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 불빛을 따라서 간 초등학교 길
기억과 추억 사이/옛날 고향 이야기
2006-01-08 13:34:30
논두렁 길을 건너 구절양장처럼 풀어진 황토길을 한참 오르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타나고 그 길 한참 아래 늙은 소나무의 이름을 가진 아담한 노송 초등학교가 나온다. 이름처럼 귀엽고 아지랑이 몽실몽실 피어오를 것 같은 작은 초등학교는 내 어릴 적 꿈이 서린 곳이었다. 그 꿈을 키우기 위해 밤마다 가슴을 졸이며 산길을 타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중학교 입학시험 공부는 그만큼 힘들고 혹독했다는 말이다. 요즘의 초등학교 아이들은 이해 할 수 없지만 내 초등학교 시절엔 중학교 입학시험이란 게 있었다. 손바닥만한 면 소재지에서 하나뿐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싫던 좋던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한 해 후배들은 그 시험이 없어져 다행히 중학교에 무시험 입학했지만 일 년 선배 중에는 입학시험에 미끄러져 나와 동기가 된 친구들도 몇 있을 정도로 그 시험은 꽤 까다로웠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시험에 떨어지면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재수하여 후배랑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난 후에도 나머지 공부에 매달렸다. 요즘처럼 집안 형편이 좋고 타고난 머리라도 있으면 실력 있는 선생을 모셔다 과외공부라도 받으면 그만이지만 그 시절은 모두가 각자 알아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것이 머리속에 잘 들어오고 아주 효과가 컸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초등학교 교실은 아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초등학교는 마을에서 가깝지는 않았다. 지금은 큰 발걸음으로 한걸음에 내달릴 수 있는 거리지만 그 때만해도 숨이 차는 거리였다. 책보를 봇짐처럼 둘러메고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은 지치기 딱 알맞았다. 집에서 약 30분 걸릴까 말까한 길이었지만 어린 발걸음으로 걷기엔 벅차고 힘든 길이었다. 대낮에도 혼자 산길을 타면 머리끝이 쭈빗할 정도로 산길은 온통 잡목으로 뒤덮여있었다. 그래서 산꿩이 날개 치며 울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산길을 으슥한 밤에 걸어가야 한다니 보통 간이 부은 게 아니었다. 친구들 대 여섯이 서로 얼굴을 맞대며 걸어도 무서움은 달아나지 않았다. 의지할 수 있는 건 희미한 불빛을 퍼 올리는 남포등이었는데 친구들은 남포동 주위에 불나비처럼 몰려들어 서로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면 서로가 놀랐다. 불빛이 비춰주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멀리서 산짐승이 달려 올까봐 발소리는 물론 말소리까지 죽여 가며 살금살금 걸어갔다. 들려오는 소리는 산자락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그 바람소리에 일렁이는 남포동의 불빛뿐이었다. 이렇게 가슴 졸이며 걷다보면 산도 길을 비켜주고 친구들은 초등학교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낮은 건물과 넓은 운동장이 한 눈에 들어오면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친구들은 닫아걸었던 말문을 열고 재잘거렸다. 눈앞을 꽉 막은 산길보다 앞이 확 트인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놓이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순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은 낮은 산마루를 뒤로 하고 밭이 넓게 펼쳐진 학교, 그 앞으로 확 트인 운동장은 답답한 가슴을 열어주기에 충분했다. 봄날이면 더 그랬다. 진달래와 철쭉이 아우성치며 물든 산에서 처량하게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가 초등학교 교실을 꽉 채울 때는 흐물흐물 애간장이 녹았다. 내가 만약 그 때 시 한수 읇을 줄 아는 어린 시인이었다면 진달래 향기에 피토하는 뻐꾸기 소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한창 수업 중에 열려진 창으로 후꾼 들어오는 청보리 내음을 맡고 있으면 저절로 졸음이 밀려들었다. 온 몸을 나른하게 해주는 봄의 내음을 맡으며 한참 들길을 달리다보면 아득한 길 너머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 내가 보이고 그럴 때면 흠칫 놀라 잠을 깨곤 했다. 그 때의 꿈은 아마 적중했는지 모른다. 현재 나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여태까지 배웠으면 뭣하는가. 글 한 줄 모르는 까막눈보다 못한 나의 삶, 피곤과 설움에 젖어 살아오다보니 삶은 너무 헤지고 누추해서 이제 꿰맬 자국도 없다.
그러나 마음의 감성만은 수산시장의 은빛 갈치 때처럼 푸득거려 되먹지 않는 시 나발을 불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시 마저 없었다면 나는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혔을지 모른다. 이것이 여태껏 배운 나의 지식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지식은 쌓이면 쌓일수록 숙성하고 높이 된다는데 나의 지식은 시장통의 욕지거리보다 못하다. 하나 써먹을 게 없다. 대학에서 배운 불어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차라리 배우지 않았던들 나의 인생은 아마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을지 모른다. 배우지 않고도 제 터를 일군 사람들은 많다. 더 넓게 말하면 국회의원도 있고 대학총장도 있었고 대통령도 있다. 그런 입지적인 인물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복을 타고났나하고 입을 벌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나의 삶을 다른 사람에 비유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나의 삶과 길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수 십 년 동안 배운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나의 지식은 폐품처럼 쓸모 없고 형편을 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내 자리가 이렇다 보니 그동안 배운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차라리 못 되었으면 팔 다리 다 걷어 부치고 공장이라도 들어가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면 지금보다 형편은 더 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물론 내가 내 인생의 좌표를 잘못 설정한 점도 있다. 가야 할 길로 가지 않고 출세 길인 줄 알고 샛길로 빠져 든 것이 내 인생에 하나의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은 이제 와서 가슴을 쳐도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잡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지름길 임을 알았다.
