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김 완
I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문학작품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일 것이다. 문학개론이라든가 문학입문류의 책에서는 보통 이 문제를 그냥 두루뭉실하게 넘어간다. 마치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자명하다는 투이다. 그저 문학이란 언어로 된 예술이다 정도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에 대한 개념규정은 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이 문제는 사실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로 각 시대는 각기 나름대로 문학에 대한 정의를 해왔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문학연구를 <그냥 문학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어떤 텍스트로 하여금 예술작품이 되게 하는 문학성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로만 야꼽슨의 주장이래, 문학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다시 문학연구에 가장 기본적인 쟁점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 나라 중. 고등학교와 대학의 문학강의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문학교육에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에 대한 개념은 문학교육과 직접 관련을 가지는 것이고, 이것에 대한 잘못된 교육은 자칫 입문자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심어주기 쉽기 때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우선 문학의 개념에 대한 기존의 이론에서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여기의 우리의 의견을 개진하기로 한다.
II.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문학은 허구이며, 상상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인 '낯설게 하기'도 많이 거론된다.
1) 문학은 허구이며, 상상적이어야 한다.
사실/허구라는 이분법적 대립으로 문학을 정의하려고 하면, <역사적 진실과 예술적 진실간의 대립은 아이슬란드의 옛 무훈담들에는 전혀 적용하기 어렵다>고 이글튼(T. Eagleton)은 주장한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영국에서 '소설(novel)'이라는 단어는 사실적인 사건과 허구적인 사건 양자에 모두 사용되었던 같다.> 당시 뉴스들이라는 것은 거의가 풍문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것들이 언제나 정확한 사실들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당시 소설(novel)과 뉴스라는 것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그것은 사실 사실적이지도 허구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 불어에서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불어에서 nouvelles 은 장편(掌篇)소설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새 소식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그러므로 사실/허구라는 이분법으로는 소설을 정의할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 미슐레의 「프랑스 역사」와 「프랑스 혁명사」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이 훌륭한 문학작품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과 허구의 두 영역의 경계를 확실히 정하기 어렵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역사가가 역사를 기술할 때, 사실 상상적 허구 없이 그 일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르뽀문학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분법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것은 그 정의의 그물은 엄청나게 성근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만일 '창조적인' 혹은 '상상적인' 글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는 역사, 철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비창조적이며 상상력과 무관한 것인가?>하고 이글튼은 논박한다. 베르그송의 창조적이며, 상상적인 글들은 훌륭한 문학작품이며(그는 그 업적으로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시튼의 「동물기」도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이러한 예는 사실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그러므로 사실/허구라는 이분법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것은, 그 정의가 극히 부분적이 될 수밖에 없다.
2) 낯설게 하기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들의 '문학적인 것(또는 문학성)'에 대한 정의이다. 이 유파에는 빅또르 쉬끌로브스끼, 로만 야꼽슨, 오씨프 브리끄, 유리 띠니아노프, 보리스 에켄바움, 그리고 보리스 또마쩨브스끼 등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야심적이고 논쟁적인 이 집단은 그들 이전에 문학비평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이미지 중심의 상징주의 이론들을 거부하면서 실질적이고 과학적인 정신으로 문학텍스트 자체의 물질적인 실재, 즉 언어에로 관심을 돌렸다. 물론 그 전에도 문학비평이 과학적이 아니라는 비판이 뗀느(H. Taine)에 의해서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뗀느가 제시했던 과학적인 비평은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은 문학작품을 그 작가의 생애와 연관지어서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정황이 그 작가의 생애의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방법이다. 그래서 그것은 작중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심리학적 방법이거나, 아니면 문학작품과 작가가 그 작품을 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계를 밝히려고 한 사회학적 방법, 아니면 이 둘을 함께 착종시켜서 작가의 사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철학적 방법 등이다. 이것은 당시 정신적 사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실증주의를 문학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기의 초에 나타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러한 문학연구의 방법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부수적인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철학적인 연구에 집착한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 문학작품은 다른 학문을 하는 자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문학비평이란 오로지 문학작품 내에 존재하고 있는 그야말로 문학적인 요소를 밝혀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평은 예술로부터 신비를 분리시키고, 문학텍스트가 다른 것과 연관짓지 않고 그 자체로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문학은 철학이나 심리학, 사회학이 아니라 언어의 특수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은 언어로 된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문학외적인 것들을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 자신의 특수한 법칙과 구조, 그리고 기술적 장치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이념을 전달하는 수단이거나 사회현실의 반영이 아니고 어떤 선험적인 진실의 구현도 아니다. 