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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쓰시마섬)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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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對馬島)의 '대마(對馬)'는 '두섬(二島)"의 뜻이다.
일본식으로 읽을 때 '쓰시마'라 하는데, '두섬'이란 우리말이 일본에 건너가 그 곳의 발음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즉 우리말에서의 '두'가 '쓰'로, '섬'이 '시마'로 된 것.
'섬'의 옛말은 '셤'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두시언해>에도 '섬'이 '셤'으로 나온다. 이 '셤'이 일본에서 '섬을 뜻하는 말인 '시마' 발음에 더 가깝다.
따라서 그 이름으로 보아서도 옛날부터 우리 땅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마도를 "對馬'라 표기하고 '쓰시마'로 읽는다.
즉 '쓰시마시마(TSUSHIMASHIMA)'라든지 '쓰시마노시마(TSUSHIMANOSHIMA)'라고 읽지 않고 '쓰시마'( TSUSHIMA)로만 읽는다.
특별히 '쓰시마'를 '쓰시마市(對馬市)' 등과 구별하여 섬이름임을 강조하는 경우에만 '쓰시마노시마(TSUSHIMANOSHIMa.對馬島)라고 쓰는 경우가 있다.
'쓰시마' 자체에 이미 '섬'을 뜻하는 '시마(SHIMA)'(島)가 들어가 있기 때문.
우리나라에서 볼 때 남북 대마도는 두 섬으로 보여 '두섬'(二島)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불러 왔는데, 일본에서 이를 비슷한 발음으로 '쓰시마'로 한 것. "쓰시마섬'이라고 부르면 '두섬섬'(二島島)이 되니까.
'두'라는 음은 일본 카타카나로는 적을 수도 없다. 그래서 '두' 대신 '쓰'로 적어야 한다.
'쓰시마'를 한자로 "對馬"라고 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한 설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對馬'란 표기는 기원 후 3세기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처음 나타난다. 일부 학자는 중국 사람이 '두섬'을 당시에 '두이마'로 듣고 이에 상응하는 한자인 '對馬'로 차음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다음과 같은 음운변천이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두울셤→두셤→두시마(dusima)→두+ᅀㅣ+마(duzima)→두이마(duima)('ㅣ'모음 앞에서 ᅀ자음 탈락)
일본 대마도 여행
대마도로 가는 배 위에서
대아고속 오션플라워호.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운항시간 1시간 10분 소요.
우리 선조들은 일본과 마주한 바다를 지금처럼 대한해협(大韓海峽)이라 부르지 않았다.
원래 조선시대부터 '현해탄(玄海灘)'이라 불렀다. '현해탄'은 일본 표기가 아니라, 우리의 표기 방식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사이에 있는 대마도(對馬島)의 '대마(對馬)'가 일본식으로 '쓰시마'라 발음되기에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이라 부른다. 현해탄을 대한해협으로 바꿔 부른 건 얼마 되지 않았다.북한에서는 '조선해협'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영화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해탄을 '검을 현(玄)', '바다 해(海)'라 해석하여, 흔히 '검은 색을 띠는 바다'인 줄로 알고 있는데, '현(玄)'은 검다는 뜻 외에 '아득하게 멀다'는 뜻도 있는데, 이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부산에서 날씨 좋은 날에 대마도를 바라보면, 이 섬이 멀리 가물가물하게 바라다 보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탄(灘)'은 '여울'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강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아주 빠르고 급하게 흐르는 곳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좁은 바다'의 뜻을 담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마도는 지금은 일본 땅으로 되어 있지만, 동해의 독도와 더불어 조선(朝鮮)이 다스리던 우리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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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
「조선국 역관사 입선지도(朝鮮國譯官使入船之圖)」는 부산진의 영가대를 떠난 조선의 문위행(問慰行)이 대마 부중(對馬府中), 즉 이즈하라[嚴原]로 입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조선 역관사는 문위행을 가리키던 대마도 쪽 용어이고 사료에 따라서는 도해 역관(渡海譯官)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문위행은 왜학 역관(倭學譯官)이 정사(正使)로 임명된 것으로, 대마 도주가 에도[江戶]에 참근 교대(參勤交代)한 것을 위로하거나 대마 도주·막부[幕府]의 경조사를 위로·하례하기 위해 1630년대 이후 모두 54차례 파견되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대마도였다.
