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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물께마을, 江村)은 강물에 흐르고
현대인(現代人)들의 일상생활은 일터에서 가정으로 집에서 직장으로 하루하루가 쳇바퀴 돌듯하는 되풀이의 연속입니다. 출퇴근 시간의 차량행렬은 언제나 도로는 주차장이 되기가 일수이며. 전철은 발디딜 틈도 없는 지옥철로 변해 버리고, 만원버스에서는 빠져나오기도 숨이 가쁠 정도입니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 강촌에 살고 싶네 "와 같은 노래말은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업무에 시달리는 그들에게는 꿈에 그리는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강촌(江村)은 물께말(마을)이라는 강가에 있는 마을입니다. 22일(일) 01월 2017년 오늘 오랜만에 백년지기 여섯명들과 강촌역(江村驛)에서 출발하여 북한강가를 따라서 가평역(加平驛)까지 걷습니다. 상봉역에서 경춘선 전철을 타고 오전 10시 50여분이 다 되어서 강촌역을 빠져 나옵니다. 2010년 12월에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에 있던 기존의 강촌역은 폐역(閉驛)이 되고 600m 정도 들어간 방곡리에 지금 이곳에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20여년 전에 강촌에 있는 검봉산(530.2m) 산행을 올 때는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열차를 이용했습니다. 객차 안에서는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남녀 청춘들로 좌석은 물론이요 통로에도 가득합니다. " 오징어 땅콩 삶은 계란 김밥 시원한 사이다 맥주 있어요 "를 외치는 손수레 판매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젊은이들의 웃음소리와 범벅이 됩니다. 객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부분에도 자리잡고 앉아있는 승객들로 완행열차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려면 "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잠깐만요" 하는 말로 사람 사이를 비집고 다녀야합니다. 서울에서 75km 거리의 열차로는 두시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있는 강촌역입니다.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며 고즈녁하면서도 한적한 시골 마을입니다. 휴일이면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젊은 청춘남녀의 데이트와 MT 장소로 젊음을 구가하는 낭만적인 마을이기도 합니다. 강촌역과 건너편에 마주 바라보이는 등선봉과 삼악산(653m) 사이로는 북한강(北漢江)이 흐르고 있으며 강촌교(江村橋)가 가교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검봉산(劍峰,칼봉) 산행은 강촌역 바로 옆 강선사를 거쳐서 강선봉을 오르고 검봉산으로 오릅니다. 능선을 타고 걷노라면 오른쪽 저 아래 굽이쳐 흐르는 북한강 물줄기가 마치 한폭의 수채화(水彩畵)를 뿌려 놓은듯 합니다. 계속되는 능선 왼편으로는 잣나무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지친 산객들의 폐포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 주고 있습니다. 호젓한 산행길은 백양리의 굴봉산(390m)과 봉화산(486.8m)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연계산행으로도 즐거움은 배가(倍加)됩니다. 봉화산과 문배마을 이정표 삼거리에서 문배마을로 향하여 구곡폭포 쪽으로 하산을 합니다. 자연산 야생 돌배와 과수원 배나무 배의 중간크기 과실인 문배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조각배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서 문배마을이라고 불리우며 200여년 전에 형성되었습니다. 요즘은 마을 전체가 식당마을로 변해버린 모습이지만 그 때는 서너집만이 시골집에서 닭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십이삼년 전(前)에 구곡폭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딸내미 가족과 함께 닭백숙을 먹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외손녀가 두살 때로 생각됩니다. 무엇이 그리 불편했던지 계속 울어대는 손녀를 엄마가 안아주어도 업어주어도 계속 울어댑니다. 막무가내인 손녀를 할아버지가 등에 업고 밖으로 나와보지만 울음은 그치지를 않습니다.우는 손녀를 까꿍까꿍 달래도 보고 재롱(?)도 떨어 보지만 별무 효과일 뿐입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멍멍멍 짖어대는 견공(犬公) 소리에 손녀는 울음을 뚝 그칩니다.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한 눈동자에는 개를 찾느라 호기심으로 가득합니다. 엷은 미소까지 머금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가 짖는 소리에 따라서 울다가 말다가를 반복합니다. 오빠는 Y대학병원 정형외과(整形外科) 레지던트 시절이라 짬을 내기가 어려워서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인 딸이 먼저 이십대 후반에 출가를 하여 아빠에게 안겨준 삶의 보람이며 보물인 맏 손주녀석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4학년으로 훌쩍 커버린 그 녀석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녀석을 달래느라 음식맛도 제대로 못 보고 진땀을 흘리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녀석을 업고 고개를 넘어서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는 온 몸이 땀범벅으로 녹초가 된 기억이 바로 어제 같이 새롭습니다. 왜 네 나이에 결혼을 할 생각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던 딸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도 애비의 가슴에는 멍울로 남아 있습니다. 