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
1)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는 1946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을 발간하면서, 제작된 사물의 현존(l'existence)과 다른 인간의 실존(현존, l'existence)을 다룬다. 사물은 현존 이전에 이미 사물의 사용에 관한 개념(관념)이 있으나, 인간의 인격에는 목적도 용도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인간의 실존은 그래서 본질에 앞선다. 그는 이렇게 본질에 대한 실존의 우선에서 자유의 철학을 도출한다. 그래서 라이프니쯔의 합리적 신학에 반대한다. 라이프니쯔에 따르면, 신이 먼저 인간의 개념을 상상하였고 그 다음에 개념을 실현하였다. 그래서 구체적 실존은 본질의 전개일 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자이지만 인간은 불가사의한 사랑행위 때문에 -그리스트교의 전통에 따르면 신의 무상(무료)의 자비 때문에 - 생겨난다고 한다. 인간이 스스로 타락할 수도 자신을 구제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실존주의는 (합리적)과학주의와 대립한다. 구조주의의 발흥은 실존주의에 대한 과학주의의 복수이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서 설명한다.
실존주의적 사유는 사르트르 이전에도 있었다. 마르셀은 1925년 이래로 실존(existence)과 객관성(objectivité)을 구분한다. 사물인 대상은 문제(problème)를 구성한다. (그리이스어 pro-blema와 라틴어ob-jetum은 '내 앞에 던져진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상을 소유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상황(situation d'être) 이다. 사물인 시계의 고장은 객관적 문제이지만, 나의 잘못은 문제(던져진것)이 아니라, 실존적 불가사의(mystère existentiel)이다. 인간의 죄를 탓하는 경우는 인간 실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작용(대상에 대한 인간의 기술능력)을 객관화한 것이다.
2) 인간의 초월성
인간의 초월성이란 인간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실존을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초월성이란 실존의 고유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인간은 '제국 속의 제국'이 아니며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넘어서, 변증법적으로 대처한다. 사르트르에서 인간은 누구나 상황내에(en situstion) 있다. 이것은 모든 실존철학의 특성이다. [이 상황은 (우주 또는 세계의) 총체적 연관과 관련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상황이다.] 결정론자나 본질론자에 따르면, 인간은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있기 때문에 항거한다(révolter)고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어떤 상황도 그 자체 참을 수 없는 상황은 없으며, 그 상황에 항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존적 투영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그 상황을 나 자신의 자유의 계기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 사르트르는 "우리는 독일 점령 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워 본적이 없다"라고 1945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여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감옥에 있는 자가 자신의 항거를 체념하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때, '이 세상에서 감옥에서 더 자유로워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그런데, 실존의 의미는 키에르케고르에서 더 분명하다. 실존자는 여러 상황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데, 그 선택에서 실존자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제일인자라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실존'의 의미는 어떤 억압적이고 비극적 상황에서 선택은 더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transcendance)이란 미래 계획을 따라서 현재 상황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을 넘어서는 것 즉 현재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이행이 곧 초월이다.] 빠스갈의 말처럼 인간은 "배를 타고"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선택은 불가피하다. 심지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책임을 추궁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실존한다(exister)'는 본질적으로 운명이 되는 '존재한다(être)'와 반대이다. 실존은 미래를 새롭게 하는 것인데, 존재는 과거가 되어 응고되고 닫혀진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결국 존재는 과거로 옮겨진 실존이다. 헤겔은 이것을 "존재란 과거에 있었던 것이다(Wesen ist was gewesen ist)"라고 표현한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닫혀진 문(Huis-clos, 1944)』의 주인공들은 지옥 속에 존재하면서 자기들의 과거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의 말 "너는 네 인생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실존주의의 유명한 공식중의 하나이다) [- 네가 살아온 업보는 바로 너이다. 이때 업보는 존재이지 실존이 아니다. 업보를 넘어서는(transcendant)것이 실존이다. 모든 실존자는 끊임없는 초월자이다. 니체의 영구회귀에 대한 재해석에서 끊임없이 과거에서 벗어남도 같은 의미의 초월이다. 이는 생명(인간 의식)의 불가역성의 반복, 즉 역사의 환원불가능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 말은 내가 실존하고 있을 때 나의 자유이고, 내가 죽었을 때 나의 본질과 운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죽으면, 실존은 끝나고 존재가 된다. 나의 살아온 인생은 이미 만들어진 역사이고, 나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역사이다. "죽었다는 것, 그것은 산자의 먹이이다. (Etre mort, c'est être en proie aux viva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