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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제 : 2011.5.1(일) 09:00
어디서 : 동구 판암파출소 뒤, 잔치집(1월 테마산행 시 뒤풀이한 집) 앞에서
누구와 : 김선건대표, 왕형님, 대자연님, 타샤님, 양각산님, 기산 로사님, 상수리님, 해오름(이기봉)님, 이사미님, 동백님, 좋은하루님, 정해님, 구구산막둥이님, 진산님, 아람 총 16명.
어디로 : 아래 지도와 같이 안삼정-4거리푯말(1합수점)-장고개(원치,탄현)-국사봉옆-독수리봉산성-구절사능선-508고지보루-할아비산성-숯고개-할미산성-이백리
아래 구글 지도는 주변 산성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도 범위를 크게 잡았습니다.
이 코스는 대규모 전쟁이 있었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에 기록이 남지않고 구전(전설)로만 전해저 아직 학계에서 연구조차하지 않은 지역이고, 등산객들도 뜸하게 지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사리는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클릭하면 크게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 식장산 계곡에 들어가기까지의 여정은 삼정동 산성에서 경계가 가능한 곳입니다. 안삼정 지역입니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산이 삼정동 산성입니다. 미군이 만든 도로를 넘어 식장산 4거리푯말이 있는 제1합수점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기촬을 하였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제1합수점의 실록입니다. 완만한 장고개(원치, 탄현) 길입니다. 고개 중턱에 있는 유명한 샘입니다. 도농룡알이 있다고 합니다.(상수리, 해오름님 촬영) 샘을 멀리서 잡은 것으로 벚꽃잎이 눈처럼 깔려 있습니다.
이 곳은 탄현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탄현은 어느 고개보다 역사서에 표현이 많이되어 있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작은 고개가 아니라 백제와 신라가 교통을 하는 고개입니다.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 23년 501년 7월에 탄현에 책을 설치했다고 하니 그 당시 백제의 왕도가 공주이고,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 시기이며, 고구려 남진하는 시기임을 감안 시 성주탁 교수님이 주장하는 금산 진산의 탄현은 공주와 상주길을 너무 우회하는 길로 사람의 속성 상 빠르고, 편한 쪽을 택하기도 하지만 고구려 남진의 급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가하게 우회해서 교통을 했다는 것에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660년 삼국사기에 백제 신하 흥수의 탄현 표현은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다.'고 하여 탄현에서 신라군을 막으라고 한 반면 백제 대신은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 王然之.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지름길을 경유하지만)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서 일당 만이니, 닭장에 든 닭이니 그물에 걸린 고기는 이들이 지형만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이 지역에서 백제가 신라를 크게 이긴 경력이 있어 그 전투에 비추어 언급하는 말로 생각되며,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해석 문제에서 중원문화연구소 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2003년) P58에 (지름길을 경유하지만) 처럼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徑 자가 지름길 경자 임
그러면 같은 탄현에 우회길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마달령과 장고개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羅>軍升<炭峴>,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게해서, 지름길 전에 탄현이 있고, 지름길과 우회로로 나누어지는 곳을 감안하면 탄현은 고개라기보다는 지금의 이백리 지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제는 동성왕 23년 501년 7월에 탄현에 책을 왜 설치했을까요.
삼국사기에 나제 동맹이 493년 결혼동맹으로 발전을 하고, 498년 7월 비타 한솔에게 사정성을 쌓게하여 그 곳을 지키게하고, 8월에 탐라(현재 제주도)가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않는다고 하여 무진주(현재 광주)까지 친정을 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는 등, 동성왕으로써는 최고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동성왕에게는 위민(爲民) 정책이 없었습니다. 삼국사기에 491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현재 공주)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나 되었다. - 금강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났고, 구휼을 하지않아 백성이 신라로 도망갔으나 이것은 신라와 결혼동맹으로 승화되면서 무마가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동성왕 22년, 499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고,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삼국사기 동성왕 23년, 500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동성왕이 위민 정책이 없는 것에 반하여 신라의 소지마립간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 소지마립간 2년(480년) 여름 5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 소지마립간 5년(483년) 여름 4월, 큰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났다. 겨울 10월, 왕이 일선 지방에 행차하여 재해를 당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재해의 정도에 따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 소지마립간 10년(488년) 10년 2월, 왕이 일선군에 행차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하사하였다. 3월, 왕이 일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도중의 주와 군의 죄수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 소지마립간 10년(489년) 11년 봄 정월,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농촌으로 돌려 보냈다.
