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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안동학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1. 머리말
조선의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사림士林이 설립한 사설私設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향촌 자치自治기구였다. 즉, 서원의 기능은 크게 후진의 敎育과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의 두 가지 역할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중 교육의 기능이 좀 더 강조되었다. 조선의 서원은 교육을 통해 지배층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고 성리학적 지배이념을 향촌사회에 전파함으로써 향촌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중반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조선의 서원은 중앙정계와의 밀접한 관련하에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서원의 설립 및 유지, 발전에 국가적 지원이 이루어졌고, 이는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서원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서원에 대한 중앙정계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서원을 통해 형성된 향중공론鄕中公論이 조선의 정치운영에 큰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 당파黨派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심했던 숙종대肅宗代에는 자파自派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앙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남설濫設’이라고 지적될 정도로 서원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런데 서원이 존재하는 공간적 위치가 향촌사회鄕村社會에 있었기 때문에 서원은 향촌사회의 지배구조 및 운영에도 큰 영향력을 가졌던 조직이었다.
기본적으로 서원이 존속하는 이유는 향촌사회에서의 지위확보나 영향력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원조직의 위상 및 운영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조선의 서원은 그 정치사회적 역할이 매우 다양하고 컸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이 글에서는 서원이 가지는 다양한 측면 중에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와 관련하여 서원이 갖는 위상에 우선 주목하였다. 조선후기 향촌질서의 변화는 기득권을 가졌던 사족士族들의 존재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사족들은 그들이 종래 누려왔던 향촌지배권에 대한 도전에 대응해야 했을 것이고, 서원조직과 운영 역시 그러한 방법 중 하나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7세기 이후 향촌사회의 지배질서 및 이와 관련된 서원의 역할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에 더해 서원을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가의 문제에 주목하였고, 이 문제의 해명을 위해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지배층의 소통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우선 서원의 성립과 발전, 쇠퇴과정을 개관하였다. 왜냐하면 향촌사회에서의 서원의 역할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시대 서원의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서원의 성립과 발전과정
조선왕조는 건국초기부터 인재의 양성과 교화敎化를 위한 제도로서 학교를 중시하였고, 이의 설립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과 지방에 관학官學을 설치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 결과 서울에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의 군현에는 향교鄕校 등의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학적 교육제도는 그것이 운영되어가는 과정에서 국가의 필요상 교화적 성격보다는 관리등용의 관문인 과거科擧에 응하는 예비지식을 습득하는 일종의 관리官吏양성기구로써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관리의 기강 해이, 과거제의 문란 등의 폐단이 발생함과 함께 점차 관학의 쇠퇴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을 주도한 사림세력士林勢力은 새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방책을 교학진흥책敎學振興策에서 찾게 되었고, 그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관학을 대체할 학제學制의 마련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그들 자신이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로 인해 화禍를 당함으로써 단절되었으나, 이후에도 사림士林을 위한 교학진흥책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바로 여기서 서원이 출현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1543년(중중 38) 경상도慶尙道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 성격은 교화敎化가 보다 중시되었던 관계상 사묘祠廟에 부수적인 독서讀書를 위한 건물정도에, 그리고 과거공부를 위한 장소라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서원제書院制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백운동서원이 출현한지 7, 8년이 경과한 명종明宗 초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원보급운동에 의해서였다. 퇴계는 서원을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위한 교화기구로 성격지우고,
서원은 사묘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원이 위주이며 사묘는 유생儒生의 본보기를 위해 서원의 부속기구로서 포함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존재는 서원에 대한 국가의 인정을 요구하는 퇴계의 청액활동請額活動을 통해 비로소 전국에 알려져 보급되는 계기가 주어졌다.
