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여행을 앞두고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에 우선순위를 두기 위해 지도를 확인하다 풍패지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낯선 이름이 궁금하여 검색을 해보니 풍패지관은 또 다른 말로 전주객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게스트하우스라고 생각하고 찾아간 풍패지관은 게스트하우스라기 보단 조금 더 급이 높았는데 말하자면 국빈용 또는 정부 관리용 게스트하우스랄까..?
| 전주 풍패지관
이용시간 : 09:00 ~ 18:00
입장료 : 없음
전주 풍패지관은 전주에 온 관리나 사신이 머물던 전주 객사다. 조선 시대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주관과 숙소로 사용하던 익헌(본 건물의 좌우 양쪽에 딸려 있는 건물)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관의 처마 아래에는 풍패지관이라고 쓴 거대한 편액(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전주 객사의 위상을 잘 보여 준다. 풍패(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의 지명)란 건국자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풍패지향이라 하였는데 이를 본따 전주 객사의 이름도 풍패지관이라 한 것이다.
전주 풍패지관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73년 조선 성종 4년에 전주사고를 짓고 남은 목재로 서익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97년에 발발한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고, 1872년 고종 9년에 보수 공사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도로 확장 공사로 동익헌을 철거하여 주관과 서익헌만 남아 있었으나, 1999년에 동익헌을 복원하였다. 현재는 주관과 동익헌, 서익헌 그리고 객사를 관리하는 수직사가 남아있다.
2016년 정밀안전진단용역 결과 서익헌의 기둥이 시계방향으로 기울고 목구조가 손상된 것으로 확인돼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기둥 이상 전체 해체보수가 진행되었다. 이런 가운데 올 상반기 실시된 풍패지관 남측과 서측 부지의 정밀발굴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 축조된 월대, 계단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려시대 대지조성층에서는 초석건물지의 유구와 그 주변으로 ‘전주객사 병오년조(全州客舍 丙午年造)’ 글자가 찍힌 고려시대 기와편 등이 출토돼 전주객사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고려시대 객사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강릉 임영관터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사례가 드물어 전주 풍패지관의 문화재적 가치와 천년고도 전주의 위상이 재조명됐다.
서익헌 해체보수와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마치고 3년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는데 방문 당시 동익헌은 여전히 지붕보수공사 중이었다.
전주객사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현판이었는데 일반적인 편액과 달리 그 크기가 매우 크고 글자가 멋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돌아와 찾아보니 한 글자의 세로 길이가 1.79m로 왠만한 성인남성의 키보다 크고, 네 글자를 합친 가로의 길이는 무려 4.6m가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편액이라고 한다.
이 엄청난 현판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명나라의 재상을 지낸 주지번이다. 명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주지번이 어떻게 한양도 아닌 전주에 이런 편액을 남겼을까? 풍패지관(豊沛之館)의 편액에는 오래된 인연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 풍패지관 현판에 담긴 이야기
1593년,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청하러 송강 정철이 이끄는 사신단이 명나라로 향했고, 이때 표옹 송영구가 서장관(문서관리 총책임자)으로 사신단에 합류하여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 머물던 숙소에서 표옹 송영구는 한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숙소의 심부름꾼이 이를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 청년은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왔는데 과거에 몇차례 낙방하여, 귀향할 여비조차 없어서 이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사정을 듣게 된다. 표옹은 이를 불쌍히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지만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 표옹은 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해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 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 였다.
청년은 표옹의 도움으로 을미년(乙未, 1595)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의 수석합격이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606년 명나라의 황태손이 태어난 것을 알리기 위해 조선으로 향하는 사신이 꾸려졌고, 표옹에게 도움을 받았던 청년, 주지번이 사신단의 최고 책임자로 조선에 방문하게 된다. 이때 선조가 교외까지 나가서 주지번을 맞이 할 정도로 주지번은 고위급 인사가 되어 조선에 온 것이었다.
주지번은 이때 전라도 왕궁 시골로 직접 행차할 것을 결심한다.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광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지번은 수소문을 해서 송영구를 찾았지만, 송영구가 죽었다는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지번이 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 송영구가 익산에 거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이 익산까지 행차를 하면, 가는 곳마다 접대를 하기위해 민폐가 심할 것을 걱정했던 주변인들이 송영구가 죽었다고 거짓을 고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주지번은 말 한필과 경호원 1명을 대동하고서 송영구를 찾아 전라도로 향했고, 송영구가 사는 익산 왕궁에 가기 전에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에 머무르면서 지금의 편액을 쓰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학사 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다.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주지번의 벼슬은 당대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다. 주지번은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쓰는 등 한림원에서도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주지번은 전북 익산 왕궁으로 찾아가 표옹 송영구를 만나게 되었고, 주지번은 송영구에게 명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책들과 함께 선물을 남긴다. 전북 익산 왕궁면에 있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인 망모당(望慕堂)은 송영구가 부친상을 당한 뒤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늘 망모하기 위해 집의 후원 구릉에 세운 누당이다. 송영구를 만나러 왔던 주지번은 송영구가 세운 망모당의 편액을 고쳐 써주었고, 풍수에 있어서도 뛰어났던 주지번은 송영구의 사후 명당 묘자리(음택지)를 점지 해주었다고 하니, 주지번이 송영구에 대해 느끼는 감사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타국만리 떨어진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익헌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서익헌 마루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니 참 예쁘다.
관리실로 사용중인 수직사
풍패지관에서 전라감영 방향으로 가다 보면 18세기 전주지도와 아트타일 벽화 전주의 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