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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향교 부설 사회교육원 회원 옥천 목담서원(鶩潭書院) 방문 현장 체험학습 실시
전남표 기자
상주향교(전교 김명희) 부설 사회교육원(원장 조재석) 회원은 지난 11월5일 회원 43명이 참여한 가운데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 충청북도 옥천군 목담서원(鶩潭書院 원장 박진하)에 현장 체험학습을 실시했다.
이번 목담서원 방문 현장 견학에는 상주향교 김명희 전교, 곽희상 사무국장, 상주향교 부설 사회교육원 조재석 원장, 사회교육원 회원들이 함께 참석해 뜻깊은 현장 체험학습이 됐다.
먼저 목담서원에 도착해 옥천 전씨(全氏) 판서공파 종친회 전재영 회장은 환영사에서 “추운 날씨에 우리 목담서원을 방문한 상주향교 김명희 전교, 곽희상 사무국장, 상주향교 부설 사회교육원 조재석 원장, 사회교육원 회원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오늘 하루 좋은 시간 되시고 가시는 길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환영사를 했다.
옥천전씨 판서공파 종친회 전재몽 이사의 안내로 목담서원, 양신정, 쌍암 전엽 효자 정려문, 호천 샘, 송정 전팽령 신도비, 인봉 전승업 충의비를 견학하며 설명과 해설을 들었다.
목담서원 방문 현장에는 옥천 전씨 판서공파 종친회 전재영 회장, 옥천 전씨 판서공 송정공파 종친회 전재일 회장, 옥천 전씨 판서공파 종친회 전대호 사무국장, 옥천 전씨 판서공파 종친회 전재몽 이사가 참석해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목담서원은 1765년(영조 41년) 지역유림과 옥천전씨(沃川全氏) 후손들이 전유(全侑) , 조선 중기의 문신 전팽령(全彭齡 1480~1560), 충간공 사서 전식(全湜)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세워져 운영되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936년 다시 복원하면서 영당만을 세우고 전유(全侑), 전팽령(全彭齡), 전식(全湜)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당초 영당 안에는 사서 전식(全湜) 선생의 영정(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이 보관돼 있었으나 현재는 청주박물관에서 위탁관리하고 있고 대신 모사본이 봉안돼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춘향제(春享祭)를 옥천군의 지원으로 지역 유림에서 제례 봉행을 주관하고 있다
(자료: 전재몽 이사 제공).
[출처] 유교신문
상주향교 부설 사회교육원 회원 옥천 목담서원(鶩潭書院) 방문 현장 체험학습 실시
[안내 자료]
옥천전씨 판서공파
옥천지역 문화유산 둘러보기
2024. 11. 5.
옥천전씨(沃川全氏) 판서공파(判書公派) 종친회
옥천전씨 판서공파 옥천지역 문화유산 둘러보기
1. 옥천전씨 판서공파 주요 가계도
1) 전씨(全氏) 도시조 :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
단소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다. 기원전(BC) 18년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 가 백제 건국시 개국에 공을 세우고 백제십제공신으로 환성군에 봉해짐.
2) 전씨는 도시조 전섭공으로부터 18본이 분적(分籍) 되었다.
정선, 천안, 팔거, 성산, 황간, 계림, 옥천, 옥산, 용궁, 죽산, 백성산, 함창, 평강, 기장, 완산, 나주, 감천, 부여로 분파됨.
3) 옥천전씨 시조 :
영동정(領同正) 전학준(全學浚)
환성군의 22세손(옥천전씨 1세)
4) 득관조 전유(全侑) :
환성군 전섭의 26세손이요, 전이갑의 11세손, 옥천전씨 5세, 관성군(管城君)
고려후기 제27대(재위 1313년~1339년) 충숙왕조에 봉익대부(고려 후기 종2품 문산계)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져 옥천을 관향으로 했다. 관 성은 옥천의 옛이름이다. 예전엔 관성전씨라고도 불렀다.