문학작품은 언어라는 그물로 짜인 하나의 물질적 사실이며, 따라서 그 기능은 마치 기계를 검사할 수 있듯이 그렇게 분석될 수 있다. 그것은 대상들이나 감정, 이미지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단어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작품이 작가의 정신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은 문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 형식주의는 본질적으로 언어과학을 문학연구에 응용한 것인데, 그 응용된 언어학 중에서도 순전히 형식적인 수준의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언어의 내용보다는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들에 관심을 갖는 그런 언어학을 그들은 문학에 적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심리학이나 사회학 같은 다른 인문과학 쪽으로 이끌릴 수 있는 문학의 '내용'에 대한 분석은 무시하고 순전히 문학작품의 형식에 대한 연구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형식을 내용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내용은 단지 형식을 동기화(motivation)시키기 수단, 다시 말해서 특별히 정해진 종류의 형식적 활동이 일어나기 위한 계기나 편의를 제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작품을 제한된 수의 장치들의 집합으로 생각했다. 이 장치들은 텍스트 전 체계 내에서 서로 관련을 가지면서 상호작용 하는 기능들로서, 이 장치들에는 음,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metre), 운(韻), 서술기법들 등과 같은 모든 문학의 형식적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 개개의 기능들과 그것들의 적절한 조합이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생소하게 느끼게 하거나 낯설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언어의 특수한 점, 즉 문학언어를 일반적인 다른 담론과 구별지어 주는 것은, 위의 장치들을 조직적으로 배치하므로 써 일상의 언어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언어에 조직적인 폭력을 가해 그것을 변형시키므로 써, 그것을 통해서 보여지는 사물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것들일지라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상투적인 일상언어로 통해서 본 세계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같아 단조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일상언어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언어는, 거만하며 나태하고 무감각에 빠진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일종의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렇게 하여 긴장된 의식이 이 변형된 언어를 통해서 본 세계는 심할 경우, 사르트르의 「구토」와 같은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문학의 언어는 세계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작품을 일상언어를 변형시킨, 다시 말해서 일상언어에서 '일탈된' 언어들 집합으로 보고 있다. 일상언어를 보통(ordinary)의 언어라면 문학의 언어는 보통의 장(場) 밖으로 튀어나온 특별한(extraordinary)언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한 어느 한 시기에 어떤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를 일상언어라고 대체적으로 정의한다면, 이 일상적인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집단 속에서도 장소와 시기, 그 집단 내에 속하는 각기 다른 소집단에 따라 조금 씩 다를 수 있다. 규범언어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도 그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 '일탈'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이글튼의 생각이다. 즉 그는 <단 하나의 '규범적 언어가 있다는 생각, 사회의 모든 성원이 똑 같이 사용하는 하나의 공용어가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방언의 경우를 보면 규범적 언어를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도 말에서는 일상어인 것이 경상도 사람이 볼 때는 생소하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 내지는 토속어로 쓰여진 글이 다 문학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글이 '낯설게 한다'는 사실은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배경만 바뀌어도 그것은 낯설게 느껴지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일상어 내지는 규범언어와 문학언어의 구별이 아니라 언어를 쓰는 일정한 방식에 차이가 있다. 특히 시의 경우 그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에서 우선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단어의 사전적 의미상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병치시키므로 써 사뭇 낯선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이 깃발에 관한 묘사라고 생각하면 묘사 자체가 생소함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 분수처럼 흩어지는 / 푸른 종소리. >에서 '푸른 종소리'도 하나의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그것이 은유이든 직유이든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나란히 배열하므로 써 나타나는 효과이다. 그리고 산문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는 까뮈의 「이방인」의 거의 전 대목과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이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낯설게 하기'라는 효과의 장치가 없는 시나 소설도 많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 산에는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 꽃이 피네 >라든지,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그들의 주장은 단번에 무너진다. 그리고 어떤 구절이 처음에 나왔을 때는 생소하게 느껴지다가 그것이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므로 써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요즈음의 광고 문구의 경우 그와 같은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라는 효과는 문학이라는 것에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III.
