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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야망 1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34년 전, 서기 1275년, 고려의 왕도 개경에서 태자가 태어났다. 이름은 왕원이었고 아버지는 한국사에서 최초로 '충성할 충'자로 시작되는 굴욕적인 시호를 받은 '충렬왕'이었고 어머니는 한국사 최초의 몽골왕후였던 장목왕후(제국대장공주)였다.
- 당시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었다. 세자가 태어나기 5년 전에 드디어 100여년에 걸친 고려 무인정권이 몽골의 압력에 의해 붕괴되고 드디어 다시 고려의 황제가 나라의 주인으로 복귀했다.
- 그러나 고려는 황제가 실권을 되찾은 대신 나라 전체가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대몽골제국의 속국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황제의 나라' 고려는 모든 칭호가 격하되었고 충렬왕 자신도 더 이상 황제의 칭호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 이에 반발하여 세자가 태어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의 상징이던 '삼별초'라는 존재가 당시 고려조정을 '허수아비'라 규정하고 강화도, 진도, 제주도 등 한반도의 가장 큰 3개의 섬 들을 누비며 '황제'를 내세우고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바다의 신화가 되었으며 일본과도 긴밀히 협력해 한때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일부 땅을 수복하는 등 강성했으나 결국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 충렬왕의 아버지였던 원종은 고려의 집권자 최충헌이 죽은 해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아버지 고종이 최씨정권의 허수아비로 놀림감이 되는 모습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이런 그는 무인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결국 당시 고려의 원수이던 몽골에까지 손을 뻗혀 당시 중국의 송나라를 토벌하러 갔던 쿠빌라이에게까지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고 화친을 청했다.
- 충렬왕 자신도 물론 아버지 원종이 최씨정권을 종식시켰음에도 이후 유경, 김(인)준, 임연, 임유무 등의 무인들에게 계속 시달리는 꼴을 보아왔기 때문에 역시 무인들에 대한 원한이 적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 원종으로부터도 권력을 위해서는 때로 나라의 수치와 자존심도 흥정해야 한다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충렬왕 왕거는 아버지보다 한술 더 떠서 쿠빌라이를 찾아가 그의 딸과 결혼하고 변발을 자청하는 등, 철저하게 몽골에게 복속하는 대신 고려에서만큼은 왕 노릇을 제대로 하기를 기대했다.
- 그러나 충렬왕의 이러한 계산의 댓가는 혹독했다. 그동안 반세기가 넘도록 끈질기게 저항하던 유일한 강적 고려가 스스로 굴욕을 청하자 몽골 제국은 그동안의 피의 댓가를 한꺼번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274년에 시작된 일본원정으로 결국 실패할 전쟁을 위해 수 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되었고 이러한 무능하고 굴욕적인 왕을 둔 고려의 신민들은 한없이 이를 원망했다.
-고려의 고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결국 왕원 세자의 친어머니인 몽골인 장목왕후는 고려에 들어오자 사실상 자신이 고려의 왕인 것처럼 행동했고, 충렬왕은 무슨 종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충렬왕의 신하들이나 총애하던 여자들을 구타하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충렬왕 자신도 몽둥이로 개패 듯이 패는 등 망신을 주기가 십상이었다. 충렬왕은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던 것이었다.
- 실의에 빠진 충렬왕은 급기야 주변에 간신들과 미인들을 가득 두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더더욱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피폐해져갔다.
- 어린 세자 왕원은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비록 그가 생각하기에도 어머니 장목왕후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면이 있어도 결국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고 그 자신도 칭기스칸과 쿠빌라이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총명한 세자는 대신 예의를 갖추어 어머니에게 시시비비를 가려 말했고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이후 장목왕후는 지나친 행동을 삼가하게 된다.
- 그러나 왕원이 아버지 충렬왕에게 간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비록 겉으로는 몽골에게 충성하는 속국의 왕에 불과했지만 장목왕후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것을 목격한 충렬왕은 개인적으로 장목왕후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녀의 소생인 세자가 자신의 아들임에도 장목왕후의 연장선상에서 은근히 경계하게 되었다. 어린 세자의 충정 어린 간언이 도리어 역효과를 자아내게 된 것이었다.
- 1287년 당시 13세가 된 세자 왕원은 난생처음으로 어머니 장목왕후를 따라 원나라의 황도 대도(현재의 북경)로 갔다. 말로만 듣던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 어린 왕원의 눈에는 대도의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당시 온 세계의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으며 좁았던 고려와는 비교가 안 되는 가히 천하의 중심이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대칸 쿠빌라이를 만났다. 칭기스칸의 손자로서 역시 그 자신도 어릴 적 칭기스칸의 무릎 위에서 재롱을 떤 바 있는 쿠빌라이는 이제 자신의 손자인 고려 세자가 자신을 찾아오자 어느덧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역시 세자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의 재롱을 즐기고 있었다.
"이지르부카(왕원의 몽골식 이름)야, 너는 칭기스칸의 후예임을 잊지 말거라. 너의 반쪽은 고려인이지만 고려 역시 그 근원을 올라가면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만난단다. 고구려의 후예답게 고려는 우리 몽골과 형제의 실력을 겨뤘고 결국 스스로 동생임을 인정한 것이란다. 이지르부카야, 그럼으로 고려는 몽골의 형제국이다. 너는 그 두 형제를 이어주는 다리라는 말이다. 껄껄껄."
- 이지르부카는 때로는 대도를 구경하며 다녔는데 적지 않은 고려인들도 보았다. 몽골제국은 그 신분 계층을 4개로 나누었는데 그 첫번째는 몽골인이요, 두번째는 색목인(아라비아, 서역인, 서양인 등), 세번째는 북중국인과 만주인, 마지막 네번째는 가장 천시했던 남중국인이었다. 고려인은 사실상 몽골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개판이던 고려보다는 살기 좋은 대도로 모여드는 고려인들이 많았다. 쿠빌라이는 고려인의 뿌리가 몽골인과 같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쿠빌라이의 소개로 세자는 많은 외국인들과도 만났는데 그 중에 마르코 폴로라는 이도 있었다. 그로부터 세계의 모든 희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 그러나 왕원은 신하들의 권유로 대도의 많은 고려인들을 만났고 고려의 세자로서 먼저 자신이 고려인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에 꽉 막힌 고려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려와 몽골의 양쪽을 이어주는 '열린 고려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열린 고려인'
- 그것은 앞으로 세자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마디로 함축해주는 코드였던 것이다.
- 장차 고려의 왕위를 이을 세자이자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던 왕원은 대도에 머물며 좀 더 넒은 세상을 경험했고 아울러 고려인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춘기의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낸 왕원은 간간히 고려를 왕래했으나 아버지인 고려왕과 어머니의 암투가 계속되던 고려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는 생활을 한 7년간 계속하게 된다.
- 이 기간 동안 세자는 이종사촌이던 테무르 등을 비롯해 많은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고려왕은 자신의 심복들을 은밀히 파견해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테무르와 그 아버지인 칭김의 부하들의 환심을 사두어 만약을 대비하려 했다. 부인인 장목왕후와의 불화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씨앗인 세자에게 결코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고려왕이 이같은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그의 고려인 수하들의 영향력도 컸다. 특히 가장 총애하던 후궁 무비는 그동안 막강한 세력을 쌓아놓았는데 이에는 경왕(충렬왕의 고려식 시호)의 묵인이 컸다. 무비는 사실상 고려의 모든 힘을 동원해 장목왕후를 은근히 압박했는데, 이에 반발한 왕후는 아들 세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 쿠빌라이칸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세자는 장차 집안의 분란을 우려해 이를 묵살했으나 경왕의 수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경왕에게 알렸다.
- 경왕은 장차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어미를 위한 복수를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의 정치가 거의 모두 실패했다는 자괴적 열등감으로 인해 경왕은 아들마저 자신을 핍박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이는 곧 자신이 먼저 선수를 써서 아들이기 이전에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세자를 제거해야 겠다는 병적인 집착증으로 발전된다. 권력 앞에 부자지간이라는 천륜마저 벗어던진 것이었다.
- 그러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세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경왕은 먼저 대도에 있는 세자로 하여금 권력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서 이미 있던 세자의 측근들마저 자신의 그것들로 바꾸어 세자에 대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았다.
- 이러한 경왕의 행동은 그러나 곧 원제국 황실에 그 소문이 퍼져 원나라 황족들은 고려왕의 경박함을 조롱했고 아들인 세자의 등 뒤에서는 세자를 향한 비웃음을 퍼부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세자는 특유의 인내력으로 이를 애써 무시했으나 속으로는 갈갈이 찢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본국 고려로는 무비 일당이 세자에 대한 소문을 과장하여 경왕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경왕의 세자에 대한 오해는 더해갔다.
- 한번은 장차 원제국의 후계자가 될 테무르와도 이 사실을 가지고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테무르는 경왕이 아들을 핍박하는 사실을 가지고 세자를 조롱했다.
"이지르부카, 네 고려 아비는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며? 쯧쯧...역시 고려인들은 형제라지만 좁은 땅에 있어서 그런지 정말 형편없는 인간들만 모였나봐...쿠빌라이칸의 피를 반이라도 받은 넌 제발 네 아비를 닮지 말아라...킥킥."
이는 세자의 아비인 경왕이 몽골 피는 한방울도 없으면서 몽골인 흉내를 내는 것을 빗댄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왕과 사이가 안좋았지만 세자는 테무르가 아비를 욕하는 것을 듣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테무르, 그게 무슨 말이냐? 그건 아바마마가 잘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와 아바마마를 이간질하려고 하는 것이란다. 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네 귀가 얇아지면 장차 이 거대한 제국을 어찌 이끌어 가려고 하냐?"
"뭐야? 아무리 사촌지간이지만 넌 소국 고려의 세자이고 난 장차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인 이 원나라의 대칸이 될 사람인데 감히 나에게 그런 막말을 해?"
테무르는 이성을 잃은 나머지 그만 주위의 수하들을 시켜 세자의 옷을 벗기고 직접 채찍질을 했다. 이는 곧 알려져 테무르는 할아버지 쿠빌라이의 큰 꾸지람을 받았고 이들은 서로 화해했으나 그 앙금은 장차 서로에 대한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 그러던 서기 1294년, 세자와 어미 장목왕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쿠빌라이칸이 죽었다. 이는 곧 고려의 경왕에게는 희소식 중에 희소식이었다. 후계자인 칭김과 테무르에게 경왕은 그동안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에 장목왕후가 예전처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테무르는 겉으로는 세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원나라 황족과의 결혼을 권유했다. 상대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 보다시리였다. 이는 은근히 경왕이 테무르를 구워삶아 이루어진 것으로 세자는 폭 넒은 친교를 통해 이것이 자신을 이용한 정략적인 결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감마라는 아버지인 경왕과 막역한 사이였고 보다시리는 매우 거세고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다. 게다가 이미 세자는 고려와 원나라에 이미 결혼한 여인들이 있었다. 특히 원나라에는 야속진이라는 몽골 여자를 각별히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황족 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에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 그러나 세자는 자신이 이 혼인을 거부하면 원나라와 고려 양쪽에서의 입지가 크게 불리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지 못해 혼인을 하게 되었다. 보다시리 역시 남편 세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세자에 대한 모든 불평 사항을 아버지 감마라에게 알렸으며 경왕은 이런 경로를 통해 세자에 대한 약점을 모으기 시작했다.
- 이러한 와중인 서기 1297년 당시 대도에 있던 세자는 어머니 장목왕후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병들어 죽었다고 했으나 의심스러운 소문은 삽시간에 황도를 파고들었다. 이제 아버지인 경왕과 '장'으로 이름을 바꾼 세자 왕장의 오랜 투쟁은 바야흐로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 서기 1297년 어머니 장목왕후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제 23세의 고려 세자 왕장의 눈앞은 까마득했다.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죽고 이제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대칸 테무르와 역시 이미 아들로 취급 안 하고 정적으로만 다루는 아버지 경왕 사이에 끼여서 그 자신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이었다.
- 게다가 새로 얻은 아내 보다시리 또한 내부의 적이라고 할 정도로 세자의 앞날은 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고려에도 부인들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려로 돌아갔다가는 명색이 아비인 경왕에게 어떠한 곤욕을 당할 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세자는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경왕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극비리에 마련해 둔 몽골 황족들의 인맥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여기에는 몽골 최고의 장군 바얀, 후일 카이산칸이 되는 카이산, 그리고 다라칸 등의 인물들이 역시 테무르대칸 몰래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왕장을 돕고 있었다.
- 바얀과 카이산은 몽골 제국의 최대의 반란이었던 카이두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어 테무르칸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제국의 거물들이었다. 특히 카이산은 테무르칸의 조카로 아직 소년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용맹과 지략의 소유자였다. 카이산은 대도에 있는 이지르부카 왕장과 자주 만나며 세자의 딱한 처지를 동정했다.
- 세자는 자신의 정적들의 눈과 귀를 피해 역으로 고려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자주 카이산과 회동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둘다 변장을 해 장차 자신들의 포부를 천명하며 울분을 달랬다. 카이산은 삼촌뻘인 세자에게 깎듯이 예를 다했다.
"저의 작은아버지 대칸은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내심 저를 매우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제가 비록 카이두의 반란을 진압한 공이 있다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테무르 대칸을 두렵게 하는 모양입니다. 삼촌께서도 역시 부왕의 의심을 받고 게다가 모후께서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세자는 고려의 술을 들이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이 세자이지 이미 아바마마에게서도 버림받은 몸이고 사방에 적이 있어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네그려. 게다가 대칸과 아바마마는 나보고 빨리 고려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물론 빨리 어마마마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지만 자칫 개 죽음을 당할 수가 있으니 이 어찌 대장부의 한이 아니겠는가?"
카이산은 분노의 표정을 띠며 진심으로 세자의 처지를 동정했다.
"삼촌의 처는 다름 아닌 저의 큰아버지 감마라 진왕의 딸이 아닙니까? 혈육끼리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뜻이거늘...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니 이것이 어찌 진정한 인간의 세상이겠습니까? 제가 만약 장차 대칸이 된다면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바로잡을 것입니다!"
- 세자는 마침내 의기투합한 카이산과 묘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세자는 카이산과 카이두 정벌때 친분을 쌓은 바얀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전후사정을 설명한 다음 바얀이 어머니 장목왕후의 죽음을 규명하는 데 카이산과 더불어 대칸의 허락을 받도록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바얀의 위치로 보아 그가 강력하게 세자의 귀국을 돕는다면 아무러한 대칸도 이를 함부로 꺾지를 못하기 때문이었다.
- 바얀은 같이 생사를 함께 한 젊은 영웅 카이산의 부탁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입궐해 대칸을 만났다.
"대칸, 쿠빌라이 대칸의 따님이신 장목 왕후가 고려에서 급사했다고 하는데 일단 그 진위를 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미 경왕과 한통속이었던 테무르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 그거야 나의 이모부이신 경왕께서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을 뭐 그리 호들갑이시요?"
"정황이 하도 수상하여 드리는 말씀이고 또 고려의 세자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하여 만일의 조치를 취하기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테무르칸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도대체 자기의 아비를 그렇게도 못믿는 이지르부카는 과연 어떠한 위인이라는 말이요? 이미 큰아버지 감마라의 딸과 정혼했으면 그만하면 황족 대우를 받고도 남음인데 뭘 그리 못미더워 나를 이렇게 짜증나게 하는 것이요?"
그러자 카이산이 날카로운 눈으로 대칸을 쏘아보며 한마디했다.
"장목왕후의 아드님이신 세자께서 의혹을 제기하시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 원나라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대한 문제이오니 대칸께서는 가벼이 넘기지 마옵소서."
- 가뜩이나 장차 정치적 라이벌로 의식한 카이산이 정면승부를 걸며 도전해 오자 테무르 대칸은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게다가 암묵적으로 카이산의 발언에 동조하듯 바얀 또한 대칸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바얀 때문이라도 대칸은 경솔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좋소. 일단 고려의 세자를 들라하시오. 단, 그대들은 빠지고 세자만 오게 하란 말이오. 독대를 하겠소."
- 다음날 세자는 황궁으로 들어가 대칸을 만났다. 세자를 보자 대칸은 다짜고짜 물었다.
"만약 이번에 고려로 들어가 그대의 모후의 죽음이 주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어찌 하겠는가? 그대로 인해 어제 짐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으니 말이다."
- 세자는 자신을 노려보며 비웃는 대칸의 의중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떻게하든 자신을 엮어 골칫거리를 제거코자 하는 대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생각해둔 것이 있는 듯 명쾌하게 대답했다.
"함부로 아비를 의심한 죄, 그리고 국왕을 불경하게 한 죄. 마땅히 아바마마의 처분에 맡기겠나이다."