사액서원은 왕王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을 의미한다.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土地와 노비奴婢를 하사받았는데, 그 보다 더 큰 의미는 해당서원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즉 사액은 서원의 입장에서 볼 때, 향촌鄕村에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국가적 공인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이는 서원을 기반으로 한 향촌사족鄕村士族의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농민통제를 비롯한 향촌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놓고 수령권守令權으로부터 견제를 받거나 갈등관계에 놓이기 마련인 사족들에게 그들이 세워서 운영하는 서원이 왕으로부터 공인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향촌활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퇴계 이황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이후 서원은 국가적 공인을 받고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적 장려하에 발전하였던 서원은 17세기, 특히 숙종대(1674~1720년)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7세기에 들어 붕당정치가 점차 본 궤도에 오르면서 향촌사회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각 정파政派는 여론을 자기 당에 유리하게 이끄어 정치적 입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자기 당파의 유학자를 제향祭享하는 서원을 지방별로 직접 세우거나 사림士林을 불러들여 이곳을 중심으로 자기 당파의 지지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특히 숙종대에는 잦은 환국換局으로 인한 집권층執權層의 교체가 자주 이루어졌고, 이후 노론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추세가 이어지면서 정치참여 계층의 폭을 축소시켰다. 그 결과 일부 집권양반과 양반토호兩班土豪를 낳으면서 한편으로는 많은 집권 소외층이 형성되었다. 각파는 자가 당파가 존숭尊崇하는 유현儒賢이거나 자파출신자의 선유先儒를 향사享祀함으로써 자파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고 당인當人간의 결속을 위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로 인해 17,18세기 급격한 서원의 증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숙종대에 나타난 서원의 남설은 동시에 사액서원의 수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숙종 당대當代에 서원에 대한 사액은 128건으로 숙종 이전 16~17 세기 중반까지의 그것에 비해 2배 가량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격증하였던 서원의 건립이 각 당파의 세력 확장이라는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액서원의 증가 역시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이때의 서원에 대한 사액은 철저하게 당파적 이해를 반영하고 있었다. 개별서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태도는 당시의 집 권층이 누구였는가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서원에 대한 사액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났다. 숙종대의 서원확대 자체가 각 당파의 세력 확장을 위
한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특히 사액서원은 국가적 승인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집권세력이 누구였는가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던 것이다.
사액의 정치적 의미는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일종의 정치적 복권의 의미를 가지고 내려졌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환국換局이 잦았던 숙종대에는 물론 영조대에도 사액은 새로운 집권세력에 대한 복권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영조 집권초기 노론정국老論政局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자 노론세력은 송시열宋時烈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을 설립하고 청액請額하거나 또는 소론집권시少論執權時 편액이 훼철된 송시열 제향 서원들에 대한 편액을 다시 내리는 조치를 내렸던 사실을 통해 사액의 정치적 의미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서원은 치폐置廢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분포한 서원의 구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숙종대 서원의 남설화濫設化 이후 전국의 서원의 서원은 1,000개 이상으로 추산되기도 하였다.
‘갑오甲午(1714年, 肅宗40) 이전에 참람되게 세운 원우院宇가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지금 영남嶺南 일로一路로 말하면 서원이 설립된 것이 백여 개가 넘으니, 팔로八路를 미루어 계산하면 천여 개 이상일 것입니다.
대사간大司諫 한사득韓師得은 이처럼 숙종대의 서원書院 남설濫設 이후 전국의 서원을 1,000여개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16~17세기 중반까지 정상적인 발전의 면모를 보이던 서원은 숙종대의 격심한 정치적 분쟁속에서 당쟁의 후방기지로서의 성격을 보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원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남설이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그 정치적인 의미 가 컸던 사액서원의 경우는 각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첨예하여 서원 남설과 동시에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제 급격하게 확산된 서원은 각 정치세력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한편 불법적인 양정모입良丁募入과 민전침탈民田侵奪 등의 경제적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국가의 적극적인 장려하에 존재하였던 서원은 정부의 규제대상으로 전환되었다. 18세기 이래의 서원규제책은 영조 17년(1741년)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을 통해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때의 서원훼철령으로 전국의 173개소의 서원이 훼철되었고, 이후 서원의 수가 대폭 감소되었다.
영조 17년 이후 서원건립에 대한 억제책은 정조연간正祖年間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서원 남설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인해 일시적으로 둔화되었던 서원의 건립추세는 정조 말엽인 18세기 후반부터 다시 확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18세기 후반~19세기에 전국적으로 분포한 서원은 약 700여개 소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의 서원증가는 미사액서원未賜額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16~17세기의 서원 남설이 사액서원의 증가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18세기 후반 이후 서원의 확대는 미사액서원의 확대가 두드러진다.