○ 소지마립간 14년(492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먹는 음식을 줄이도록 하였다.
신라는 486년 백제 땅의 삼년산성과 굴산성의 개축을 신라 일선지방의 장정을 뽑아 하였으므로 자연히 백제사람과 신라사람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백성들은 백제와 신라의 왕들에 대한 비교도 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491년 홍수로 인하여 백성이 신라로 도망 간 금강상류지역인 보은(삼년산성이 있는 지역)이나 옥천(굴산성이 있는 지역)의 민심은 신라쪽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498년 동성왕의 무진주(지금의 광주)로의 친정은 백제 왕도인 공주 가까이에 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때 대전지역 및 청주지역에서 고구려군이 물러갔다는 의미이고, 나제동맹 상 당연히 보은과 옥천에서 신라군이 물러가야 했는데, 민심이 신라쪽으로 흐르다 보니 신라군은 철수하지않았을 것이고, 여기에 499년 가뭄이 들었는데 동성왕이 또 구휼을 하지않으니 귀족들이 항의를 합니다. 500년 삼국사기의 기록은 동성왕은 대궐문을 닫고 측근 정치를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서운 것이 민심의 여론이라고, 계속적인 동성왕에게 불리한 여론이 백제 땅으로 확산이 되니 501년 7월 탄현에 책을 세워 사람을 통제함으로 민심의 확대를 막은 것으로 보이고, 탄현의 책은 보은과 옥천지역을 백제는 포기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이시기전후로 관산성전투 전까지 백제와 신라가 싸운 기록은 없습니다.
동성왕은 귀족과 백성의 민심에서 버림을 받았고, 측근 정치를 하였음에도 최측근에게도 배신을 당하여 '백가'에게 백가가 원하지않을 일을 시켰다가 백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여기서도 민심이 받혀주지않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 또 하나의 예인 것 같습니다.
장고개(원치, 탄현)을 지나 독수리봉쪽으로 올라 갑니다. 자모리입니다. 황사때문에 흐립니다.
식장산은 진달래가 많은 곳인데, 진달래가 많이 졌습니다.
독수리봉산성입니다.
황사로인하여 전망이 좋지않아 2010년 10월에 찍었던 사진을 올립니다.(클릭)
그리고 지지난주 토요일 권선정 교수님 강의를 듣고 1911년 출판 된 조선지형도라는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인터넷 상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구하기가 힘들고, 1919년 5만분에1 지도가 종로도서관에서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지명등이 일제에 의해 많이 바뀌었겠지만 그래도 참 좋은 자료인 것 같아 상기 구글 지도 범위를 올리겠습니다. (클릭)
상기 지도를 올린 것은 관산성 전투의 후반부를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성왕은 계현을 넘어 수캐골을 지난 구천(서화천)변으로 따라오다가 신라 매복군에게 납치되어 죽음을 당합니다. 성왕이 구진벼루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구진벼루에서 죽었다기 보다는 삼국사기에 구천에서 죽은 것으로 표기되었으니 구천의 위치를 찾다보니 구진벼루라는 지명이 있고, 구진(狗津)벼루는 개구자에 건널진이고, 벼루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구천을 건너는 곳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중원문화재연구소 "신라와백제의 격전지(관산성)지표조사보고서"66쪽에는 천(川)과 진(津)은 우리말 "내"와 "나루"로서 혼용된 예가 웅진과 웅천으로 구진이 구천으로 병기 될 수 있다고 함으로 구천에서 죽은 성왕이 구진벼루에서 죽은 성왕이 되었습니다.