"흐흠, 그래?"
- 대칸은 경왕이 세자를 고려에서 만나면 십중팔구 제거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다. 또한 자신의 위협이 되고 있는 카이산과 절친한 세자를 제거한다면 자신에게도 하등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던 것이다.
- 이윽고 대칸은 그동안 세자가 대도에서 양성한 고려인 용사들과 카이산의 군사까지 대동하고 고려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여기에는 카이산 자신도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같이 고려로 향했다.
- 대칸은 이참에 카이산 마저도 고려에서 불귀의 객으로 만들기 위해 비밀지령을 고려의 경왕에게 전하기에 이른다. 과연 세자는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풀고 도사리는 음모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었다. 어쨌든 고려 세자 왕장의 험난한 여정은 호랑이굴인 고려로 향하고 있었다.
- 고려의 세자 왕장이 황족인 카이산 등 몽골과 고려의 용사들을 대동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의 경왕은 이때야말로 장차 후환인 자신의 아들과 테무르칸의 사주를 받아 카이산 마저 한꺼번에 없앨 묘안을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는 정상인의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처사였지만 자신의 왕위와 관련된 일인 이상 경왕은 천륜을 아예 지워버린지 오래였다.
- 다만 테무르칸이 보낸 밀지에서도 그랬듯이 세자 왕장을 섣불리 죽여버린다면 원나라의 황족 일부도 크게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은밀히 없애야만 했고 이는 카이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단 경왕이 생각해낸 것은 일찌기 몽골과 고려의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몽골사신 저고여 살해사건을 흉내내 세자 일행이 고려의 국경을 넘어오기 전에 고려인들을 여진족으로 위장시켜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
- 겉으로는 여진족의 도적 떼로 위장해 세자 일행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는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우선 경왕은 세자를 호위하고 있던 카이산의 실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몽골제국을 누비며 천하의 무예 실력을 뽐내던 카이산의 신출귀몰한 칼솜씨와 활 솜씨 아래 경왕의 애첩인 무비가 뽑았다던 고려 최정예 암살단들의 목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던 것이다.
- 첫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경왕은 서경(평양)에 도착한 세자 일행에게 미인들을 붙여 몰래 독살하려 했다. 서경에서 뜻밖의 환대를 받은 세자 일행은 당연히 이를 의심했지만 서경의 태수가 먼저 술을 먼저 마시는 것을 보고 따라 마시기에 이르렀다.
-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술에는 얼음이 있었는데 태수가 마실 때는 얼음이 녹지 않아 독이 스며들지 않았으나 막상 세자와 카이산이 마실 즈음에는 얼음이 녹아 이들은 그만 맹독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이들은 데리고 온 수하들이 업고 산중으로 달아나 가까스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수하들중에는 이 같은 위험을 염두에 두고 해독전문의 명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해진 경로로 가면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자 일행은 위장을 하고 낮에는 숨어서 자고 밤에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왕도인 개경에 다다랐다. 세자 일행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경왕은 대노하며 군사를 풀어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세자 일행은 일단 개경 밖에 있는 세자의 고려인 장인 평양군 조인규의 별장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조인규는 세자의 아내 조비의 아버지였다.
- 다음 날, 왕궁에 입궐한 조인규는 경왕에게 세자가 자신의 처소에 있음을 알렸다. 이미 세자가 도착한 사실이 기정 사실화 되자 아무러한 경왕도 더 이상 세자를 비밀리에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세자가 모후인 장목왕후의 문상을 가는 것을 허락했다.
- 세자는 문상을 위해 왕궁으로 입궁했지만 이미 경왕의 주위에는 궁인 무비를 비롯해 온통 세자를 음해하려는 세력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세자는 일단 부왕인 경왕에게 인사를 올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 경왕의 냉대였다.
"불효막심한 놈. 어미가 죽었으면 한걸음에 달려와야지 두달이나 끌다가 마지못해 오다니...네가 정녕 그러고도 세자더냐? 오기 싫어서 억지로 온 것이 아니더냐? 네 어미가 지하에서 이런 꼴을 보면 얼마나 노여워하시겠느냐?"
그러자 주위에서 세자를 향한 조소와 야유가 쏟아졌다. 세자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돌아서 나갔다. 그러자 무비의 가시돋친 한마디가 세자의 등뒤에 꼬쳤다.
"허기야 몽골인의 피가 반이나 들어있으니 모전자전이겠지요...호호호."
세자는 당장 무비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갈기갈기 찢여죽이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 처소로 돌아온 세자는 장목왕후의 죽음에 대해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선 왕후를 모시던 시녀들을 추궁해 죽음 당시 상황을 물어봤으나 모두 자연사했다는 답변만을 앵무새처럼 했다.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 봐도 돌아오는 것은 모르겠다거나 그냥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하나마나 한 대답이었다. 경왕과 무비의 입단속은 그만큼 철저하고 집요했다.
- 그러나 아직도 왠지 왕후의 죽음이 석연치 않았던 세자는 대담하게도 의심이 가는 무비의 처소로 잠입해 비밀서찰들을 훔쳐 오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비의 처소는 수백명의 호위무사들이 24시간 철통같은 경호를 하고 있었다.
- 세자는 카이산과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한끝에 무비의 처소에 불을 지르고 그틈을 이용해 재빨리 사람을 들여보내 중요 서찰을 빼앗아 온다는 방법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계획은 세자가 왕궁의 눈을 의식해 일체 말로써가 아닌 카이산과 몽골어로 필담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 그러나 발상은 좋았으나 막상 이를 실행할 사람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고려 사람은 일단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자가 데리고 온 일행 중 누군가가 이를 실천에 옮겨야만 했지만 그 누구도 자원해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카이산 자신이 나서겠다고 했으나 모인 일행 중에 천천히 일어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세자마마 신첩이 한번 나서보겠나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는데 그녀는 다름아닌 세자가 대도에서 얻은 애첩 야속진이었다.
- 야속진은 몽골인으로 세자가 일찌기 대도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을 때 날렵한 무사로 처음 만난 여인이었다. 특히 자객으로 비밀임무를 수행하는데 능해 세자가 그를 총애하다가 이윽고 눈이 맞아 세자의 여인이 된 것이었다.
"야속진..."
- 세자는 자신의 애첩인 야속진에게 그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당연히 내심 반대했으나 이미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른 대안이 없었다.
"세자마마, 신첩의 몸은 곧 마마의 것이옵니다. 세자마마가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낌없이 바칠 것이오니 심려마시옵소서. 이 야속진이 언제 안되는 일에 나선 적이 있사옵니까?"
-야속진의 어조는 단호했다. 사랑하는 이를 이용해 아버지의 애첩을 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세자는 한없는 비애를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세자는 이미 어미의 원수를 갚는 것 이상의 더 큰 목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경왕의 애첩 무비의 처소에 잠입해 불을 지르려던 계획은 카이산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했으나 카이산 자신이 장차 대원제국의 유력한 후계자였고 귀한 몸이시기 때문에 여차 무슨 화를 당할 수도 있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유력한 후보로 바로 세자 자신의 애첩이던 야속진이 나서게 된 것이었다.
- 이튿날 밤, 야속진은 일단의 용사들을 거느리고 무비의 거처로 향했다. 무비의 거처는 다름 아닌 궁궐 안이었으나 특히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그녀였기에 경비는 특별히 궁궐 다른 어느 곳보다도 삼엄했다.
- 일단 야속진은 양동 작전을 써서 무비의 처소 근처에서 수하들을 시켜 칼싸움을 벌이게 하였다. 처소 바로 지척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무비의 경비군들도 소수정예만 남긴 다음에 그쪽으로 몰려가 싸움에 가담했다.
- 그 틈을 노리고 야속진은 복면을 한채 불씨를 살려 지체 없이 무비의 처소로 불을 던졌다. 불은 삽시간에 처소를 에워쌌고 경비병들이 불길을 쳐다보며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야속진 이하 용사들은 그들을 손쉽게 처단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다른 곳에 있던 궁궐 견룡들까지 우르르 몰려오기 전에 모든 것은 전광석화처럼 빨리 처리되어야 했다. 그래서 불길이 처소 안으로 더 번지기 전에 야속진은 재빨리 무비의 침전 안으로 잠입했다.
- 시녀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일어난 무비는 재빨리 뒷문으로 도망친 지 오래였다. 이미 무비를 모시던 시녀 중 한명을 매수해두었던 세자는 침전의 구조를 야속진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무비가 머물던 침소에 들어가 중요서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짧은 와중에도 화마는 인정사정없이 퍼져 처소를 삼키고 있었다.
- 야속진이 불길을 가까스로 뚫고 나왔을때 이미 궁궐 안은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용사들은 이미 수백의 견룡군들에게 둘러싸여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야속진도 이들과 합류해 싸우려 했으나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용사들의 만류로 하는 수 없이 사지를 간신히 벗어 나는데 성공했다. 대신 용사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밤 사이 무비의 처소에 자객들이 침입해 불을 지르고 처소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왕은 대노하여 즉시 범인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분노에 치를 떨던 무비의 강압으로 왕은 전 대신들을 모두 불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무비도 경왕과 나란히 자리를 같이 했다.
- 한참 대책이 논의되던 중, 갑자기 세자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가 웅성되며 이를 모를 긴장감이 조성되자 세자는 한마디로 좌중을 제압했다.
"누가 어마마마를 시해했는지 알아냈습니다."
- 경왕과 무비는 일순간 섬찟했으나 평정을 되찾았다. 경왕은 시치미를 떼고 누구냐고 묻자 세자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바로 무비와 그 일당들입니다."
"뭐라고?"
무비는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경왕도 당황하며 진정하라고 만류했으나 무비는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전하, 세자가 드디어 미쳤나봅니다. 전하께 온 충성을 다 하는 소첩을 모함하다니요...?"
- 그러자 세자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일단의 서찰을 꺼내들었다.
"이 서찰들에는 무비가 어마마마를 독살시키기 위한 일단의 음모들이 적혀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비의 필적입니다. 이 서찰들이면 무비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 그러자 무비를 추종하던 대신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 경비가 삼엄했던 무비의 처소를 어떻게 세자가 뚫고서 들어갔다는 말인가? 경왕과 무비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자, 도대체 넌 어떤 근거로 무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거냐? 그 서찰이 무비의 것이라는 무슨 증좌라도 있느냐?"
- 그도 그럴것이 무비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야속진이 불길을 뚫고 들어가 그 짧은 시간에 무비의 극비서류들을 손안에 넣었으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비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서류들이 불에 전부 타 버려 자신의 증거들이 깡그리 없어진 것이 잘된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어이없음은 그 누구보다도 더했다.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권신들의 모든 서류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간에 이 서류의 필적이 무비라는 것이 확인된다면 무비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호호호...세자의 장난이 정말 도가 지나치군요. 만약 세자의 장난이 거짓이라면 뭘로 그 죄값을 치룰 건가요?"
"이미 원나라의 대칸앞에서 맹세했듯이 모든 것은 아바마마이신 전하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흠...그 말에 한치의 거짓이 없으렸다...?"
- 그러자 아버지 경왕의 눈빛에는 돌연 살기가 돌았다. 이런 모습을 세자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한 비탄한 심정으로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서찰들을 대도에 보내 그 진위를 확인해보자."
"이미 보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본에 불과합니다. 진본은 소자 휘하의 용사들이 이미 대도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미 대칸에게도 소식이 갔기 때문에 아무리 늦어도 3일 안으로 회신이 올 것입니다."
- 세자의 수하들에 의해 신속히 대도로 전달된 무비의 서찰들은 테무르칸과 세자를 옹호하는 대신들의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감정을 받았고 그 결과는 무비의 진본임이 확인되었다. 이 서찰들이 먼저 바얀과 다란칸 등 세자파들에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된 것이였지, 만약 테무르칸에게 먼저 전달되었더라면 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위조해 그 죄를 세자와 카이산에게 뒤집어씌웠을 것이다.
- 결과가 무비의 것임이 드러나자 이는 원나라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왔다. 감히 속국의 일개 애첩이 쿠빌라이칸의 딸을 죽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바얀과 다란칸은 거세게 칸에게 항의했고 아무러한 테무르칸도 이러한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테무르칸은 분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먼저 원나라 대칸으로서의 기본임무를 실행해야 했다.
- 즉시 이번에는 바얀을 비롯해 몽골의 정식 사신이 고려조정에 파견되었다. 이 모든 것이 세자가 약속한 3일 이내에 이루어졌다. 고려에 파견되었던 모든 다루가치들을 대동한 바얀은 세자와 카이산을 대동하고 일단 무비의 일당들을 모두 색출해 포승줄에 묶어 경왕 앞으로 데려왔다.
"대칸의 황명으로 대원제국의 황족이자 고려의 왕후를 시해한 천하의 악당들을 잡아 처단하려 합니다. 왕께서는 나서지 마시오."
- 바얀의 이 한마디에 고려의 조정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경왕은 그저 사색이 된 체 얼어붙어 있었다. 귀신에 홀린 듯 얼이 빠져버린 무비는 갑자기 발악을 하며 경왕에게 애원했다.
"마마,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이건 모함입니다. 왜 이리 침묵하시나이까? 전하의 명으로 모든것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옵니까? 이제와서 이러시면 소첩보고 그냥 죽으라는 것이옵니까? 너무나 원통하옵니다. 살려주시어여 전하, 전하...!"
- 그러자 바얀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무비의 안면을 강타했다. 무비가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혼절하자 바얀은 싸늘하게 경왕을 노려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왕에 대한 처분은 이후에 대칸께서 다시 내리실 것이니 그동안 근신하고 있으시요."
- 이리하여 무비를 비롯해 그 일당이었던 환관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 등이 시해 혐의로 처형되기에 이르고 그 도당 40여명을 귀양에 처해졌다. 무비의 일당들은 바로 경왕 자신의 지지기반이기도 했기 때문에 경왕 자신의 타격도 엄청났다. 세자는 마침내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내고 어미의 원수를 갚게 된 것이었다.
- 고려 경왕(충렬왕)의 지지기반이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암살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붕괴되자 경왕은 싫든 좋든 은신하며 이를 갈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총애하던 애첩 무비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아들에 의해 살해되자 이미 천륜을 사실상 끊은지 오래되었지만 세자에 대한 원한은 이제 뼈에 사무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더 이상 부자지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 무엇보다도 기가막힌 것은 고려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무비 일당의 일망타진전까지만 해도 경왕 이하 무비의 일당들에게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던 이들이었지만 눈앞에서 대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왕을 냉대하며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 취급을 했다. 유유상종이라고 경왕과 무비 일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모리배들만 거둔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경왕은 바얀 등에 의해 사실상 궁궐에 연금상태가 되어 테무르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 모후인 장목왕후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푼 세자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미 모든 날개가 잘린 아버지 경왕이었지만 자신의 세력이 전무했던 고려에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위험천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산의 생각은 달랐다.
"형님, 이참에 아예 형님이 경왕을 갈아치우고 고려의 새 왕이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님이 고려왕이 되면 장차 저한테도 든든한 기반이 될터이고 제가 제위에 오르면 다시 형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니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자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때와 절차가 있는 법이다. 이미 아버지인 경왕은 나를 철천지 원수로 대하고 있어 내가 고려에 남아 있는다면 무슨 화를 당할지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우리가 고려로 오는 길에 겪은 바가 있지 않더냐? 더군다나 내가 빨리 고려의 왕위를 차지하면 세상에서는 나를 보고 아버지를 쫒아내고 왕이 된 천하의 패륜아라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미 고려는 유교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속사정이 어떻든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만 보고 쉽게 나를 매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단 대도로 돌아가 모든 절차를 밟아 당당하게 고려의 왕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제 허울뿐인 경왕에 비해 테무르칸은 엄연히 대칸입니다. 오히려 대도로 가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나에게 대도는 고려보다 더 친숙한 곳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다. 테무르칸이 또 무슨 수작질을 부릴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돌아가서 원나라의 큰 힘을 이용해 고려왕이 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해서 세자는 카이산과 함께 대도로 돌아왔다. 고려에서 대도로 가는 긴 여정의 어느날 밤, 세자는 야속진과 은밀히 밀회를 즐긴다.
"야속진...그대가 몸을 던져 악당들의 음모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요. 그대는 나에게 모든 것이오. "
"세자 전하...당연히 신첩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옵니다. 그런 말씀은 저를 몸둘 바를 못하게 합니다."
"하하 여전사인 그대한테 이런 여인의 풍모를 보니 한껏 더욱 그대가 사랑스럽구려. 나는 고려에도 부인들이 많지만 그대야말로 나의 진정한 아내요."