“미사액지사원未賜額之祠院 가위성라무열可謂星羅霧列” 이라고 지적되던 18세기 후반 이후 미사액서원의 증가는 후손後孫에 의한 건립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후손에 의해 건립된 서원의 경우에도 향촌의 다른 사족들과의 연계를 통해 건립, 운영되었던 서원이 19세기에는 ‘현縣에 한 성씨가 있으면 반드시 서원을 세운다’ 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 성씨 즉, 하나의 문중門中에 의한 건립이 성행하였다. 배향인물配享人物 역시 충절인忠節人이나 중앙의 고위관료를 지낸 인물 중심이었던 이전과는 달리 한 문중의 인물들이 인물의 고하에 관련없이 배향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중 중심의 서원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18세기 이래의 향촌사회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 이후 사족士族의 향권鄕權상실로 인해 사족공동의 이해를 창출할 수 없게 되었고, 여기에 농업과 상업의 발전에 따른 신흥세력의 성장과 도전이 활발해졌다. 이에 사족은 공론公論에 의한 공동의 이해가 아닌 개별가문 단위로 기득권을 지켜나가고자 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혈연적인 결집형태인 동성촌락同姓村落을 형성하여 문중기반門中基盤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성촌락 형성을 통해 강화된 문중기반은 최종적으로 서원書院, 사우祠宇의 건립으로 귀결되었는데, ‘以家廟而鄕祠 以鄕祠而家廟’ 라 하여 한 문중의 가묘家廟가 서원으로 발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 이후 상당수의 서원이 개별문중個別門中의 위상강화를 위해 설립된 ‘문중서원門中書院’ 위주로 존립하게 되면서 서원은 후진에 대한 교육 및 교화라는 주요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서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 중단되고 거의 대부분 후손에 의해 운영됨에 따라 일반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1871년(高宗8) 흥선대원군에 의해 사액서원 47개소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서원이 훼철되기에 이르렀다.
2. 향촌사회의 지배질서와 서원의 역할
임진왜란 이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서 구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구는 유향소留鄕所였다. 고려 말 재지지배세력이었던 향리층鄕吏層은 조선 초기에 재지사족在地士族과 이족吏族으로 분화되었는데, 점차 재지세력에서 향리층이 이탈되었고 품관층品官層을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운영되었다. 품관층 역시 16세기 이후에는 관직과 일정한 연계를 가진 사족士族과 그렇지 못한 비사족非士族으로 분화되어 갔다. 이와 같이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가운데 사족과 품관층은 모두 유향소를 구심점으로 향촌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면서 향촌사회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관철시켜 갔다.
유향소는 향리의 단안壇案에 대신하여 향안鄕案을 작성하였고, 향안의 입록入錄과 운영 등 향촌지배의 전반적인 운영원리를 규정한 향규鄕規를 마련하여 향촌사회를 지배하였다.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여 유향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주체는 일향一鄕 사족士族의 모임인 향회鄕會였다. 향회에서는 재지사족의 주도로 향중공론鄕中公論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향촌지배가 이루어졌다. 한편, 유향소 이외에도 사족들은 사마소司馬所, 향교鄕校 등 향촌기구에 참여함으로써 향론을 형성하였고, 향약鄕約의 시행 역시 사족들의 향촌지배를 실현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와 같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 큰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다. 임란은 조선왕조의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은 향촌의 지배질서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임란을 경과한 향촌사회는 막대한 인명의 손실, 전답田畓의 상실, 토적의 봉기, 노비의 도망 등에서 온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한 전후 복구와 향촌질서의 재확립이 절실한 문제였고, 새로운 향촌질서의 확립은 향촌지배라는 차원에서 재지사족在地士族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향사당鄕射堂·향안鄕案의 중수重修, 동계洞契·동약洞約의 실시 등 전쟁 전 재지사족在地士族의 향촌지배조직의 정비와 더불어 서원書院의 건립 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전쟁 중의 의병義兵활동을 기반으로 전란 후의 향촌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사족권士族權은 관권官權과의 일정한 협력 하에 그들 위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향촌에서의 사족세가 강화되어 향권鄕權 주도가 가능하게 되자 종전부터 그들이 마련해 시행해 왔던 유향소留鄕所·향안鄕案·향규鄕規·향약鄕約·동계洞契·동약洞約·족계族契·향회鄕會·향교鄕校 등의 향촌조직과 서원을 통해 향촌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들 향촌조직을 매개로 열렸던 향회鄕會는 향촌운영과 관련된 사족들의 공동관심사가 논의되었던 장場으로서 재지사족의 향촌운영 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였다. 향회는 논의될 사안과 개최되는 장소에 따라 다양하였다. 예를 들면, 부세賦稅 문제와 관련된 향중대소사는 대개 유향소에서, 문묘종사나 복제논의服制論議와 같은 사문斯文과 관련된 문제는 향교나 서원에서 개최되었고, 서원의 신설이나 제향인물의 추가 선정 문제 또한 서원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향회의 종류는 다양하였으나 향중공론鄕中公論의 주제는 동일하였으며, 각각의 기능을 달리하며 존재하였다.
