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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의 周側學
Framework of Zhou-Zhai in Kyunyeo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고 영 섭 (Ko Yeong-s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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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mansan@unitel.co.kr
■차 례■
1.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1.1. 본성(性)과 표상(相)의 융회
1.2. 성스러움(聖)과 속스러움(俗)의 무애
2. 敎判을 보는 눈
2.1. 균여의 삶과 저술
2.2. 화엄 五敎判의 새 해석
2.3. 대승원교에서 同敎와 別敎 이해
3. 균여의 주측학
3.1. 橫盡의 법계
3.2. 竪盡의 법계
3.3. 周側의 법계
균여의 周側學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1.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종래 우리는 종족(species)을 흔히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종종 ‘만드는
인간’(Homo Faber, Man the Maker), 심지어는 ‘생태학적 인간’(Homo Oecologicus)이라고까지도 부르고 있다. ‘20세기의
야콥 부르크하르트’라 불리는 J.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이기보다는
오히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Man the Player)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만드는 인간’과 ‘생각하는 인간’보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규정이 훨씬 더
적확하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마인베르크 역시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고찰을 철학이 마땅히 담당해야 하며, 또 그것이 철학의 본래적이며 고유한 임무에 속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 Anthropologie)이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자기의 과제를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인간을 연기적 존재로 본다. 연기는 緣(조건)이라는 타자를 통해 나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때문에 나를 규정하는 어떠한 외연을 벗어난 내포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기의 그물을 벗어난 ‘나’라는 존재는 없다(無我)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호이징하가 말하는 ‘놀이하는 인간’도 결국은 ‘연기적 인간’인 것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인간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얻기 위해 발심하는 존재이며, 발심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서원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면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리고 화엄가였던 균여(923~973)는 불교적 인간(보살)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세계는 사물의 총화이고, 인식주체(6根)와 인식대상(6境)의 부딪침(觸)을 통해 구성되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현실적 인간인 나의 삶의 총화(一切)이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변화하고(顯色, 變) 공간적으로 거리끼는(形色, 礙) 것이 사물(變礙故 名爲色)의 성질이다. 때문에 ‘변화’와 ‘점유’의 속성 위에서 사물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들에게 표상되는 것이다.
신라 말엽 가야산 해인사에 화엄의 대가였던 觀惠(견훤의 福田) 법사와 希郞(왕건의 福田) 법사가 있었다. 이들을 따르는 문도들은 점차 華嚴圓敎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져 南岳(화엄사)과 北岳(해인사)으로 갈려 매양 싸웠다.해인사(북악) 화엄원교의 법통을
이은 균여는 두 파의 宗趣가 모순되어 분명하지 않음을 탄식하고는 무릇 막혀서 여러 갈래로 된 것을 하나의 바퀴자국(一轍)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다. 균여가 뒤에 圓通首座에 올라 화엄교학과 禪學 그리고 재편되는 瑜伽(法相)교학의 통일을 모색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균여는 의상으로부터 상승되어 오는 한국화엄과 智儼 이래 法藏․澄觀․宗密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본성(性)과 표상(相),
周(橫盡)와 側(竪盡)의 기호를 통해和會를 시도함으로써 佛說의 핵심인 중도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자 했다.
그의 周側 개념은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아우르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본성과 표상을 융회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周側’은 법계를 바라보는 균여의 기표일 뿐 아니라 그의 전 사상을 표현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종래 균여 화엄의 접근 방식은 性相 융회의 개념으로만 접근해 왔다. 이는 균여의 불교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하기보다도 당시 불교교단이 처한 정치․사회사적인 측면에 치중한 연구자들이 광종에 의해
발탁된 균여가 고려 초기의 통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性(華嚴)과 相(瑜伽)의 융회를 꾀했다고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균여 화엄의 핵심은 화엄과 유식, 즉 性相의 융회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화엄 고유의 두 관점(橫盡/竪盡)을 아우르는 주측의 프레임워크로 설명될 수 있다. 주측은 불교사상사의 고유 개념인 理事의 코드나 性相의 기호와 달리 균여가 정립한 독창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균여가 정립한 주측 개념을 통해 균여의 인식틀을 살펴보고자 한다.
1.1. 본성(性)과 표상(相)의 융회
균여가 살았던 시대는 신라말 고려초의 전환기였다. 신라말부터 전국의 각 지역에서 자본을 축적해 온 여러 호족세력들은 왕권과 결탁하여 더욱 강고해져 있었다. 새로이 세워진 왕조는 이들 지방호족 세력의 강력한 지지 위에서 정립될 수 있었다. 때문에 재위에 오른 고려 왕들은 호족중심의 체질로부터 벗어나 왕권중심의 체질로 전환하려고 하였다.
균여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은 후삼국의 통일이 막 시작되어 고려 왕들이 천하를 왕권중심으로 집중하려는 시기였다. 국가적으로는 아직 후삼국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으며, 교단적으로는 견훤의 복전이었던 남악의 관혜(화엄사)와 왕건의 복전이었던 북악의 희랑(해인사)으로 나뉘어 교단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균여 자신은 비록 북악계 출신이었지만 두 계파를 華嚴一乘의 입장에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본성과 표상의 융회, 聖과 俗의 융회라는 형식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균여의 性相 융회사상은 불교계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목적보다는 광종대의 전제정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시각이 있다. 이것은 인간학의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정치․사회사적인 시점으로만 파악하려는 시각이다.
균여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비껴 가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는 자세를 취했다. 가난한 서민들과 중산층의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서원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보현십원가는 바로 화엄행자였던 균여의 원행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균여의 사상적 화두는 정치․사회적 시선보다는 당시 인민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시선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존재의 속성을 본성과 표상의 기호로 설명한다. 性은 우리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이며, 相은 우리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서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인 존재이자 그것이 대상화되어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사물이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정체성이 性이라면, 사물이 지니고 있는 현상적 모습은 相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본래성인 性과 그의 겉모습인 相, 즉 본질과 특성은 사물의 총화인 세계의 안(속)과 밖(겉)의 두 측면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호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기도 했다.
본성과 표상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두 모습이다.
존재의 근원적 모습이 性이라면 현상적 모습은 相이다.
궁극적 진리가 眞諦라면 방편적 진리는 俗諦이다.
존재를 有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 가지 모습이 三性이라면,
空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 가지 모습은 三無性이다.
유위적 원리가 緣起라면 무위적 원리는 性起이다.
이렇듯 불교사상사에 등장하는 개념들은
性과 相의 기호처럼 존재의 두 측면으로 표현된다.
인도불교사상사에서 空(진제)과 有(속제)의 코드로 자아와 세계를 설명했다면,
중국불교사상사에서는 理(진여)와 事(생멸)의 기호로 인간과 자연을 해명했다.
그리고 한국불교사상사에서는
空과 有, 理와 事의 코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도
性과 相의 기호로 껴안으면서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이해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文雅(圓測), 元曉, 義湘, 太賢 등과 같은 불학자들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균여 역시 화엄가로서 理와 事, 性과 相의 기호를 사용하면서도 周와 側의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했다.
불교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존재의 속성에 대한 치밀한 통찰이 투영되어 있다. 즉 현상계의 존재를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相宗이라면, 그 존재를 空觀에 입각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性宗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유식사상의 특징이라면, 후자는 반야중관 및 삼론․화엄사상 등의 특징이다.
또 화엄사상 안에는 유위적 측면인 緣起와 무위적 측면인 性起가 내재해 있다. 이는 현상계의 모습을 法界緣起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如來性起로 인식하느냐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현상계가 지니고 있는 圓融한 모습을 강조하면 性起論으로 전개되며,
차별적인 모습을 강조하면 緣起論으로 전개된다. 때문에 연기론과 성기론의 긴장과 탄력 위에서 화엄의 일승학은 구축된다.
균여는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인 본성과 표상의 문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했다. 性과 相은 중관과 유식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화엄과 유가(법상)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이는 인도대승불교의 중심적 과제이자 중국불교의 핵심적인 쟁점이다.
더욱이 空과 有, 性과 相의 문제는 理와 事의 문제로도 설명된다. 균여는 화엄의 理와 事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근원적 원리(理)와 구체적 사태(事)를 주측의 개념을 통해 표현한다. 여기서 理는 근원적 원리인 진여이자 理實法界이다.
여기서 理實은 진여의 무자성을 의미하고 법계는 진여의 실체를 말한다.