"세자님의 어머니 일에서도 보셨듯이 너무 한쪽만 편애하면 반드시 큰 사단이 나게 되어있사옵니다. 부디 경계하옵소서."
"으음...보다시리 말이요? 비록 권세가인 진왕 감마라의 딸이라 자의반타의반으로 혼인했지만 여자가 너무 기가 사나워 나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그래도 앞으로 세자마마의 앞날에 큰 도움이 될 부인이시오니 지혜롭게 대처하옵소서."
"그대의 현명함 또한 그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구려. 이리 오시오..."
그들은 대도에 도착할 때까지 연인으로서의 운우의 정을 마음껏 나누었다.
자신의 계획이 보기 좋게 수포로 돌아가자 테무르칸 역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의 경왕은 확실히 몰락했지만 테무르칸 자신의 위신도 상당히 구겨진 셈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권위가 깎인다는 것은 대원제국의 대칸으로서 치명적이었다. 또한 바얀과 다란칸 등의 세력가들이 카이산을 중심으로 세를 결집하게 되어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쿠빌라이칸의 딸을 죽인 것은 무비 일당이었으나 경왕이 연관되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조치도 빨리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왕의 무죄 여부에 대한 토를 다는 것은 아무러한 대칸이라해도 쿠빌라이칸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테무르칸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반대파에게 모든 것을 순순히 내어주기도 뭣해 테무르칸은 이런 말들을 했다.
"경왕이 악당들과 연관되었다는 점은 분명하기에 그 자를 그냥 고려의 왕위에 놔둘수는 없다는 것은 짐도 잘 알고 있소. 허나 매사는 시기를 잘 타야하는 법이요. 그래도 경왕은 명색이 왕인데 성급하게 끌어내리면 고려의 반발을 살 수도 있으니 좀 더 신중하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오. 일단 경왕을 대도로 불러 소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소?"
- 그러나 테무르칸의 이런 제안은 이미 격앙된 원나라 조정을 설득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바얀이 이 분위기를 대신해 말을 전했다.
"대칸. 지금 쿠빌라이의 영령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대칸의 할아버지인 쿠빌라이칸 말입니다. 대칸께서도 고모가 되시는 고려왕후가 악당들에게 암살당해서 이제야 우리는 원한을 풀고 하늘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 고려왕이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 이상 시간 끌것이 뭐가 있습니까? 고려의 민심요? 고려왕은 이미 인심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지난날 고려왕이 저지른 그 수많은 어리석음을 대칸께서는 진정 못 들으신 겁니까? 더구나 설사 일부의 반발이 있다 해도 우리에게는 쿠빌라이칸의 위대한 피를 이어받은 이지부르카 세자마마가 계십니다. 경왕의 핏줄이기도 하구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고려왕의 폐위 조서를 내리십시오."
- 테무르칸 입장에서는 바얀의 직설적인 언사 못지 않게 세자가 고려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못마땅했으나 이제 와서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이 모든 대세를 부정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테무르칸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마지못해 당장 경왕의 폐위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따로 사람을 고려로 보내 경왕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모양새가 좋고 대도로 와서 같이 후일을 도모해 보자는 밀지를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경왕 역시 이를 악물로 대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로서 1298년 정월 경왕은 태상왕으로 물러남으로써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충선왕'이다, 이제 단순히 고려왕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한 그의 활약이 막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 1298년 정월, 아버지 경왕을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선왕(충선왕)은 즉위 교서에 30여 개에 달하는 개혁안을 선포해 고려를 새롭게 바꾸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아버지경왕이 즉위했던 25여년 동안 나라가 아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선왕은 어렸을 때부터 고려가 심각하게 망해가고 있었다는 느낌을 강력히 받았었고 어머니 제국대장공주 역시 이제 자신의 나라이기도 했던 고려에 대한 걱정이 심해 자주 경왕에게 간언했지만 그때마다 심각한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대륙을 향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단 이제 자신의 나라가 된 고려를 일신해야만 했다. 이런 선왕의 개혁의지와 실행은 그간 경왕의 무능한 통치에 지쳐있던 고려 신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 이런 선왕의 일련의 개혁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대도에서 선왕과 같이 귀국한 계국대장공주 보다시리가 새로운 불씨로 피어오르게 된다. 보다시리는 매우 거칠고 사나운 성격의 여인으로, 선왕이 대도에 머물렀을때 자신의 신변안전 차원에서 정략적으로 결혼한 상대였다. 진왕 감마라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 혼인을 통해 선왕은 원 왕실의 부마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왕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대칸 테무르도 함부로 선왕을 건드리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진왕 감마라의 위세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 보다시리 또한 선왕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일단 자신에게 무관심했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필 자체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외가 소원하게 되자 자연 둘 사이에 소생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선왕은 자신과 야속진 사이에 관계는 극비리에 부쳐 보다시리가 아직 이를 눈치채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려로 오자 공식적으로 세자빈으로 있던 조비를 가장 먼저 핍박하기 시작했다.
-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선왕이 어미의 죽음을 파헤치러 개경으로 향할 때도 많은 도움을 줬던 가문의 여식이었다. 선왕 또한 야속진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조비에 대해 겉으로 엄청난 애정을 쏟았는데 이것이 계국공주의 눈에 딱 걸린 것이었다. 자신 또한 선왕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자와의 사랑도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계국공주는 자신 가문의 배경을 내세워 선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마, 아직도 조비가 세자빈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랍니까?"
"그대와 혼인하기 전부터 이미 세자빈으로 책봉된 현숙한 여인이요.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이오?"
"당장 조비를 폐위하시고 제가 당연히 고려의 정식 왕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다시리, 그대가 고려의 풍습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기 고려에는 왕비 책봉에 대한 나름 절차와 예법이 있다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대를 고려의 정식 왕후로 책봉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제가 고려의 왕후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하지만 지금 제가 요구하는 것은 당장 조비를 사가로 내보내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옵니다. 조비가 저와 한 지붕에서 마주치는 꼴은 싫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자 아무러한 선왕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대는 이제 고려의 왕후가 될 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이오? 경솔히 행동하지 마시오."
"지금 전하는 누구 덕분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어느덧 공주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솟구쳤다. 선왕은 속으로 오한을 느꼈다.
"전하가 대도에서 대칸의 눈밖에 나 매일매일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때 누가 전하를 보호해주었습니까? 바로 저의 아비인 진왕감마라칸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의 이 간단한 요구마저 무시하실 참인가요? 그런 천한 고려의 여자 하나 곧바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가 전하의 그릇입니까?"
"닥치시오!" 선왕은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나 또한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거늘...엄밀히 따지면 대원제국에서 서열은 내가 그대보다 까마득히 높다는 말이오. 게다가 이제 고려의 왕인 나에게 어찌 그런 말을...이번에는 철없는 것으로 치고 불문에 부치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이런 막말을 하면 내 그때는 가만있지 않겠소!"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선왕을 향해 공주는 다시한번 무서운 눈길을 쏘아붙였다.
-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사실상 유폐 상태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경왕에게도 이러한 왕과 공주의 불화소식은 들렸다. 자나깨나 테무르칸의 소환명령을 기다리던 경왕은 선왕이 자신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와 왕의 잦은 다툼 소식을 듣자 경왕은 속으로 뜻밖의 원군을 얻었다며 쾌재를 부르고 이 상황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던 공주는 원나라에서 지내던대로 자주 사냥을 나가는 것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삼았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곁에 있던 시녀들을 개패듯이 패는 것은 애교로 심지어 칼을 뽑아들어 시녀들을 죽이는 것을 즐길정도로 공주의 성품은 잔학무도했다. 경왕은 이런 정보를 얻자 어떻게하든 공주와 접촉해 만남을 가질 시도를 하고자 했다. 유폐되어 있던 경왕은 몰래 지니고 있던 재물을 풀어 자신을 지키던 경비병들을 매수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리고 경비대장을 통해 공주의 시녀와 접선하는데도 성공했다. 시녀가 공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이미 왕과 상왕의 관계를 알고 있던 공주는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상왕이 시아버지로서 조비를 빨리 몰아낼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귀띔하자 왕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던 공주는 한번 만나보기로 했다. 비밀장소에서 공주와 경왕은 드디어 만났다.
"아버님..."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은 그야말로 거만의 극치였다. 경왕은 속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이 60이 넘은 자신을 무슨 쓰레기 취급하듯이 기분나쁘게 보자 온갖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었다.
"오냐 아가야...드디어 처음 얼굴을 보는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지..."
경왕은 일부러 초췌한 표정으로 공주의 동정심을 사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자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녀라도 경왕이 어떤 위인인가는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이 왕이 되어 나를 한번도 만나주지 않는구나. 그런데 그녀석 변발은 하고 있더냐?"
그러자 공주는 문득 왕이 변발을 하지 않은것을 새삼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머리모양을 애매하게 해 변발같기도 했고 그동안 관을 쓰고 있어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경왕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난 왕이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변발을 한 것이었다. 그건 대원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이런 내가 감히 나의 왕후이자 쿠빌라이의 성스러운 소생을 사주해 죽였다는 것이 말이 되냐말이다. 이 모든 것은 무고란다."
"그런데 저를 보자 한 것은 그것때문이 아닐텐데요?"
공주가 냉정하게 쏘아붙이자 경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상관이 있다. 내가 이지부르카였다면 고려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너를 왕후에 봉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 머뭇거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네가 바로 대원제국을 상징하는 것인데 너를 무시하는 것은 곧 대원제국을 무시하는 거란 말이다. 대원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고려왕으로서 이는 반역이 아니겠느냐?"
(이 인간이 정말...)
아무리 왕이 밉지만 명색이 아비라는 자가 아들을 모함하는 꼴은 공주라 해도 차마 더 이상 듣기가 역겨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지금 왕도 상왕을 밀어내고 자기가 왕이 된 셈이 아니던가? 공주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거래를 하자꾸나."
"뭐라고요?"
"이미 너와 왕은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내 자식이지만 명색이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녀석이 대놓고 원나라를 무시하는 꼴은 나로서도 차마 더 이상 참기 힘들다. 그러나 지금 나는 힘이 없다. 네가 날 도와준다면 조비를 당장 몰아내고 너에게 새로운 삶도 찾아줄 것이다. 이건 내가 너의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에게 베푸는 온정이라는 점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공주는 며느리 어쩌구 하는 것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조비를 쫒아내는 방책만은 궁금했다.
"그럼 아버님이 무슨 묘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정답은 이미 내가 한 말 안에 있다."
상왕은 그제서야 무서운 눈빛을 하고 공주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공주는 그마저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신왕에 대한 음모는 그 모양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겉으로 선왕이 총애하는 조비를 몰아내고자 하는데 일단 의기투합한 공주와 상왕은 즉각 음모를 꾸미기에 몰두했다. 물론 공주의 일차 목적은 조비를 빨리 쫒아내고 자신이 고려의 정식 황후가 되는 것이지만 상왕은 선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복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와 관련해 공주는 상왕이 자신에게 한 말 중 다음을 그냥 흘려들었던 것이다.
"너에게 새로운 삶도 찾아줄 것이다."
- 완전히 손발이 묶여있었던 상왕은 일단 공주를 통해 풍비박산 난 자신의 세력을 다시 모으는데 열중했다. 이들은 선왕에 의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완전히 상왕을 버린 이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상왕 입장에서는 일단 세를 불리는 차원에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복위하면 자신을 버린 자들은 남김없이 처치해 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 상왕은 계국공주를 통해 대도의 테무르 대칸에게도 다시 접선해 선왕을 몰아낼 음모를 다시 꾸미기 시작했다. 이미 공주의 아버지 진왕 감마라칸은 고려의 딸에게 이야기를 다 들어 마음이 선왕에게서 많이 떠나있었던 정도도 아니고 자신의 딸을 푸대접하는 선왕에게 적개심마저 품게 되었다. 자연 그동안 한배를 타고 있던 카이산과 바얀 등과도 척을 지게 되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대칸은 진왕 감마라칸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반대 정적들을 더욱 열심히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카이산을 위시한 바얀과 다란칸 등의 대칸 반대파들은 이와 같은 사태에 크게 당혹감을 느꼈다. 감마라칸이 자신들의 편에 있음으로써 대칸을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버팀목이 빠져나가니 자신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됨과 동시에 고려의 선왕에 대한 보호막마저 엄청 쇠약해졌기 떄문이다.
- 자신의 측근들을 재결합한 상왕은 비밀리에 조비와 조인규를 모함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고 이를 빌미로 선왕 또한 왕위에서 내몰 음모를 한꺼번에 꾸미기 시작했다. 이윽고 상왕의 지시대로 공주는 위구르어로 선왕이 고려로 돌아오자 자신을 갑자기 박대하기 시작했으며 대원제국과의 일체감의 상징인 변발도 소홀히하고 옷도 고려식으로 입고 모든 것을 원나라 이전 고려의 것으로 바꾸려 한다고 썼다. 또한 고려인인 조비만을 총애해 그 어미가 자신을 저주하는 굿을 밤낮으로 올려 자신의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고까지 썼다. 게다가 선왕이 장인인 조인규를 사주해 비밀리에 군사를 기르고 고려의 다루가치와 친원파들을 남김없이 죽이려한다는 무고까지 낱낱이 써서 대도의 왕태후에게 보냈다. 겉으로는 왕태후에게 하소연하는 형태였지만 사실상 고려의 선왕을 무고하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공주가 쓴 내용은 조비 가족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상왕이 이를 몰래 가로채 그밖의 내용을 왕창 추가했던 것이다. 이렇게 공주는 상왕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래도 명색이 대원제국의 황실 일원이자 고려의 정식황후가 될 몸이 자신의 지아비를 참소하는 서신을 보낸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상왕과 대칸의 사전조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서신 자체도 곧바로 대칸 테무르에게 전달되었다. 테무르칸은 왕태후에게 받았다며 이 서신을 조정에 대대적으로 공개했고 그 파문은 엄청났다. 일찌기 자신의 어머니이자 쿠빌라이칸의 딸인 장목왕후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고려로 가서 자신의 친부인 상왕을 끌어내릴 정도로 열심이었던 선왕이 이제 자신이 왕이 되자 곧바로 반원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대원제국의 위정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양새이자 카이산 등 선왕파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무고입니다. 모든 정황이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좋소. 그럼 그 논란의 당사자들을 대도로 압송해 문책해봅시다."
대칸의 명령하에 조비를 비롯해 그 일가족이 모두 대도로 압송되었는데 특히 조인규는 대칸의 밀명하에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시키는 대로만 말하면 일가족은 모두 무사할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조인규는 그만 굴복하고 허위자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공주와 상왕이 꾸민 서신에 적힌 그대로로 조인규의 거짓실토로 원나라 조정은 경악했다. 대칸은 이러한 분위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
"위대하신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로 푸른 늑대의 성스러운 혈통을 이어받은 고려왕 이지부르카는 선대에 씻을 수 없는 패악을 저질렀소. 그동안 이 자가 저질렀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대원제국의 등에 비수를 꽂기 위한 철저한 위장이었던 것이오. 그 죄로 보면은 당장 처형감이지만 쿠빌라이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또 실제로 반역을 도모한 증좌는 없으므로 일단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당장 대도로 압송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감히 우리 황족공주를 능멸한 그 조비라는 여인은 처형하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테무르칸은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이산을 비롯한 선왕파는 이 모든 것이 농간임을 속으로 알아차렸으나 지금 의문을 제기하면 자신들의 입지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대칸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해 눈을 지그시 감고 외면했다.
- 고려 상왕을 폐위한 지 불과 7개월만에 또 다시 고려의 왕을 폐위하는 대원제국의 특사가 고려의 왕도 개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대칸의 폐위교서를 읽고 선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자신의 투기가 이렇게 엄청난 사태로 이어지자 계국공주는 마음 한 켠에 아차했지만 어차피 선왕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 있지 않았던지라 그저 무덤덤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또한 선왕도 의외로 이 모든 것의 배후에 공주가 있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주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이리하여 새로운 고려를 만들어 자신의 대망의 발판을 구축하려던 선왕의 시도는 7개월만에 산산히 부셔졌다. 그리고 공주와 함께 이제 다시 대도로 끌려가 미지의 운명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 아들인 선왕을 몰아내고 다시금 고려의 왕으로 복위한 상왕, 즉 경왕은 그동안 억눌렀던 울분을 마음껏 토해냈다. 선왕이 나름 고려의 앞날을 위해 취한 개혁조치들은 모두 혁파되었고 다시금 자신이 이전 왕이었을 때로 환원시켰다. 선왕이 개혁한 것들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선왕이 했다는 것 자체로 앞뒤 따지지 않고 무조건 원상태로 복귀시켰던 것이다.
