게 하려고 성도들에게 주신 교훈, 복음, 가르침 등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말씀입니다. 7절, 훈계의 말씀을 주신 주님을 송축한다고 했습니다. 8-9절, 훈계를 주시는 주님이 늘 가까이 계시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마음과 영이 기쁘고 즐거워한다고 찬양합니다. 9-10절, 육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스올에 버리거나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성탄절은 우리 성도들에게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며 절실하게 하기 위하여 있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사역은 할 수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하여 크고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때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만 교회는 그 구호에 속아서 성탄절을 최고로 큰 복음의 나팔로 이용하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됐습니다. 옛날에는 술 취한 사람 입에서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가 있었고, 믿음이 있든 없든 상가에 성탄장식과 캐롤이 있었는데 이제는 교회에서조차 보고 듣기 어려운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을 밝히든, 캐롤을 틀든, 그것들이 생명의 길을 만들어주시려고 오신 주님을 알리는 말씀의 역할을 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퍼뜨려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는 주님을 알려야 합니다. 트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성탄등도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을 만들러 오신 주님을 안내하는 말씀입니다. 성탄 선물은 괜한 허비가 아닙니다. 최고의 선물이신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절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귀하게 여겨 길이 이어지도록 보전해야 합니다.
다윗은 마지막 구절에서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의 길을 만들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알게 하는 말씀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코 헛수고만 하게 하는 길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는 길임을 노래합니다. 부디 이 노래 소리가 여러분의 심령에도 들려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