이와 같이 문학을 허구적이 것이거나, 상상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이나, 문학작품의 속성이 '낯설게 하기'라는 주장은 문학작품에 대한 부분적인 정의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문학에 대한 정의가 이와 같이 부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문학작품의 속성이 문학작품에 내재해 있다고 보았던 데에 있다. 이것은 고대 이래의 인식론적 고착에 기인하고 있다. 즉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분리하므로 써 진리 자체가 객체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는 아직도 자연과학적 방법에서는 유효하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연구에서조차도 극단적인 분야에서는 연구자의 해석에 따라 진리가 변할 수 있다는 가정이 오늘 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대안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은 오늘 날 정신과학을 위시한 인문학에서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학적 이론의 기초이다. 즉 모든 진리추구의 출발은 주체와 객체의 만남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현상에서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 채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된 상태에 있다. 이것은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의식의 대상만을 따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대상이 의식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경험과는 달리 의식과 그 대상과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인식도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어떤 글이 문학작품으로 인식되려고 하면 반드시 독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독서라는 행위 없이 문학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팽이와 같다. 팽이가 팽이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갖고 노는 사람의 채찍질에 의해서 끊임없이 돌아가야 한다. 돌기를 멈출 때 팽이는 그냥 하나의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작품도 그것이 문학작품인 것은 그것이 작품으로 읽혀질 때이다. 그것이 읽혀지지 않을 때 그것은 그냥 종이 위의 검은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때 이것은 그냥 죽어 있는 상태이며, 망각된 존재로 있다. 이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하나의 확실한 존재로 확립시키는 것은 바로 독서라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독서행위는 바로 문학적 경험의 시작이며 끝이다. 작품을 읽다가 잠시 책을 놓고 다른 생각을 할 때, 이 작품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며, 다시 독자가 와서 일깨울 때까지 그것은 그냥 하나의 종이뭉치로 머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항상 피동적은 아니다. 일단 독자가 작품을 읽게되면, 작품은 자신의 비밀스런 곳을 드러내 보여주며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창조하도록 요구한다. 적어도 독자가 성실하게 작품에 임하는 경우, 작품은 독자에게 더 가까이 오도록 권유하며, 독자의 전 감각과 추억에 호소한다. 이리하여 독자의 의식은 작품 자체에는 없는 무언가와 대면한다. 여기서 독자의 창조와 진정한 독서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작품과 독자간에 일어나는 이 변증법적인 관계, 이것이 바로 독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글 자체 안에서 그 글이 작품이게 하는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것은 문학에서 독자의 역할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독자는 작품에 대해 전적으로 피동적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망막에 빛이 작용하여 상을 맺게 하는 것과 같이 독서도 하나의 기계적인 작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심자로 하여금 작품 속에는 작가가 말하기를 의도한 어떤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의미란 일방적으로 그냥 주어지는 아니다. 의미란 각각의 독자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독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것은 줄거리 뿐, 그 외의 것은 작품 속에 나타나는 단어나 구절들을 대면하는 독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그토록 이나 오랫동안 많은 주석들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실증주의자들의 오류도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작품이란 단지 작가의 경험의 소산이고 그래서 작품에 나타나는 모든 정황이란 그의 삶에서 나오며, 독자는 오로지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럴 경우, 읽는 행위란 작품 속에 주어진 그 진실을 탐구하는 피동적인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독자의 창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루스트가 생뜨 뵈브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겼던 부분도 바로 이것이며, 지난 60년대 초 프랑스 문학계에서 일어났던 신구논쟁에서, 구파의 대표 격인 삐까르(R. Picard)가 신파에 속한 바르뜨(R. Barthe)의 「라신느에 대하여」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비평인가? 새로운 사기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요컨대 어떤 글이 문학작품이 되는데는 독서라는 행위가 필수적이고, 이것은 동시에 독자의 존재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글이 문학작품인지 아닌지는 그 글을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에 대한 개념정립은 바로 어떤 글과 그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T. Eagleton)은 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문학은 특정종류의 글들이 보여주는 어떤 내재적인 성질 혹은 일단의 성질들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들>(p.17, 이글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엘리스(J. M. Ellis)가 주장했던 '잡초'론을 그의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즉 <'문학'과 '잡초'는 존재론적인 용어라기 보다는 기능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들은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지 사물의 불변적 존재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들은 하나의 텍스트 혹은 한 엉겅퀴가 사회적 전후 맥락 속에서 갖는 역할,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나 차이점, 그 행태의 양상, 그것이 쓰이는 목적과 그것에 관련된 인간적 실천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p.18, 이글턴) 따라서 문학작품이라고 일컹어지는 글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내재적인 성격이나 구조들은 문학작품이 되는 가능태일 따름이지 그것 자체가 문학작품의 결정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란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은 그 대상을 변별할 수 있는 자질들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이 자질들은 그 대상에 내재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문학이나 '잡초'라는 개념처럼 이 개념의 변별적 질들이 그 자체 내에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달려있다고 한다면, 이 개념은 그리 산뜻한 것이 될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것에 대한 설명은 개념이라고 까지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박 이문(朴 異汶)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의 시각으로 볼 때 문학이론 텍스트들은 개념 사용의 투명성이나 담론의 논리적 짜임새에 있어서 직업적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에 비해 일관된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 마디로 철학적 입장으로 볼 때 문학이론이 펴는 담론은 불필요하게 잡다하고 어수선해 보인다.(p.44, 박이문)> 문학이론가의 입장으로 볼 때, 한 철학자의 이와 같은 논평이 약간은 과장된 것이라 해도 이것에 대해서 그리 반박할 말이 없다. 특히 문학이론가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선결되어야 할 문학작품의 개념정립의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이끌고 가야겠다.