균여는 이치적인 측면에서, 理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 理를 道理라고 하였다. 그는 차별성을 강조하는 연기적인 측면보다는
원융성을 강조하는 성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균여는 事를 시간적으로 변화하고 공간적으로 점유하는 구체적인 사태,
즉 집이나 수풀, 연못, 산 등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行, 位, 敎의 차별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균여는 연기의 법문을 구체적인 사태인 事라고 하면서도 그 事가 一乘 안에 있다고 파악한다.
그는 연기의 법문 안에서 동교일승이 아닌 별교일승을 강조한다.
이는 법화경을 돈교와 원교로 보면서, 별교로 보지 않고 동교로 보는 교판관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균여의 연기의 事法은 별교일승 중에서 논해지므로, 일승과 삼승이 體에서뿐만 아니라 뜻에서까지 차별이 없는
本來無二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사태인 事를 두고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일체로 파악하는 강력한
융회적 입장이 바로 균여사상의 특색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균여는 理에 의한 성불을 眞空인 本性에 卽入하는 성기론적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세 가지의 성불로서 位, 行, 理의 成佛을 든다. 位성불은 六相차별을 방편으로 보는 것이며, 行성불은 자신의 근기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경계를 얻음으로써 성불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位와 行의 성불은 차별성을 방편으로 하여 佛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理의 성불은
모든 차별의 나머지 모습이 다하여 본성으로 돌아가야만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균여는 이 理와 事를 법성과 연기의 면으로 이해한다. 즉 근원적 원리인 理는 법성의 性으로, 구체적 사태인 事는 연기의 緣으로 이해하거나 眞과 應, 法身과 應身, 不變인 진제와 隨緣인 속제로 파악하는데, 이것은 법장의 설을 소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理와 事를 空과 有,
性과 相의 관념으로 수용하였다.
理를 非劫,
事를 劫으로 설정하거나
事를 九世,
理를 非世에 짝짓기도 하였다.뿐만 아니라
理와 事를 橫과 竪,
圓融과 行布,
法과 時,
本과 末,
평등과 차별,
本有와 修生,
智와 恩,
眞空으로 돌아가는 것과
三世를 만나는 것 등으로 짝지었다.
이는 事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데 비해서 理는 그 모습을 가지지 않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인식의 대상(相)이 스러져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 理와 구체적인 인식 대상과
더불어 하는 事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균여는 空과 有, 理와 事, 性과 相 등의 무수한 二項을 통해 융회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곧 그가
모색하고자 한 독창적 코드인 周와 側의 기호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균여가 性과 相의 기호를 통해 융회를 모색한 것은 종래
화엄의 무수한 이항의 담론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주측의 코드를 통해 자신의 인식틀을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聖과 俗의 무애를 통해 대중교화로 나아갔던 것 역시 화엄행자였던 균여 자신의 실천적 화엄을 주창하기 위한
모색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균여의 시선 역시 이러한 융회적 관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1.2. 성스러움(聖)과 속스러움(俗)의 무애
균여는 평생을 화엄행자로 살았다. 출가한 뒤 그는 화엄학통의 두 계파가 반목 질시하여 대립할 때도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열심히 敎說하여 계파간의 알력과 분쟁을 종식시켰다. 균여는 오로지 ‘불법을 넓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洪法利人) 일에
전심전력했다.여러 諸家들의 章疏類에 일반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주석(記釋)을 달아 편의를 주었다.
당시의 보편적인 언어(方言)를 취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대표적인 장소류들에 주석을 단 것이다.
이는 교단을 정비하고 교육을 통한 제자 양성의 노력, 그리고 다수의 관음 정토 계통의 발원문을 통해 서민 대중에게까지
화엄원교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던 의상의 노력과도 겹친다. 하지만 교단의 소임을 맡으면서 갈등 역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현덕 5년(958) 불일사 안에 벼락이 떨어졌다. 재변을 없애고자 하면 모름지기 큰 법력에 의지해야 했다.
대사를 청하여 강연을 벌이는데 한낮부터 한밤까지 거의 3주일을 쉬지 않았다. (대사가) 묻고 대답함에 있어서 ‘仁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진행하였다. 모인 무리 중에 悟賢徹達--徹達은 지금의 승통이다--이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을 했다. ‘강연의 주제자가 비록 명민하나 그래도 후배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그래도 선배다. 그런데 어찌하여 묻고
대답하는 데 겸양과 사양의 예를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
이러한 혐의를 두고 곧 비방의 말을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한 거사가 다가와서는 말리며 말하기를
“시기하고 분해할 것 없습니다. 오늘의 강사는 그대 선조 義湘대사의 제7化身입니다.
큰 가르침을 널리 펴시고자 다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현이 듣고는 깜짝 놀라 곧 대중에게 말을 전하여 “내가 잘못 알았다” 하고 참회를 하였다.
이 기록은 선배 학승인 오현과 후배 학승인 균여의 갈등이 뜻밖의 정보에 의해 해소됨을 보여주고 있다. 갈등 해소의 열쇠는
단연 의상과의 연계성이다. 의상의 제7화신으로 비정된 균여의 미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聖과 俗의 무애를 위해
화엄행자로서의 보살도를 실천한 의상과 균여의 행적이 서로 겹치는 지점에서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릇 大聖의 좋은 가르침에는 일정한 방도가 없고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라서 같지 않으니 …… 그러므로 이치(理)에 의지하고
가르침(敎)에 의거하여 간략히 槃詩를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이 그 이름을 넘어선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화엄의 핵심 종지를 뽑아 내고 그것을 다시 반시의 형태로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참된 근원으로
이끌고자 했던 의상이나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오로지 ‘불법을 넓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洪法利人) 일에
전심전력했던 균여의 보살행은 모두 화엄행자로서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을 이항대립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화회하려고 했던 의상과 균여는 화엄행자의 삶을 살았다.
화엄행이 바로 보현행원이듯이 의상이나 균여 모두 보현행을 통해 聖과 俗을 융회하려고 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균여는 ‘노래 중의 노래’인 詞腦歌를 지어 세상을 교화시켰다.
보현십원가(普賢十種願往歌) 11수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는 聖과 俗의 무애 위에서 전개된 그의 보살행의 일환이었다. 그는 향가 11수를 지으면서 서문에 이렇게 썼다.
대저 詞腦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데 쓰는 도구요,
願往이라 하는 것은 보살이 수행하는 데 줏대가 되는 것이라. 그리하여 얕은 데를 지나서야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가까운 데부터 시작해야 먼 곳에 다다를 수가 있는 것이니, 세속의 이치에 기대지 않고는 저열한 바탕을 인도할 길이 없고,
비속한 언사에 의지하지 않고는 큰 인연을 드러낼 길이 없도다. 이제 쉬 알 수 있는 것은 비근한 일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심원한 宗旨를 깨우치게 하고자 열 가지 큰 서원의 글에 의지하여 열한 마리 거친 노래의 구를 짓노니, 뭇 사람의 눈에 보이기는 몹시 부끄러운 일이나 모든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될 것을 바라노라.
비록 지은이의 생각이 잘못되고 언사가 적당치 않아 성현의 오묘한 뜻에 알맞지 않더라도 서문을 쓰고 시구를 짓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의 선한 바탕을 일깨우고자 함이니, 비웃으려고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인연을 맺을 것이며, 훼방하려고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이익을 얻을 것이니라. 엎드려 바라노니 훗날의 군자들이여, 비방도 찬양도 말아 주시기를!
모름지기 중생을 교화하려고 할 때에는 세상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도구(詞腦)를 매개하는 것만큼 요긴한 방법은 없다.
어린아이도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直立’을 통해 언어를 발견하고 도구를 발견하여
활용할 줄 알듯이, 해당 분야의 가르침을 문외한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과 같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나아가야만 한다.