5) 전숙(全淑) :
옥천전씨 6세, 공양왕 원년(1389년)에 관성군(管城君)에 봉해 짐. 아버지 전 유(全侑)와 부자가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짐. 111살까지 장수. 옥천전씨의 파조 분파를 크게는 관성군 전유의 세 아들(옥천전씨 6세)을 각각 파조(派祖) 로 하여
첫째는 전서공파 전광운(全光韻), 정의대부 판비서감사 이부전서 역임
둘째는 봉상대부공파 전인숙(全仁淑), 봉상대부 역임
셋째는 판서공파 전숙(全淑), 고려조 충목왕조 봉익대부 판도판서 역임
6) 전효순(1433~1508, 全孝順) :
옥천전씨 9세, 등무과, 중직대부 석성현감, 읍인이 청덕비 세워 줌, 증 가선대부 이조참의. 아들 전응경의 조졸(早卒)로 손자 3형제 육아.
7) 전응경(1459~1481, 全應卿) :
옥천전씨 10세, 23세 조졸, 장사랑(將仕郎), 증 이조참판
판서공파 전숙(全淑)의 4대손 전응경은 세 아들이 있는데
첫째는 전팽조(全彭祖), 옥천전씨 11세, 호 송노(松老), 송노공파
둘째는 전팽수(全彭壽), 옥천전씨 11세, 호 송오(松塢), 송오공파
셋째는 전팽령(全彭齡), 옥천전씨 11세, 호 송정(松亭), 송정공파로 구분
8) 전팽령(1480~1560, 全彭齡) :
옥천전씨 11세, 관성군 전숙의 5대손.
사도시첨정, 성균관사성, 통례원 우통례, 평안평사, 단천군수, 삼척과 밀양부사, 상주목사 (1549~1550) 역임, 강원관찰사 제수, 가선대부 부호군 임명, 예조참판 제배. 청백리에 선정, 옥천전씨 족보 갑인보(甲寅譜) 창보(1554년, 75세)
9) 전엽(1505~1583, 全燁) :
옥천전씨 12세, 호 쌍암(雙岩), 전팽령의 아들, 1543년 식년시 입격, 1566년(62세) 명종 21년 생존시 효자로 정려, 공조좌랑, 조산대부 행이산현감 역 임.
10) 전승업(1547~1596, 全承業) :
옥천전씨 13세, 호 우재(愚齋) 또는 인봉(仁峰), 전팽령의 손자, 증광초시 장원, 사재감첨정 역임. 천거에도 관직 사양. 사후 봉정대부 사헌부장령 추증. 임진왜란시 창의하여 중봉 조헌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보은, 청주, 당진, 금산등지에서 격전 분투. 청주전투 승리 소식을 조정에 알리러 행재소에 가던중 금산전투에서 전몰한 소식을 듣고 돌아와 박정량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1기의 큰 무덤을 만들어 오늘의 칠 백의총을 만들었다. 조헌선생이 상소한 간초와 잡저 등을 모아 조헌선생의 유고집을 만 들었다.
11) 전급(1570~1629, 全汲) :
옥천전씨 14세, 자 백영, 전승업의 첫째 아들, 전팽령의 증 손. 벼슬이 통훈대부 사재감주부(主簿)로써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친의 명을 쫓아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금산에서 왕을 호종했으 며, 정묘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12) 전식(1563~1642, 全湜) :
옥천전씨 14세,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사후 충간 (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류성룡, 장현광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훗날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의 청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상주 옥동서원과 옥천 목담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전식(全湜)의 조부 이 상 선조의 묘는 옥천에 있고, 전식(全湜)은 전여림(全汝霖)의 아들로 상주에서 태어났다.
특이사항은 전식(全湜) 사후 4년(1646년)에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전식(全湜) 사후 58 년에 용주 조경(趙絅)이 지은 신도비문에는 증직 사유가 아들 전극항이 영사원종공신에 책훈되었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으나, 2021년 12월 20일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교지 내용을 보면 전식(全湜)의 정사원종공신 1등 녹훈관련 좌의정으로 추증된 것으로 되어 있다.
13) 전극항(1590~1636, 全克恒) :
옥천전씨 15세,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 호는 규천(虯 川). 아버지는 대사헌 전식(全湜)이며, 어머니는 홍천서(洪天叙)의 딸이다. 정경세(鄭經世) 와 이준(李峻)을 사사(師事)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 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 순절하 였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책을 많이 읽어 널리 알면서 기억력도 뛰어나 선진들로부터 경이 와 찬탄을 받았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1778년(정조 2) 병자호란 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정려되었다.