우선 '잡초'란 배척의 의미가 있으므로 문학작품을 이야기하는 데는 별로 적절치 못한 예인 것 같다. 물론 엘리스의 그 의도를 짐작 못하는 바 아니다. 우리는 '잡초'보다는 '친구'나 '연인'을 문학작품에 비유하는 게 더 좋은 방식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글을 보통 사람에 비유한다면 문학작품이란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워진 사람, 그의 의견에 내가 거의 전적으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즉 친구나 연인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두 가지의 예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1) 우리는 살아가면서 날마다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들은 그냥 행인일 뿐이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들 중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복잡한 꿈자리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정말 난생 처음으로 내 마음을 온통 휘저어 버린 한 사람을 만난다. 초면에 말을 걸 수도 없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다. 그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는 무엇을 좋아할까? 알기라도 한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고 싶다. 가서 온갖 걸 다 물어보고 싶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만난다. 우리는 서로의 교감에 의해 가까워진다. 그래서 그에 관한 이야기라면 밤새라도 할 수 있다. 이제 그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2)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출판물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날마다 배달되는 두세 종류의 일간지, 다달이 나오는 월간지들, 광고지, 서점에 쌓여있는 엄청난 량의 각종 책들, 등 정말 자기를 보아달라고 우리들 앞으로 맹렬히 달려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한 채로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내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든다. 그 책을 뽑아 첫 한두 페이지를 읽어본다. 썩 괜찮다. 그래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밤새 읽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 끝까지 읽고 또 읽고 읽는다. 그래서 그 책 이야기가 나오면 신들린 듯이 몇 시간이고 떠들어댄다. 이 책은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위의 두 가지 유사한 예에서와 같이 문학작품은 이렇게 형성된다. 그것은 문학작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읽는 나에 의해서 문학작품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친구나 연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잡초'라는 것의 성격이 그 분류구조의 성격 상 문학작품에 유사하지만, 연인이 더 적절한 비유인 것이다. 지금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주위에 산재해 있는 어떤 글도 문학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혹자는 물을 것이다. 고시 준비하는데 쓰이는 책, 이를테면 민법총칙이나 경제원론 같은 책도 그렇겠느냐고.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스땅달은 입문시절 육법서의 하나인 민법(民法; Code Civile)을 즐겨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 그 민법 책은 훌륭한 문학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으로 분류하고 있는 시, 소설, 수필 등과 같은 종류의 글만이 문학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그와 같은 장르의 구분도 그리 산뜻한 경계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글이 친근하게 느껴지거나, 우리의 정념에 호소해서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정념에 불을 댕길 수 있는 글이라면 그 모두가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글, 내용이 좋은 글이라는 것은 문학작품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문학작품은 아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은 친구나 연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지 그 사람들 자체가 친구나 연인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전통에서는 글은 곧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글이든지 간에 그 글 속에서 우리는 그 글을 쓴 사람의 영혼의 그림자를 다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글이 아주 실용적이며 과학적인 글일 지라도 그렇다. 예를 들어 세이건(K. Sagan)의 「우주의 역사」같은 책은 천문학 이론을 대중화시킨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우주관을 비롯하여 그의 인간 됨됨이의 파편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다못해 「화장을 잘 하는 법」이라는 아주 실용적인 책에서도 그 글을 쓴 사람의 인 간됨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작품이 되는 글이 어떤 내재적 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문학작품은 문학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 의해서 그것은 만들어진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엘리스가 문학작품을 잡초에 비유한 것은 구조상은 연인과 비슷하다 하겠으나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인만큼 그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