보살이 중생구제의 손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수행의 줏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誓願의 벼리인 ‘願往’인 것이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내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내 뼈를 쪼개 붓을 삼으며, 내 피를 뽑아 먹물로 삼아, 경전 베껴 쓰기를 수미산만큼 쌓더라도, 불법을 소중히 여기므로 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다”고 했듯이 균여는 그러한 마음으로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보살행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중국 정통문법과는 달리 우리 고유의 서민적인 문체로 중국과 한국 화엄의 성취를 유감 없이 집대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지은 다수의 저술은 오히려 뒷날 新編諸宗敎藏總錄(高麗敎藏) 3권을 집대성하는
義天에 의해 비판된다.海東의 선대 여러 법사가 남긴 기록은 그 학문이 날카롭거나 두루하지 못하고 억설이 더욱 많음이
한탄스럽다. 그리하여 어리석고 어두운 後生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어서 중생이 능히 聖敎로써 거울로 삼아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구히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梵雲․眞派․靈潤 등 여러 법사의 책은 잘못된 것으로, 그 말은 글을 이루지 못하고
그 뜻은 通變함을 얻지 못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무지로 만들고 後生을 현혹시킨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이러한 의천의 시각은 의상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화엄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법장으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정통으로
여기는 사대주의적 발언이다. 아울러 균여의 문체와 시각을 비판하고 晋秀淨源으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상승한 자신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발언이라 보여진다. 즉 한국화엄과 중국화엄을 융회적 시각으로 집대성한 균여계의 화엄을 비판하고
법장의 문법을 계승해 온 정원의 화엄을 상승한 자신의 인식틀을 세우기 위한 거대한 문화적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균여의 저술이 天其 등에 의해 방언이 삭제된 텍스트라 해도 위의 지적처럼 “글을 이루지 못하고 그 뜻은
通變함을 얻지 못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무지로 만들고 後生을 현혹시킨 것”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주측으로 표현되는 균여의 인식틀까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어떻든 의천의 이러한 발언은 보현십원가를 지어 성속의 무애를 도모했던 균여의 보살행을 평가절하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황해도 해주의 미미한 집안의 후예로 태어난 균여와 뒷날 고려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祐世僧統에까지
오른 왕족인 의천과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런 격의 없이 가난한 백성들과 힘없는 대중들의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던 균여의 보살행과, 신이한 법력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무하려 했던 그를 의천이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방언을 즐겨 사용했던 균여의 문체나, 이론보다 실천 중심의 화엄을 표방했던 균여를 정통문법을 지향하며 이론 중심의
중국화엄을 흡수하려 했던 의천이 수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방언과 화법을 통해 화엄원교의 골수를 높게 형상화한
보현십원가를 통해 불교를 대중화시킨 균여의 보현행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지향의 불교와는 달랐던 것이다. 난해하고 복잡한 화엄의 哲理를 법계연기의 因陀羅網으로 짜낸 법장의 조직적 章疏類와 달리 화엄행자인 균여의 서원이 절절
하게 배어 있는 보현십원가는 바로 화엄보살의 원행이었으며 중국화엄과 변별되는 균여 화엄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균여는 諸家들의 장소류에다 일반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주석을 달아 널리 유통되게 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보편적인 언어와 문체를 취하여 세인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이 비록 의천에 의해 비판받아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뒷날 균여를 알아본 天其 등이 방언을 삭제하고 임금에게 주청함으로써 고려대장경 「보유편」에 入藏되었다. 그것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텍스트이다.
균여 시대 고려 초기의 불교계는 신라 이래 상승되어 온 화엄교학 중심의 교단이 주도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새로이 정립되기 시작하는 禪法의 산문이 하나의 물결로 떠오르고 있었고, 아울러 瑜伽(法相) 교단도 다시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균여의
聖과 俗의 무애행은 이론(저술)과 실천(노래 교화)이 하나되는 화엄행자의 도정 위에서 시행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2. 敎判을 보는 눈
균여의 본성은 邊氏이고 법명이 均如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품이 밝고(煥性) 뜻이 고상하였으나(尙志)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
(亡名). 후에 낙랑군부인의 존호를 받았던 어머니 占命은 나이 60에 임신하여 일곱 달 만에 대사를 낳았다. 대사의 용모가 추하여 길거리에 버렸더니 까마귀 두 마리가 날갯죽지를 펼쳐서 아이의 몸을 보호하였다. 길 가던 사람이 놀라서 부모에게 알린 덕분에 잘못을 뉘우친 부모의 손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15세(志學之歲)에 사촌형인 善均화상을 따라 부흥사에 가서 識賢화상에게서 공부하였다.
아울러 영통사의 義順화상에게도 나아가 더 큰 공부를 하였다. 이는 가르치는 이의 그릇이 가르침 받는 이의 자질보다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스승을 옮겨 배운 균여는 화엄학승으로 대성했다.
2.1. 균여의 삶과 저술
균여는 祈晴祭를 통해 광종과 인연을 맺었다. 광종 4년(953) 3월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때마침
後周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했다. 비가 계속되어 책봉의례를 거행할 수 없자
후주 사신이 “동쪽 나라에는 반드시 성인될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그로 하여금 날이 개도록 기도드리게 하지 않습니까?
만일 날이 갠다면 나는 聖賢의 징험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광종은 다음날 기청제를 지낼 만한 성현의 사문을 천거하게 했다.
그때 국사 謙信이 均如대사를 천거했다. 법사는 그때 젊은 나이였는데 나라의 청함을 받고 경건하게 걸음을 옮겨 사자좌에 오르셔서는 圓音으로 연설했더니 천둥과 번개가 없어지고 잠깐 사이에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잦아지면서 하늘이 개이고 해가 나타났다. 이때 광종은 대사를 공경하여 아홉 번의 절을 올리고는 대사가 태어난 곳을 물었다. 대사는 “黃州의 북쪽 둔대엽촌이 제 고향입니다”라고 하였다. 광종이 ‘용과 이무기가 난 곳이 큰 연못(大澤)이 아니긴 하나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 어찌 열 집(十室)의 작은 마을에 없으리요?’라고 생각하여 얼마 뒤 대사를 大德에 봉하고 아울러 칙명으로 속세의 식구(眷屬) 십여 명에게 각각 25頃의 밭과 남종 여종 각각 다섯 명씩 내리고 황주성 안에 옮겨 살도록 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균여는 황해도 황주 둔대엽촌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균여는 용과 이무기나 태어날 만한, 다시 말하면 대호족의 집안이 아닌 열 집 남짓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광종의 妻家 역시 황주의 대호족인 황보씨 집안이었다. 균여의 집안이 처음부터 황보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균여가 광종과 인연을 맺고 난 뒤부터 균여 집안과 황보씨 집안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듯하다.
하지만 광종과 관련을 맺은 균여가 교단의 요직을 맡아보기 시작하면서 다른 문중과의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균여전에 의하면 正秀 등과의 갈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보 연간에 귀법사의 사문 正秀가 법관에게 나아가 일을 꾸며 참소하기를, “균여대사가 반역의 마음을 품고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관리가 그 일을 아뢰었더니 광종이 듣고 노하여 대사를 급히 부르게 하여 입궐하면 해하려 하였다. 대사가 대왕의 처소에 이르러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엎드리었다. 광종이 그 정상을 보고는 정직하다 여기고 칙령을 바꾸어 의관 두 사람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곧이어 承宣薛光을 절로 보내어 위무하게 하였다. 이날 밤 대왕의 꿈에 키가 한 길이나 되는 神人이 나타나 침전을 누르고 서서 말하기를 “대왕께서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法王을 능욕하였으니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일이 크게 일어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자 땀이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가까운 신하를 불러서 꿈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송악 북쪽에서는 바람이 없는데도 소나무 몇 천 그루가 저절로 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대왕께서 이 변괴를 들으시고 점을 쳐 보라 명하시니 후회스럽고 두려워 곧 대궐 안에 消災道場을 시설하고 법관에게 명하여 正秀의 방을 철거하라 하였다. (정수의) 在家 兄은 문서를 날조하여 아우로 하여금 무고하게 한 죄로 정수와 한날 죽임을 당하였다.
정수와 균여는 화엄원교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 듯하다. 정수는 균여가 신이한 법력으로 불법을 폄으로써 불교의 정통문법을 파괴하고, 아울러 보현십원가를 통한 균여의 불교 대중화 노력이 지극히 비불교적이라고 여겼던 문중의 대표일 수도 있다. 때문에 화엄에 대한 정수의 입장과 균여의 입장 차이에서 벌어진 사건일 수 있다.
또 출가자의 위계질서가 분명한 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후배인 균여의 강력한 교단개혁 과정을 그와 다른 입장에 서 있던 정수가 거부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화엄에 대한 남악과 북악의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듯이 균여가 화엄사(남악)와 해인사(북악)의 입장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악 출신인 균여와 달리 정수는 남악 출신일 수 있다. 때문에 균여의 교단 개혁이 정수 자신이 속한 문파의 이익과 위배되므로 그것을 막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종과의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균여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또 권력과의 긴밀한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정수계에서 관계 복원을 위한 계략으로 만들어 낸 사건일 수도 있다.
하여튼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교적 입장이나 대 국가․사회적 관점이 달랐던 그룹의 시각을 대표했던 正秀가 균여를 참소하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균여는 남악과 북악으로 대립하던 교단을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시켰다. 이는 국가에 대한 불교계의 목소리를 한 곳으로 모을 통로를 모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균여는 광종 14년(963)에 歸法寺가 창건되자 그곳의 주지를 맡으면서 입적 때까지 광종의 귀의를 받는다. 이후에도 나라가 처한 여러 차례의 천재지변을 法力을 통해 물리침으로써 광종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광종과의 긴밀한 과정은 오히려 균여를 權僧으로 보게 하거나, 또는 불교를 광종대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했다는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저술을 통해 그러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
많은 저술을 통해 중생교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던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11종 59권의 저술에는 중국화엄과 한국화엄이 망라되어 있다.