상기 지도에 언급된 마항리쪽을 대천리라고도 합니다. 이곳 전설은 신라 김무력장군이 여러일 이곳에 주둔하면서 신라군을 모여 정비 후 관산성을 공격하였다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동평리 서화천쪽과 연결되는 성재고개도 있습니다. 신라군은 탈출하기 수월한 매봉산과 동평리쪽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우연히 구천(서화천)변을 따라 올라오는 성왕과 마주쳐 성왕을 납치하여 대천리을 지나 고속도로의 금강유원지 휴게소쪽으로 탈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시기 여창(위덕왕)은 일본서기에 신라 땅 깊숙히 들어가 구타모라새(塞)를 쌓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타모라새의 위치를 청성면 산계리 굴산성으로 추정을 하는데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추후에 하기로 하고, 성왕의 시신 반환과정에서 백제는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했을 것이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거점도 양보했을 것입니다.
신라의 김무력 장군은 관산성을 공격하여 백제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천리, 대골이라는 곳에서 군사를 모우고, 백제 여창은 대규모 반격을 위해 작선상 후퇴를 합니다.
여창의 후퇴과정를 일본서기는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五年(五五四)冬十二月。
餘昌遂見圍繞。欲出不得。士卒遑駭不知所圖。有能射人筑紫國造。進而彎弓占擬。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發箭之利通所乘鞍前後橋。及其被甲領會也。復續發箭如雨。彌■不懈。射却圍軍。由是餘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餘昌讚國造射却圍軍。尊而名曰鞍橋君。〈鞍橋。此云矩羅賦。〉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25년(서기 554년) 겨울 12월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차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안교(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餘昌이 (筑紫)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鞍橋는 우리 말로 矩羅이(くろじ)라 한다].
백제 위덕왕인 여창이 후퇴를 하다가 신라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왜군 축차국조의 활 솜씨로 신라군을 저지하고 샛길로 후퇴를 했다는 말인데, 청성면 산계리에서 금강변 화인진을 경유하여 관산성쪽으로 철수하면서 신라가 백제를 포위할 곳은 없고, 단지 이곳 옥천에서 대천리에 집결한 신라군이 관산성을 공격함과 동시에 산계리, 금강변 화인진, 교동리, 지도상 옥천(지금의 구읍) 그리고 관산성으로 철수하는 백제군을 공격을 하니 백제군의 퇴각로가 막히고 자연스럽게 3면이 신라군 위치가 됩니다. 이에 백제군은 지금의 옥천읍사무소쪽에서 신라군을 막아내고 여창은 지오리산성과 국원산성의 사이길(요사이 도로명 각신로)로 우회(빨간줄로 표시)하여 관산성을 경유하지않고 철수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백리 황골(승지골)의 전설( 관산성 전투 시 이곳에 백제 여창(위덕왕)이 주둔을 하였는데 신라군이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을 백제 성왕이 후미에서 공격하여 신라군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성왕과 여창이 같이 있을 수 없어 갯골로 돌아가다가 신라 도도에게 기습을 받고 성왕은 죽었다는 전설)은 백제 여창의 철수는 관산성을 점령한 신라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작전을 쓴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는 그 옛날 이백리에 사는 주민 입장에서 위덕왕의 행렬이 지나가고, 신라군이 그 옛날 이백리 주민의 입장에서 여창(위덕왕)의 행렬이 지나가고, 신라군이 이 행렬을 추격하고, 독수봉능선쪽과 장고개(자모리쪽)에서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진 상황을 독수리봉능선과 자모리쪽에서의 대규모 공격은 성왕이 공격한 것으로 착각을 하여 구전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시기 성왕은 전사하였고, 여창의 철수와 왕급의 대규모 공격에서 여창은 동시에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어느 한쪽이 가짜였을 것입니다.