- 아울러 인간성이 소심하고 간악했던 경왕은 왕위에서 쫒겨 났을 때 자신에게 등돌린 이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복위를 도왔던 이들도 가차없었다. 어차피 경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복위를 위해 이용하고 버릴 버러지같은 인간들이었다. 다만 비록 지난날 자신을 배신했더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 한 번 쓰고 버리기 아까운 무리들도 있었다. 그런 부류들을 경왕은 일단 살려두기로 하고 훗날 진짜로 그 쓰임이 다하면 잔인하게 처형시킬 생각이었다. 이런 신하들 역시 다시금 경왕의 천하가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일단 경왕에 적극 협조하며 나름 살길을 모색하기에 바빴다. 말하자면 서로 불안전한 협조관계를 잠정적으로 유지한 셈이었다. 그렇지 못한 과거 신하들은 모두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수도 개경은 한동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경왕은 비록 폐주(선왕)가 대도로 끌려갔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폐주가 대도에 나름 지지세력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마음대로 자객을 보내 암살하기도 용의치 않았음도 잘 알고 있었다. 폐주를 제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치적 역량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대도로 간자들을 보내어 폐주의 동태를 감시함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계국공주와 연락을 취하며 폐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광분했다.
- 대도로 끌려간 폐주는 비밀리에 대칸의 비밀감옥으로 끌려갔다. 테무르 대칸의 입장에서는 이지부르카를 대도의 거리를 돌게 하며 죄인으로서 온갖 수모를 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다해도 엄연히 쿠빌라이 대칸의 혈통을 받은 이로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까지 훼손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또한 그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이들은 자신을 지목할 것이고 이는 곧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것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폐주를 자신의 비밀 지하감옥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카이산칸을 비롯한 폐주파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폐주가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폐주와 함께 대도로 온 공주는 아버지 감마라칸한테로 갔다.
- 처참한 몰골로 대역죄인처럼 사슬에 묶인 채 있는 폐주의 앞에 대칸이 실실 비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지부르카, 난 니가 어렸을때부터 싫었어." 대칸의 첫마디였다.
"너는 항상 쿠빌라이 대칸 할아버지의 총애를 나보다 더 받았지...그래서 니가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 다짐했지. 꼭 대칸이 되어서 내가 너보나 낫다는 것을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결국 나는 대칸이 되어서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지. 너도 지기 싫었는지 고려의 왕이 되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지...이게 뭘 뜻하는지 아냐? 넌 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거야."
마치 인생의 승리자라도 된 듯이 테무르는 만면에 승리자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날 어떻게 할꺼냐?"
"물론 널 죽일 수는 없겠지..."
테무르는 순간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또한 너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할 수도 없다. 어떻게 너 같은 것이 감히 대쿠빌라이칸의 성스러운 핏줄을 받아 이렇게 날 곤란하게 하는 지 모르겠다. 생각같아서는 단칼에 해치우고 싶은데 말야...하지만..."
폐주는 대칸을 똑바로 노려봤다.
"이제 네가 꿈꾸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하나하나 다 빼앗아 갈 참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로부터 서서히 말라죽일거다. 네가 사랑하는 것...꿈꾸는 것...너의 나라 고려...철저히 내가 알아내 하나하나 없애주마. 그래서 널 산 송장으로 만들어 나에게 죽여달라고 매달리게 만들것이라 말이다."
"너야말로 꿈꾸고 있구나. 테무르..."
그러자 대칸이 가지고 온 채찍을 사정없이 폐주에게 휘둘렀다.
"대칸이라고 불러라. 이 빌어먹을 고려종자야!"
대칸이 가지고 있던 채찍은 쇠가죽으로 된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를 피하려한 폐주는 결국 팔꿈치에 채찍을 맞아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폐주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쿠빌라이칸이 나를 너보다 더 총애하신 거지. 대칸으로서 온 만물의 지배자로서의 그릇은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고 기껏해야 옛날 사사로운 인연의 기억으로 그걸 복수하려고 날뛰는 너의 모습을 보시면 하늘의 쿠빌라이칸이 뭐라 하실까? 내가 고려의 피를 반이나 가지고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너와 나의 위치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뭐야? 이자식이...이자식이 입만 살아서..."
테무르는 부들부들 떨며 다시한번 채찍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폐주는 두려움없이 할말을 했다.
"딱하구나 대칸이여...그러니 너는 쿠빌라이칸의 반도 못따라가서 나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것 아니겠냐? 나 또한 하늘에 계신 쿠빌라이칸과 그리고 고려의 왕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나는 지은 죄가 없단 말이다. 지금 넌 그렇게 의기양양하지만 지금 그럴때 마음껏 즐겨라. 대칸으로서 마음껏 누릴 것을 누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반드시 나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그건 대칸으로서의 너도 어찌할 수 없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며 숙명이다. 네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테무르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길길이 날뛰기만 했다. 그러나 주변의 제지로 감옥을 나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 이후 폐주는 한 달 간 지하감옥에 갇혀있었다. 고문같은 것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 기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윽고 감옥에서 나오자 카이산을 비롯한 폐주파 일원이 나와 맞이했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공주는..."
"당연히 지 아비인 감마라칸에게 갔겠지요.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렇군."
폐주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야속진은...?"
"제 처소에 있습니다."
"그래...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질 나 이지부르카가 아니다. 오히려 지하감옥에서 나오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어."
- 폐주는 막연하지만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희망이 저기 저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아득하기는 했지만...이후 폐주는 한동안 카이산 등과 함께 사냥을 다니며 다시 자신의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야망을 다시 구체화시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칭기스칸이 이룩한 인류 역사상 최대제국 몽골제국은 쿠빌라이칸에 이르러서는 5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졌다. 대원제국,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일칸국, 그리고 킵챠크칸국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차가타이칸국과 오고타이칸국은 제일 약체라 그 존재감이 미미했고 일칸국은 페르시아 지방, 킵차크칸국은 러시아 등 멀리 위치해있어 당시 대원제국의 관심밖이었다. 칭기스칸 생전시에도 몽골제국이 가장 염두에 두었던 지역은 중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을 완전히 먹어 치운 대원제국이야말로 몽골제국의 중심으로 자부하기에 지나침이 없었던 것이다.
- 그러나 쿠빌라이칸이 중국을 완전히 병합하고 제국의 중심을 중국땅인 대도로 옮기자 중국화를 우려한 몽골 지도부층 일부가 쿠빌라이의 동생인 아리크부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쿠빌라이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몽골반란세력 양쪽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당시 끈질기게 몽골제국에 반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자 이를 크게 반기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려-몽골의 밀월관계가 성립된 것이었고, 태자의 아들인 지금의 경왕이 스스로 변발을 하며 몽골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 비록 쿠빌라이 생전 당시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테무르칸이 즉위하자 이런 북방의 몽골반란세력은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아리크부케 이후 이들 반란세력의 중심에는 카이두가 있었는데 쿠빌라이칸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테무르칸이 형편없는 대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오랜 준비끝에 드디어 서기 1301년 대군을 일으켜 대도를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 그동안 자신의 대칸자리를 공고히 하는데만 급급해 반대파인 카이산을 비롯해 폐주 등을 핍박하기에 바빴던 테무르는 이런 반란군 소식정보를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시해왔었다. 중국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손아귀에 쥔 그는 이런 초원의 떨거지들을 가볍게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치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오랜 기간 엄청난 각고의 노력을 들인 카이두의 대군은 그야말로 무적의 정예병들로 테무르가 보낸 대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순식간에 대도 인근까지 접근해버렸다. 득의양양한 카이두는 대도를 점령하고 중국인들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라 장담하며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식겁한 테무르는 카이두군이 대도를 완전히 에워싸기 전에 탈출해 남쪽으로 천도할 뜻을 비추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이런 궁리를 하자 대다수의 몽골 신료들은 다시 한번 대칸에게 크게 실망했다.
- 제국대장공주 일로 이 당시 대칸을 지지하고 있던 감마라칸 역시 대칸의 졸렬한 행동에 크게 실망한 이들 중 하나였다. 폐주가 고려에서 대도로 끌려온 이후 어언 3년이 지나는 동안, 공주와 폐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감마라칸이 엄금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폐주와 공주 양쪽이 모두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두의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감마라칸은 다시 한번 대칸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카이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감마라칸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여 힘을 회복할 궁리를 하게 된다.
- 한편, 고려의 경왕은 자나깨나 대도의 폐주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제국공주와 폐주의 사이를 나쁘게 유지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이제는 감마라칸이 시큰둥하게 나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대도로 갔다가는 재수없으면 카이두의 포로가 되거나 개죽음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밀정만을 계속적으로 보내 동태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 오랫동안 대칸과 경왕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사냥 등으로 소일하며 때를 기다리던 폐주는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비록 실제로 자신의 정적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항상 그런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대단한 스트레스였다. 또한 몽골 황족들의 자신에 대한 멸시의 시선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자 카이산이 자신을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형님, 이번 카이두의 공격은 우리 대원제국으로서는 크게 불행한 일이나 형님에게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와 함께 백의종군해 카이두의 반란군을 물리치는데 동참하십시오. 열심히 싸워서 적들을 물리치면 형님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라는 명예를 되찾을 수 있고 잘하면 그걸 기화로 고려의 왕으로 복위할 길도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지금 대칸이 저렇게 시퍼렇게 버티고 있는 이상 힘들 것이네..."
"그런 대칸은 지금 도망칠 궁리만을 해 쿠빌라이칸 할아버지를 크게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실의 여론도 대칸에게 매우 안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전공은 커녕 죽는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자 카이산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쿠빌라이칸이 푸른 하늘에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맞이해 주시겠지요. 그보다도 더한 영예가 있겠습니까? 형님도 몽골의 전사이자 고려의 용사로서 진면목을 보여주실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음...생각해 보겠네."
카이산을 돌려보낸 폐주는 야속진을 불렀다. 야속진은 이때 이미 폐주의 아들을 둘이나 낳으며 사실상 정실부인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폐주의 사랑이자 더없이 믿을 수 있는 참모였다.
"야속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마마, 카이산님의 말대로 하시지요. 지금 그 방법밖에는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마의 명예를 회복하셔야죠."
"그대도 역시 같은 생각인게요? 허허..."
폐주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야속진에게 말했다.
"의충(훗날 세자 왕감)과 아라눌특실리(훗날 충숙왕)를 불러주시오."
이윽고 폐주의 어린 아들들이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았다. 폐주는 말없이 이들을 정답게 쓰다듬더니 다시 한번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 대도에 육박하던 카이산의 대군은 대칸이 보낸 대군을 다시 한번 격파하고 대도를 포위하기 직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 순간 카이산이 비밀리에 기르던 사병들이 일종의 특공대를 조직해 야밤에 카이산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습격을 당한 카이두군은 허둥지둥대다가 일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폐주의 계책이었다. 야속진도 다시 한번 전사의 옷을 갖춰입고 부군을 도와 종군했다.
- 예기치 않은 일격을 당한 카이두는 노발대발하며 대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대도에서 모든 몽골인들은 자신에게 항복하고 모든 중국인들은 죽일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엄포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도를 통째로 불살라버리겠다고 했다.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카이두에게 혼쭐이 난 대칸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으나 카이산파의 대응은 달랐다. 카이산은 이 전갈을 가지고 온 카이두의 사신의 목을 베고 카이두에게 일전을 선포했다. 대칸 허락없이 한 행동이라 대칸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이 비상시국에 또한 몽골 황족들 분위기 때문에 가벼운 핀잔만을 주고 끝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사신의 목을 받아든 카이두의 분노는 이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대도를 완전히 포위한 그는 온갖 최신무기들을 동원해 인정사정없이 대도에 있는 건물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제 대도가 함락되면 카이두가 새로운 대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칸때 워낙 철옹성으로 지은 대도이고 성 안에 중국인들은 대도가 떨어지면 자신들이 모두 몰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 해 싸웠다. 이런 이들을 격려하며 앞장서서 싸운 이는 황궁에서 벌벌떨며 있던 대칸이 아니라 바로 카이산과 폐주였다.
- 예상과는 달리 대도가 쉽게 함락되지 않자 카이두의 초조함은 날로 더했다. 그러자 같이 반란에 참여해 대도 포위전에 가담하고 있던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의 마음도 심히 흔들렸다. 만에 하나 대도공격이 실패한다면 그 후폭풍은 곧 자신의 나라의 멸망이었다. 그러자 회군을 결심하고 몰래 카이산에게 전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 고전하고 있던 카이산에게도 이는 분명 희소식이었다. 이 서신에 따르면 두아 자신은 카이두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이고 하늘 아래 중심인 대도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푸른 하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겠으니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그러자 카이산은 카이두를 없앨 계책을 물었으나 두아는 카이두는 자기 자신을 겹겹히 호위해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 이윽고 두아는 약속대로 자신의 군대를 야음을 틈타 몰래 빼내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 사실을 안 카이두 역시 이제 본거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자신 군대의 피해도 막심한데다가 역으로 포위되면 전멸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돌아가 자신을 배신한 두아를 응징할 앙심도 또한 품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카이산의 입장에선 이 역적을 그대로 돌려보내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금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폐주가 자신이 특공대를 이끌고 잡입해 카이두를 해치우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카이산이 기겁하며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말렸으나 폐주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결국 죽음보다 못 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하자 카이산은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다.
- 야속진과 특공대를 이끈 폐주는 밤이 되자 철군준비로 어수선한 적군의 진영으로 잠입했다. 폐주 자신 또한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자원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였다. 적군의 군복을 입은 채 침투했지만 지나가는 길에 암호라도 물으면 난감한 일이었다. 물론 특공대원들 중에 몽골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카이두의 대천막 근처까지 접근하는데는 성공했다.
- 카이두의 대천막이 보이자 일단 폐주는 불화살을 당겨 대천막 갤에 쏘아댔다. 그러자 삽시간에 불길이 타오르며 카이두를 비롯한 장군들이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더욱 많은 수의 군사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어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자 폐주의 수신호에 따라 특공대원들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흩어지고 폐주 곁에는 오직 야속진만이 남게 되었다. 흩어진 대원들은 여기저기 불길을 놓기 시작했고 이들을 따라 카이산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조금씩 대오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 결국 사로잡힌 대원들은 카이두의 졸개들에게 하나하나 처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이미 카이두군 복장을 한 폐주와 야속진은 어수선한 틈을 타 카이두의 오십 보 근처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야속진이 틈을 보아 몸을 날려 순식간에 카이두의 목덜미에 비수를 들이대는데 성공했다. 황망하게 당한 카이두는 영문을 모른 채 다짜고짜 달려들려는 병사들에게 저리가라는 손짓을 하기에 바빴다.
- 이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야속진과 카이두 옆에 바싹 다가간 폐주는 재빨리 하늘로 불꽃화살을 쏘아올렸다. 그러자 이를 기화로 성문을 열고 카이산의 군대가 카이두의 진영으로 곧바로 짓쳐나왔고, 카이두의 목줄에 비수를 댄 채 폐주와 야속진은 점차 카이산의 군대쪽으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야속진의 실수로 돌에 걸려 넘어지자 해방된 카이두는 자신의 칼을 뽑아들어 단숨에 야속진을 베려했다. 그러자 폐주가 재빨리 달려들어 카이두의 검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윽고 카이두와 폐주의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몽골 전통에는 일대일로 겨룰때는 아무도 훼방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룰이 있었다. 카이두 역시 당시 몽골 최고의 전사 중 하나였으므로 폐주는 여러번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점차 카이산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며 다가오자 카이두는 부하들에게 폐주와 야속진에게 달려들라는 신호를 보낸다. 카이두의 기가 꺾인 것을 직감한 폐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려 카이두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살벌했던 카이두군 역시 달려드는 카이산군과 함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이지부르카'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 대원제국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였던 카이두의 대도 공격을 성공리에 방어한 카이산의 명성과 카이두의 목을 용감무쌍하게 베어버린 폐주 이지부르카의 위용은 삽시간에 대전환을 불러왔다. 더군다나 카이산과 폐주는 같이 힘을 모아 카이두의 패잔병들을 추격해 이들을 깨끗이 일망타진해버리니 원나라의 몽골 황족들간에도 폐주를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졌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외손자답다는 평가가 다시 일어났다.
- 반면 시종일관 비굴한 모습만을 보여준 테무르칸에 대한 비판여론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위기상황에서 사람의 본성이 나오는 법인데 대칸 즉위 이후 가장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테무르의 행동은 대원제국의 치욕이라는 의견들이 조정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테무르는 조회도 잘 열지도 않았으며 열더라도 몽골 황족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는 등 굴욕의 연속이었다.