화엄 2조인 지엄의 저술을 주석한
搜玄方軌記(10권),
孔目章記(8권),
五十要問答記(4권),
十句章圓通記(1권, 현 2권)와 3조 법장의 저술을 주석한
敎分記圓通鈔(7권, 현 10권),
旨歸章圓通鈔(2권),
三寶章圓通記(2권) 그리고 의상의 저술을 주석한
法界圖圓通記(2권)가 이를 말해 준다.
또 현존하지는 않지만 入法界品抄(1권)는 智儼과 義湘과 澄觀의 저술목록에 모두 들어 있으며,
심지어 원효의 저술목록에도 들어 있는 것이다. 균여 화엄의 성격이 특히 징관과 종밀의 화회적 체계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입법계품초는 아마도 징관의 저술에 대한 주석으로 추정된다.
그의 저술은 6종(보현십원가 11수 포함) 18권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불교 이해,
즉 화엄 오교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2. 화엄 五敎判의 새 해석
敎相判釋은 붓다의 가르침을 계통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시간적으로나 내용(형식) 또는 방법적 잣대를 통해 체계 지우는 틀이다. 때문에 교판의 출발은 어떠한 편향 없이 정립되었다. 天台智顗의 표현대로 ‘南三 北七’로 대표되는 당시의 교판은 각 종파가 형성되면서 자종의 이론적 틀로서 자리매김된다. 양자강 남쪽의 3종 교판과 북쪽의 7종 교판이 당시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南三 北七에 입각하여 많은 교판이 생겨 나왔다.
그러나 중국의 남북조를 거치면서 점차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적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가장 위에 온다’(後來居上)는 것처럼 각 종파들은 自宗의 소의 경론을 가장 나중에다 배치하였다.
그래서 모든 경론들을 오직 자종의 소의경론의 등장을 위한 배경으로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佛說을 자종의 해석틀에 맞추어 지극히 편벽되고 국집된 시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판은 결국 중국 종파불교 성립의 근간이 되었다.
한국의 고승들 역시 불설 이해의 틀인 교판을 세웠다. 문아(원측), 원효, 승장, 태현 등 유수한 사상가들은 불학을 보는 자신들의
안목이 있었다. 그 안목은 자신이 속한 집안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균여의 교판은 법장(643~724)의 교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균여의 교판은 법장의 華嚴一乘敎義分齊章(화엄오교장)에 관한 주석인 釋華嚴敎分記圓通鈔에 실려 있다.
법장은 同別 2교판, 5교 10종판, 4종판의 교판을 세웠다.
그 중에서 화엄의 대표적 교판으로 정립된 법장의 5교 10종판은 그의 화엄오교장에 잘 나타나 있다.
법장은 먼저 慈恩窺基(632~682)의 8종판 중 7종판을 자신의 10종판 안에 그대로 흡수하고 여덟 번째에 여래장 전통의 不空宗을 배당시켜 眞實不空宗으로 설정했다. 거기에다 不二적인 가르침을 머금고 있는 유마경을 배당하여 相想俱絶宗을 아홉 번째에 배당하고, 마지막으로 완전한 가르침으로 화엄경을 배당하여 圓明俱德宗이라 했다.
법장은 오교판을
소승교(제1~6종)로부터 시작하여
대승시교(제7종)․
대승종교(제8종)․
대승돈교(제9종)․
대승원교(제10종)로 짰다.
먼저 小乘敎에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하는 근본경전을 짝지웠다.
大乘始敎에는
반야경과
해심밀경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두 사조인 중관과 유식으로 설정했다.
大乘終敎에는
여래장경 등을 중심으로 설정했으며,
大乘頓敎에는 이후 선법의 소의경론이 되는
능가경과
유마경 등의 경전을,
大乘圓敎에는
법화경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정했다.
그러다가 법장은 나중에 화엄경탐현기를 지으면서 종래 자신의 5교 10종판을 4교판으로 수정했다.
그는 소승교는 隨相法執宗으로,
대승시교는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반야중관의 교학을 空始敎인 眞空無相宗으로,
다른 하나는 유가유식의 교학을 相始敎인 唯識法相宗으로 설정하고,
대승종교를 대승돈교와 대승원교를 포괄하는 如來藏緣起宗으로 재편한다.
균여는 법장의 화엄오교장을 해석한 교분기원통초에서
지엄이 수현기에서 언급한 3종 교판에 대해 순차적으로 요약하여 이름붙였다.
즉 修相漸의 修相은 삼승의 지위에 기대어 이 일승 스스로의 덕을 나타내므로
별교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서, 오교 가운데에서는 점교는 아래의 3교를 말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漸頓圓 三敎에 대하여
점교를 修相漸,
돈교를 實際頓,
원교를 窮實圓이라고 이름붙인다
또 實際頓의 실제는 一乘行者의 解行을 말하며,
窮實圓의 窮實은 果海를 말한다고 풀이했다.
균여는 지엄이 말한 화엄경에 대한 세 가지의 이름,
즉 ‘大方廣佛華嚴毘盧遮那所說經’,
‘大方廣佛華嚴普賢菩薩所說經’,
‘大方廣佛華嚴諸菩薩修業經’을 전제하고
搜玄記를 인용하여 자신의 화엄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균여는 지엄이 ‘처음에 다섯 바다를 관찰한다’(初觀五海等)라는 경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일으키는 것’의 열 가지 뜻(十義)을 나열하고
第一義에서 第三義까지에 해당된다고 했지만,
지엄이 화엄경 전체를 세 가지 이름으로 총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균여는 이 세 가지의 이름이 점교와 돈교와 원교 3교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질문:세 경을 3교에 준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
첫째는 다음과 같이 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세 經이 각기 세 가르침을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오직 頓敎와 圓敎 안에서만 세 경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
지금 세 번째 뜻을 따라 풀이하면
이 경의 세 敎義 가운데에서 頓敎와 圓敎 2敎는 五敎 중 第五 圓敎에 포섭된다.
때문에 이 세 경만이 頓敎와 圓敎이다.
지엄의 수현기에 나오는 漸頓圓의 三敎相을 ‘對治方便行門差殊’에 근거하여
‘方便修相對治緣起自類因行’,
‘實際緣起自體因行’,
‘窮實法界不增不減無障礙緣起自體甚深秘密果道時’라고 하는
行門에 세 가지의 차제를 나누어 설하고 있는 것을 순차적으로 요약하여 이름붙이고 있다.
균여는 점교와 돈교와 원교의 3교 가운데에서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에 짝짓고 있다.
법장의 오교판인
소승교와
대승시교․
대승종교․
대승돈교․
대승원교의 틀로 말하면
화엄경은 대승원교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지엄의
수현기에 근거한 修相漸을 점교,
實際頓을 돈교,
窮實圓을 원교에 짝지우면서
화엄경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다.
균여는 이러한 세 가지 뜻에 의거하여 점교와 원교 및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대승돈교․
대승원교의 5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섯 번째인 원교로 귀일시키고 있다.
균여는 화엄경을 원교 또는 돈교와 원교로 설정하고
그 나머지 교의나 경전에 대해서는 확고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질문:옛사람이 이르기를 이 경 가운데에는 三敎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修相의 漸은 이 경에 다 통하며,
實際의 頓 역시 이 경에 다하므로 이 경 안에는 3교가 갖추어져 있거늘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대답:비록 그 뜻이 있지만 그러나 아래의 4교는 修相漸이며
華嚴經만이 頓敎와 圓敎이기 때문이다.
균여는 점돈원 3교에서
화엄경은 돈교와 원교 2교라고 하면서도,
5교에서는 돈교까지를 포함하고 나머지 4교를 修相漸이라고 한다.
즉 점돈원의 점교 가운데에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의 4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돈교가 5교의 중심인가 점돈원 3교의 중심인가는 화엄경에서 설한 교의에 해당되는가 아닌가에서 중요한 相違가 생겨난다.
이것은 수현기에서 光統律師 慧光의 설을 끌어들여 점돈원 3교를 설해 마치고
“이 경은 곧 頓과 圓 2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화엄경을 판석하고 있다.