어릴 때도 큰 소리 한번 치지 않던 애비가 총명하고 예쁜 성숙한 딸에게 어처구니 없는 망발을 한 것입니다. 2년여 동안 약국을 그만 두고 쉬면서 매일 등산을 하곤 술로 세월을 마비시키던 알콜중독자의 돌출 행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봉화산 동쪽 수동리에 있는 고깔봉(420.5m)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계곡물인 강촌천(江村川)과 아홉개의 바위능선을 휘감아 떨어지는 50m 높이의 구곡폭포 소하천(小河川)이 강촌리에서 어우러져서 북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옛 강촌역에서 구곡폭포까지는 약 4km이며 중간지점에 검봉산 칡국수집이 산객(山客)들을 유혹합니다.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객실로 사용하여 앞에는 평상들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칡국수 칡술 칡부침 촌두부 편육이 주메뉴이며 촌두부와 칡국수는 직접 이곳에서 만드는 수제품(手製品)입니다. 칡국수 칡부침 촌두부 편육을 안주 삼아 칡술과 함께 곁들여 먹는 맛은 이곳만의 담백하며 깔끔한 느낌입니다. 칡술과 칡국수가 생각 날 때면 검봉산이 아닌 건너편에 있는 삼악산을 오르고도 일부러 찾아들곤 하던 맛집의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히 눈에 띄이는 음식점도 별로였으나 시골 정취(情趣)를 마음껏 느낄 수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선(複線) 전철화로 강촌역이 신설된 이후로는 현재의 강촌역에서 옛 강촌역까지의 차로(車路) 양쪽으로는 서울의 어느 한 곳을 옮겨 놓은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고 있습니다. 닭갈비집을 비롯하여 주점(酒店) 레스토랑 숙박시설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완전한 유흥가로 탈바꿈 한 모습입니다. 일부 지역에는 스쿠터 바이킹, 디스코 팡팡, 허리케인, 회전목마, 범버카, 유아용 놀이기구 등이 있는 놀이동산도 있습니다. 놀이기구 이외에 강가에는 바나나보트, 웨이크보드, 플라이 피쉬 등 수상 레포츠가 준비되어 있으며, 옛 강촌역에서 김유정역까지는 레일바이크도 즐길 수 있습니다. 완전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자칫 쾌락의 마을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많은 놀이기구와 유흥음식점들이 있으나 노객의 마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예전과 같이 다시 찾고픈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강촌(江村)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괴리의 도시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폐역(閉驛)이 되어버린 옛 강촌역 승강장의 벽과 기둥에는 갖가지 사연과 사랑하는 연인들의 이름들로 가득했습니다. " XY대학 화이팅, SKK대학이여 영원하리, DD여대 연극영화과 MT, 이부자 ♡ 김종웅, 2001년 1월 11일 서류바와 대바기 다녀가다, 함하자 3년만기다려, 조단서는 호적등본을 떼어와야 결혼할거야(영자가) , 손수자와 박행고의 결혼기념일, 최길옥과 일곱번째 사랑의 세레나데, " 등등을 겹친데 또 덧 씌워서 꼭꼭 눌러쓴 흔적들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굳은 맹서 그 약속 그 사랑의 언약들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습니다. 새끼손가락을 걸며 영원(永遠)한 사랑을 약속하던 그 때의 연인(戀人)들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연들의 약속과 맹세(盟誓)들은 이제는 까마득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지도 오래입니다. 지금은 그저 말 없는 울씨년스런 겨울바람만이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칼바람을 맞으며 강가의 보행로로 들어섭니다. 그저께 내린 눈길이 군데 군데 빙판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깁니다. 물결치며 흐르는 북한강의 물살은 맑기만 한데 강물을 스치며 날으는 새 한 마리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멀어져 가는 옛 강촌역을 뒤로 하니 불현듯 강촌(江村)에 대한 그리움이 노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江村 (두보,杜甫)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自去自來堂上燕(자거자래당상연)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碁局(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맑은 강물이 마을을 한구비 감싸서 흐르며 길고도 긴 여름의 강촌은 그윽하기까지 하구나.
집 마당과 집 위를 오가며 날고 있는 제비도 강물 위를 스치며 날으는 기러기도 평화스럽기만 하도다.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있으며 어린 아들 녀석은 낚시 도구를 만들고 있는구려.
내 몸에 병이 들어 아프더라도 약만 있으면 이 보잘것 없는 몸이 무엇을 더 원하고 구하리요.
자연 속에 파묻힌 강촌의 한가로움과 아름다움은 수채화를 뿌려 놓은듯 환상의 그림입니다.
두보가 49세에 읊은 강촌에 대한 시는 말년생활을 가족과 함께 강촌에서 자연에 파묻혀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삶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이백(李白)과 더불어 시성(詩聖)으로 불리우며 이두(李杜)로 병칭(竝稱)되기도 합니다. 두보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 속에서 숙모 슬하에서 자랄 수 밖에 없습니다. 7세에 벌써 시상(詩想)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명성을 받기 시작합니다. 과거시험에 낙방을 하여 꿈을 접어야 했으며 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자기 분수에 맞게 편안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게됩니다. 이백은 자연과 세속에 직접 부딫치면서 자신을 마음껏 키워 나갑니다. 이백일두시백편(李白一斗詩百編)이라고 이백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시상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며 두보가 읊은 말입니다. 중국 시인 중에서 두보 만큼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출한 시풍도 없습니다. 전란(戰亂)으로 피폐한 생활상과 사회에 대한 부조리와 부정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인 입니다.
