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작, 화제의 초점
쉽고 재밌고 깊은 공감을 주는 시가 좋은 시
이경철(문학평론가)
얼마 전 문단 모임에 나갔다 뒤풀이 자리에서 '디카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카톡으로 툭하면 디카시를 보내오는 중견 시인이 있었고 또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도 있었기에 디카시와 그 시단의 현황에 대해 주로 내가 물어본 것이다.
페이스북은 잘 안 하지만 가끔 열어보면 꽤 많은 지인들이 사진 과 함께 글을 보내오고 있다. 디카시도 있고 디카수필도 있고 디카일기로 읽을만한 글들도 올라와 있다. 이제 글만으로는 안 될 영상 시대가 된 것이다. 그만큼 모든 걸 핸드폰의 디지털카메라에 담고 또 매체도 핸드폰 시대로 넘어왔음을 누구도 부정 못 할 시대 아닌가.
그날 대화로 디지털카메라와 시를 합성해 줄인 말인 '디카시'라 는 용어가 200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와 2016년 국립국어원에 문학 용어로 등재된 사실을 알았다.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디카시 작품 이 실리고, 고등학교 연합고사 문제로 출제되기도 한단다.
각 지자체에서 문학상으로 디카시 부문도 두어 시상식도 하고 있으며 전문 문예지도 펴내며 신인들을 배출하는 등 날로 대중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확장세에 있다. 영상과 시로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날 로 세를 확장해가며 본격문단에서도 많은 참여와 관심을 보이며 디지 털 시대 시의 총아도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카시의 사전적 정의는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로,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이다.
카메라로 시적 순간을 포착하고 문자로 표현하여 SNS로 실시간 소통한다는 점에서 시에 어울리는 그림이나 사진을 곁들이는 시화詩나 포토포엠과는 다르다. 카메라 앵글을 대며 피사체와 느꼈던 즉흥적 교감을 덧붙이기에 시는 길어야 5행으로 짧아야 한다는 게 디카시에 대 한 대체적 정의다.
그런 디카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조야말로 디카시로 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장르임이 저절로 떠올랐고 모두들 동의했다. 사진 영상이 시적 이미지의 구체적 상관물로서 드러나 있는데도 자꾸 그 이 미지를 문자로 보여주려 시가 길어지는 애로점을 자유시인들은 말하는데 시조시인들은 압축 정제된 장르의 특성상 이미 체화돼 있지 않은가.
기실 시조단에도 디카시를 초창기부터 이끈 시인이 있다. 이상범 시인은 2007년 첫 번째 디카시집으로 『꽃에게 바치다』를 펴낸 이래 지금까지 9권의 디카시집을 펴내고 있지 않은가.
얼음새꽃
만리길 헤맸던가, 살얼음 디뎠던가
해뜰녘 몸을 열다 망막에 얼비치는
렌즈와 눈맞춤하네, 입술 살짝 열고서
변산바람꽃
꽃새암 잎새암도 여린 바람 타고 온다
살짝 뜬 눈꽃 위로 구르는 눈석임물
눈두덩 간지럽힌다. 하늘하늘 배냇짓
노루귀꽃
깊은 잠 헤쳐나온 노루발이 돌아간다
잔설을 빼꼼 열고 햇살을 촘촘 박아
덧대는 한 올 한 땀이 바늘귀를 열고 있다
- 김덕남, 「화산곡, 줌인zoom in」 전문 (《정형시학》 2022년 봄호)
한 제목 아래 각각 제목을 달고 독립된 세 수의 단시조로 구성된 연시조聯詩調다. 다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는 야생화들을 제목처럼 줌인으로 확대해 묘사하고 있다. 사진과 같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첫수 "망막에 얼비치는/렌즈와 눈맞춤하네"에서 카메라로 찍으면서 교감하며 쓴 디카시로 읽고 싶은 시다.
첫째 수 ‘얼음새꽃’은 눈 얼음 사이에 피어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복수초’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복수초' 하면 이미지가 얼른 와 닿지 않는데 ‘얼음새꽃’ 하면 이른 봄꽃 이미지가 확 와 닿는다. 이게 순우리 말의 맛과 효용 아니겠는가.
그런 얼음새꽃이 기나긴 겨울 얼음 사이를 헤치고 살얼음을 디디며 지금 눈앞에 와 피어있다. 렌즈를 들이대니 살짝 핀 꽃이 눈맞춤한다. 물론 시인도 그런 눈맞춤, 입맞춤하고파서 렌즈를 들이댔을 것이다. 첫수에서는 이렇게 시인과 대상 간의 교감이 카메라를 찍는 행위로 잘 드러나고 있다.
둘째 수 '변산바람꽃'은 이른 봄바람에 꽃 피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변산바람꽃을 묘사하고 있다. 반쯤 벌어진 꽃잎에 구르는 눈석임물에 "눈두덩 간지럽힌다"는 그 '눈두덩'이 시인의 것인지 변산바람꽃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도 시인과 대상은 일치돼 있다.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하늘거리는 변산바람꽃에서 시인은 태초의 짓거리인 "배냇짓"을 봐내고 있다.