따라서 점돈원 3교로 보든 5교로 보든 균여는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법장의 오교판에서 원교인 법화경을 同敎一乘으로 보느냐 別敎一乘으로 보느냐의 구분과 함께
교판에 대한 균여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2.3. 대승원교에서 同敎와 別敎 이해
법장의 화엄오교장의 첫 장인 「建立一乘」에 의하면 일승을 동교와 별교로 나누고 있다.
동교일승은 分諸乘과 融本末로 나누어 설명하고,
별교일승에서는 性海果分과 緣起因分으로 나누고 있으며,
緣起因分은 分相該攝으로 전개하고 있다.
동교일승은 별교일승이 다함이 없이 존재하며 널리 모든 근기의 인연에 응한 교의의 논거로서 諸乘에 걸쳐 설한다.
一乘敎義는 동별 2교에서 전개된 4문에 의거하여 건립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 별교일승의 分相門에서는 10문을 세우고,
별교일승이 어떻게 삼승과 구별된 교의 내용인가를
법화경 「비유품」의 大白牛車와 三車의 비유를 기본으로 하여 설한다.
법장에게 분상문은 어디까지나 별교일승을 설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여의 시각은 그게 아니다.
균여는 동교와 별교의 2교판에서 대승원교를 다시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으로 분류하는 법장과는 달리,
법화경을 熟(終)敎와 頓敎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동교와 별교의 2교에 모두 통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동교는 제4교인 돈교 위에 있는 것이지만 제5교인 원교는 아니며, 화엄원교에 동교일승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균여는 법장의 교분기에서 설정한 분상문 10문 중 제9문까지를 둘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의 여섯 차별은 同敎分相이지만
일곱․여덟․아홉 문의 세 가지 차별은
화엄경을 인용하기 때문에 別敎分相이다.
그러므로 權實의 차별 또한 初敎를 방편으로,熟敎와 頓敎를 진실로 삼는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1문의 權實差別에서부터 제6문의 附囑差別까지는 법화경을 經證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동교의 分相門이며, 제7문부터 제9문까지는 화엄경에 의한 별교의 분상문이다. 때문에 방편과 진실의 경계는
동교와 별교의 구분에서 경계지어지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동교와 별교에 대한 균여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를테면 法華經 가운데에는 때(時)와 일(事)에 의거한 判釋이 있고 뜻(義)에 의거한 判釋이 있다. 때와 일에 근거하여
判釋하면 熟敎와 頓敎에 해당하고, 만일 뜻에 의거하여 높게 判釋하면 同別 二敎가 있게 된다. 同敎는 華嚴의 아래이면서
四敎의 위에 있다. 別敎는 華嚴과 둘이 아니다. 지금은 別敎의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圓敎는 文證에 해당된다.
법화경의 敎相은 시간(時)과 대상(事)에 의거하면 숙교와 돈교 2교에 해당되지만,
뜻에 의거하여 判釋하면 同別 2교에 통하게 된다.
그러나 동교는 화엄의 아래이자 4교의 위에 있으며,
아래의 4교보다는 높지만 원교는 아니며, 화엄원교에 동교일승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그는 법화경이 일승사상을 설하는 경전이라고 하면서도
화엄경에 상대해서는 아래 단계에 설정함으로써 별교와 동교로 두 경전을 갈래지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균여는 법화경을 돈교와 원교로 설명하면서도 동교를 일승교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는 법장이 별교일승을 논증하기 위하여 법화경을 유용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균여는 지엄과 의상이 거론하였던 所流와 所目과 方便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교판 용어로 활용한다.
방편승의 영역에서 동교의 내용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流目(所流와 所目)은 지엄의 공목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의상 역시 이 개념을 원용하였다. 의상은 수행방편에 의거하여 수행방편 자체를 해명하는 대목에서 원용하고 있다.
의상은 방편일승에 의거하여 一乘所流, 一乘所目, 一乘方便을 구분한 뒤 앞의 둘을 緣起道理에 의거한 것으로 보고,
뒤의 방편은 智에 근거한 용어로 보았다. 이것은 방편이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廻心을 전제로 하여
중생을 이끌기 위해 五乘으로 펼쳐 교설한 선교방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流目은 수행방편의 논리적인 연기도리의 측면에서, 방편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균여는 별교가 화엄과 둘이 아닌 별교일승이며 별교만이 원교라고 말한다. 즉 별교와 동교를 구별하여
화엄경과 법화경의 교상을 경계짓고 있다. 이러한 同別 2교에 대한 해석은
五敎章 본문에서나 다른 주석들에서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교판관으로 삼은 것은 균여의 독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균여는 법장처럼 법화경을 화엄경과 같이 원교로 짝짓고는 있다. 균여는 지엄의 漸頓圓 3교판과 법장의 5교판을 수용하면서도 동교로 분류되는 법화경을 일승교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법장과 다른 균여 교판의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균여의 교판은 여느 화엄학자와 변별된다. 그의 교판은 오교장을 주석할 때에 보여준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균여의 화엄경관은 그의 교판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화엄가들은 법장의 화엄교판을 수용해 왔다. 하지만
균여는 법장 교판의 틀을 원용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해석틀을 만들었다.
균여 역시 光統律師 慧光의 3종교판을 인용한 지엄의 수현기에서의 漸頓圓 3종 교판을 거론하면서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에 배치하고,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의 오교판에서는 원교에 설정하고 있다.
균여 교판의 특징은 법장이 대승원교로 취급한 법화경과 화엄경을 배치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균여는 법화경의 교상을 시간(時)과 대상(事)에 의거하면 숙교와 돈교에 해당하지만,
뜻(義)에 의거하면 동교와 별교에 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교판에서 대승원교를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눠 볼 때 동교는 별교일승인 화엄의 아래에 있으며
5교판 중 4교의 위에 있기 때문에 아래의 4교보다는 위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균여는 화엄원교에는 동교일승인 법화경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엄원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별교이며 그 별교만이 원교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래 화엄학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균여는 화엄경을 頓圓一乘이라고 하고 일승교학에 동교를 포함시키지 않는 독특한 同別 2교설과 5교설을
설하고 있다. 그는 법장이 별교일승을 논증하기 위하여 단순히 법화경을 끌어들여 동교라고 분류한 것과 다른 해석을 하였다.
균여의 교판에서는 법화경 역시도 중요한 교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3. 균여의 주측학
앞 장에서 균여의 교판 이해를 통해 그의 불교관 또는 화엄관을 살펴보았다. 균여는 화엄을 대승돈교이자 원교로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별교일승은 오직 화엄뿐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균여의 화엄관은 주측의 논리를 통해
구축한 법계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균여는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상에서 周側의 ‘周’는 橫盡法界를 말하며, ‘側’은 竪盡法界라고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다. 균여가 ‘가로’ 또는 ‘수평’의 의미를 지니는 ‘周’와, ‘세로’ 또는 ‘수직’의 의미를 머금고 있는 ‘側’의 키워드(核語)를 통해 구축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성기론과 연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아우르려는 사상적 전략 위에서였다.
균여가 “티끌(塵)과 시방(方)에서 ‘塵’은 微塵이요 ‘方’은 十方이니 미진과 시방을 周側하는 것이다. (여기서) 周는 횡진법계이며, 側은 수진법계이니 지금의 풀이에서는 橫과 竪를 반드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방삼세에 이 커다란 법(華嚴大法)을 두루 설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주측이라고 일컫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주측’의 논리를 통해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화회하려 했다.
그는 ‘周’와 ‘側’의 개념을 원용하여 본성과 표상의 융회,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의 무애, 티끌과 시방의 원융, 가로와 세로를 회통시키고 있다.
이러한 균여의 화회의 노력은 바로 의상의 횡진법계관과 법장의 수진법계관을 ‘주측’의 논리 위에서 융회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또 법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로 인해 갈라져 있던 당시 화엄사상계의 분열을 별교일승 원교의 입장에서 총섭하기 위함이었다. 균여는 주측의 기표를 통해 본성과 표상, 성스러움과 속스러움, 티끌과 시방, 가로와 세로, 횡진과 수진의 측면을 통해
화회해 가고 있다.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는 내 마음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와 사물의 총화인 세계 사이에서 일심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긴장과 탄력의 영역 자체이다. 그리고 이 법계를 통해 우리들 자신이 모두 重重無盡의 因陀羅網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나라의 裴休(797~870)거사는 법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법계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체 중생의 신심 本體이다. 본래부터 신령스럽게 밝아 막힌 데가 없으며 광대하여 텅 비고 고요한 것, 이것이 유일한 참다운 경계(眞境)이다. 모습이 없되 대천세계를 펼쳐 놓고 가장자리가 없되 만유를 머금고 있다. 마음의 모습 사이에 뚜렷하지만 모습을 취할 수 없고 티끌의 안에서 빛을 발하되 理를 헤아릴 수 없다. 진리를 꿰뚫는 지혜의 눈과 망념을 여읜
밝은 지혜가 아니고서는 능히 자기 마음의 이 신령한 통함(靈通)을 보지 못한다.
