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연주암(冠岳山 戀主菴)
연주암의 암은 암자(庵子)의 암(庵)이 아니라 "쑥대로 만든 임시움막"을 뜻하는 菴(암)이다
菴 : 맑은대쑥 암
부수(部首) : 艹 (艸: 풀 초)
맑은대쑥
■■■암(庵) vs 菴(암)
'암(庵)'과 '菴(암)'은 모두 '작은 절'을 뜻하며, 둘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菴'은 '庵'의 이체자(다른 글자이지만 같은 뜻을 가진 글자)로, 둘 중 어느 글자를 써도 의미에 차이가 없습니다.
'암(庵)'의 원래 의미: '마을과 떨어진 곳에 나무와 풀 (쑥대)을 엮어 만든 임시 움막'이라는 뜻으로, 규모가 작은 불교 사찰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암자(庵子)는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가리킨다.
‘庵(암)’의 본래 의미(本來 意味)는 ‘마을과 일정(一定)하게 떨어진 곳에 나무와 풀을 엮어 만든 임시(臨時) 움막(幕)’이다.
그래서 ‘庵’보다는 ‘菴’이란 글자가 본래 의미(本來 意味)에 더욱 가깝다
'菴(암)': '庵(암)'의 이체자로, '庵'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결론: '암(庵)'과 '菴(암)'은 한자만 다를 뿐, '작은 절'이라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둘 중 어느 글자를 사용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
학명은 Artemisia Keiskeana MIQ.이다. 산지에서 흔히 자라는 식물로 50㎝ 가량 자란다.
잎은 어긋나고 주걱꼴이며 가장자리에 결각상의 톱니가 있고 뒷면에 갈색의 털이 난다. 밑동잎은 넓은 알꼴이며 심장형으로 땅에 쫙 깔린다.
꽃은 여름철에서 가을철에 걸쳐서 핀다. 어린순은 산나물로 먹고 뿌리는 통경(通經)과 밭은 기침약으로 쓴다.
조계종曹溪宗에 속한 연주암.
'암菴'이 암자庵子의 암이 아님에 유의할 것
연주암은 의상 신라시대에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역시 의상 대사가 시조이다.
‘왕실 주목’ 효령대군 영정 봉안
연주암은 조선 초 효령대군에 의해 중창되는 등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불교 공부와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연주암은 조선 초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효령대군 영정을 효령각에 봉안하고 있다.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큰 체격의 효령대군이 지휘관을 상징하는 등채를 오른손에 잡고 용좌에 앉은 당당한 모습이다.
효령각 주련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대군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출자왕국통불역(出自王宮通佛域) 앙첨천국상선대(仰瞻天國上仙臺),
스스로 왕궁을 나와 부처님 계신 곳 왕래하니 영주대 높은 곳에서 우러러 불국을 바라보네.”
원래 관악산 연주대(戀主臺)는 의상대사가 화엄의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대(臺)를 만들어 영주대(靈珠臺)라 불렀다.
영주는 <화엄경>의 “파도 밑에 신령한 구슬이 숨어 있다네(波底隱靈珠)”란 말에서 나온 이름이다. “식(識)의 물결과 파도 속에는 마음의 진주가 절로 숨어 버리지만, 마음의 티끌 속에 깨달음의 자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비유해 결국 영주는 불성(佛性)을 상징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6월 성간(成侃)은 ‘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에서 “서쪽 비탈로부터 오르기 시작하여 가다가 또 북으로 휘어드니 산 형세가 날카롭게 솟았다. 그래서 넝쿨을 부여잡고 겨우 올라가 보니, 집채 같은 바위가 빙 둘러 있는데, 그 밑은 거의 천 길이나 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정신이 아찔했다”며 영주대에 오른 느낌을 전하고 있다.
“승경,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
조선중기 문신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은 ‘관악산으로 스님을 찾아감 (冠岳尋僧)’이라는 시(詩)에서
“암자가 산속에 숨었으나 종소리는 감출 수 없다네. 누가 — 구름 뚫고 공색을 찾는가”
하여 관악산을 멋지게 노래했다. .
정탁이 말한 <반야심경>의 공(空)과 색(色)을 떠난 세계가 바로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곳인 영주대이다.
또한 옥담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과천에서 은거하며 ‘관악산 영주대에 올라(上冠岳山靈珠䑓)’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기언 허목(許穆, 1595~1682)은 1678년 4월 8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악산을 유람하고
“영주대는 세조(世祖)께서 예불하던 곳으로 관악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했고, 좌상(左相) 권시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주대 절정에 올랐는데, 산의 돌이 매우 위태롭고 험하였으므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아찔하고 두렵소. 그러나 세상살이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탄한 길이라 할 것이오”
라고 말해 세상살이의 위태로움을 영주대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그가 쓴 ‘관악산 유람기’에
“관악산은 영주대가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고 산승(山僧)이 말하자, 북쪽으로 올라 의상봉, 관악사와 원각사 두 절을 지나서 영주대 아래에 이르러 영주암(靈珠菴, 현 연주암)에서 쉬고,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 돌을 뚫어서 층계를 만들었는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바위틈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금씩 올라가 빙 돌아서 대의 꼭대기에 이르니, 삼면은 막힘없이 전부 바라보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서 있었다.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고 다시 돌로 처마를 만들어 불상을 덮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을 쌓았는데 돌을 쌓고 흙을 채워서 50여 명은 앉을 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 또 구멍을 파 등불 밝힐 곳을 만들었다”
고 영주대를 둘러본 일을 소상하게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