14) 전충남(?~1592, 全忠南) :
옥천전씨(전서공 진산파) 15세, 창의 의병 충순위(忠順衛)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중봉 조헌(趙憲)을 따라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하여 그 이름이 항의신편(抗義新篇) 녹권(錄券)에 실렸다.
♣ 송정 전팽령선생이 상주목사 퇴임 후 청백리에 선정되고, 전팽령선생의 아들 전엽이 효 로 살아 생전 정려 되었으며, 전엽의 아들 전승업이 아들 전급과 문중(전서공 진산파)의 전충남과 함께 임진왜란시 조헌선생을 도와 의병활동을 하였고, 전식선생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시 의병을 일으킨 것과, 아들 전극항이 병자호란시 왕명으로 도성을 지키다 순 절하였으며, 옥천전씨 25세 전좌한(全佐漢) 애국지사(愛國志士)는 1920년 20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옥천전씨는 대대로 청렴결백한 삶은 물론 효와 우국 충정(憂國衷情)으로 후세인들의 귀감이 될만한 조상을 모시고 있다.
2. 양신정(養神亭)
양신정은 조선 중기 문신인 송정 전팽령(全彭齡, 1480∼1560)이 밀양부사에 재직하고 있을때에 장래에 독서도 하고 글도 가르칠 수 있도록금강가의 목담 호수변에 지은 정자로, ‘전송정(全松亭)’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인종 1년(1545)에 세워진 건물이며, 소세양의 「양신정기(養神亭記)」에 그 당시의 기록이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12년(1620)에 다시 지었으나, 영조 9년(1733)에 무너져 없어졌다. 지금의 정자는 순조 28년(1828)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지금까지 충효정신을 고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 건물은 목조기와집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서쪽 한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나지막한 흙 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소나무 숲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양신정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29호(1978.12.11.)로 지정되었다.
3. 목담서원(鶩潭書院)
1571년(선조4년) 옥천군수 서희려의 발의로 쌍봉서원(雙峰書院)을 창건하고 김문기, 전팽령, 곽시등 삼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확정하였으나,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서 사우(祠宇)와 더불어 소장했던 송정선생의 문집 15권을 비롯하여 군서요어(群書要語) 4권과 치신준승(治身準繩)등의 저서와 탄암(坦菴) 곽시(郭詩)선생의 저서가 전부소실(燒失) 되었다. 이후 삼계서원(三溪書院)과 삼양서원(三陽書院)에 봉안하였다가 거듭된 훼철로 1710년 대곡영당(垈谷影堂)에 송정선생의 진영(眞影)만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 사우(祠宇)가 퇴락하고 영본(影本)이 퇴색하여 빠른 시일 내에 중수(重修)와 개모(改摹)를 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목담영당(鶩潭影堂)을 1765년(영조41년) 지역의 유림과 옥천전씨(沃川全氏) 후손들이 사우(祠宇)를 목담에 건립하고 송정공 전팽령(全彭齡,1480년~1560년)의 진영(眞影)을 개모했다. 송정공 전팽령(全彭齡)의 영정만을 봉안하였다가, 1776년(영조 41년)에 강학(講學) 할 수 있는 강재(講齋)를 건립함으로서 목담서원(鶩潭書院)의 면모를 갖추어 향토의 교육기관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1819년(순조19년)에 사우(祠宇)를 개수(改修)하고 충간공 사서 전식(忠簡公 沙西 全湜, 1563년~1642년)의 영정을 상주 본손가(本孫家)로부터 동년 9월 중정(中丁)에 이모봉안(移摹奉安)하여 송정공 전팽령(松亭公 全彭齡)과 함께 봉향해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1936년 봄에 옛 서원의 자리에 목담영당(鶩潭影堂)만을 다시 세웠다. 서원이 철폐된지 69년만에 갈망하던 사우(祠宇)를 복원하고 영정도 이곳으로 봉안하였다. 1936년 봄에 사우(祠宇)의 재건(再建)과 아울러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의 영정을 개모(改摹)하여 관성군 전유(全侑)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좌우에 송정공 전팽령(松亭公 全彭齡)과 충간공 사서 전식(忠簡公 沙西 全湜)의 위패와 영정 3위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中丁)일에 춘향제(春享祭)를 옥천지방 유림의 주간하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기존 목담영당 “편액”의 “경신 3월(庚申 三月)”은 “1980년 3월”을 의미한다.