우선 문학작품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문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체는 문학작품의 겉모습이다. 이것은 작품내용의 성격을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은 단조롭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며, 단호하고 힘찬 모습이기도 하고 박력 없이 흐느적거릴 수도 있다. 또한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체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몸매나 얼굴에다 옷을 잘 입은 사람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 내 친구나 나의 연인인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겉보기에서 다른 사람의 호감을 갖게 할 수는 있지만 보는 사람 모두와 친구나 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뿐이며, 그것은 또한 가식일 수도 있다. 거꾸로 말해서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평해지는 글들이 다 문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훌륭하다고 평해지거나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다 미모를 갖추고 있고,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문체란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내용과 잘 상응할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사람도 그의 성격이 얼굴이나 옷입는 모습에서 드러나 보이듯이, 진실된 글은 그 성격이 문체에서 드러난다. 사람도 억지로 꾸민 모습이 그 사람과 조금만 이야기를 해보아도 그것이 가면이라는 것이 드러나듯이 억지로 꾸민 글은 몇 줄만 읽어보아도 금방 싫증이 나게 마련이다. 진실된 사람이 가식이 없듯이 진실된 글은 그 내용과 표현이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글을 일반적인 사람에 비유하고, 문학작품은 일반적인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친구나 연인에 비유하는 것은 문체라는 문제에서 볼 때도 완벽한 상응같이 보여진다. 그리고 이와 같이 문학작품을 연인에 비유하는 이 입장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문학연구나 문학교육은 하나의 진정한 출발점에 서는 것 같다.
IV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그들의 아들 격인 프랑스의 구조시학자들의 근본적인 오류는 문학작품의 본질이 작품 속에 내재해 있다고 믿었던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문학작품과 관련되는 문학외적인 것은 모두 제2의 관심으로 돌리고 오직 문학작품의 내부에만 관심을 가졌다. 즉 주로 문체와 구조와 같이 문학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구성조직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들은 <어떤 언어메세지로 하여금 예술작품이 되게 하는 것>, 즉 문학성을 문학작품 내부에서만 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예술에 있어서 감상자의 중요성을 그들은 간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에 있어서 독자가 문학작품을 결정짓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작품이라는 말은, 다른 모든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인 용어가 아니라 기능적인 용어이다. 그러니까 그것의 본질이 있어 만고불변하는 그런 성질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유행처럼 당시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것이다. 오늘 날 문학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들을 19세기 사람들이 보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조차 지이드가 처음 그것을 읽었을 때, 그는 그것을 소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자신의 주장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 글이 혹시 엘리스나 이글턴의 주장을 반복하는 듯이 보여질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물론 문학작품이라는 용어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라는 출발점에서는 이글턴의 주장을 우리는 전적으로 인정하고, 이 글도 그러한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글턴은 그런 입장에서 출발하여 문학이라는 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반영이라는 결론으로 의 논지를 이끌고 간 반면, 우리는 이 입장을 좀 더 근본적으로 문학하는 입장의 출발점으로 이용한 것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연인이나 친구에 비유한 것은, 한 마디로 문학은 사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문학작품은 탄생할 수도 없고 또한 그것을 향유할 수도 없다. 작품을 탄생시키는 작가는 그 작품의 출발점이 되는 대상에, 그것이 상상적이든 현실적이든, 그 대상에 자신의 의식을 한없이 가까이 한다. 그래서 그 대상의 내밀한 부분을 함께 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진실 되게 그린다. 그리고 그 작품의 독자는 작가가 그 작품을 탄생시킬 때와 같이 작품에게로 한없이 가까이 갈 때야 비로소 그 작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의식을 어떤 대상에 한없이 가까이 해서 그 대상과 하나가 되고 푼 이 마음,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정도로 그 대상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진정한 앎도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사랑 속에는 자유와 참여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문학작품이란 독자와 어떤 글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결과로서 독자가 자신이 대하고 있는 글에 대해서 취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문학연구와 문학교육의 출발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서, 우리는 문학연구와 문학교육에서 그 대상이 되는 문학작품을 어떻게 정의해야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문학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해 보았을 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이와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문학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흥미진진한 문제가 남아있다. (경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참고서
1. T. 이글턴(김 명환 外. 역), 문학이론 입문,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6.
2. 박 이문, 문학과 철학, 서울, 민음사, 1995.
3. J.-P. Sartre, Que'est-ce que la litt rature, Paris, Gallimard, 1947.
4. J. Culler, "La litt rarit " in Th orie litt raire, Patis, PUF, 1989.
5. G. Genette, Fiction et Diction, Paris, Seuil,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