문위행이라고 하는 외교 사절은 조선 후기의 중국 사행 중 역관이 정사로 파견된 뇌자행(賚資行)과 대비될 수 있다.
뇌자행은 중국에 상주문을 올리고 책력을 받아오고 표류민을 송환해 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명칭을 통해서도 등급을 알 수 있듯이 통신사는 문관 고급 관리가 정사로 파견된 ‘사(使)’였고, 대마도로 파견된 문위행은 역관이 정사로 임명된 ‘행(行)’이었다.
문위행의 규모는 당상관 1~2인, 당하관 1인 외에 군관·포수·취수 등을 포함하여 적을 경우에는 40~50명이었지만 대개 70명 선을 넘었다.
「조선국 역관사 입선지도」에서 볼 수 있듯 문위행은 2척의 배로 출발하였고 대마도에서 파견된 재판 차왜(裁判差倭)가 해로를 안내하였다. 대마도 측의 예인선이 해로를 안내하고 바람이 없을 때는 조선 배를 밧줄로 연결하여 해안에 접안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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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순국비
박제상 순국비는 대마도의 향토사가인 나가도메 히사에와 황수영 교수의 노력으로 1988년에 세운 것이다. 미나토의 작은 포구 방파제 바로 앞에 홀로 서 있다.
이 순국비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는 박재상이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던 장소인 목도가 대마도가 확실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대마도의 '사우미의 미나토'라고 상세히 그 장소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순국비를 자세히 보면
'新羅國使 朴堤上公 毛麻利叱智 殉國之碑'
(신라국사 박제상공 모마리질지 순국지비)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모마리질지'는 박제상이 일본으로 갔을 때의 사신명으로 이두처럼 일본인이 박제상을 발음상으로 적당히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질(叱)'자는 이두에서 사이시옷 소리를 적던 글자로서 실제 발음은 '모마릿지'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맨 마지막 글자인 '지(之)'자는 고대에 존칭의 뜻으로 덧붙이는 말이었다. 즉, 신라시대에는 '박제상'이라는 한자를 적어 두고 '모마리'에 가까운 발음을 했을 수도 있다.
이 순국비는 약 30년 전 일본 정부에서 세운 비석으로 대마도 북쪽에 있다.
영해박씨 대종회에서는 매년 이곳으로 제사를 지내러 간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죽은 곳은 일본이라 하였는데, 당시 대마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마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통신사 신유한과 실학자 안정복은 박제상이 순국한 장소를 큐슈(九洲)의 하카타(博多)라고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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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 시내의 조선 통신사의 흔적들
이즈하라는 1489년 대마도 번주(성주, 영주) 종정국이 부중을 옮겨서 생긴 번주 휘하의 무사도시, 즉 사무라이들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대륙의 문화, 무역, 외교의 창구로써 번창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 왕래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대마시(2004년 3월 1일 시로 승격)의 시청 소재지다. 부산에서 배로 2시간 40분 걸린다.
조선통신사 일본 파견
임진왜란 후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장장 2백여 년 동안 12 차례에 걸쳐 계속됐던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최고의 관료로 구성된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이하 학자, 문화인을 비롯해 화려한 악대, 소동, 무인, 통역관 등 500여명에 달하는 외교, 문화 , 무역 대사절단이었다.
일본의 학자나 문화인들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를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사절단이 묵는 객사를 찾아와 시와 글을 받아가고 학문과 외교에 대한 질문을 하고 듣기를 청했다.
사절단의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준비와 협조에 백만 냥(5580억원) 정도의 경비를 대마번은 지출하였다고 한다. 이는 조일 무역에 대한 대마번(번주인 소씨일가)의 이윤이 더 엄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통신사를 초청하여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이어지는 장장 6~7개월의 행렬을 끝까지 돌봐 주는 실무를 맡은 것은 대마도주 일가의 가업이었다. 대마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막부정권 아래에서 조선과의 외교권과 무역권을 독점한 독립적인 특수한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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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안과 내륙을 달리며(주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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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만[浅茅湾] 입구에 있는 해궁[海宮]이다. 우미사치야마사치[海幸山幸]의 신화로 유명한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와 도요타마정[豊玉町]의 유래가 되었으며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신다.
바다에서 신사의 본전(本殿)까지 다섯 개의 도리이[鳥居]가 이어져 있으며 밀물이 들 때는 2m나 바닷물에 잠기는 도리이도 있다. 음력 8월 1일 오마쓰리[大祭]가 열리며 봉납연예[奉納演芸]와 후나구로대회[船ぐろう大会]로 붐빈다.