상식선에서 한 전쟁에서 2명을 왕을 전사시킬 수 없겠지요, 일본서기에서 여창의 철수는 신라군에 노출이 되고, 왕의 외곽 호위를 왜군이 했다는 점에서 실질 여창이 아니라 가짜 여창으로 보여집니다. 실질 여창(위덕왕)은 화인진에서 금강을 통하여 철수를 하고 내탑쪽에서 세천유원지를 경유하고 독수리봉에서 빼앗긴 관산성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작전을 전개한 것 같습니다.
즉 가짜 여창(위덕왕)의 행렬을 노출을 시켜, 신라군이 관산성 밖으로 가짜 여창을 잡기 위해 나오도록 유도를 하고, 식장산 할아비산성과 무중골의 군사는 구진벼루의 지역을 통하여 관산성을 공격하고, 할미산성의 군사는 많은 신라군의 주력이 이백리 넘어 마달령쪽으로 지나가면 독수리봉 능선에서 황골(승지골)쪽으로 기습공격을 동시에 한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을 지명을 보면 그 당시의 전투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할미산성의 백제군은 대승을 하여 승지골, 백골산, 대전 직동(핏골, 참샘마을)의 전설을 만들었고, 할아비산성의 백제군은 염장, 말무덤고개 및 영동군 각계리의 직동(핏골)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백제군의 주력인 할아비산성의 백제군은 백제군 시신을 염했다고 하여 염장, 말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말무덤 고개전설을 비추어 보았을 때 관산성 탈환에 실패를 하였고, 몇만의 군사가 맞붙은 전선으로 그 전투 현장은 용봉산성, 동평리산성, 마성산성으로 확대되었어도 백제는 관산성을 탈환 할 수 없었던 것 같고, 백제 위덕왕은 서로의 군대가 대치되는 상황에서 보은, 청산(청성)쪽과 옥천과의 연결을 차단하여 옥천 지역을 고립시키는 작전 역시 영동군 각계리 직동(핏골) 전설을 감안 시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백제군의 옥천 고립작전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때 김무력장군의 신라군이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어려우니 진흥왕에게 지원을 요구했을 것이고, 진흥왕은 고구려와 지원을 요청하여 그 해 음력 10월에 고구려군이 웅천(지금의 공주)를 공격합니다.
할미산성의 백제군은 승지골에서 승리를 하였고, 관산성으로 회군하지 못한 낙오된 신라군이 관산성으로 회군을 하려다가 백골산에서 패하고, 백제군에 감시되다가 고구려가 웅천을 공격하니 금강을 넘어 고구려군과 합류하기위해 금강쪽으로 접근을 하다가 백제군에게 전멸을 당합니다.
660년 탄현 언급 시 일당 만, 닭장에 갇힌닭, 그물에 걸린 고기는 승지골 전투와 낙오된 신라군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백제군이 웅천을 공격하는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회군을 하면서 관산성 전투는 끝납니다. 관산성 전투는 일방적인 신라의 승리가 아닙니다.
구절사와 이백리가는 코스가 나뉘어지는 곳
508고지 보루입니다. 독수리봉산성에서 내리는 명령을 봉화나 깃발, 북으로 전달하는 곳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석축입니다. 식장산은 백제군이 1만명 군사가 1년이상 먹을 식량을 비축했다고 해서 식장산이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식장산의 여러 산성과 아래의 석축이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을 합니다. 아래 사진의 석축은 급경사의 계곡에 쌓아 능선을 다니는 병사들이 보다 신속하고, 불편없이 다니라고 쌓은 것 같습니다.
진산님과 석축
할아비산성입니다
할아비산성 능선에서 본 장고개, 탄현입니다. 나무만 없다면 장고개가 잘보이겠지요.