- 카이두의 난이라는 변수로 인해 오히려 폐주의 명성만 높아지자 고려 본국에서 시종 대도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경왕에게는 이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또다시 폐주가 무비 일파 제거때처럼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경왕의 지나친 우려가 아닌 엄연히 현실로 일어나기 충분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고심끝에 경왕은 자신의 최측근인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 중 송린과 석천보는 경왕이 이전에 한번 폐위당했을때 가장 먼저 경왕을 버리고 폐주에게 붙었던 경력이 있던 간신배들이었지만 사람이 워낙 없던 경왕으로서 나름 쓸모가 있어서 경왕은 속내를 숨긴채 다시 쓰고 있었다. 물론 이용가치가 다하면 극형에 처할 심산이었다.
- 다만 왕유소의 경우는 달랐다. 경왕이 특히나 왕유소를 중요시했던 까닭은 왕유소가 폐주에 대해 극한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폐주가 고려왕이었을때 개혁의 일환으로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대거 압수해 백성들에게 분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가장 피해를 본 자가 바로 권문세족의 대표주자였던 왕유소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왕이 복위한 다음에 왕유소는 자신의 땅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다른 권문세족들이 이미 다 나꿔채어 순식간에 집안이 몰락했다. 절치부심하던 왕유소는 경왕에게 절대충성을 맹세하고 폐주를 파멸시키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 경왕 또한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유소에 대한 믿음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남달랐다. 그래서 그에게 제일 먼저 의견을 구했다. 자신들도 살아남기 위해 근근하던 송린과 석천보는 어떻게 하던 경왕에게 찰싹 달라붙어 공을 세워 목숨을 부지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경왕이 왕유소만을 총애하자 은근히 이를 견제하고 질시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이때도 역시 이들은 경왕이 왕유소에게 먼저 묻자 무섭게 왕유소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를 간단히 무시한 왕유소는 입을 열었다.
"역시나 이전에 전하께서 언급하셨던 일을 추진하셔야 할 줄 아뢰나이다."
"그렇다면..."
"폐주와 공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놓는 것 말이옵니다."
경왕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되물었다.
"공주의 아비 감마라칸이 최근 대칸에 대한 지지를 거두려하고 있는 마당에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경왕이 이렇게 나오자 송린과 석천보는 무섭게 송유소를 몰아붙였다.
"영명하시옵니다. 전하. 그대는 어찌하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 이 중차대한 사안을 어지럽히려 하시오?"
그러자 왕유소는 이들을 무시한 채 경왕을 직시하며 말했다.
"감마라칸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주에게 직접 접촉해 승낙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공주를 개가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그 적임자도 물색해놓았습니다."
"그게 누구요?"
"고려 왕족인 서흥후 왕전이옵니다. 제가 이미 의사를 타진했는데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왕전...? 흠..."
"외모며 기질이며 뭐 하나 폐주에 빠지는 것이 없고 오히려 폐주가 비교도 안되는 봉황같은 인물이지요. 이미 폐주에 대한 마음을 거둔 공주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신랑감일 것입니다."
- 경왕은 무릎을 쳤다. 이전에 공주에게 한 말도 있고 해서 공주를 개가시킨다면 감마라칸도 폐주에게 다시 붙을 명분 자체를 앗아가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러한 폐주도 세력기반을 다시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 틈을 노려 테무르칸과 다시 폐주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밀 기반도 마련되는 것이었다.
"역시 경은 과인의 제갈공명이요. 그럼 경이 직접 가서 공주에게 의향을 타진하도록 하시오."
"예, 전하."
송린과 석천보는 한 마디도 못한 채 다만 뭐씹은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 지체없이 대도로 달려간 왕유소는 어렵지 않게 공주를 만나 대면했다. 그리고 경왕과 나눈 말을 그대로 공주에게 전했다. 그런데 공주의 대답이 심상치 않았다.
"또다시 고려인과 혼인하라구요?"
"이전 경왕 전하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소서. 이는 대원제국과 고려의 만년친선을 위한 대계이오니 공주마마께서는 부디 혜량하옵소서."
" 그 왕전이라는 자는 저와의 혼인을 대번에 승낙했다구요?"
"고려의 왕족으로서 폐주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인물이옵니다. 공주마마께서도 매우 흡족해 하실 것이옵니다."
그러자 공주는 앙천대소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보세요...그런 큰 인물이 그래도 한때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고려왕의 왕후였던 나를 주저함도 없이 취하려고 한다는게 말이 된다고 보시나요? 그런 폐륜아가 어디 있나요?"
"서흥후께서는 고려와 제국의 만년대계를 위해 자신의 한 몸 던지실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는 부디 오해를 거두시옵소서."
그러자 공주는 대번에 칼을 뽑아들어 송유소의 목줄기에 갖다댔다.
"닥치시오!!! 자기를 희생하는게 아니라 나의 부와 권력을 나누려는 욕심이겠지...내 이미 경왕과 경왕을 따르는 네놈과 같은 모리배들의 됨됨이를 다 알고 있거늘...비록 이제 폐주와 나는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어찌 그대들과 같은 무리들과 한통속이 되겠소? 난 칭기스칸의 피를 받은 위대한 몽골의 여전사란 말이요. 그 왕전이라는 자가 그렇게 나를 취할 자신이 있으면 어디 대도로 와서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하시오. 나를 이기면 나를 가져도 좋지만 그렇게 못하면 내 칼에 그자의 목이 떨어질테니...아니 그보다도 경이 나와 한번 겨뤄보는게 어떻겠소? 경이 나를 이기면 내 대번에 승낙할테니..."
"마마...제발."
아무러한 왕유소도 오금이 저리는 순간이었다. 한참이나 왕유소를 노려보던 공주는 이윽고 칼을 거두며 말했다.
"가서 경왕에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세요. 어차피 나는 더 이상 고려인과 살을 섞을 생각은 꿈에도 없으니...!"
왕유소의 낯이 흙빛이 된 채 줄행랑을 치는 뒷모습을 보던 공주 앞에 장막을 걷으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잘했다. 내 딸아."
감마라칸이었다.
- 왕유소가 고려로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하자 경왕 역시 경악했다. 이는 미처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송린과 석천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유소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왕은 더 이상 고려에 계속 있기도 불안했다. 다시금 테무르 대칸에게 사신을 보내 직접 독대를 요청했다. 본격적으로 만나 폐주와 그 세력을 없앨 궁리를 함께 하자는 요지였다.
- 테무르 역시 날로 카이산과 폐주의 기세가 높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아직 후사도 없었고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이전에는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경왕과의 직접 만남은 가급적 피했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여러모로 없었다. 쿠빌라이의 외손자? 흥! 그렇다면 나는 쿠빌라의 친손자로서 대칸이고 유일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카이산이나 이지부르카 따위는 서열상으로 나와 동렬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뇌까리며 대칸은 전격적으로 경왕의 대도 방문을 승인했다. 그리고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왕은 드디어 대도에 직접 발을 들였다. 이때가 1305년의 일이었다.
- 오랜만에 온 대도였다. 경왕은 테무르 대칸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황궁으로 입궐했다. 몽골제국의 속국이 되어 여러가지로 초라했던 고려의 개경에 비해 대도는 확실히 천하의 중심이라 자연스럽게 느낄 정도로 모든 것이 거대했고 위풍당당했다.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며 경왕은 더욱 위축되었다.
- 그러나 이번에 먼 길을 온 김에 경왕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폐주를 제거하고 이 모든 것을 끝낼 독한 마음을 품고 왔다. 그래서 고려의 조정을 통째로 옮겨온듯한 것처럼 막대한 재물과 신하들을 대거 대동했다. 왕유소 등 자신의 최측근들도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이후 경왕이 귀국할 때까지 2년동안 고려는 왕과 주요 신료들이 모두 없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 처음 벌어지게 되는데, 후에 폐주 역시 이를 답습하게 된다.
- 그런데 경왕이 막상 황궁에 들어오자 환관은 경왕을 만조백관이 도열해있는 대전이 아닌 밀실로 안내했다. 더군다나 밀실 앞에 이르자 환관은 경왕 일행을 막아서며 오직 경왕만이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왕은 내심 은근히 두려워졌으나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하며 이에 따랐다. 밀실에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거기에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대칸 테무르가 채찍을 들며 살기등등하게 경왕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왕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대칸 폐하, 불충한 신 왕거(경왕의 이름) 이제서야 폐하를 알...알현하옵나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하기가 무섭게 대칸의 채찍이 사정없이 늙은 경왕의 살을 파고들었다.
"으...으헉!"
채찍의 고통으로 경왕은 자기도 모르게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씩씩거리며 대칸은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며 인정사정없이 경왕을 매질했다.
"네놈이 아들놈을 잘못 싸질러 오늘날 내가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된거다. 네 죄를 알렸다?"
"아이고 아이고...천번 만번 죽어 마땅하오니 대칸께서는 부디 고정하옵소서..."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된 경왕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버텼다. 잠시 이성을 잃은 대칸은 그제서야 채찍을 거두며 뇌까렸다.
"생각 같아서는 만조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네놈을 응징하고 싶었다만...그래도 일국의 왕이니 네 체면을 생각해 이정도로 해두는거다!"
"아이고...황...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경왕은 몸을 부들부들떨며 연신 머리를 땅에 박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왕께서는 대칸의 언사를 용서하시오. 요새 하도 시절이 수상해서 그런 것이니..."
경왕이 놀라며 고개를 쳐들자 거기에는 대칸 옆에 황후 브르간이 있었다.
"대칸 폐하...몸도 성치 않으신데 지나치게 힘을 쓰시면 해롭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이지부르카를 낳은 저 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올라서 말이요."
아직도 씩씩거리며 대칸은 옆에 앉았다. 브르간은 아무 말 없이 경왕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경왕도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리에 앉았고 환관들이 달려와 경왕의 몸에서 열심히 피를 닦았다. 경왕을 노려보던 대칸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이지부르카 그놈을 완전히 결딴낼 좋은 방법이 있는가?"
"이지부르카는 누가 뭐래도 제 아들놈입니다. 저보다 그놈을 잘 아는 이는 없죠."
"그놈 때문에 내가 요새 죽을 맛이다. 카이산과 함께 카이두의 난을 진압해 정상적으로는 이제 그놈을 제거할 수 없게 되었어."
"몽골인들이 힘들다면 우리 고려인들이 나설 수 밖에요." 어느덧 경왕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일단 제가 이지부르카의 집에 머물 예정입니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하나 설마 저를 내쫒기야 하겠습니까? 거기에 머물며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가 감시하며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브르간이 맞장구를 쳤다. 이에 힘을 얻은 듯 경왕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졌다.
"신이 고려의 왕이기 때문에 그놈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대도의 몽골 황족들에게 소문을 퍼뜨릴겁니다. 그러면 이지부르카에 대한 평판도 다시 떨어질 것이고 그와 한통속인 카이산 등의 세력도 많이 꺾이겠지요."
"하지만..." 다시 브르간이 나섰다.
"이지부르카와 카이산은 카이두 전쟁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벌써 조정의 대다수 중신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형편입니다,.그래서 이제 더 어려운 싸움이 되었습니다."
- 브르간의 말이 나오자 대칸은 더욱 더 수심에 찬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경왕은 더욱 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신이 직접 이 대도로 온 이상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 말대로 경왕은 직접 폐주의 저택을 찾아갔다. 밖에 사냥을 나가있던 폐주는 이 소식을 듣자 같이 있던 카이산과 의논했다.
"형님, 도대체 경왕이 무슨 꿍꿍이속일까요? 고려의 정사를 내팽겨치고 대도까지 왔다면 이는 분명 대단한 결심을 한 듯 합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맨날 부딪치니 이는 분명 경왕이 나와의 마찰을 고의적으로 일으켜 나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수작일거다. 사실 허구헌날 이러는 나도 정말 지치는구나..."
폐주는 뭔가를 골똘이 생각하더니 곧 시종에게 서신을 써주어 집으로 보냈다.
- 폐주를 만나면 실컷 곯려주며 원한을 표출하려고 했던 경왕은 의외로 시종이 전해준 서찰을 읽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내용은 아버지 전하를 만나 자식의 예를 다하고자 했으나 공사다망하고 곧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을 정벌하는 준비 때문에 피치못해 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에 이 불효의 벌을 받겠으니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경왕은 폐주가 이미 자신의 속내를 훤히 꽤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버지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도 없지만 자식만큼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왕은 이를 갈며 폐주의 거처에 짐을 풀며 자신의 집 마냥 행세했다.
- 폐주는 다른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경왕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전같으면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 정벌전에 종군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경왕이 직접 대도로 온 이상 이는 불가했다. 그래서 1306년 카이산만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 드디어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카이산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물론 폐주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 폐주는 비밀리에 오고타이 정벌전에 개입하기도 하고 대도에 머물려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왕은 폐주의 행방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애를 태웠다. 경왕이 대도에 온 이후 폐주는 유령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칸이 폐주를 불러도 폐주는 이를 생까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를 역이용해 대칸과 경왕은 폐주가 황명도 무시하고 잠적했다고 비난했으나, 이미 폐주를 욕할 중신들은 거의 없었다.
- 오고타이 칸국의 멸망으로 카이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몽골제국 최고의 영웅이 되었고 후사가 없던 테무르 대칸에 이어 원나라의 대칸이 되리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브르간이 자신의 처가인 옹기라트 부족의 중립을 깨뜨리고 대칸의 편에 끌어들이자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옹기라트 부족은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의 부족으로 그동안의 중립을 깨고 대칸을 지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칸은 카이산이 오고타이 칸국 원정을 떠난 틈을 타고 폐주가 종적을 감춰버린 사이 전격적으로 종제인 아난다칸을 자신의 후계로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이제 양측의 황위를 둔 혈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 폐주는 다른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경왕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전같으면 카이산과 함께 오고타이 칸국 정벌전에 종군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경왕이 직접 대도로 온 이상 이는 불가했다. 그래서 1306년 카이산만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 칸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 드디어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카이산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러한 성공 뒤에는 물론 폐주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 폐주는 비밀리에 오고타이 정벌전에 개입하기도 하고 대도에 머물려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왕은 폐주의 행방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애를 태웠다. 경왕이 대도에 온 이후 폐주는 유령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칸이 폐주를 불러도 폐주는 이를 생까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를 역이용해 대칸과 경왕은 폐주가 황명도 무시하고 잠적했다고 비난했으나, 이미 폐주를 욕할 중신들은 거의 없었다.
- 오고타이 칸국의 멸망으로 카이산은 이제 명실상부한 몽골제국 최고의 영웅이 되었고 후사가 없던 테무르 대칸에 이어 원나라의 대칸이 되리라는 점은 이제 누구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브르간이 자신의 처가인 옹기라트 부족의 중립을 깨뜨리고 대칸의 편에 끌어들이자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옹기라트 부족은 칭기스칸의 아내 보르테의 부족으로 그동안의 중립을 깨고 대칸을 지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칸은 카이산이 오고타이 칸국 원정을 떠난 틈을 타고 폐주가 종적을 감춰버린 사이 전격적으로 종제인 아난다칸을 자신의 후계로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이제 양측의 황위를 둔 혈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 카이산의 반란 성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바로 옹기라트 부족의 내응 여부였다. 테무르 대칸의 황후인 브르간이 이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옹기라트 부족도 대칸편에 섰다. 카이산의 외가도 옹기라트 부족이었으나 브르간의 경우는 친가로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해도 넘어설 수 없는 현실 앞에 옹기라트 부족의 인내도 급격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폐주의 부탁을 받은 형식상 장인인 감마라칸의 설득으로 인해 극적으로 이 부족의 지지도 카이산쪽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 카이산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어느덧 대도 외곽에 진출해 순식간에 몽골제국의 수도를 겹겹이 포위했다. 테무르 대칸은 15만 대군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쨌든 수세에 몰린 입장이라 절대로 성문을 열고 나가 맞대응하지 않았다. 그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능력있는 장수들이 거의 다 카이산에게 붙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마지막 보루인 옹기라트 부족의 장군들을 믿고 버티고 있었으나 물론 틈만 나면 성문을 열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그냥 성문을 열고 카이산군을 맞으면 그만일 것 같지만 성문을 여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치 않았다. 테무르가 그래도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아 자기 심복들을 성문 요충지에 배치해 여차하면 대칸에게 알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대칸을 놓치면 카이산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낭패였다. 그는 반드시 대칸을 사로잡거나 여의치 않으면 죽여야만 했다. 그래야 후환을 깨끗이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원로들의 밀지를 받은 옹기라트 장수들은 폐주의 계략을 채택해 황궁 주변에 불을 놓고 성문의 심복들을 그쪽으로 향하게 했다. 처음에는 옹기라트 장수들보고 가서 불을 끄라고 했지만 이들이 미동도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썰물처럼 성벽에서 빠져나가 황궁으로 향했다.