이 같이 다양한 향회를 통한 공론의 형성을 통해 재지사족은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를 관철해 갔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이 향촌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감에 따라 서원의 향촌사회에서의 역할도 강화되어 갔다.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족간의 상호연결을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내지 취회소聚會所가 필요하게 되었고, 서원도 그러한 사족들의 필요에 적합한 하나의 집회소集會所 내지 매개체였다. 서원은 사자士子의 장수藏修와 교화敎化를 표방하여 학교임을 내세움으로써 관官의 간섭을 모면할 수 있으면서도 사자집단의 취회와 결속을 도모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향촌활동의 구심체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향약鄕約, 향교鄕校 등과는 달리 향촌사회의 유력한 사족들만의 취회소였다는 점은 향촌여론의 결집처로서의 서원의 위상을 결정지웠다.
그런데 서원이 처음 건립되기 시작했던 초창기의 서원은 일차적으로 사림士林의 강학소講學所라는 기능이 강조되었다. 이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조하였던 점으로써 사림을 경계하였던 훈척계로부터 찬동을 받아 국가로부터 사액을 실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림이 강학소만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이곳에 향촌의 사자士子가 취회聚會하는 이상 서원이 사림의 향촌활동과 전혀 무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때까지 정권이 훈척계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 사림의 향촌활동이 억제당하고 있었으므로 서원이 사림의 정치활동의 기반이 될 수는 없었지만 서원의 정착과 보급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재소京在所를 통하여 중앙의 재경관료在京官僚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유향소를 중심으로 그때까지의 향촌사회를 사실상 주도해 왔던 세족世族들과 그들에 대항했던 신흥의 사림세력 사이에 큰 충격을 주어 새로운 긴장상태를 조성하고 세력판도와 균형관계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명종년간明宗年間에 일어난 소수서원紹修書院 분쟁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소수서원에 대하여 퇴계는 퇴관退官 후에도 계속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종 11년 소수서원에서는 유생儒生과 유사有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소수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이 유생을 욕하고 구타하여 이에 항의한 유생들이 서원을 비우고 귀가하는 이른바 공원空院사태가 빚어졌던 것이다. 공원空院사태는 거의 1년 가까이 계속되어 서원이 황폐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될 정도였다. 이러한 분쟁은 기본적으로 토착세족土着世族과 사림세력士林勢力 사이의 대립이 그 배경이었다.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은 주세붕에 의하여 발탁된 이후 풍기의 세족世族이었던 순흥順興 안씨安氏와 연결된 인물이었다. 주세붕의 서원 건립시 이를 지원함으로써 이후 서원을 사실상 관장할 수 있었던 순흥 안씨 중심의 세족 집단은 퇴계의 노력으로 사액을 받게 되면서 퇴계 문인들과의 공존체제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때에 이들 양 세력간에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1여년에 걸쳐 공원空院이 되었다는 것은 퇴계 문인계의 유생 세력이 사실상 서원에 서 축출된 것을 의미한다. 당시 퇴계가 차지하는 사회적인 명성이나 그 문인들의 활동상으로 소수서원은 다시 퇴계 문인의 수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수사원의 분쟁은 서원장악을 둘러싸고 토착세력과 사림들의 대립과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며, 이는 이 시기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갖는 사회적 기능, 즉 사림활동의 기반으로 서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서원의 향촌사회지배기구로서의 역할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종법제宗法制에 입각한 부계적父系的 친족질서親族秩序가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족을 중심으로 한 동성촌락同姓村落이 확산되었다. 