할아비산성의 장대지입니다.
할아비산성의 성벽일부입니다.
할아비산성에서 내려 오는 급경사입니다. 이 곳 주변은 3년전에 큰산불이 나 국토해양부 장관이 직접 와서 산불진화를 독려하였습니다.
멀리서 본 할미산성입니다.
그리고 숯고개에서 본 무중골과 관산성입니다. 우리는 관산성으로 가지않고 백제가 승리한 할미성을 넘어 이백리 승지골로 갑니다.(클릭)
숯고개에서 본 갯골입니다. 멀리 철탑뒤로 보이는 백골산과 사현산성(옥천에서 항곡리산성)의 능선이 보입니다.(클릭)
사현성 이야기 나온 김에.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AC 490) 12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이중 사현은 모래사자에 고개현자로 모래재를 의미합니다. 사현성을 구글지도를 통해 자세히 설명을 하면. 아래 지도와 같은데
관산성은 4개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486년을 전후로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으로 끊어진 백제와 신라의 교통로 확보 및 고구려 남진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이고, 고리산의 의미는 지난 고리산 테마산행 시 언급한 내용으로 고리산의 뜻은 고구려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90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현성이 언급되고, 대전 모래재 근처에 산성이고, 이 산성은 관산성과 고리산(고구려산)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나제동맹으로 백제와 신라는 꾸준히 고구려에 대항하여 대전지역을 다시 탈환하기위해 고리산을 넘어 확보한 곳에 산성을 쌓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에서 모래재라는 지명은 있어도 사현이라는 지명은 보지못했는 권선정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大田地名誌》(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 에서 뽑은 대전 이라는 지명의 역사성을 태전과 비교한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 부록 권2의 「초산일기(楚山日記)」의 일부를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는데,
7월 11일(乙巳) 새벽 2시(축시)에 빈소를 파한 다음 조전(朝奠)과 상식(上食)을 올리고 나서 시신(柩)을 상여에 실은 다음 발인제를 지내고 바로 길을 떠나는 새벽 미명(未明)에 비바람이 치다가 오래지 않아 조금 개었다.
상여를 메는 등의 인부들의 담당은 주산(注山), 마산(馬山), 사현(沙峴), 와지(瓦旨) 등 4개 부락과 배달촌(白達村), 대전(大田), 사오(沙塢), 초동(草洞)에서 사창계(社倉契)가 차출(調出)하여 3연패로 나누어 번갈아 메고 동화동(東華洞)까지 갔는데 이덕원(李德遠) 등이 병풍과 차일을 냇가에 치고 기다리고 있기에 거기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사현(沙峴),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산, 마산동을 미루어 볼때 위치는 지금의 모래재를 위치입니다. 여기의 사현이 삼국사기의 사현과 같다면, 사현산성은 관산성에서 부터 백제와 신라가 대전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보이고, 관산성에 대전으로 진격하는 또하나의 길, 닭재길에서 계현산성을 넘어 사정성 중간에 위치한 이름이 없어 소호동산성이니 비파산성으로 불리는 산성이 <耳山>산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곳은 은진송의 재실이 많은 이사리의 앞산으로 초산일기와 같은 선조들의 일기를 복사본이라도 확보하여 본다면 지명을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 글을 읽은 회원 중에서 초산일기와 같은 은진송씨 집안의 일기에 관한 정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할미산성 바로 밑에서 잠시 경치를 보면서 쉬는 모습
할미산성입니다.(클릭)
할미산성의 장대지입니다.
할미산성의 성벽입니다.
이백리입니다.(클릭)
이백리입니다.
607번 버스를 타고 나와 대전 으능정이에서, 젊은이 속에 있으니.... 아! 옛날이여.... 회원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클릭)
첫댓글 아람님 수고가 많았습니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좋은 자료 올리심에 감사하구요.
부러워요... 같이 갈수 있는 날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