- 대도 입성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은 야음을 틈타 이루어졌고 대칸 심복들이 성벽에서 철수해 황궁 근방까지 간 것을 신호로 옹기라트 부족들은 지체없이 성문을 열었고 카이산의 15만 기병의 대군은 무서운 속도로 대도 안으로 짓쳐나갔다. 동시에 숨어있던 반 테무르파의 모든 군사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안에서 호응했다. 카이산군 이외에 대도 안에서 수많은 군병들이 대칸 타도를 외치며 사방에서 나타나자 대칸의 15만 대병 역시 모래알처럼 흩어지기에 바빴다.
- 황궁의 방화를 진압하러 대칸파 장수들이 달려왔으나 이것은 연막전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배후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리며 대칸의 죽음을 외치며 황궁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온 천지에 진동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칸과 그 무리들은 한꺼번에 황궁에 갇힌 채 최후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대칸 테무르는 모든 상황을 깨닫자 가뜩이나 안 좋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피를 갑자기 한 움큼 토하더니 실신했다. 한참 뒤 깨어난 그는 황후 브르간에게 말했다.
"황후...이제 모든 것은 끝난 듯 하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카이산에게 목숨이라도 건져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브르간의 안색이 돌변했다.
"대칸...그렇게 카이산을 죽이려고 악을 쓰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비겁한 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제는 별다른 수가 없지 않소?"
"아마도 대칸은 운좋으면 사시겠지요. 허나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명 저들은 저는 죽이려고 할겁니다."
그러자 대칸은 아무말 없이 브르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미 눈에 초점이 없는게 거의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온 몸을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나더니 황궁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카이산에게 직접 항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낌새를 황후가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칸...제발 마지막 순간이라도 대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용납을 못합니다!"
그녀는 울먹거렸다. 지아비로서 황후의 목숨은 어찌되던 상관안하고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대칸의 추한 모습이기도 했다.
"대칸...절대로...절대로 나가시면 안됩니다. 그 문을 열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자 비틀거리며 나가던 대칸이 뒤를 돌아 황후를 쳐다봤다. 역시나 눈에 초점이 없는 것이 표정 또한 무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으헉...으으..."
대칸이 갑자기 문을 열다 말고 고꾸라졌다. 커다란 창이 자신의 배를 관통해 그 끝을 자신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칸은 입을 파르르 떨며 뭐라 입을 움직이다 말고 그대로 넘어져 즉사했다. 황후가 창을 던져 대칸을 죽인 것이다.
"대칸...이렇게라도 체통을 지켰으니 다행입니다." 황후가 눈물지으며 이미 숨이 끊어진 그에게 한 말이었다.
황후는 이제 황궁, 아니 대도를 빠져나가 후일을 기약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여전사가 들이닥쳤다. 아직도 폐주의 공식 왕후였던 제국대장공주 보다실리였다. 그녀는 자빠져 죽은 대칸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윽고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창을 대칸에게서 뽑아내며 황후 브르간에게 한 마디 던졌다.
"황후...아니 브르간...이거 니년이 한 짓 맞지?"
"뭐라?...네년이 감히 나한테..."
"훗, 곧 죽을 몸인데 니년이 아직도 황후 타령이냐?"
그말을 마치자마자 대칸을 뚫은 그 창을 곧바로 황후에 날렸다. 황후 역시 정통으로 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외마디를 지르며 쓰러져 즉사했다. 뒤이어 곧바로 들어온 감마라칸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자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 했던가? 역시 같은 창으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하하!"
대도에 입성한 카이산은 곧바로 황궁을 향했는데 저항하는 대칸파를 소탕하느라 조금 늦게 황궁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폐주 등과 합세하고 다란칸, 바얀 등과 함께 대칸과 황후가 최후를 맞은 그 방으로 들이닥쳤다. 감마라칸과 공주는 이미 그들을 기다린지 오래였다.
"브르간이 대칸을 해쳐서 우리가 브르간을 응징했소." 감마라칸이 상황 설명을 하자 카이산과 폐주는 한동안 주검이 된 대칸과 황후를 내려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정적이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친척이었다. 특히나 폐주는 어릴 적 할아버지 쿠빌라이 대칸의 무릎팍에서 같이 놀던 대칸이었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상대라도 막상 죽어버리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 카이산이 뒷수습을 하는 동안 폐주는 이제 자신의 숙제를 해결하러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경왕은 난리가 나자 자신의 신료들과 방법을 궁리했지만 온갖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빠져나가려다가 죽을까봐 그냥 폐주의 저택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온 폐주와 맞딱드린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부자지간이지만 폐주와 경왕 모두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한동안 적막감만 감돌 뿐이었다. 다만 폐주는 얼굴표정이 복잡했고 경왕은 사시나무 떨 듯이 두려움에 휩싸였을 뿐이었다. 이윽고 폐주는 경왕을 비롯 고려에서 옮겨 온 조정신료들을 통째로 모두 연금시켰다.
- 이리하여 서기 1307년 카이산은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대칸 테무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대칸이 되었으니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원나라 3대 대칸이자 황제인 '무종'이 바로 이 사람이다. 새 대칸은 모든 상황이 수습되고 열린 대연회에서 모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우리 대원제국은 짐과 이지부르카 형님의 것이다!"
- 그러자 바얀과 다란칸 등은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모두들 공감할 정도로 이번 정변에서 폐주의 역할은 지대했다. 또한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로서 그 정도 공치사는 들어도 마땅한 것이었다. 드디어 폐주는 고려의 왕으로 복귀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오랜 야망을 다시 재추진할 동력을 얻은 것이었다.
- 대원제국의 회녕왕 하야스(카이산)가 새로운 대칸이 되자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테무르파들은 남김없이 숙청이 되었으나 이번 정변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옹기라트 부족세력은 우대되었다. 이제 천하는 하야스칸과 그를 지지하던 바얀, 다란칸, 그리고 폐주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막후세력인 진왕 감마라칸 등이 있었다.
- 새로운 대칸이 공공석상에서 폐주가 자신과 함께 대원제국의 주인이라 천명한만큼 폐주로서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이제 자신의 숙적이던 테무르칸이 처치되었으니 자신은 마땅히 억울하게 참소받아 빼앗긴 고려왕의 지위를 되찾아 귀환해야만 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되어야 할 점이 남아있었다. 첫번째는 이전에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버지 경왕이 쿠빌라이 대칸의 딸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일파의 수장이라는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다시 아버지를 고려국 왕의 지위에서 끌어 내릴만한 명분이 부족했다. 물론 경왕이 테무르에게 붙어 자신의 환국을 막으려하고 나아가 죽이려하기까지 한 점에 따라 경왕을 쫒아내고 자신이 고려왕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 그러나 문제는 본국 고려에서의 정서였다. 당시 유교적인 관념이 꽤 뿌리깊게 남아있던 고려로서는 이유야 어땠던간에 아들이 아버지를 두 번이나 폐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동서고금에서도 듣지 못한 해괴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안의 온상인 아버지를 계속 놔둔다는 것은 우선 대칸부터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두번째로는 이전에 왕위에서 쫒겨난 경험에서도 보았듯이 이제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은 고려가 아닌 대도였다. 폐주 자신의 세계관 또한 그러했다. 더구나 대칸이 자신에게 대원제국의 실권을 주다시피 한 상황에서 다시 고려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굴러온 복이자 절호의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폐주는 이제 몽골 황족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자격으로 7번째의 자리를 보장받았다.
- 폐주가 현재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바로 대칸과 야속진. 그러므로 폐주는 자신의 고민거리를 대칸과도 긴밀히 상의했다. 대칸은 이 세상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폐주를 깎듯이 모셨다. 물론 그렇다고 폐주가 이전처럼 대칸을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는 존댓말이 오갔다. 그 결과 폐주가 일단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그 방식은 경왕이 스스로 하야하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방식이야 폐주의 입장에서도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부자지간이라는 관계가 문제인 것이지 스스로 하야하게 만드는 방법은 폐주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 작정할 정도로 독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권력 앞에서는 천륜도 무용지물이라는 점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일단 고려국왕의 지위를 회복하고 대도로 귀환하는 문제는 대칸과 차후 시간을 두고 논의하기로 했다.
- 이리하여 폐주는 1307년 4월 개선장군의 심정으로 경왕과 그 측근들 등 고려 조정을 한꺼번에 포로로 잡은 채 고려로 귀환길에 오른다. 폐주가 고려조정을 통째로 인질로 잡고 귀환하는데 당연히 저항이 있을리가 없었다. 고려의 황도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고려백성이 도열해 폐주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폐주가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행한 개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폐주에게서 다시금 희망을 본 것이었다.
- 개경에 도착한 폐주는 우선 경왕의 최고 측근이었던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을 끌어내었다. 이미 대칸에 위협이 되던 아난다칸이 살해되었듯이 일찌기 이들이 충동질한 서흥후 왕전 또한 폐주의 밀명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된 다음이었다. 살기등등한 폐주 앞에 끌려나온 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며 그저 목숨만을 구걸할 뿐이었다. 그러나 왕유소는 침묵을 지킨 채 무겁게 눈을 감고 있었다. 폐주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왕유소만 남겨둔 채 송린과 석천보는 형장으로 보냈다. 곧 이들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폐주에게 전달되었다.
"네가 나에 대한 원한으로 경왕에게 붙어 그동안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너를 다른 놈들과 같이 당장 죽이지 않은 것은 죽이기 전에 너의 죄악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자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며 왕유소는 말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무슨 뜸을 그리 들인다는 말이냐? 이미 난 모든 것을 잃어 두려울 것이 없는 몸이다. 다만 네놈을 없애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일 뿐..."
"네놈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그토록 막대한 부귀영화를 누렸으면서 백성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느냐?"
"내가 설령 그런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해도 너하고는 대체 무슨 상관이냐?"
"아직도 네 죄를 뉘우치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러자 왕유소는 껄껄 웃으며 얼굴에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이보게 젓비린내나는 젊은 친구..."
그러자 폐주를 옹위하던 주위에서는 술렁거리며 왕유소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다. 반말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상 고려의 왕인 폐주에게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금도를 넘는 짓거리였기 때문이다. 폐주는 이제 30대 초반이었으니 60대인 왕유소가 그러는 것은 나이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폐주는 그 모욕을 참으며 왕유소의 말을 경청했다.
"세상이 있은 이래 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고 가진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일쎄. 더구나 네놈은 왕으로써 그야말로 가진 자의 가장 위가 아니겠는가? 자네가 개혁을 한답시고 하는 바람에 난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다. 다른 가진 놈들은 거의 건드리지 못하고 여전히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보는가?"
"나의 치세가 중간에 참소로 인해 멈추어 개혁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네가 말한대로다. 개혁이 끝까지 갔더라면 너 같은 악질 토호들은 모두 응징되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복위하면 못했던 일들을 끝낼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너를 죽이는 것이다."
"백성들은 어차피 개돼지일 뿐이다. 적당히 먹고살게 해주면 주인이 누구인지 상관을 안한단 말이다. 이것이 그들의 천성이란 말이다. 네가 아직 젊어 세상을 모르는가본데 세상은 네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내가 죽어도 다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쥐어짜는 놈들은 나오게 되어있다. 백성들이 너의 개혁에 환호한다?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기 때문에 너에게 환호하는 것이겠지. 결국 백성들도 수가 틀리면 언제든지 네 등에 비수를 꽂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음..."
폐주는 도저히 말이 안통한다고 여겼음인지 손짓으로 왕유소를 처형장으로 보냈다.
- 이리하여 폐주는 아버지경왕의 측근세력을 두번째로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두번 다시 경왕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다 잘라놔야 할 심산이었다. 자기가 한 짓이 있는지라 경왕은 연금 상태에서 거의 반미치광이 노인으로 변해갔다. 어차피 제정신이 아닌지라 폐주가 상대해 봐야 시간 낭비였다. 이윽고 1308년 7월 경왕은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뒷말이 무성했다. 폐주가 생각처럼 빨리 안 죽어 죽였다느니, 이전에 내통한 혐의가 있는 폐주의 왕후 보다시리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였다느니 하는 등이었다. 경왕의 장례는 졸속으로 빨리 행해지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다시 고려왕이 된 이지부르카는 속으로 뇌까렸다.
(아버지...비록 이승에서는 악연이었지만 저승에서 눈 똑바로 보고 또 보시옵소서. 이 이지부르카...아니 왕장의 꿈이 어떻게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리는지를 말이옵니다...)
- 하야스칸이 대원제국의 새로운 대칸에 오르자, 이제 폐주는 당장이라도 경왕을 폐하고 자신이 다시 고려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경왕이 죽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윽고 경왕이 죽자 폐주가 다시 복위하니 그가 바로 선왕이다.
- 선왕은 왕위에 복귀하자 이전에 멈췄던 여러가지 개혁을 재추진했다. 그는 경왕때 일본원정이나 합단의 난으로 안그래도 오랜 몽골과의 항쟁으로 쑥대밭으로 되어있던 고려가 한층 더 피폐해지고 백성들도 모두 거지꼴을 못 면하고 있던 사정을 잘 알았기에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세자때부터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 그가 이전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선포한 30여항의 개혁안은 고려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고려병'을 전면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뜻을 담았는데,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농상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이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 중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의 소금 전매제를 금지시켜 백성들에게 폭리를 취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았다는 데 있다. 또한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독점한 토지들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거나 나눠주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도모했다.
- 왕의 목적은 일단 고려를 안정시켜 백성들에게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야망이 대륙에 있다 해도 자신이 왕으로 있는 고려는 자신의 중요한 기반이었고 고려를 바탕으로 자신의 발언권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쿠빌라이 대칸의 외손자라는 혈통이 있다해도 자신의 반쪽은 고려인이었으며 더구나 부계였기 때문에 이것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만큼은 고려에서 자신의 개혁이 완전히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끝을 보고자 할 참이었다.
- 선왕이 고려에서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재추진하는 동안 그는 꾸준히 대도의 대칸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소통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일종의 인터넷 이멜의 역할을 했다. 당시 몽골의 발달된 역참제 덕에, 또한 개경와 대도의 거리가 생각처럼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1주일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형님, 제 옆에 형님이 없으니 뭔가 공허합니다. 하루속히 몽골 황실의 어른으로서 대도로 와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대칸,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지금 고려에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마무리되는대로 대도로 들어가 대칸을 보좌하겠습니다>
<대원제국이 저와 형님의 것이라는 제 선언을 벌써 잊으신겁니까? 세상의 중심으로 오셔서 제국을 돌보셔야 하는 것이 곧 형님의 나라 고려를 돕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대칸>
<바얀과 다란칸 등만으로는 제 통치에 문제가 많습니다. 더욱이 이번에 공을 세운 옹기라트 부족과 감마라칸의 압박도 상당하구요. 여기 대도의 정세도 한시가 급합니다. 형님이 빨리 오셔야 중심을 잡고 보다 제가 안정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려야 대도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대도에서 다스리는거나 개경에서 하는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안정이 먼저입니다. 형님>
- 대칸이 매주마다 사람을 보내 대도로 들어오라고 압력을 넣으니 선왕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칸이 계속 대도로 오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대칸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선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선왕은 대칸에게 제국의 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 숙고 끝에 선왕은 일단 대도로 가서 직접 대칸과 상의하기로 했다. 복위 후 불과 2개월만에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에 경왕처럼 온 조정신료를 대동하고 대도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숙부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하게 하고 대도로 길을 떠났다.
"이렇게 닥달하시면 애당초 왜 저를 고려로 보내셨습니까?"
선왕이 대칸에게 한 말이었다. 불경스러운 언사였으나 선왕과 대칸 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그렇게 여기 대도 사정이 않 좋습니까?"
"남방에서도, 티벳에서도, 북쪽 초원지대에서도 모두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안으로는 형님이 안 계신 사이에 감마라칸과 옹기라트 부족 원로들이 연합해 바얀과 다란칸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형님이 여기 계셔서 절 좀 도와주시면 제가 안심이 될 터인데 말이지요."
"저도 제 앞가림을 할 뭔가가 필요해 일단 고려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한 것입니다."
