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50
(인종 명종 4)
*明宗의 죽음과 士林의 재 등장
大妃 문정왕후는 명종 8년, 명종의 나이가 스물이 된 후에야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으로 하여금 親政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尹元衡 역시 변함없이 막강하였다.
윤원형은 20년 동안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면서 끝없는 부패행위를 일삼았다. 철이면 철마다 8도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바리바리 올라왔고, 곳곳에 그의 田畓이 있으며, 호화로운 저택이 한양에만 15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윤원형을 움직이는 최고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鄭蘭貞이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鄭允謙과 官婢의 사이에서 태어난 庶女로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으나, 남자를 유혹하는 뛰어난 매력을 가진 여인으로, 윤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妾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正實婦人을 내쫒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고 대간 부인의 최고 영예인 貞敬夫人까지 되었다. (貞敬夫人 : 조선시대 文武 중신 중, 正一品과 從一品의 大臣의 부인에게 내리는 최고의 작호)
정난정은 뛰어난 두뇌회전으로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었고, 윤원형의 권세를 등에 업고 商權을 장악하여 전매와 싹쓸이 모리 행위로 엄청난 富를 축적하였던바, 당시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혼인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옥중화'를 꼭 보시기 바람)
이러한 정난정이 나름대로 사회적 功이 있었던 바, 이는 일찍이 庶女의 서러움을 겪어온 자신의 과거지사 때문이겠지만 ~ 그것은 適子와 庶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고, (윤원형을 움직여) 불교를 융성토록 한 것 等이다.
하지만 정난정 역시 문정왕후와 함께 사대부들의 공공의 적이었으므로, 윤원형 권력의 근원인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로 유배에 처해졌고 결국은 항상 넣고 다니던 비상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윤원형 또한 정난정이 죽은 지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糟糠之妻不下堂'이라고 귀가 닳도록 얘기해도 馬耳東風이더니. ㅉㅉ.. )
大妃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모두 죽자, 때를 기다리던 사림파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士林派는 거듭된 사화로 많은 인재를 잃었지만 전국 각처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곧바로 정계에 복귀하여 윤원형 일파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 등, 실로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하게 된다.
한편, 명종은 부인 沈氏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後宮으로부터도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는데 그 하나 뿐인 아들도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만다.
이에 後嗣(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德興君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翼善冠을 벗어 써보라고 하자,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河城君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 라고 응답하여 명종의 눈도장을 받았다고 한다. 눈치빠른 이 얍삽한 자가 바로 명종의 뒤를 이은 宣祖이다.
명종은 외아들이 죽은 후, 충격의 후유증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 만인 1567년에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 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