그런데 동성촌락이 형성될 수 있는 족적 기반의 바탕은 족계族契에 있었다. 족계란 혈연적 유대가 강한 개인끼리 거주지인 동리洞里를 중심으로 동족집단내 친족간의 상호부조와 조선봉사祖先奉祀를 목적으로 조직된 계회契會로써 친족내의 인간관계의 유지를 위하여 향약의 윤리조항을 원용하고 또 향약의 자치조직을 도입함으로써 동성촌락내에서의 향약의 시행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족계가 성행한 것은 임란 후 향촌의 재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서였다. 그런데 족계는 단순히 동족간의 상부상조적相扶相助的 조선봉사祖先奉祀만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족계는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자제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자제교육의 강조는 향촌 내의 다른 구성원에 대한 배타성을 갖는 족적族的 결합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동족계원同族契員 이 향촌지배층으로서의 위치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족계는 자제교육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동성촌락내에서는 대개 족계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서당書堂을 갖고 있었다. 조선봉사祖先奉祀를 목적으로 하는 족계가 이와 같이 자제교육을 위한 교육기구로서 서당을 가졌다는 것은 이 시기의 향촌사회에서 서원이 수행하던 역할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특정 유학자를 제향하여 사림의 본보기로 삼고 겸하여 사림의 장수藏修·강학처講學處로서의 기능을 가진 서원이 이러한 경우 비록 그 본래의 제도에서는 벗어났다 하더라도 족적기반 내에서 조선봉사祖先奉祀와 자제교육을 겸하여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기구로 변모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17세기 후반 이후 현실로 나타난다.
붕당정치의 명분논쟁이 격화되고 정쟁희생자에 대한 원통伸寃의 의미를 지닌 서원의 건립이 성행하여 서원의 성격이 강학講學·장수藏修 중심에 서 제향 위주로 전환되면서 제향인물의 선정기준이 도학자道學者나 유현儒賢 뿐 만 아니라 향현鄕賢, 심지어는 행의行誼있는 사자士子나 효자孝子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는 선으로 확대되자, 각 동족집단들은 자기 동족의 현조顯祖나 입향조入鄕祖를 제향하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여기에 자제교육을 위한 동몽재童蒙齋나 양정재養正齋 따위의 건물이나 아예 서당書堂을 함께 부설하였다가 서원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성촌락내에 세워진 서원은 일차적으로 동성촌락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유지할 수 있는 기반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건립은 후손들 중에서도 주로 문중門中 엘리트들의 발의와 주도에 의했던 것만큼 활동도 주로 이들이 하였다. 문중 엘리트들은 서원을 발판으로 향중鄕中의 다른 문중과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일족一族을 대표하는 문중 엘리트가 다른 문중과 유대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바로 서원이었다. 물론 서원 외에도 향교·향사당·향청 등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17세기 후반 이후 점차 사족의 관심 밖으로 밀려 나고 있었기 때문에 사족들이 교유할 공간은 서원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따라서 일문一門의 엘리트들은 자기 문중을 대표하여 다른 문중의 서원에 참여함으로써 문중간의 연결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 연적으로 향촌의 사족이 주도하는 향권 대열에 참여할 있게 되었다. 서원은 이제 유자儒子집단인 학계士林만의 장수처藏修處이며, 동시에 향촌에서의 그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재지사족들의 세력권형성과 향권 성장에 서원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서 1738년(英祖14) 김상헌金尙憲 서원書院 창건문제를 놓고 경상도 안동安東 지방에서 일어난 관권官權과 향권鄕權의 대립을 들 수 있다.