하기야 그 어린 초등학생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예언자가 아닌들 장래의 자신의 일까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공부를 해 한다는 갓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이 시험을 보니 나도 시험 본다는 식으로 그렇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그늘 내려선 산길을 걷는 것도 장래의 큰 포부가 있어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당장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더 급했다. 치맛바람도 없었고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공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도 않았지만 친구들은 척척 알아서 공부에 매달렸다.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요즘의 가정 현실을 비교하면 내 초등학교 시절의 시험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한 시범적인 케이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교실에서 흐린 남포동 밑에서 공부를 하고 늦은 시간 집을 향하여 산길을 타고가면 산짐승이 쿡쿡 울었다, 이름도 모르는 산짐승이 울면 날것들은 숨어서 날개를 치기도 했다. 어둠을 갉아먹는 밤은 산짐승과 새들과 더불어 친구들의 귀가길을 공포로 몰아넣는 주범들이었다. 이 공포가 친구들을 친하게 엮어주는 구실을 했다. 무서움 앞에는 오직 단합만이 살길이었다. 산짐승을 만나든 귀신을 만나든 서로가 몸을 밀착시켜 걸으면 덜 무서웠다. 친구들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와 냄새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끈끈한 우정도 낮이 되면 확 바뀌어 버렸다. 밤길을 탈 땐 함께 의지하며 몸을 맞대며 걷던 친구들은 그 와중에서도 서로를 곯리며 싸움질을 했다.
특히 경희와 경용이는 종종 싸웠다. 어쩐 일인지 경용이는 계집애인 경희만 보면 놀려먹고 수작을 걸었다. 50이 접어든 경용이는 지금은 키가 크고 몸집도 좋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주 키도 작고 허약체질이었다. 그런 체질을 가진 경용이가 경희를 꺾고 의기양양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안 그래도 경희는 얼굴이 예뻤지만 성깔은 있어 머슴아인 경용이 한테 쉽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것을 두고 친구들은 늘 경용이를 골려 주었다 경희한테 진 것이 크나큰 수모였던 것이다. 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니며 공부했던 6년 동안에도 중학교 시험은 자신의 행로의 분기점을 결정짓는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의 합격 여부가 인생을 갈라놓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은 후배인 나와 친구가 되고 친구들은 한 학년 미끄러져 후배와 함께 다시 입학시험을 치르는 수모를 톡톡히 겪어야 한다. 시험에 미끄러진 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자신이 게으르게 공부를 한 탓이었다. 일종의 업인 셈이다. 일 년 선배 중에는 시험에 미끄러져 우리와 합류한 친구 몇이 있었지만 나의 친구들은 다행히 그런 부류는 없었다.
세월은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이제 50이 되고 그동안 학교는 무진장 변해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던 폐교바람으로 학교는 빗장을 걸게 되었다. 무서움에 쭈빗쭈빗 머리칼이 치솟던 황토빛 산길이나 그 산길을 타고 올라간 산자락에서 들려오는 비둘기의 애간장 녹는 소리, 홰치듯 허공으로 솟구치는 꿩의 목 찢는 울음소리들이 모두 가슴 속에 묻히게 되었다. 하늘로 꺼졌나 땅으로 꺼졌나 그렇게 활기차던 학교가 통폐합의 명분으로 분교가 되더니 슬그머니 폐교가 된 모습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리게 저려왔다.
눈만 뜨면 도시로 눈길을 주던 농민들, 도시에는 금덩이라도 쌓아놓고 있는 줄 아는 듯 농촌을 뜬 사람들 때문에 농촌은 노인들만 남는 활기 없는 시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국도를 타고가다 초등학교를 바라보면 가장 가슴이 아프다. 학교 앞 시냇물에서 보를 쌓아놓고 목욕을 감던 일, 양코들을 보면 깐수메를 달라며 쩝쩝 기부미를 외치던 까맣게 탄 친구들의 얼굴들, 교실 속 풍경의 영상들은 지금생각하면 모두 버릴 수 없는 추억들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무시험으로 그냥 마치지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유있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숫제 경쟁자들이다. 옆에 있는 단짝들도 서로 어떻게 무너뜨릴까 머리를 굴린다. 우정은 달아나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학교가 학력고사를 보는 날은 일생일대의 혼란을 일으킨다. 시험 그 자체가 출세를 보장해주는 보중수표가 되어 서로 이를 악물고 그 관문에 도전한다.
심신은 하나같이 절어있고 요령과 눈치만 발달해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갈 길을 배운다. 삶은 학생 때부터 독하고 모진 것을 배우는 지름길로 변한지 오래다. 그러고 보면 그때의 중학교 입학시험은 어떠한가. 고향에 가서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황토길 산길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분위기로 치르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그리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