"부자집에서는 술과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며 굶주려서 죽은 백성들의 해골이 저잣거리를 메운다"는 날센 비판도 가감없이 시로 읊으곤 합니다. 두보의 시는 하나의 역사책과 같다고 하여 사시(史詩)로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강물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눈동자마저 움츠려들게 하며 발걸음은 어느새 백양리역 구내로 접어듭니다. 조금 전에 스쳐 지나온 옛 백양리역는 승객 대여섯명 정도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으로 시골의 자그마한 곳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강가에서 바라보는 지금의 백양리역의 거대하고 웅장함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실감나게 합니다. 3층 정도 높이의 구름다리 위에 철근과 유리로 지어진 역사(驛舍)는 하나의 빌딩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출입구로 들어서면 해외로 여행가는 공항(空港)에라도 나온듯한 착각마저 들게하고 있습니다. 넓직하고 높은 천정과 깨끗한 화장실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3층 높이 정도의 계단이 있으며 엘리베이터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승강장에는 돔 형태의 높은 천정으로 되여 있으며 승객들 위한 대기소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출입구 바로 안쪽에는 고객지원실(승무원실)과 고객대기소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승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이 고객대기소 보다 두배 이상은 넓으나 직원은 달랑 한명만이 보입니다. 대기소에는 추위를 피하느라 2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드는 장소입니다. 들어서면 훈훈한 난방이 노객들의 얼어버린 가슴을 녹여주고 있습니다. 위짜추의 아내가 준비해 준 영양밥을 김에 얹어서 따끈한 율무 견과차(茶)와 함께 움츠러둔 몸의 한기(寒氣)를 날려 버립니다. 주위에는 산과 북한강만이 감싸고 있으며 띄엄띄엄 펜션이나 별장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민들도 없는 한마디로 허허 벌판 같은 이곳에 이처럼 거창한 전철역사(電鐵驛舍)가 세워진 것이 생뚱맞기 까지 합니다. 조금은 실용적으로 주위 여건에 맞는 예산(豫算)을 집행했으면 하는 노객만의 생각을 해 봅니다. 여기서 전철로 가평역으로 가겠다는 백년지기(百年知己)의 푸념을 하는 벗도 있지만 계속 걸어서 굴봉산역까지는 가기로 합니다. 차디찬 강바람이 휘몰아치는 빙판길에는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들 노객들 뿐입니다. 세 시간 정도 걸으며 앞에 보이는 것은 춘성대교와 경강대교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일렁이는 북한강물을 바라보며 차디찬 바람을 헤치며 걷는 짜릿한 쾌감(快感)에 젖어서 찾아가려던 굴봉산역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두 녀석이 무릎을 비롯하여 온 몸이 피로에 지쳐서 도저히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포기 상태입니다. 경강대교 밑에서 세명은 택시를 타기로 하고 세명만이 경강대교를 건너서 가평역으로 향합니다. 북한강 철교 밑으로 흐르는 강물은 꽁꽁 얼어서 그 위로는 새하얀 눈이 덮혀 있어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용감한 것인지 부질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도 걷지 않는 얼어버린 강 위를 한 사람이 조심스레 걷고 있습니다. 내려가서 한번 미끄러지듯이 계속 걸어 보고픈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 야 이 미친 놈아 " 하며 소리지르는 녀석들의 핀잔이 지레 짐작 들리는 것 같습니다. 자라섬을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그냥 서류바 또파파 두명이 기다리고 있는 가평역으로 들어갑니다. 시간은 약속 시간을 훨씬 경과된 15시 30분을 넘기고 있습니다. 뒤쳐진 벗들은 택시콜이 여의치 않아서 이를 악물고 걸어서 도착한 시간은 16시 15분입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볼멘소리를 아우르며 가평잣을 구정(舊正) 설 선물로 미안함을 달래봅니다. 택시 두대에 나눠 타고 손두부집 맛집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허름한 시골집을 그대로 식당으로 운영하는 곳으로 예전에 연인산을 다녀오면서 한번 들렀던 곳입니다. 솥뚜껑에 들기름을 두르고 구워 먹는 두부와 곁들인 꽁치조림과 콩비지찌개가 한잔 술의 맛을 북돋아줍니다. 지친 백년지기 벗들의 피로가 계속되는 권주가 합창소리에 산산이 부셔져서 허공(虛空)으로 날아가 버리는 순간입니다.
변모해 버린 오늘의 강촌역 주변에는 주정(酒精)과 닭갈비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오가는 스쿠터의 엔진 소리만이 귀청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서산(西山)으로 넘어가 버린 태양은 내일 또 다시 떠 오를 것이지만, 오고프고 찾고 싶고 보고파 하던 옛 강촌역(江村, 물께 말)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으려는지. 답답한 이 노객(老客)의 마음을 저기 저 말 없이 흐르는 차가운 북한강물로 띄어 보내려고 합니다.
2017년 2월 11일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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