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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_마가23_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가복음 7장 1~13절 “1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할렐루야! 한주간도 건강하고 평안하셨는지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배경으로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
어제 어떤 꿈을 꾸고 오늘 일어나셨는지요? 저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 안좋은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은 벌써 한 열 번쯤은 꾼 것 같습니다만 꿀 때마다 기분이 별로 안좋습니다. 군대에 가는 꿈 다음으로 꿈속에서도 기분이 안좋은 꿈은 시험을 보러 갔는데 이미 시험이 끝났거나 날짜를 잘못알고 가는 그런 꿈입니다. 시험장소가 바뀌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시험범위가 달라서 황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깨고나서 꿈이었구나 하며 안심하면서도 오늘이 몇일이지 확인해본 적도 있습니다. 열심히 시험을 준비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 하는 허탈감을 꿈속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준비한 것들이 허사가 된듯한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꿈에서 깨서도 마음이 영 찝찝하고 허탈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연관되어서 생각된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경배하였도다!”라고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아마 생각만해도 끔찍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래도 참 종교적으로 열심있고 경건하다고 생각되어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7:6-7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지난 2주전에 로마서 성경공부에서 읽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장들입니다. 그중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열심을 말하면서 그것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였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0:2-3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이단인 예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고 멸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는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1:14)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믿는 성도들을 잡으러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서 행한 열심있는 행동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처럼 황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게 된 이후에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지식’입니까?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0장 30-3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롬10:32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은 ‘올바르지 않은 지식’에 때문이고 그것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어찌 그러하냐?’라는 말의 앞 구절들을 읽을 때 조금더 분명해 집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세상의 영혼들에게 주시려고 하신 의는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을 의지하여 살아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의 법, 율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율법이 깨우쳐주는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의를 얻게 된다’는 지식을 따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행위’, ‘자신들의 열심있는 행동들’을 의지했기 때문에 오히려 메시야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았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 Vs 믿음을 의지하는 사람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품이나 인격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어쨌든 열심히만 하면 일단 인정을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을 좋은 성품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이것 저것을 한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고, 내가 이정도 했으니 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보다 더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고백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먼지와 티끌같이 무익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나를 나되게 하셨습니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고백 속에 주어집니다. 무능하고 무익한 존재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셔서 흘리신 그 보배피를 통해 나는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었다는 믿음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내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내가 내세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로 이야기하자면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안식일을 비롯한 절기와 율법들을 모두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표지로써 마땅히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욱 더 많은 규율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의도는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의 삶에서 살아내기 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규율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손 부정한 사람
예를들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문제가 되었던 음식 먹기전에 손을 씻는 정결예식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1절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적들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퍼지게 되자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 몇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식사) 먹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예법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하는 로마의 수신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합니다. 3절과 4절의 내용은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대적 배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손씻는 규례에 대해 설명하는 글입니다.