이렇듯 법계는 우리의 “인식 주관에 의하여 대상화되고 인과적 범주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그 자체로서의 존재세계”를 말하며, 이를 법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법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이다. 여기에 대해 균여는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융회하여 주측의 법계로 설정하고 있다.
화엄의 경론에는 다양한 비유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계를 설명하기 위해
‘돈’(錢), ‘塔’, ‘數’, ‘菩薩수행위’(地) 등의 비유가 사용된다.
유수한 화엄행자들은 十錢喩, 十層十塔과 十層一塔喩, 一數와 十數喩, 初地와 十地喩 등의 비유들을 원용하여
법계를 설명하고 있다. 균여 역시 종래 화엄행자들이 원용한 비유들을 통해 자신의 법계관을 설명해 내고 있다.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화회하려는 균여의 노력은 중국화엄과 한국화엄의 융회의 과정에서 보여지고 있다.
먼저 균여의 법계관은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자신의 주측의 기호에 의해 아우르고 있다.
의상이 성기론적 관점에서 橫盡의 법계를 설정했다면, 법장은 연기론적 관점에서 竪盡의 법계를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균여는 의상의 횡진을 ‘周’로, 법장의 수진을 ‘側’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때문에 균여의 주측은 의상으로 대표되는
해동화엄과 법장으로 대표되는 중국화엄을 화회하는 입장에 있다.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인 일승법계도원통기를 보면 법장과 의상의 법계에 대한 관점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나(一)를 부를 때 일체가 입으로 답하는(一切口許)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법장이 (이야기하듯이) 하나의 이름(一名)을 부를 때 일체(一切)가 각각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自名口許) 것이다. 둘째는 의상이 (이야기하듯이) 하나의 이름(一名)을 부를 때 일체가 모두 하나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 것(一名口許)이다.
풀이하여 말하면, 의상대덕의 盡과 不盡은 십 층짜리 열 탑(十座十層塔)을 나열한 것과 같아서
첫째 탑의 첫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은 첫째 층으로서 한꺼번에 입으로 답하며,
첫째 탑의 둘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 아홉 탑의
둘째 층은 둘째 층으로서 또한 모두 입으로 답한다는 뜻이니 이것이 橫盡法界의 의미이다.
법장이 하나의 이름(一名)을 부를 때 일체(一切)는 각기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함(自名口許)이라 한 것은
마치 십 층짜리 한 탑(一座十層塔)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층을 부르자마자 (나머지 층이) 나는
첫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각각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自名口許) 뜻이므로 (이것이) 竪盡法界(의 의미)이다.
이 기록은 10層10塔의 비유를 통해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의상과 10層1塔의 비유를 통해 수진법계를 설명하는 법장의 예를 통해 횡진과 수진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횡진법계에서는 제1탑의 제1층을 부르면 제2탑 내지 제10탑의 제1층이 모두 “나도 1층,
나도 1층” 하고 답한다는 것이다. 수진법계에서는 제1층을 부르면 “나는 제1층 내지 나는 제10층” 하고 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엄의 십구장에 대한 주석으로 알려지는 十句章圓通記에는 횡진법계와 수진법계에 대한 설명이 위의
일승법계도원통기의 설명보다 쉽고 명료하게 풀이되어 있다.
의상은 곧 횡진법계를 주장했고, 법장은 수진법계를 주장하였다. 의상의 盡과 不盡은 하나하나의 계위(一一地)를 세워
十地 중의 十地를 갖추는 것과 같아서, 初地의 歡喜地를 부를 때 뒤의 구지(後九地) 중의 歡喜地로 나아가게 되어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도 歡喜地 나도 歡喜地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법장의 盡과 不盡은 한번에 십지로 나아감(一往十地)과 같아서 첫 歡喜地를 부를 때 뒤의 九地가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는 離垢地 내지 나는 善慧地 나는 法雲地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비유로 설명해 보면 의상의 주장은 마치 열 층의 열 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탑의 첫째 층을 부를 때,
뒤 아홉 탑의 첫째 층이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도 첫째 층 나도 첫째 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橫盡法界를 뜻한다.
법장의 주장은 마치 열 층짜리 한 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의 아홉 층이 이르기를 나는 둘째 층,
나는 셋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竪盡法界를 뜻한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법계에 대한 의상과 법장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10地 중의 10地’ 비유에서 初地를 부를 때
나머지 9地 중의 歡喜地가 나도 환희지라고 응답하는 것을 의상의 횡진법계라 한다면, ‘한번에 십지로 나아감’(一往十地)의
비유에서 첫 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9地가 나는 離垢地, 나는 發光地 내지 나는 善慧地, 나는 法雲地라고 응답하는 것을
법장의 수진법계라 할 수 있다.
위의 글에 의하면 의상이 ‘하나에서 열을 보려고 했다’면, 법장은 ‘열에서 하나를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의상이 十座十層, 즉 10층10탑을 세워서 횡진법계를 설정하고 있다면, 법장은 一座十層, 즉 10층1탑을 세워서 수진법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법계를 1중의 10(向上來)으로 보느냐, 10중의 1(向下來)로 보느냐인 것이다. 이 1중의 10과 10중의 1을 開宗記에서는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하면 향상래이며, 열반을 버리고 생사를 향하여 중생을 교화하면 향하거”라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의상이 10층10탑에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 ‘일체가 모두 하나의 입으로 답한다’고 본다면, 법장은 10층1탑에서
‘일체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입으로 답한다’고 보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상은 근원적 원리인 ‘理’와 구체적 사태인 ‘事’의 관계를 통해 차별과 일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균여는 이러한 두 입장을 주측의 체계를 통해 화회하고 있다.
3.1. 橫盡의 법계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근원적 원리(理)와 구체적 사태(事)의 관계를 통해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라는 것은 차별(事)의 시작이요, ‘일체가 곧 하나’(多卽一)라는 것은 차별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화엄행자들의 사유체계이다.
횡진법계를 설정한 의상은 10층10탑의 비유를 통해 十方世界를 설명하고 있다. 法界圖印은 十地論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의상은 10지를 들어서 법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의상은 보살 계위 하나하나가 모두 10지를 갖추는 ‘10지 중의 10지’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초지의 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9지의 환희지는 모두 같은 것이 되어 그 안에 포함되며, 초지의 선혜지를 부를 때 나머지 9지의 선혜지는 모두 같은 것이 되어 그 속에 포함된다. 또 초지의 법운지 안에 나머지 9지의 법운지가 같은 것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10지’의 비유로 설명하면서 ‘10지 중의 10지’를 ‘一往十地’의 비유로, 또는 ‘10층10탑’(橫盡)의 비유를 ‘10층1탑’(竪盡)의 비유로 바꾸어 설명하기도 한다.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가 원용하는 비유를 아울러 원용하면서 비유를 들어 나간다. 아래의 기록에는 횡진의 법계와 수진의 법계를 융회하려는 균여의 생각이 담겨 있다.
만일 十地論에 의거하여 初地에서 十地로 감(一往十地)을 세워서 말하면, 첫 歡喜地를 부를 때 나머지 九地가 모두 덩달아 나도 歡喜地, 나도 歡喜地라 일컬으면 (이는) 의상의 주장이다. 첫 歡喜地를 부를 때 나머지 九地가 나는 離垢地, 나는 發光地 내지 나는 法雲地라고 하면 (이는) 법장의 주장이다. 만일 10층1탑을 세워 달리 비유하면 첫째 층을 부를 때 뒤의 아홉 층이 일컫기를 나도 첫째 층, 나도 첫째 층이라고 하면 (이는) 의상의 주장이다. 첫째 층을 부르는데 뒤의 아홉 층이 말하기를 나는 둘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하는 것은 법장의 주장이다.
의상의 횡진법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지’이며 나머지 9지 역시 초지와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초지를 환희지라 부를 때 나머지 9지들도 각기 덩달아 환희지라고 일컫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때문에 균여에게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10층10탑의 비유는 결국 수진법계를 설명하는 10층1탑의 비유로도 전이된다.
왜냐하면 10층10탑의 비유는 첫 탑의 각 층에 나머지 아홉 탑의 각 층이 속하게 되므로 곧 10층1탑의 비유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횡진법계는 시방세계의 무진연기와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층10탑’의 각 층이 첫째 탑의 첫째 층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의 제6구인 인타라문이 횡진법계가 되는 근거가 된다.