"제가 형님께 뭘 더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제가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고 고려국왕이지만 이제는 대칸이 계신 이상 보다 확실한 지위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 선왕이 거기까지 말하자 대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건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눈빛이어서 선왕을 내심 당황하게 했다. 권력이란 결국 서로간의 신의마저 바꾸어 놓을 것인가...? 그러나 선왕은 이제와서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옛 고구려의 땅을 영지로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자 대칸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형님...형님은 이제 저와 함께 대원제국을 다 가지신거나 다름없고 이미 고려를 다스리고 있는데 새삼 옛 고구려의 땅이 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입니다. 고려왕으로서 옛 조상의 나라에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현재까지 대칸이 임명해 관료로서 다스린다면 모를까...그토록 거대한 영토를 봉한 예는 칭기스칸 이래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일칸국, 킵챠크 한국 이후로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미 오고타이 칸국은 우리손으로 끝장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외로 만들어 주십시오." 선왕의 목소리도 단호해졌다. 이전에 보지 못한 선왕의 돌출행동에 대칸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선왕은 표정도 단호하게 지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야스...이건 네 형님으로서 부탁하는 거다...너와 나 사이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더냐? 우리는 한 핏줄인데 말이다."
갑자기 선왕이 반말투가 되었으나 대칸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씀하십시오...형님."
"나는 큰 꿈이 있다. 비록 외가는 몽골 황족에 닿아있으나 부계로는 나는 엄연한 고려의 황실 혈통이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항상 북쪽 땅을 염원해왔다. 대제국 고구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일 칸국, 킵차크 칸국 등은 모두 대원제국에 복속해있지만 엄연히 하나의 제국들이 아니더냐? 나는 그것을 뛰어넘고자 한다."
대칸은 놀라기는 커녕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고구려 제국의 땅을 내가 받아서 나만의 제국을 세우고자 한다. 그래서 대원제국과 영원한 우호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고려와 몽골 황실 양쪽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어..."
"고구려 이야기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쿠빌라이 칸께서도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을 기억하실 정도이고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칭기스칸 할아버지의 먼 조상도 고구려와 발해에 닿아 있다는 전설도 있구요..."
"그래 동방의 그 전설적인 제국 고구려 말이다...결국 몽골도 고구려와 전혀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사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고구려 땅의 지배자가 되도 명분적으로나 아무 문제가 없다.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들은 대칸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형님이 대원제국을 위해 세우신 공이 있고 지위로 보나 제가 그런 파격을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허나 또 하나의 문제는 이미 그 땅은 칭기스칸의 외가쪽 부족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이 완전히 그 땅을 차지하실 수는 없을겁니다. 그들을 평화적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또다시 대원제국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고 이는 제가 절대로 원치않는 상황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당장 그 땅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달라는건 아니다. 일단 나를 봉해주고 차츰 내 세력을 넓힐 작정이다."
"그렇다면..." 대칸은 잠시 운을 떼다가 말했다. "형님을 심양왕으로 봉하면 어떻겠습니까? 자 이제 만족하시고 제 곁에서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심양왕..."
"옛 고구려 땅의 지배자를 뜻하는 봉호입니다."
- 선왕은 이리하여 '심양왕'이라는 봉호를 받고 지금의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땅의 지배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더더욱 고려에만 머물 수 있는 구실도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외교권도 없는 고려왕으로 내정간섭을 받으며 사느니 고려를 실제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대도이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며 실력자로 행세하는 것이 고려를 위해서도 한층 낫다고 생각했다.
- 심양왕이 된 선왕은 만주 일대로 행차해 그 드넓은 벌판을 말달리며 옛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미 심양왕의 명성을 들은 만주 일대의 몽골 군벌들은 스스로 찾아와 심양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선왕은 그냥 대도에 눌러앉아 심양왕으로서 만주와 한반도 양쪽을 다 다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고려만을 염두에 둔 고려땅의 조정대신들에게 이것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의 전하가 고려에 안 계시고 대도에서 고려를 다스린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 어찌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반발이 일파만파가 되어 고려 조정에 퍼져나갔다. 비록 명분은 심양왕이 되어 만주 일대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니 고려와 만주를 다 다스리기 위해서는 대도에 있는 것이 합당하다는 선왕의 교지가 있었지만 가뜩이나 이전 경왕때부터 피폐해있던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왕이 고려에 있어야 고려의 내정에 집중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 더욱이 고려나 심양왕 자신에 있어서 심각했던 사실은 심양왕이 고려에 있는 동안 야심차게 추진했던 일련의 개혁정책들이 계속적인 상황변화로 인해 꾸준히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심양왕도 이 점을 우려해 대칸의 소환명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급격한 개혁으로 인해 권문세족 등 기득권층이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는데 자신이 고려에 부재하면 이들이 준동하기가 한층 손쉬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심양왕은 자신이 대원제국의 실력자가 된 현 시국에서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동방의 작은 소국 고려의 왕이 아니라 대원제국의 일부분인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등의 지위를 능가하는 동방의 대제국 고구려와 고려를 합치는 큰 야망을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려 조야의 반발은 그의 입장에서는 한심하게 여겨졌다. 물론 고려 백성의 민생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보다 큰 중심에 있으면 장기적으로 자신의 개혁 역시 보다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했기 떄문에 고려의 인내력이 요구되는 시점이었지만 그의 야망 전체를 내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설득 역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 심양왕의 이러한 큰 야망은 오직 대칸과 자신만이 아는 것이었기에 대원제국의 나머지 실력자들도 역시 돌아가는 정세가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제는 심양왕의 견제세력으로 떠오른 바얀 등은 당시 탈탈 대승상을 움직여 심양왕을 고려로 환국시켜 고려왕의 임무를 다 하게 해야 한다고 대칸에게 건의했으나 대칸은 오히려 '심양왕'의 작위를 '심왕'으로 격상함으로써 이들의 불만을 제어했다.
- 이제 '심왕'이 된 선왕은 더욱 더 자신감이 생겨 고려의 신하들에게 대도로 와서 고려의 정사를 아뢰라는 이른바 '전지정치'를 실행하도록 한다. 이는 물론 여러모로 무리한 정치라는 점은 그 누구보다도 심왕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볼 때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정책으로 자신이 중심을 잡고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굳게 심왕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단기적으로는 고려 조정을 큰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 특히나 심왕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있던 고려 대신들은 심왕의 이런 행동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전승 최유엄은 직접 대도로 찾아가 심왕과의 독대를 청했다. 그를 만난 심왕은 일단 온화한 미소로 대했다.
"먼 길을 수고스럽게 오게 해서 미안하오."
"전하, 전하께서는 고려의 전하가 맞사옵니까?"
다짜고짜 극언을 퍼붓는 최유엄에게 심왕은 약간 당황했지만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럼 왜 고려에 아니계시고 이곳 대도에 계시는 것이옵니까?"
"내가 조서로 이미 신하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을텐데...?"
"신 등은 이해가 안되옵니다. 물론 대칸이 전하에 대한 신망이 두터워 요동 일대를 관할하는 직책을 부여하셨음은 우리 고려로서도 크나큰 경사이고 어찌보면 태조 폐하 이래로 국시였던 북벌의 완성이기도 한 실로 천 년의 쾌거이옵니다. 그러나 개경에 계시면서도 얼마든지 심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실 수 있사옵니다. 그런데 고려의 지존께서 이곳 대도에 계시다니요? 이건 신 등이 일찌기 들은바 없는 괴이한 행동이십니다."
"대칸께서 이곳에 머물러 고려와 요동을 동시에 관할하라 간곡히 부탁하시어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소. 그러나 대도에 머무르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오. 과인도 다 생각이 있어 이러는 것이니 경 등은 부디 제발 과인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전하가 고려에 아니계셔서 그동안 전하의 개혁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헛된 희망만 잔뜩 넣으시고 오히려 더 큰 좌절감만 안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군왕이 취할 행동이 못되는 것입니다."
"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개혁은 여기 대도에서도 얼마든지 교지를 내림으로써 계속 추진될 수 있다고 보오. 오히려 과인이 대도에 있음으로써 고려의 안녕이 더욱 더 보장받는 것이오. 지금 현재 세상의 힘의 중심은 여기 대도요. 그리고 여기 대도에서 과인은 고려에 있을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고 결국 그 혜택은 고려에게 돌아가는 것이오. 그러한 이치를 경은 진정 이해 못하겠소?"
그러자 최유엄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또 하나의 독설을 내뱉었다.
"지금 고려에서는 이상한 말이 돌고 있사옵니다."
심왕은 아무 대답도 안한 채 최유엄을 노려보기만 했다.
"전하께서 실은 경왕 전하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입니다."
이 말을 듣자 아무러한 심왕의 얼굴에 노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뭣이?"
"물론 신 등은 그런 참담한 말을 믿지 않습니다. 분명 이는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속 대도에 머무르시면 이런 참언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몽골인이기 때문에 고려에 아무런 미련이 없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최유엄의 무엄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심왕 주변의 측근들이 최유엄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심왕이 만류했다. 그는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최유엄을 내쳤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 1년이 지나도록 심왕이 고려로 귀환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려 조야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어 나갔다. 심왕이 경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유언비어는 이미 백성들까지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심지어 왕이 대도에서 급사했는데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까지 돌았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 처음에는 이런 유언비어가 심왕의 정적이었던 권문세족들이 지어낸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 입장에서는 심왕이 대도에 있어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현 상황이 오히려 좋기 때문에 일부러 심왕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의 개혁파들이...?)
- 심왕은 고려에서 돌고 있는 불경한 소문들은 자신의 귀국을 강제하기 위한 개혁파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내가 돌아와 헛소문을 잠재우고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두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에 대한 대책이 나름 시급했지만 제국의 정사를 대칸과 함께 돌보기도 바쁜 몸이었기 때문에 잠시 이를 미루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심왕 인생의 최대 실수로 남게 된다.
- 이제 '고려심왕'이라는 직책으로 대원제국을 대칸과 동등하게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심왕은 그야말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권력이 그만한만큼 각종 대소사를 챙기느라 정말 하루가 짧은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새로운 대칸 이후 그를 지지했던 분파들간의 정쟁 또한 중재하거나 무마하는 역할도 그의 몫이었다. 그런 심왕에게 고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개혁파들의 불만 소식은 그야말로 그에게는 지엽적인 관심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 대원제국의 중심에 있는 심왕에게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고려의 입장에선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심왕의 복위로 그토록 염원하던 고려개혁 나아가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혁파들의 배신감은 이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심왕이 고려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고려를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알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고심끝에 심왕이 고려의 정사를 대행시켰던 제안군 왕숙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왕숙에게 먼저 넌지시 심왕에게 아뢰어 고려왕의 자리를 양위해달라고 하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숙은 펄쩍 뛰었다. 왕숙은 개혁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왕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숙은 이 사실을 대도의 심왕에게 고할까하다가 그래봤자 한층 고려의 혼란만 가중된다고 생각하고 이들 개혁파 신료들을 넌지시 타이르고 없던 일로 했다.
- 왕숙에 대한 공작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이들은 심왕의 장남인 왕감에게 접근했다. 그때 왕감은 심왕이 다른 가족들과 함께 대도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자신이 고려를 비워두어 여론이 안 좋을 것을 미리 예견한 심왕이 장차 자신의 뒤를 이을 왕감을 고려에 남겨두어 그나마 불만을 최소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개혁파들이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이전부터 왕감은 이미 부왕이 고려를 비워두는 것에 나름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10대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는 여러 위기상황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고려의 개혁파들은 심왕의 귀국을 바라는 다른 신료들과 힘을 합쳐 왕감을 고려왕으로 내세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어차피 자기 핏줄이니 고려왕으로 세우고 심왕은 대도에서 계속 권력을 휘둘러도 괜찮을 것이라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심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 이들은 부왕의 정책에 비판적인 왕감을 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자신들이 찾던 고려왕의 재목이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왕감이 고려왕이 되어 제대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대도의 심왕이 자신의 맏아들을 지도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감을 데리고 고려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비교적 궁궐에서 곱게 자란 왕감은 막상 바깥세상의 지옥도를 보자 더욱 충격을 먹었다.
"이것이 고려의 현실이옵니다. 저하..."
"그렇다면 이런 고려를 놔두고 아바마마는 도대체 대도에서 뭘 하신다는 말인가...?"
"소신들의 말이 그말이옵니다. 고려왕이신 전하께서는 마땅히 환국하시어 못다한 개혁을 완수하셔야 하는 것이 순리이옵니다. 그런데 대도에서 고려왕으로서 다른 일에만 몰두하고 계시니 이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전하께서 너무 완강하시기 때문에 소신들은 대신 고려를 다스릴 새로운 왕을 저하께서 맡아달라 굽어 통촉하는 것이옵니다."
"부왕이 계신데 어찌 내가 감히 고려왕의 자리를 탐하겠소? 일단 대도로 가서 내가 직접 아뢰어보리다."
- 이렇게 해서 대도로 부왕을 찾아간 왕감은 고려의 참혹한 현실을 자세히 아뢰며 환국을 종용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아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심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또한 그런 고려의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때가 있음을 알기에 인내하는 것일 뿐이었다.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세상사는 네 생각처럼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란다. 때로 군왕이란 멀리 보고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을 겪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도 고려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차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오나 아바마마...지금 고려는 반드시 아바마마가 계셔야 하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고려의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가 안계신 고려는 탐욕스러운 권문세가들이 그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고 있습니다. 제안공 왕숙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이상 고려를 방치하지 마옵소서!"
"내가 한 말 못 들었느냐? 못난놈같으니...그렇게 안목이 좁아서야 내가 어떻게 대사를 장차 너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 못난 놈 같으니...!"
- 심왕의 꾸지람을 들은 왕감은 한숨을 내쉬며 대도를 떠나 고려로 돌아왔다. 그러자 개혁파 신료들이 물어왔다.
"뭐라 하십니까?"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조금만 더 참으라 하십니다. 너무 오래 고려를 떠나셔서 이곳 사정을 전혀 모르시나 보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 판국인데 말이요..."
"그렇다면 이제 저하께서 결단하셔야 합니다."
"무얼 말이요..."
"고려 백성들을 위해...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시는 것 말이옵니다."
"나보고 아바마마를 배신하고 고려의 왕이 되라는 소리요? 그건..."
"일찌기 심왕 전하께서도 정의를 위해 경왕 전하와 척을 지시지 않으셨습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 그러나 왕감은 아직도 확실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와중에 고려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이 심왕의 정적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고려에 있는 권문세족들, 그리고 대도에 있는 바얀 등의 세력들...이들은 왕감의 이런 모습에서 심왕을 궁지에 몰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 고려심왕과 고려에 남아있는 세자 왕감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테무르 대칸을 몰아낼때까지는 심왕과 동지였던 바얀과 다란칸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아무리 종친이라고는 해도 하야스 대칸의 심왕에 대한 신임이 너무 과도하다고 느끼고 서로 공조하며 심왕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심왕의 장인이었던 정계의 거물 감마라칸까지도 끌어들일 생각을 했으나 아무리 감마라칸이 기회주의자라도 기본적으로 심왕의 편을 들까봐 망설이고 있었다.
- 대도까지 찾아가 부왕을 설득하려 했던 세자의 시도는 예상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파들은 어린 세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심왕의 말빨에 상대가 안되리라는 점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만 그래도 그를 대도로 보낸 이유는 자꾸 틈을 벌이게 하여 세자가 나중에 자신들의 말을 더 잘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자는 단순히 고려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부왕의 정책에 비판적이었고 간언을 한 것이었으나 이들 개혁파들의 계획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던 것이다.
- 대도로 직접 쳐들어가 심왕에게 대들었던 최유엄 등도 이미 강경 개혁파의 일원이었음은 물론이고 이제 이들은 속도를 앞당기기 위하여 김의중이라는 인물을 세자에 붙여놓게 되었다. 그의 임무는 세자를 수행해 자주 고려의 현실과 신음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게 하여 나라를 생각하는 세자의 조급함을 이윽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표출하게 하려는 물밑작업이었다.
- 세자가 대도까지 직접 찾아와 귀환을 종용하고 최유엄이 찾아와 자신에게 무례를 저지르며 귀환을 촉구하자 아무러한 심왕도 고려를 너무 비우면 위험할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래서 계속 자신의 간자들을 보내 국내 정세를 파악하게 하고 개혁파와 권문세족들의 동향을 계속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얀과 다란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심왕을 최대한 대도에 묶어놓고 그 사이에 세자로 하여금 고려에서 변란을 일으키게 하여 심왕의 평판을 최대한으로 떨어뜨린 다음에 고려로 쫒아 내버려 권좌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재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으나 심왕은 이미 경왕과의 골육상쟁이라는 주홍글씨를 이미 가지고 있어서 또 한번 이번에는 아들과의 골육상쟁을 한다면 그의 운신에 치명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바얀은 은밀히 자신과 선이 닿아있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통해 심왕이 보낸 간자들을 잡아 매수하게 하여 고려정세의 심각성을 실제보다 훨씬 축소시켜 보고하게 한다. 그래서 심왕은 세자와 개혁파들의 불평이 있으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권문세족들도 마찬가지라는 종합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심왕은 아직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 대원제국과 심왕으로서의 정무에 당분간 열중하게 된다. 권문세족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심왕의 귀국을 늦추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 부분에서 바얀과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나 심왕이 정치적으로 매장당한 다음에 고려로 돌아온다는 바얀의 후반 계획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개혁파들은 세자에게 그동안 고려의 위기 상황을 실제보다 엄청나게 과장해 세자에게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세자의 인내심도 그만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아직 어린 나이라 차분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덜 된 점도 작용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판단한 개혁파들은 어느 날 왕궁의 텅빈 옥좌가 놓여있는 대전으로 세자를 안내한다.