3,4절,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손을 씻는 것은 출애굽기 30장 18-21절에서 제사장에게 요구되었던 정결규례였습니다. 또한 일반 사람들도 혹시 부정한 사람(유출병환자 레15:11)과 접촉을 하였을 때 씻는 정결예식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장과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다녀와서 혹시 모를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을 의심해서 물을 뿌리는 전통과 관습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같은 유대인들의 율법이해나 행위는 율법을 더 잘 지키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과 같이 섞여 살면서 유대인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러면에서 만들어진 장로들의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대중이나 갈릴리의 어부들과 같은 사람들은 이처럼 엄격하게 매번 율법을 지키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삶의 일상사에서 부정한 것들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중에는 이와같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해 사람들이 보지않을 때는 잘 지키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전통을 율법과 동등한 권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엄격한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까지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은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5절)’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겉에 집착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겉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겉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은 내면의 문제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되는 내면은 잘 관리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손을 씻도록 하신 율법은 손을 씻으면서 자신의 행동을 씻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마음으로 나아간다는 상징적인 의미였고 거룩한 예배, 거룩한 제사가 가능하도록 자신을 관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의 정결에만 집착하다가 마음의 정결함은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행위를 의지하고 믿음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겉에 집착하고 자신의 열심과 행위에 치중하다가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경험들이 있으십니까? 저는 분주하게 예수님과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일을 하다가 아무일도 안하고 예수님 발앞에만 앉아있는 마리아를 향해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마르다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마르다가 일을 많이 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놓치게 되었고, 마리아에 대한 불편한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 어떤 집에 심방하고 예배하려고 하면 극진히 잘 대접하시기 위해 정작 예배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사역할 때 어떤 집사님은 자녀들을 교회에 출석시키기 위해서 아침부터 전쟁을 치렀다고 말씀합니다. 그 전쟁 가운데 교회 나온 아이의 마음은 이미 분노로 가득하고 집사님도 지쳐서 이렇게 신앙생활해야 하는가 회의감이 든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겉에만 집착하다가 바리새인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아니면 믿음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갑니까? 행위를 의지하여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말씀을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의 결과는 사람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예로써 예수님은 ‘고르반’ 전통을 말씀하십니다.
막7:11-13 “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유대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악용한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님께 드리고 도와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종교적 제도로 숨긴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이 생활이 너무 어려우면 회당에서 그들을 도왔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헌금을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이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가서, 돕고 싶지만 고르반을 했기 때문에 도울 수 없다고 말하고 교회에 가서는 도와 달라고 하여 드린 것을 도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전통과 제도를 악용하면서 어겼던 것입니다.
사람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고르반과 같은 제도는 교회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거나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마저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서울 광화문 광장 한켠에는 ‘모든 권세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명분으로 ‘정부와 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의 원인규명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촉구하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향하여 마귀들이라든지 종북이라든지 하면서 악다구니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를 명분으로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다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성경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뻐하는 자들과는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는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니 이제 그만 울고 집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말일뿐더러 때로는 종교적인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너무 믿음이 좋은 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예수님을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셨고 갈등하셨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은 흔들림이 전혀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도 흔들리고 때로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믿음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고난당한 사람, 실패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그를 사랑하고 보듬어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참 사람됨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금요일은 작년 4월 16일 304명의 영혼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임을 당한 세월호 참사가 5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날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월호의 선채도 인양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9명의 사람들이 배안에 남아있습니다.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명인 4명의 학생들과 양승진, 고창석 두 선생님, 이영숙, 권재근 아빠와 아들 권혁규, 우리에게는 그저 9명 숫자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이고 딸이며, 남편이고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직도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몇일전에 다윤이의 엄마이신 박은미 집사님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 꿈에서 다윤이가 나타나 자신은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해서 ‘내 딸이 살아있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깨고서는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허망했을까요? 차라리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우셨습니다. 허망한 꿈, 차라리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꿈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어제는 105년전, 1910년 8월 29일 경술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경술년 국치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광복절은 잘 알지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국치일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105년전 오늘도 나라를 빼앗긴 그 첫날 아침을 맞는 많은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어제의 일이 꿈이었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되어 참담함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라잃은 백성의 슬픔과 고난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다가오는 한날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날 우리 인생은 어떤 꿈처럼 느껴질까요? 그때 우리가 허망한 꿈을 꾼 것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한평생 산 인생이 허망한 꿈이었으면 바라는 그런 순간이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온 삶이 ‘너희가 헛되이 나를 경배하였도다. 헛되게 인생을 살았구나!’라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이 있을까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행위를 의지않고 믿음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이 내 안에 계시고 나를 그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것은 내면의 하나님 형상, 예수님의 생명이 어떻게 마음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지에 대하여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으시는 보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서 나와 동행하십니다. 어떤 자리 어떤 환경에 놓여 있더라도 그분은 나를 떠나시지 않고 나를 붙드신 손을 놓지도 않으십니다. 입술로만, 몸으로만 주님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날마다 그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매일의 일상을 예수님의 참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