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스님의 인불사상
<1>
아미타 부처님의 후신이라고 칭송을 받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는 불자로서 보살계를 받는 수행에 대한
근본 뜻과 그 공덕과 보살계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글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보살계라는 것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분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아는데 번뇌의 속박에 얽힌 범부가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지만 또한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보살계는 부처님의 계[佛戒]라고도 하고 마음의 계[心戒]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계인 까닭에 아무나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살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보살, 즉 과거 천불의 스승이라고 알려져 있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온갖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내지 팔만사천 번뇌로 뒤엉켜 있는 범부중생들이 어떻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며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질문이다.
방편불교에 집착해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기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다. “만약 자신을 범부라고 집착하여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곧 일불승一佛乘의 종자를 말살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옛 성인이 결코 ‘많고 많은 번뇌와 업과 미혹들이 모두 다 보현보살의 참다운 진리의 세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중생을 집착하여 부처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곧 시방의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화엄경』에서 ‘부처와 마음과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앞의 질문에 대한 매우 명쾌하고 시원한 답이다. 보살계의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서 다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범부는 범부가 아니라 성인이요,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부처인 까닭에 만약 범부를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불승의 종자, 즉 자신의 부처인 무량공덕생명을 말살하는 일이다. 성인이 말씀하지 않았는가? “우리 인간이 눈만 뜨면 토해내고 심지어 꿈속에까지 꽉 차있는 번뇌 망상과 온갖 업장과 미혹의 무더기들이 그대로가 보현보살의 참다운 진리의 세계다.”라고. 만약 질문대로라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였겠는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중생을 집착하여 부처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곧 시방의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정적인 말씀이다.
영명 연수선사의 취지도 결국은 “당신은 부처님”이다. 모든 성인들이 이와 같이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리석은 탓으로 바르지 못한 견해에 물이 들어 다이아몬드를 흙덩어리로 알고 함부로 취급하여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운동을 요원의 불길처럼 일으키야 하리라.
<2>
영명 연수선사는 또 『제법무행경』이라는 경전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게송을 소개하고 있다.
“탐욕이 곧 도道다. 화를 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췄다.”
이 게송은 『제법무행경』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사찰에 계율만 숭상하는 한 비구가 있었고, 또 보살정신을 갖추고 보살행을 실천
하는 한 법사가 있었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스님은 매일 시내에 내려가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주민들의 어려운 일들을 돌보아
주느라고 늘 바빴다. 그것을 본 율사비구가 비방을 하고 꾸짖고 그를 돕는 그의 제자들까지 절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였다. 그래서 보살법사는 그를 위해서 위의 게송을 설하게 되었고 그 게송을 들은 율사비구는 곧바로 삿된 법이라고 비방하여 지옥에 떨어졌다. 그러나 게송과 같은 최상승의 법문을 들은 그 공덕으로 마음을 돌이키고 나서 지옥을 벗어나와 성불하게 되었다는 줄거리다.
사람의 삶이란 별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믿는 바대로 그 일에 탐욕을 부리며 산다. 보통 사람들도 그렇고 부처님이라는 분이나 다른 성인들도 다 그렇다. 다만, 욕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때에 따라서 울화도 치밀고 가슴도 쓰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소화해 내는가 하는 것은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다. 정도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삶이다. 사람사람의 전 존재 가치에 대한 억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수시로 변하고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 표현현상을 두고 부처니 중생이니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견해다. 사람의 가치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니다.
탐․진․치가 모든 사람들의 평상심이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금강경』에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일체법이 무엇인가? 눈만 뜨면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그 일이 아닌가? 그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진실을 잘 간파하여야 한다. 그런 삶을 떠나서 달리 불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모두 부처님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