목담서원 지붕 추녀마루 망와(望瓦)에 “기묘년(己卯年) 3월 일”이라고 기년(紀年)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819년 3월 일”을 의미한다.
이곳에 봉안되어 있는 충간공 사서 전식(全湜)의 영정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1992.10.23.)로 지정되어 있다.
4. 효자 정려문(旌閭門)
이 정려각은 1566년 1월19일에 명종임금이 전엽(全燁, 1505~1583)을 효행으로 살아 생전에 정려한 특이한 경우이다. 전엽(全燁)의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쌍암(雙岩). 아버지는 상주목사를 지낸 송정 전팽령(全彭齡)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변으로 세워져 있는 효자비는 마을 주민들에게 효를 실천하는 마을이란 자긍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효자정이 마을의 입구를 상징하고 있어 정문거리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질 만큼 주민들에게 상징하는 바가 크다. 송정 전팽령 선생의 아들로 효심이 지극했던 전엽 선생은 조선 명종 때 하늘이 내린 효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생전에 나라에서 효자정을 전수 받게 된다.
효자정과 함께 새말과 정문거리 사이에 위치한 전엽 선생의 효행비에는 "그의 아버지 전팽령 선생이 돌아가시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묘를 지켰으며 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의 효심에 감동한 나머지 흰 제비 한 쌍이 날아와 여막 처마 끝에 제비집을 짓고 함께 3년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전엽 선생은 "여막에서의 3년동안 조석으로 1km도 넘는 길을 걸어 깨끗한 물로 밥을 짓고 또 금강변 쌍바위 위에서 고기를 잡아 조석으로 아버지를 모셨으며 이에 감복한 호랑이가 꿩이나 사슴 등을 물어다 주기도 했다"며 "효자로써 그 이름을 나라 안에 떨치셨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과 『상산지(常山誌)』, 『진천군지』 등에도 기록되어 전한다.
정려각 내부의 편액 내용은 “조산대부 이산현감 전엽을 효자로 문려에 정표(旌表)를 하다. 조선 명종21년(병인, 1566년, 가정45년) 정려할 것을 명하다.”로 되어 있다.
* 편액내용에 월일 날자가 없지만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32권)에 신해(辛亥)로 표기되어 있어, 실제 정려를 받은 날은 1566년 1월19일이다.
5. 호천(虎泉)
전엽 선생의 효 상징 호샘(虎泉)
마을과 정문거리 사이에 세워진 효자정 앞 도로 밑에서 자그마한 샘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샘은 전엽 선생의 효심에 감동한 호랑이가 물자리를 잡아 주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 그 이름도 호샘(虎泉), 또는 효자천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샘에 대해 주민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메마르지 않고 금강과 1km도 넘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비가 내려 금강물이 탁해지면 함께 탁해진다"며 그 신비함을 전한다. 또 30년 전까지도 마을 전체가 이용할 정도 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 호샘은 전엽 선생의 효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개한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전엽 선생은 그의 아버지 전팽령 선생이 돌아가시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묘 근처에 우물이 없어 매일 1km가 넘는 길을 걸어 물을 길어다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드리던 중 하루는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앞발로 바위 밑을 파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자리에 가보니 물이 고여있는 것이 보여 그곳을 파보니 물이 솟아났다고 전했다. 이 샘과 관련해 마을 주민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마을 앞으로 도로가 건설되면서 샘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주민 모두 군청을 방문, 샘을 없애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따라 샘은 도로 밑에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6. 호천재(虎泉齋)
옥천전씨 판서공파의 재실로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기와집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 백천 전대하공의 주도하에 3년여에 걸쳐 경향 각지의 종친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하여 1992년에 현재의 건물로 신축하여 사용되어 오고 있다. 2015년 12월 상수를 설치하였다. 호천재(虎泉齋) 현판의 유래는 송정 전팽령 선생이 1560년 돌아가신 후 아들 쌍암 전엽 선생이 60살이 넘은 나이에 3년간 여묘살이 중 효행에 감복하여 호랑이가 우물을 파준 데서 호샘(虎泉)이 생겼고, 호천재(虎泉齋) 현판은 호샘(虎泉)과 관련하여 붙인 현판 이름이다. 현판의 글씨는 송정공의 16대손 송탄 전안원(全安元)이 썼고, 현재의 건물 신축 후 현판을 제작 설치하였다.