"아바마마도 안 계신데 내가 왜 여기 와야 하오?"
어리둥절한 세자에게 김의중은 아뢰었다.
"이미 심왕께서는 고려를 버리셨습니다. 이제 세자마마께서 고려의 옥좌에 오르시어 고려의 정사를 돌보셔야 하옵니다. 고려에 계신 세자마마야말로 고려의 참된 군왕이시기 때문이옵니다."
그러자 도열해있던 개혁파들은 한결같이 외쳤다.
"천세 천세 천천세!!"
세자는 당황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있었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경들은 어찌 처신하려고 이러시오? 이러지들 마시오..."
개혁파들을 대표해 그들의 입이 된 김의중은 이에 대답했다.
"심왕께서는 워낙 제국의 정사일로 바쁘시어 고려에 못 오신다는 점은 저희들도 이해하옵니다. 그러나 세자마마께서도 보셨듯이 작금 고려의 사정은 너무 안좋사옵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더 이상 이 나라에 군주가 안 계시오면 5백년 고려의 사직은 망하옵니다. 이에 신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세자마마를 임시로 왕위에 올리고 심왕의 회답을 기다리자는 것이옵니다. 또한 세자마마는 심왕 전하에 이어 당연히 고려의 왕이 되실 몸이옵니다. 현 시국이 수상하니 심왕께서도 크게 이해하시고 저하에게 고려를 맡기실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 마옵소서. 자 오르시옵소서."
- 세자는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서서히 옥좌의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게 심호홉을 한 다음 고려의 왕좌에 앉았다. 그러자 개혁파들은 다시 한번 천천세를 외치며 신왕의 즉위를 경하했다. 그리고 심왕의 조서라며 위조해 문무백관에게 뿌리고 신왕의 즉위를 정당화했다. 이어 재빠르게 고려의 모든 권력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심왕이 머뭇거린 사이에 말하자면 고려에서 개혁파들이 주동해 세자 왕감을 왕위에 올리는 정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 얼마 후 이 소식을 들은 제안군 왕숙은 자신이 모을 수 있는 군사를 집결시키려고 했으나 바얀의 공작으로 이제 완전히 심왕을 고려에 들어오는 것을 사생결단으로 막기로 한 권문세족들까지 개혁파들과 힘을 합친 결과 오히려 왕숙이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고려 국경 밖으로 내쫒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문세족들과 개혁파들은 서로 상극이었으나 일단 심왕이라는 공동의 적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 배를 타게 된 것이었다.
- 곧바로 대도로 달려온 왕숙에 의해 사태의 전말을 들은 심왕은 경악했다. 자신의 친아들...그것도 장남이 자신의 뒤통수를 이렇게 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받은 보고들도 모두 가짜였음은 더욱 충격이었다. 자신이 오래 대도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려의 기반이 사실상 허무할 정도로 전무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허기사 고려왕이면서도 머문 기간이 얼마 되지도 않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 왕숙이 대도로 도망쳐 온 지 불과 하루 뒤, 이번에는 고려 개경에서 아들 왕감의 서신이 도착했다.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하고자 충신들이 종용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고려의 임시 왕 자리에 올라 급하게나마 백성들을 구할 정사를 펴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아바마마인 심왕은 부디 이를 이해하고 이렇게 된 이상 고려를 자신에게 임시로 맡겨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자 심왕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런 천하의 바보천치같은 놈...내 여태껏 이런 놈을 세자로 앉히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 심왕은 울부짖으며 서신을 갈기발기 찢어 내동댕이쳤다. 자신이 대도에서 행세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고려왕이었는데 그걸 세자가 앗아 가버리면 바얀 등 정적에게 좋은 빌미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하늘을 우러러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심왕은 눈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항상 위기에서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 심왕이 명색이 왕으로 있는 고려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아들인 세자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삽시간에 대도에도 퍼졌다. 사람들은 심왕이 아버지인 경왕과도 다투고, 부인인 보다시리와도 무늬만 부부이고한데 이제 친아들까지도 등을 돌렸다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바얀 등 반심왕파는 이러한 여론을 한층 부정적으로 퍼뜨렸다.
(정말로 난 저주받은 팔자던가...?)
- 자신의 발판이던 고려에서 정변이 터지고 자신의 명성이 또다시 곤두박질치는 최악의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세자의 친모였던 야속진은 자신이 직접 고려로 가서 세자를 설득하겠다고 심왕에게 진언했으나 심왕은 소용없을 것이라고 단칼에 이를 물리쳤다. 세자의 성격을 어릴적부터 잘 아는 심왕은 고집세고 순수한 세자가 이지경까지 왔으면 대의를 내세워 쉽게 아무리 어머니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속진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모정을 내세워 한 번 시도라도 해볼 요량이었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와중에 보다시리가 심왕을 찾아왔다.
"부인, 어쩐 일이오?" 이미 거처가 서로 다른 사실상 남남이었기 때문에 보다시리를 대하는 심왕은 냉랭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어찌하실 셈입니까?"
"일체 연락이 없던 그대가 내 아들놈의 일로 직접 찾아오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구려."
심왕의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제가 부친을 설득해 조정의 여론을 움직여 고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와드릴까 합니다."
심왕은 이 말에 귀가 송곳했으나 이내 되물었다. 그만큼 이들의 관계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이 되버린지 오래였다.
"댓가는?"
"당신이 항상 품속에 품고 있는 야속진이라는 그 계집을 세자에게 보내십시오."
"그게 무슨 뜻이요?"
"제가 여기 대도의 여론을 돌려놓을테니 그녀를 자기 자식에게 보내 설득하라는 겁니다."
- 심왕은 금새 보다시리의 의도를 알아챘다. 야속진을 자신에게서 떼어놓고 고려로 보내면 손을 써서 그녀를 죽여버리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심왕은 보다시리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잔인한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미 부인에게도 말해놓았지만 세자는 부인이 간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돌릴 아이가 아니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써볼까 하오."
그러자 보다시리는 벌컥 화를 냈다.
"부인...부인이라니요? 저는 실제로 어떻든간에 전하의 엄연한 정실부인입니다. 그따위 천한 계집년을 부인이라 칭하시다니오?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좋도록 생각하시오."
보다시리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안정을 되찾았다. 심왕은 보다시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부인, 지금은 부인과 장인인 감마라칸의 도움이 필요하오. 장인 어른께 잘 말씀해 주시오. 조만간 조정에서 내가 소명할 기회가 있으니 말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이것만은 명심하세요. 제 앞에서 함부로 그년을 부인이라 칭하지 마세요. 전하께 부인은 오직 저 하나입니다. 저는 제가 죽을때까지 전하의 부인으로 남을겁니다. 실제로는 부부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 고려의 정변 소식이 퍼지자 난감해진 것은 대칸 하야스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심왕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바얀등이 주도하는 여론은 심왕에 매우 비판적이 되버리고 나름 심왕도 조정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았지만 이런 여론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바얀 등은 고려의 세자가 정변을 일으켰는데 당연히 아비인 심왕이 가서 이를 진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이것이 맞는 말이었으나 심왕의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서 여론에 밀려 고려로 돌아가면 다시 여론에 밀려 영원히 대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야망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대칸 입장에서도 믿을 수 있는 심왕이 곁에 없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내심 심왕을 응원하고 있었다.
- 결국 조정에서 심왕 등 모든 대신들이 총출동해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바얀과 다란칸 등은 심왕이 마땅히 고려로 귀환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하며 이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인데 심왕이 안가고자 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대칸은 심왕을 거들어 심왕은 고려왕뿐만 아니라 만주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에만 머물수 없다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으나 바얀 등은 고려에 잠시 가서 정변을 진압하고 오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냐고 따졌다. 그러자 한 발 나서며 바얀에게 묻는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바얀 대장군은 심왕이 고려에 갔다온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소?"
감마라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려에 대장군의 눈과 귀가 깔려있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오. 그렇게 심왕을 고려로 내쫒고 싶어하는데 잠시 정변을 진압하고 심왕을 다시 대도로 돌아오게 놔두겠다는 보장을 할 수 있느냐 말이오?"
"심왕이 반란을 진압하고 오는 것인데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다면 순리에 맡기면 그만인데 그토록 심왕이 고려로 가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자식의 반란을 아비가 진압하도록 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심왕은 고려왕이기도 합니다."
"당연? 그게 과연 좋은 모양새가 되겠소? 더구나 심왕은 이미 경왕과도 같은 골육상쟁을 겪은 바 있소. 또다시 그런 수모를 겪게 하자는 말이오? 도대체 바얀 당신의 의도가 뭐요?"
- 감마라칸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아무러한 바얀도 대단히 궁색해지기 시작했다. 눈치빠른 대칸 하야스는 며칠 동안 정회하기로 하고 심왕과 단둘이 만나 사안을 논의했다.
"잠시 정회했으나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형님. 바얀이 반격하기 전에 빨리 고려의 정변을 진압해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이 고려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두신 묘안이 있습니까?"
"있기는 하지만...이것 역시 세자의 반란만큼이나 앞으로 나의 전정에 치명적일 수 있어서 고민이다. 특히나 고려왕으로서의 나의 위치에 있어서 말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칸. 저에게 하루의 말미만 주십시오.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 심왕의 눈빛은 흔들렸다. 과연 그의 고육지책은 무엇일까?
- 대칸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날 심왕은 초췌한 얼굴로 황궁을 찾아갔다. 주위를 모두 물린 대칸은 심왕에게 매우 궁금하다는듯이 물어봤다.
"그래, 형님. 무슨 복안이 있으신 것입니까?"
- 그래도 누군가 엿들을까봐 심왕은 대칸에게 가까이가 귓속말로 뭔가를 소곤거렸다. 그러자 대칸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해졌다.
"그렇게 한다면 고려의 난리를 수습할수는 있겠지만 형님의 고려에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방치한다면 난 고려에서의 모든 기반을 잃게 된다.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음..."
- 대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칸으로서 명하노니 심왕은 그대로 계책을 시행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칸!"
- 한편 대도로 서신을 보낸 세자 왕감은 부왕인 심왕으로부터 아무런 전갈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화가 난 세자는 김의중에게 따져 물었다.
"그대는 내가 임시로 고려왕이 되면 심왕께서 모든 것을 납득하시고 용인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것이오?"
"전하, 침착하시옵소서. 조만간 곧 심왕께서 무슨 하교가 있으실 것입니다. 게다가 설사 일이 우리 뜻대로 잘 안풀린다 해도 이미 고려의 모든 힘은 우리에게 있사옵니다. 도대체 두려워 하실 것이 무엇이옵니까?"
"부왕의 허락도 안받고 오직 나의 우국충정만으로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이제 세상이 나를 천하의 불효자라 일컬으면 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게다가 부왕께서는 대원제국의 실력자이신데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해 불바다로 만드시면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하느니 못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오?"
"전하, 전하께서는 부왕의 친아들...그것도 장남이시옵니다. 설마 심왕께서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전하에게 해라도 끼치시겠사옵니까? 걱정마시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방안을 신등과 논의하시옵소서."
"개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권문세족들과 힘을 합쳐 가까스로 아바마마를 제어하고 있는데 저들을 막고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것이오?"
세자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김의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비상시국에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지금 고려에서 힘의 관건은 군사이옵니다. 권문세족들의 사병이 문제인데 지금 우리 사람들이 조정의 군권을 장악해나가고 있습니다. 일단 권문세족들과 제휴한 것은 일시적으로 저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이었고 저들을 한번에 쓸어버려야 마마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개혁...심왕께서도 쉽사리 추진하지 못하신 개혁을 전하의 손으로 이룩해내실 수 있습니다. 심왕 전하께서도 권문세족들 때문에 개혁을 안정적으로 추진하시지 못하셨는데 이것을 전하께서 이루시면 고려 백성들의 칭송은 물론이고 심왕께서도 기꺼이 전하를 인정하실 것이옵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사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옵소서.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 이렇게 개혁파들은 임시 고려왕위에 오른 세자 왕감을 안심시키는데 분주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일단 심왕이 고려에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으로 막아보자 대도의 실력자 바얀과도 내통했고 심지어 개혁파들과도 연대해 이를 일시적으로 성공시켰으나 개혁파들이 조정의 군권을 장악해나가자 결국은 서로 격돌할 것임을 직감했다. 사실 서로 원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권문세족들도 나름 대처를 하는 중에 대도에서 심왕의 전갈이 왔다.
- 심왕이 권문세족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놀라웠다. 앞으로도 일정한 개혁을 계속 하겠지만 권문세족들의 이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세자 왕감을 끌어내려 대도로 보내주면 이전처럼 제안공 왕숙에게 섭정을 계속시키고 현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권문세족들은 심왕이 궁지에 몰리자 일시적인 방편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전갈을 비밀리에 가지고 온 사람은 놀랍게도 대칸의 아우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인종)였다. 그가 대칸이 이 약속을 보증한다는 말을 하자 삽시간에 대세는 돌변했다.
- 그래도 심왕을 의심하는 일부 권문세족들이 있었으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는 하되 일단 대원제국의 대칸이 직접 약속을 한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에 심왕편에 서서 왕감을 잡아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결국 대세를 이루었다. 그동안 대칸이 속국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불문율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지자 권문세족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유르바르와다와 같이 돌아온 제안공 왕숙은 권문세족들과 논의해 야밤을 틈타 일시에 대규모의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해 들어갔다. 권문세족들이 이렇게나 빨리 자신들의 뒷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개혁파들은 군사를 동원할 틈도 없이 너무나 어이없게 패주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권문세족의 사병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왕감을 사로잡고 곧바로 대도로 실어보냈다. 모든 것이 전격적으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고 허둥대던 김의중 등 개혁파의 우두머리들도 각개격파식으로 모두 대도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왕감의 쿠데타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것이다.
- 대도로 압송되어온 왕감은 어느덧 부왕 앞에 무릎꿇려져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 뒤로 김의중 등 다른 개혁파의 수장들도 모두 무릎꿇고 있었다.
"나의 보검을 다오!"
- 심왕은 검을 쥐자 지체 없이 다가가 김의중 등 개혁파의 무리들을 하나하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어리석음이 대사를 그르쳤구나! 너희들은 고려 종사의 천년만년 죄인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 심왕이 직접 하나하나 모두 목을 베어버리고 이윽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세자만이 남게 되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이 널브러진 심왕의 거처는 온통 핏물로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해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너만 남았다. 단지 내 핏줄이라는 이유로 이 무리들의 수괴인 너를 살려야 하겠느냐?"
- 세자는 떨면서도 말했다.
"소자는 단지 고려를 위해서 한 일이옵니다. 부왕께서 저를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내 너를 대도로 불러 그토록 알아듣게 이야기했거늘...너를 세자로 삼은 것도 다 내 불찰이니 이제와서 누굴 탓하랴...다만 차마 내 손으로 널 죽일 수도 없고 대칸께서도 특별히 네놈을 죽이지 않고 귀양보내시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으니 가서 죄를 참회하며 지내라. 네 운명은 이제 내 손을 떠났다."
- 심왕은 허탈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보다시리가 한 마디 했다.
"세자...이토록 부왕께 불효를 저질렀으면 알아서 스스로 자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소?"
- 그러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심왕은 나직히 말했다.
"부인...그만하시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세자 그대 때문에 부왕이신 심왕은 또다시 골육상쟁의 오명을 뒤집어썼어요. 결국 고려에서의 개혁도, 여기 대도에서의 입지도 또 치명타를 입게 되었죠. 아직도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있죠?"
- 세자는 보다시리와 심왕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소로운 눈빛으로 보다시리를 아무말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보다시리는 그런 세자와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다가 문득 심왕에게 물었다.
"전하...이전에 전하가 저희 가문의 요청을 하러 오셨을 때 제가 거래의 조건을 말씀드린 적이 없었던 것 기억하시죠?"
심왕은 침통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오?"
"바로 이것이옵니다!"
- 그러자 심왕은 문득 깨달은 듯 눈을 번쩍 뜨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보다시리의 창이 세자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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