교통은 쓰시마공항[対馬空港]에서 차를 이용한다. 주변에 바이린사[梅林寺], 고릴라섬[ゴリラ島], 에보시다케전망대[烏帽子岳展望所], 신와노사토자연공원[神話の里自然公園] 등이 있다.
해안가의 한 곳간. 바람이 심해 지붕에 무거운 돌판을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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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修善寺)
대마도에 가면 수선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이 절에는 74세의 노령으로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서 있다. 그 곁에서 선생의 영면을 축도하려는 듯 철따라 피고지는 무궁화꽃은 애처롭게 아름답다. 이 절은 656년 백제의 법묘(法妙)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백제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대마도가 우리 역사문화 속에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해준다.
그런데 이절에는 “修善”이라고 쓴 편액에 걸려 있다. 이 편액은 친일파 남작 김학진이 쓴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를 오히려 숙연케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반대 상소를 올리며 항일투쟁을 호소한다. 그리고 정산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일본군대의 눈을 피하려고 낮에는 병을 핑계 대고 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미복 차림으로 태인으로 가서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모의하였다. 임병찬은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재산을 풀어서 군기를 비축하고 있던 터였다. 홍주의병이 패하여 인심이 크게 무너진 상황이었으나 의병을 모으니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으로 80여 명의 유생들이 모였다. 하루 전에 상소를 올려 의병을 공개 모집한 것이었다.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 가면 “丙午倡義 紀蹟碑”를 볼 수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의병대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남원으로 출병하려던 최익현 선생은 남원의 주둔 병력이 대한제국군임을 알고 망연자실한다. 연청의 황혼 무렵에 포위망이 좁혀오고 총알이 쏟아지니 휘하 의병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오직 임병찬과 11명의 의병이 사투하다 결박당하고 말았다. 최익현 선생은 군율 위반죄로 3년형을 선거 받고 1906년 7월 8일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간수가 일본 좁쌀로 지은 죽을 바쳤으나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왜인은 크게 놀라 우리 정부를 통해서 음식물을 공급 받아야 했다. 임병찬 등의 간곡한 청으로 음식을 이어갔으나 나이가 많고 위장이 역해서 먹는 것이 점점 감퇴되었다. 이어 일본인 간수가 최익현 선생의 상투를 자르려하자 거부와 더불어 단식을 결행하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최익현 선생의 나이 74세였다. 음력 11월 17일 (1907년 1월1일) 단식 31일 만에 아사순국한 것이다. 일제는 대마도의 수선사에서 장례를 모시게 하였다.
김학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 최익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비롯해 반일 상소를 올린다. 이로하여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일도 있었다. 이후 최익현이 의병에 함께 나설 것을 제의했으나 동조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민족과 조국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김학진은 과거에 급제한 후 권문세가에 힘입어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1894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내게 되었다. 마침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은 정권유지를 위해 동학군과 알게 모르게 제휴하고 있었다.
척화파 중 당시 정권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김학진은 전라 감사로 천거되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은 전라감사로 내려가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다. 고종이 그를 불러들여 전라감사로 임명하니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 ‘편의종사(便宜從事)’의 조처를 내려달라고 하였다. 편의종사란 현지의 사정에 따라 임금의 결재 없이 일을 우선 처리하는 권한을 말한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고종은 할 수 없이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전주감영은 이미 동학군의 손에 떨어 있었다. 김학진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서야 전주에 부임할 수 있었다. 이 때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합의되었다.
집강소는 동학군에 의해 운영되던 곳으로 면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통해 정부와 타협하며 제반 폐정과 모순을 개혁했다.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고 자신의 감사 집무실을 내주었다. 전주에 있는 회룡총 4백 자루, 크루프포 등 대포 3문과 탄알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농민군의 운량관(運糧官)이 되기도 했다.
김학진은 1906년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 유배를 떠날 때 홍문관 태학사에 오르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7년 사망하였다. 그 작위는 아들 김덕한이 내려 받았다. 그 덕분에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첫댓글 회장님 더운데 잘 지내시죠?
정재도, 이영택, 이형석 회장님들 사진을 보니 옛날 답사하던 생각이나네요~
나 역시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카페 들어와 주어 고맙구요.
사진에 보이는 내 옆은 이영택 회장님의 손녀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