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3년 7월 벌어진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이자 강원도 화천 백암산(해발 1,179m)을 사수하려는 국군 5사단과 8사단, 6사단 7연대가 중공군과 격돌한 고지전.
흰바우(흰바위)산으로도 불리우는 백암산은 화천군 북부 철원군(당시 김화군)과의 경계에 위치한 일련의 고지들 중 가장 높은 고지로, 화천댐(파로호)과 직선거리로 12㎞ 가량 떨어진데다 일대를 감제할 수 있어 당시 남한의 거의 유일한 대규모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 사수를 위한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다. 또한 백암산을 내주게 되면 화천을 비롯해 춘천과 원주, 제천 등 중부내륙을 통과해 남부지역까지 일사천리로 내려갈 수 있어 더더욱 필사적이었다.출처
2. 전개
2.1. 7월 13일 ~ 15일 중공군의 7월 공세 및 백암산 점령
7월 13일 밤 중공군의 6개 사단급 인해전술에 금성 방면 부대들이 무너졌고, 백암산 북부에 있던 8사단 역시 공격을 받았다.
7월 14일 8사단은 주파리-백암산 서단으로, 5사단은 백암산-1051-876고지로 물러나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한편 백암산 서쪽 적근산 부근을 방어하던 3사단 18연대 1대대장은 최전방 3대대에 이어 연대 본부와의 통신도 끊기자 포위공격을 염려해 예하 중대들을 시작으로 백암산까지 후퇴해 재집결하라고 한다. 하지만 적들이 주요 길목에서 총탄을 퍼붓자 불안감을 느끼며 금성천 교량을 어찌어찌 건넌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서 남은 대대가 자신들 뿐인데다 이조차도 상태가 좋지 않아 재보충을 해야 할 상황임을 토로한다.
7월 15일 정일권 2군단장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3사단, 6사단을 예비부대로 물린 뒤 5사단에게 백암산 남쪽 고지군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들고 파로호로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사력을 다해 저지시킨다. 그런데 오후 6시 20분경 백암산과 1051고지를 피탈당했고, 남은 병력들은 백암산 남쪽의 수동령에서 고둔골-수상리 남쪽 고지군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2.2. 7월 16일 ~ 18일 5사단의 백암산 탈환전
7월 16일 백암산을 점령한 중공군은 점령 과정에서 입은 피해와 장마로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진지공사로 분주했고, 이 틈을 타 오전 6시 5사단 27연대는 백암산을, 35연대는 소백암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27연대는 지형이 불리해 백암산 점령에 실패했다. 반면 35연대는 2대대가 876고지에서 기습적으로 측방공격을 해 점령에 성공하나 적의 역습에 소백암산도, 그나마 지키고 있던 876고지도 모두 상실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군단장은 8사단에 배속돼 백암산 서측 1118고지를 공략중인 6사단 7연대를 5사단으로 배속 전환시켰다.
7월 17일 7연대와 27연대는 백암산을, 35연대는 소백암산과 876고지를 공략했다. 하지만 저항이 거세자 5사단장은 백암산 공략부대들에게 백암산을 우회해 그 북방의 고지군을 점령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27연대는 2대대가 백암산을 공격하는 동안 동쪽으로 우회해 1대대가 전차의 지원하에 103번 도로로 이동해 살구정을 점령하였다. 한편 7연대는 서측으로 우회해 1118고지를 점령 후 연달아 962고지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35연대는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7월 18일 아침 항공 폭격이 끝나자 27연대 2대대가 백암산 정상에 돌입해 탈환에 성공하였고, 1대대는 살구정에서 전차의 지원하에 장재 수곳지를 거쳐 북한강변의 662, 641고지를 점령하였다. 7연대도 819고지를 점령하고 금성천변의 595, 689고지를 점령하였다. 35연대도 876고지, 833고지, 780고지를 차례로 탈환하고 북한강변 501고지로 진출하였으며 소백암산도 20시간의 전투 끝에 탈환하였다. 이 결과 5사단은 반격작전 목표를 확보하고 여내골에서 여골까지 금성천-북한강 선을 확보하였다.
3. 여담
전투의 주 무대였던 금성천 및 화천 백암산은 현재 제7보병사단 관할이다.
1950년 7월 여수에 상륙한 해병대가 경남 함양군에서 치른 전투와 1951년 5월 충남 금산에서 벌어진 전투도 똑같이 백암산 전투다. 하지만 화천 쪽에 투입된 인원들만큼 그 중요도나 인지도가 비교되지 않기에 인지도 측면에선 일반적으로 화천 쪽을 뜻한다.
가곡 비목의 일화에서도 언급됐듯 휴전 이후에도 한동안 뒷수습이 되지 않아 이름과 소속 모를 유해들이 여기저기 묻혀있거나 나뒹굴고 있었고, 돌무덤으로 수습된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2013년 5월 7사단과 유해발굴감식단이 백암산과 흑운토령 일대에서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했다.
제5보병사단 전사에서도 제법 손꼽히는 전투인지라 사단가 2절에 이 백암산도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