因陀羅에 기대어 의미의 경계를 드러냄이란, 위로 融會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안으로는 中心이 없고 밖으로 경계에 힘쓸 수 없어서 因陀羅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神琳이 이르기를, 비유하면 세계가 도는 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안과 밖의 구별이 없듯이, 마치 한 마디의 손가락으로 물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因陀羅 또한 그러하다.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法界의
일체 세계가 나타나 안립하듯이 이 모든 세계는 낱낱의 티끌이 한 손가락의 물결 속으로 거둬들여지고 또한 이 한 손가락 물결
속의 法界 또한 다시 이와 같으므로 거듭거듭 다함 없게 된다.
티끌과 시방, 가로와 세로를 총섭하고자 하는 화엄에서 횡진법계는 실천의 지평 위에 서 있다. 때문에 횡진법계는 10층10탑의 비유에서의 첫째 층, 10지에서의 초지, 10錢에서의 1錢, 10數에서의 1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횡진법계는 인타라문과 같아서 중중무진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의상이 法性偈에서 ‘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것은 한 티끌 안에는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하나 안에는 전체가 들어 있다는 언표이다. 이는 횡진법계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상은 초지인 환희지를 통해서 10지를 말하듯 一卽多의 전개(확산)를 중심으로 多卽一의 통합(응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타라문의 중중무진의 표현은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기제가 된다. 그런데 끊임없이 펼쳐지는 重重과 無盡은 엄격히 말하면 구분된다. 즉 중중이 하나 속에 전체를 총섭하는 것(從--세로적인 면)이라면, 무진은 나머지 문이 모두 전체를 총섭하는 것(橫--가로적인 면)이다. 때문에 10층10탑으로 비유되는 횡진법계는 무진으로, 10층1탑으로 비유되는 수진법계는 중중으로 설명된다.
즉 중중이 수진의 법계를 설명하는 기제라면, 무진은 횡진의 법계를 설명하는 기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10층10탑의 비유가
횡진법계의 무진에 맞추어진다면, 10층1탑의 비유는 수진법계의 중중에 맞추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10지’의 비유로부터 ‘10지 중의 10지’로 나아가며, 더욱이 수진법계의 비유인
‘一往十地’로까지 나아가 인타라문의 중중(竪盡) 무진(橫盡)으로 융회하고 있다.
3.2. 竪盡의 법계
법장이 화엄의 두 코드인, 원리로서의 理(성기)와 차별로서의 事(연기)를 空과 不空의 기호로 전개하고 있음에 비해, 균여는 근원적 원리인 理와 추상적 사태인 事를 性과 相의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도의 空有적 사유와 중국의 理事적 사유를 한국의 性相적 사유를 통해 종합하고 있는 균여의 사유체계를 엿볼 수 있다.
10층1탑의 비유로 설명되는 법장의 수진법계는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 一切가 각기 반응한다. 이를테면 첫째 층을 부르면 횡진법계의 10층10탑의 비유처럼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들이 모두 첫째 층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둘째 층, 나는 셋째 층 내지 나는 아홉째 층, 나는 열째 층으로 각각 반응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십지론의 10지의 비유에 의하면 수진법계에서는 초지 환희지를 부르면, 횡진법계의 10지 중의 10지의 비유처럼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들이 덩달아 환희지라고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離垢地, 나는 焰慧地 내지 나는 善慧地, 나는 法雲地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횡진법계에서는 첫 문이나 첫 층이 제일 중요하지만, 수진법계에서는 각 문과 각 층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진법계에서는 일체를 구성하는 개체가 각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장의 입장은 균여에 의해 잘 정리되고 있다.
균여는 십구장원통기의 제7장인 ‘摠三三轉現際無窮門’에서 수진법계의 근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은 세로(竪位)에 의해 법계를 논한 것이다. 한 티끌에 의거하여 법계의 일체의 法을 총섭하고, 그 총섭된 일체의 法 안에 다시 각기 일체의 法을 총섭하면 오직 가로(橫位)에 의거해 법계를 논한 것이라 이른다. 지금 이 문안에서는 三際에 의지하여 相攝을
논하였기 때문에 竪位에 의거해 법계를 논한 것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제목으로 摠三三轉現際無窮이라 한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 안에도 三際가 있고 현재 안에도 三際가 있고 미래 안에도 三際가 있기 때문에 摠三이라 한 것이며, 三門이 개별적이기에 三轉
이라 이른다.
불교에서는 과거(前際)와 현재(中際)와 미래(後際)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한다. 과거 莊嚴劫과 현재 賢劫과 미래 星宿劫을 통해 시공을 설명하듯이 三際(三世)는 우리들이 인식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서 정리되고 있는 ‘摠三三轉現際無窮門’ 역시 그러하다.
과거․현재․미래 안에도 각기 과거․현재․미래의 삼제가 있다는 것을 摠三이라 하고, 그 삼세가 원융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三轉’이라 했다. 때문에 수진법계는 ‘총삼’과 ‘삼전’을 통해 한 티끌(一塵) 안에 三世法을 드러내는 원융의 의미를 지녔지만 그 삼세법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菩薩瓔珞經에서는 붓다가 梵摩達王에게 말하기를, “네 앞에 누워 있는 개는 너의 과거 몸이며 장차
나는 너의 미래 부처”라 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가 한 시점에 현현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만일 三乘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오직 개(狗)만 있었고 사람(人)과 부처(佛)는 없었으며, 현재는 오직 사람만 있고 개와 부처는 없으며 미래에는 오직 부처만 있고 개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法을 세움이 외롭고 단조롭다. 一乘의 가르침에서는, 과거의 개 가운데에도 사람과 부처가 있었고, 현재의 사람 가운데에도 개와 부처가 있으며, 미래의 부처 가운데에도 개와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法을 세움이 원만한 것이다.
균여는 瓔珞經의 경문을 三乘과 一乘의 입장에서 각기 해설하고 있다.
이는 삼승이든 일승이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 안에서 개와 사람과 부처의 모습을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경문에서는 삼승의 뜻에서는 하나의 한정사를 지녀 삼세가 각기 구별되지만, 일승의 뜻에서는 하나 안에서 둘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해 우리 몸은 개와 사람과 부처가 한 몸이지만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法體는 하나이지만 九世의 구별에 따라 法도 역시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法體와 九世의 입각지에 따라 삼승과 일승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횡진법계와 마찬가지로
수진법계 역시 원융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원융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지점은 일승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에도 각각 삼제를 갖추고 있다는 ‘총삼’의 입장은 일승의 시각에서 드러나는 원융의 뜻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구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三轉의 관점은 현상의 하나하나를 강조하는 삼승의 관점인 것이다.
법체의 입장인 일승의 시각과 구세의 입장인 삼승의 시각에 의해 각각 총삼과 삼전으로 수진법계는 설명된다. 이는 현상계의 모습을 근원의 시작으로 보느냐, 차별의 끝으로 보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법장의 수진법계는 현상계를 연기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법장은 수진법계를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균여는 법장과는 달리 차별의 끝은 근원의 시작으로 돌아간다고 함으로써 차별의 시작과 끝을 융회하고 있다. 즉 구체적 사태(相)의 끝은 근원적 원리(性)로 돌아감으로써 하나가 되며, 그때에는 모든 차별성이 사라지고 진실성만이 남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법장이 현상계의 모습을 차별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균여는 근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상계를 바라보는 법장의 시각이 연기론적 관점에 서 있다면, 균여는 성기론적 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澄觀의 시각과도 겹치는 것이다.
3.3. 周側의 법계
균여의 현존 저술에서 ‘주측’이라는 술어가 보이는 곳은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상에서이다.
그가 이러한 ‘주측’이란 술어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적 틀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은 당시 불교계의 사상적 대립을 화회하고자
함에서이다. 그의 화엄관을 살펴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저술에서 균여는 ‘周’를 횡진법계에, ‘側’을 수진법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균여가 모색한 ‘주측’의 체계 또는 법계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주측’이란 개념을 특화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균여는 ‘하나가 곧 일체’라는 관점을 통해 차별의 끝으로 이끌어 내는 주측의 틀을 제시하였다. 주측의 ‘周’는 횡진법계를 말하며, ‘側’은 수진법계이다. 여기서 미진(一)과 시방(多)은 주측을 통해 하나가 된다. 또 티끌(塵)과 시방(方)은 이 주측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미진과 시방을 두루 감싸안는 주측은 곧 균여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균여가 모색한 주측의 틀은 理理의 相卽과 事事의 相卽과 理事의 相卽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균여는 의상의 화엄교학 중에서 특히 理理無碍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화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상 화엄이 균여 화엄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은 법계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別敎一乘에 의하면 理理의 相卽 또한 얻고 事事의 相卽 또한 얻으며
理事의 相卽 또한 얻어서 각각 相卽하지 아니하기도 하고 또한 상즉하기도 한다.