7. 송정 전팽령 선생 신도비
송정 전팽령(松亭 全彭齡) 선생의 신도비문은 종현손(從玄孫) 창주 전극념(全克恬)이 찬(撰)하고 유고(遺稿)하였으며, 약 370년전의 1650년경에 송정공의 제3 증손(第三 曾孫)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전익(全瀷)이 3종질(三從姪) 극념(克恬)에게 요청하여 비문을 찬(撰)하였다. 이 신도비문이 필사(筆寫)되어 기록으로 전래(傳來)되고 송정공의 14대손 송강 일하(松岡 一夏)의 편수(編修)로 내용이 송정선생문집(松亭先生文集)에 수록(收錄)되어 있으며, 신도비에도 각자(刻字)되어 있다, 그리고 1974년 옥천전씨 대동보에 원문 수록과 2019년 판서공파보에 국역(國譯)되어 수록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신도비 건립의 발의(發議)는 종중(宗中)에 합의를 거쳐 신도비 수립을 계획하고 각지(各地)에 있는 후손들이 시대적으로 경제적 사정이 열악(劣惡)한 여건(與件)에서도 정성어린 성금(誠金)의 답지(遝至)로 그 뜻이 결집(結集)되고 힘을 얻어 마침내 선생이 몰후(歿後) 405년이 지난 1965년 3월 을사(乙巳)에 종인들의 숙원(宿願)이었던송정 전팽령 선생의 신도비 건립(神道碑 建立)을 지역민과 유림(儒林) 관계자 등 종친(宗親)들이 참여한 가운데 축하(祝賀)속에 비 수립(碑 竪立) 제막식(除幕式)을 성황리(盛況裡)에 할 수 있었다.
8. 인봉 전승업 선생 충의비(忠義碑)
■ 충청북도 옥천 출신 의병장, 전승업
♣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힘쓰다
전승업(全承業, 1547~1596)의 본관은 옥천, 호는 인봉(仁峰)이다. 조부 전팽령은 한때 옥천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모셔질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손에 꼽히던 인물이었다. 전승업은 과거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별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후, 천거로 등용되어 중학교수, 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지만 아버지 전엽의 병이 점점 심해져 이를 사양했다.
♣ 중봉 조헌과 함께 의병을 도모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일 뒤 전승업이 황망한 조헌을 다그쳐 의병장으로 추대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전승업은 건장한 체격의 종 100여 명을 모으고, 잡곡 등을 100여 석을 모아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영동과 청산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아 전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 조헌을 포함한 700구의 시신을 수습하다
1592년 8월 전승업과 조헌은 1,500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고,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전승업은 이 소식을 왕에게 전하러 의주로 향했다. 그가 진중을 비운 사이 금산전투가 일어났고 조헌을 포함해 의병 700명은 전멸했다. 소식을 들은 전승업은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와 700구의 의병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승군들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전승업은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에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조헌이 나라에 올린 글과 여러 저서를 모아 유고집을 만들었다.
♣ 옥천전씨 14세 전급(全汲)은 전승업의 첫째 아들로 벼슬이 통훈대부 사재감주부(主簿)로써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친의 명을 쫓아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금산에서 왕을 호종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 옥천전씨 15세 전충남(全忠南)은 창의 의병 충순위(忠順衛)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헌을 따라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하여 그 이름이 녹권(錄券)에 실렸다.
배향인물 영정(影幀) 종류
[안내자료제공] 옥천전씨 판서공파 전재몽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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