마지막 수 '노루귀꽃'에서도 줌인해서 노루의 발 같은 꽃과 귀 같은 꽃받침을 묘사하고 있다. 깊게 쌓인 눈을 뚫고 나와 핀 꽃을 깊은 겨울잠 헤쳐나와 잔설을 빼꼼하게 열었다고, 그리고 햇살에 빛나는 가시 많은 꽃받침을 바늘귀를 열고 있다"며 한땀 한땀 기워 겨우겨우 오고 있는 이른 봄의 소리를 노루귀꽃과 함께 듣고 있다.
이 시에서 '화산곡, 줌인'이란 제목만 빼며 모두 우리말을 쓰고 있다. 순우리말처럼 돼 어찌해볼 수 없는 '만리'만 없다면, 어떤 산인지 한자로 안 써 헷갈리는 '화산곡'도 그냥 '꽃산' 정도로 하면 어떨까 싶다. 꽃이름들이며 '꽃새암', '잎새암'같은 순우리말 맛을 더욱 잘 살리기 위해. 순우리말의 맛을 살리면 이렇게 시 쓰기가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최초의 감흥이며 이름 짓기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너와 내가 만났을 때 최초의 감흥을 날것으로 전하기에 최적화된 양식의 시조가 디카시에서는 자유시보다 훨씬 더 비교우위에 설 것이다. 시 조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시조단에서 디카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 면 좋겠다.
바람의 길을 따라
달려온 시간들이
올올이 일어서서
나부끼는 시간들이
마침내 멈추어서는
정적 속의 아우성
- 유자효, 「억새」 전문 (《정형시학》 2022년 봄호)
바람이 불다 잠시 멈춘 억새밭을 동영상처럼 연속적으로 스케치 한 시다. 스케치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적 이미지보다는 '시간'이나 '정적'등 추상의 내면적 이미지가 우세하다.
단수로 된 이 시에서 초장에서는 바람 부는 갈대밭을 그리고 있다. 억새밭 사이로 난 바람길을 시간이 숨 가쁘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고 있다. 중장에서도 초장을 이어받아 바람 부는 갈대밭을 묘사하고 있다. 달려온 시간들이 올올이 나부끼는 것으로,
'갈대밭'을 소재로 한 시에서 젊은 시절 질풍노도로 내달리던 일 정을 회고하는 시들은 많다.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회한을 나부끼며 달 려온 시간들을 회상하는 시편들이 참 많다.
이 시도 초장, 중장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시조 구성 의 특성상 시간들의 진행을 보여주면서도 압축, 정제해서 더 빛나고 있다. 특히 전환과 결구인 종장이 압권이다.
바람이 멈춘다는 전환을 거쳐 마침내 “정적 속의 아우성"이라니. 가을 텅 비어 더 환한 햇살에 반짝이는 갈대의 허연 꽃들의 아우성이 귀에 들리고 눈에 잡힐듯하다.
그런 공감각 속에 이젠 젊음에서 벗어난 시인의 성숙도 보이고 그래도 아우성치는 어찌해볼 수 없는 그리움이라는 이율배반의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바람은 멎고 햇살에 반짝이며 아우성치는 갈대밭 사진 과 함께 보고 읽으면 참 좋을 시다.
무변의 밤을 긋는 별똥별의 한 획처럼
벼랑 끝 다다르면 한 홉의 숨을 모아
사, 랑, 해,
심장을 건네고 은하로 핀 메아리들………
- 정수자, 「나아종」 전문 (《문학청춘》 2022년 봄호)
별이 총총 빛나는 캄캄한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묘사하고 있는 시다. 단수로 된 이 시의 주제는 숨넘어가며 가장 나중에 하는 말 '사, 랑, 해,'다.
일상에서도, 시 등 문학작품 속에서도 사랑은 너무 많은 소재, 주제가 돼 있고 작품 속에도 무수히 나온다. 그렇게 해서 다 낡을 대로 낡은 ‘사랑’이란 말 혹은 주제에 시인만의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시다.
이 시 본문 끝 각주에서 밝혔듯 제목으로 쓴 '나아종'은 김현승 시인의 시 「눈물」 중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이란 구 절에서 차용했다. 시인이 가진 가장 소중한 말인 “사, 랑, 해,”를 더욱 고 귀하게 하면서 "한 홉의 숨을 모아" 쉬는 쉼표로 '사, 랑, 해'라는 말을 자기화하기 위하여 김현승 시인의 조'나아종'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렇게 시인이 최초로 만든 언어이면서도 어둠 속에 한 획을 그 으며 떨어지다 목숨의 벼랑 끝에서 스러지는 별똥별이 내뱉는 공감각 적 이미지가 “사, 랑, 해,”다. 시인이며 별똥별이며 뭇 생명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그런 '사랑'이란 말은 다시 뭇 생령들의 심장을 울리면서 끝 닿을 데 없이 저 은하까지 울린다는 시다.
시조의 정형을 맞추면서도 “사, 랑, 해,”라는 주제를 돋보이게 한 연으로 잡은 이 단시조도 캄캄한 밤 총총한 별들 사이에서 보는 이의 눈 속으로 떨어지는 별똥별 사진과 함께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품격있는 디카시로 읽힐 것이다.
하략 ........
이경철 1989년부터 《현대문학》, 《한국문학》 등 문예지들을 통해 월평 등 다수의 현장 비평적인 평론을 발표, 2010년 《시와시학》에 김남조 시인 추천으로 등단. 저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21세기 시조 창작과 비평의 현장, 미당 서정주 평전』 등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 등이 있음. 현대불교문학상(평론부문), 질 마재문학상 등 수상.
- 《정형시학》 2022.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