의상은 화엄의 근본교의를 理理의 상즉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얻게 되면 理事의 상즉과 事事의
상즉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균여 역시 이러한 理理의 상즉에 법계도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만일 別敎一乘에 의하면 理理의 相卽 역시 얻고 理事의 相卽 역시 얻기 때문에 이것이 別敎이다. 그 본위를 취하면
이리의 상즉과 이사의 상즉이니 이것이 三乘이다. 비유하면 강물이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다 같이 짠맛이 됨과 같다.
理理의 無碍와 事事의 無碍가 모두 이 화엄경에 갖추어져 있어서 모두 사사의 무애에 해당한다.
균여는 의상의 理理無碍를 수용하여 자신의 주측의 틀을 전개한다. 즉 그는 4구의 상즉 가운데 理理의 상즉을 화엄의 근본으로 보는 의상의 관점을 수용한 뒤, 理理의 상즉이 理事의 상즉이나 事事의 상즉과 하나로 회통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는 理理의 상즉이 횡진법계의 논리적 근거임에 비해 理事의 상즉과 事事의 상즉이 수진법계의 논리적 근거임을 전제한 뒤 다 같이 짠맛인 바닷물처럼 셋을 하나로 화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균여는 주측에 기초하여 의상의 사상을 근간으로 법장의 사상까지를 융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원칙적인 하나 속에 전체를
통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음미해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물의 事相에 대한 파악이 균여 화엄사상 속에 결여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事相이 원칙적인 理 속에서 융회되어 하나로 파악될 때 事나 理는 모두 泯滅되어 존재를 초월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민멸된 일체로 나타나게 된다. 균여 화엄의 事相에 대한 관심은 法相에 대한 그것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그의 性相융회사상을 형성시키는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중국 화엄사상의 경우 대체로 事相의 민멸을 말하고 있으나 근본인 理의 민멸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균여는 事相뿐 아니라 理의 민멸까지도 주장하는 점에서 다른 화엄사상가와 큰 차이를 이룬다. 그가 주장한 理理無碍는 물론 의상 화엄의 전통을 이은 것이겠지만, 理의 민멸 때문에 가능해진다. 민멸되지 않은 원칙적인 理만일 경우, 그 사이에 무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원리로서의 理가 차별을 넘어선 眞空이며,
차별로서의 事가 妙有인 것처럼,
균여는 자신의 性相的 기표를 통해 가로와 세로,
근본(本)과 지말(末),
眞空으로 돌아가는 것과 三寶를 만나는 것,
同體와 異體 등의 기호로 대비시키며 자신의 사상적 지평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균여가 근원적 원리와 구체적 사태를 근본과 지말에 대비시키며 설명하는 까닭은 그가 차별보다는 원리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말에서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성기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근본과 지말을 원리와 차별에 대응시킨 것은 비실체의 실체인 묘유를 통해 비실체인 진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균여는 원리와 원리의 무애(理理無碍)에 역점을 두고 있음에 비해,
법장은 차별과 차별의 무애(事事無碍)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균여가 의상의 화엄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그는 의상과 같이 원리를 절대적인 理로 보면서도 그 원리에 다시 다함(盡)과 다함이 없는(不盡) 차별을 설정함으로써
원리와 원리의 무애를 말하고 있다.
균여는 의상의 화엄을 횡진법계로, 법장의 화엄을 수진법계로 정리한 뒤 다시 이 두 법계를 종합하여 주측의 프레임워크를 세운다. 횡진법계가 초지(환희지)를 강조하여 10지 전체를 초지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라면, 수진법계는 10지 전체를 이해하려고
할 때 10지의 의미를 하나하나 추구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의상의 횡진법계가 일체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라면, 법장의 수진법계는 일체 중에서 그 각각의 의미를 달리 파악하려는 것이다. 법장은 ‘일체가 곧 하나’(十中一, 向下來)에서 차별이 시작되고 ‘하나가 곧 일체’(一中十, 向上來)에서 차별이 끝난다고 보고
있지만, 균여는 의상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곧 일체’에서 차별이 시작되고 ‘일체가 곧 하나’에서 차별이 끝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균여의 주측법계는 차별의 시작을 ‘10중의 1’로 파악하는 법장의 수진법계와 차별의 시작을 ‘1중의 10’으로 파악하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화회시키고 있다. 균여는 실천 중심의 의상의 법계관과 이론 중심의 법장의 법계관을 전관한 뒤에 다시 의상의 횡진법계의 입장 위에서 법장의 수진법계를 화회하여 주측법계를 건립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균여가 의상과 법장의 법계를 화회하면서도 실천적 화엄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측의 프레임워크를 정립하려고 했다는 사실과 주측이 자신의 화엄일승사상을 떠받치는 키워드라는 점이다.
균여는 불설의 핵심인 중도의 도리에 입각하여 주측 또는 性相의 코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는 비록 의천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뒷날 균여계 화엄가인 天其 등에 의해 그의 저술이
고려대장경에 입장될 수 있었다. 때문에 현존하는 그의 방대한 저술의 질과 양은
한국 불교사상가들의 추종을 쉽게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의 저술과 활동을 통해 그가 고려 초기의 화엄가로서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는 신라 의상 이래의 화엄을 종합하고 중국의 화엄까지 아우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론적 측면에 치중해 있는 중국화엄과 실천적 측면에 치중해 있는 한국화엄을 자신의 주측이라는 코드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한중화엄을 집대성했다. 따라서 우리는 균여의 저술 속에서 한국화엄의 성취만이 아니라 중국화엄의 성취까지 읽어 낼 수 있다.
Framework of Zhou-Zhai in Kyunyeo
Kyunyeo(923-973) established the interpretative framework of ‘vertical and horizon(周側)’ to reconcile the philosophical confrontation between ‘Namak’ and ‘Pugak’, which are divorced from each other due to the different viewpoint to consider ‘Hwa-eom Won-gyo(華嚴圓敎)’ since the Three-Kingdoms period. The semiotic ‘vertical and horizon’ polarity that encompasses the interpretations of Dharma-dhatu in scheme of ‘vertical’ and ‘horizon’ each should be considerded as a code to represent Kyunyeo’s whole thoughts
Kyunyeo, in his own system of doctrinal classification that match Hwa- eom to Tong-gyo and Won-gyo, tried to synthesized both sectarian view- points, the vertical and horizontal interpretation of Hwa-eom Thoughts. The epistemological framework of vertical and horizon could be followed up subsequently in course of the harmonization.
From the point of Seong-gi-ron(Manifestation of Buddha’s Essence, 性起論), Kyunyeo established the framework of vertical and horizon, which is originally derived from the Uisang’s horizontal interpretation of worlds that is based on the theory of Manifestation of Buddha’s Essence, and also from the Fazang’s horizontal interpretation that is founded on the theory of Dependence of Arising respectively. After he examined thoroughly two theories of vertical and horizontal world-view that, according to the former, of Fazang, all discriminations begin at the viewpoint of ‘Ten includes One(十中一, 向下來)’, and it ends with the viewpoint of ‘One includes Ten(一中十, 向上來)’, and according to the latter, of Uisang, the discriminations begin with that of ‘One includes Ten(一中十, 向上來)’ and end with that of ‘Ten includes One(十中一, 向下來)’, Kyunyeo sets out his diagram on the basic frame of horizontal interpretation of worlds.
His concerning on the world-views turned out to be focused on the question that whether the world-view should be established on pursuing for the enlightenment without entanglement of life and death(向上來), or on pursuing for the salvation of sentient beings in mundane world(向下去). In other words, this question also entails the other questions followings:whether the world-view has to be set on the dependence arising in influence on one after another
(重重緣起) or on the dependence arising endlessly(無盡緣起),
and whether it is to be stressed on the practice or theory. Fundamentally, Kyunyeo take a point to encompass the concerning of dependent arising on the basis of the theory of Manifestation of Buddha’s Essence.
After unbiased evaluation on the two theories, Kyunyeo tried to harmonize the Uisang’s practical and horizontal world-view with the Fazang’s theoretical and vertical world-view on the interpretative back- ground of former mainly. For Kyunyeo, thus, the theory of Rounding- Sides(zhou-zhai, 周側) or the vertical and horizontal interpretative scheme should be considered as a code to encompasses the forerunning inter- pretative thoughts of Hwa-eom and the whole system of Kyunyeo’s thou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