안동은 영남嶺南 사림士林의 본거지로서 조선 중기 이후로는 고위관직자를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문벌을 형성하며 영남 사림의 공론을 좌우하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안동의 갑족甲族과 명문가名門家는 하회河回 류씨柳氏와 의성義城 김씨金氏, 그리고 진보眞寶 이씨李氏였다. 하회河回 류씨柳氏는 안동군 풍남면 일대에 동성촌락同姓村落을 이루고 여기에 류씨柳氏의 대표적 인물인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아들 류진柳袗을 모시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갖고 있었으며, 의성義城 김씨金氏는 역시 안동군의 임하면 일대에 동성촌락을 이루고 김진金璡과 그의 아들 김성일金誠一 형제를 모신 사빈서원泗濱書院을 갖고 있었다. 또한 진보眞寶 이씨李氏도 안동군 도산면에 동성촌락을 이루고 이황李滉과 문인 조목趙穆을 모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류柳·김金·이씨李氏는 각기 동성촌락을 형성하여 혈연적 관계에 의한 세력기반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위에 학연에 의하여 상호간의결속을 공고히 하였다. 즉, 안동부내安東府內에는 이황李滉을 주향主享으로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을 배향配享하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이 있는데, 이는 이황이 조선朝鮮 성리학性理學의 유종儒宗이며, 류성룡·김성일은 그의 고제高弟로서 학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조先祖 사이의 이러한 학문적 연계는 후손들 사이에서 서로 연결을 지속할 수 있게 하였다. 거기에 류성룡과 김성일은 사림의 분열 이후 초기에는 동인東人 그리고 뒤에는 남인南人으로서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두 집안은 당색黨色에 있어 동일하였다. 진보 이씨 또한 유柳·김金 양인에 의하여 퇴계退溪가 남인南人의 유종儒宗으로 받들어짐에 따라 남인파가 되었다.
이러한 세력기반을 토대로 하여 그들은 영남嶺南의 남인세력南人勢力의 본거지로서 기호지방의 남인들과 함께 집권당인 서인정권西人政權에 대립하는 유력한 정치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집권당인 서원정권은 안동의 주도권을 남인으로부터 빼앗으려 여러모로 노력하였으나, 류柳·김金·이씨李氏 중심의 남인 세력이 향권을 장악하고 일대의 경제권을 쥐고 있어 서인세력의 부식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안동의 남인세력이 중앙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동족적同族的 기반이 확고한 위에 학연學緣과 당색黨色에 의하여 그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였기 때문이며, 그러한 유대관계를 유지케 하고 결속을 강화해 주는 중요한 기구 중의 하나가 도산陶山·사빈泗濱·병산屛山 등의 서원書院이었다.
이러한 안동에 영조英祖 14년 서인西人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金尙憲을 모시는 서원을 창설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남사림嶺南士林과의 사이에 커다란 분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도 논의시비가 분분하였다. 안동은 김상
헌의 본관本貫이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그가 은거隱居하여 종신終身한 곳으로써 서인西人 특히 노론老論에 의하여 서원 창건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으나, 안동사림의 반대로 오랫동안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영조 14년 감사
監司 유척기兪拓基와 안동부사安東府使 어유룡魚有龍의 주장하에 안동유생安東儒生 안택준安宅駿 등 서너 명의 주도로 서원이 창건되었다. 안택준安宅駿을 앞세운 노론세력은 남인세력권인 안동에 장차 남인에 대항하는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파계열의 서원을 창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남인 사자士子의 반발이 심하였고 종내에는 이미 건립된 서원을 훼손하기까지 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노론정권은 서원을 훼손한 주동자들을 잡아들여 치죄治罪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던 소론계少論系의 박문수朴文秀는 안동사림의 중론에 의하지 않은 서원건립이 잘못이라 하여 남인을 두둔하고, 이러 창건을 주도한 안택준安宅駿이 선정先正을 존경하기 위해 발론發論한 것이 아니고 한 고을의 향권을 장악하려는 사욕에서 창건 발의를 한 것이라 비판하였다.
이러한 안동 일원의 향권 장악을 위한 서원건립 문제를 통해서 동족적인, 학파적인 그리고 당파적인 결합과 유대를 공고히 해 주는 매개체로서 서원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한 지역의 유력한 양반사족집단이 그들의 세력권 내지 생활권 내에서 상호간의 집단적 보호를 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서원을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3. 서원의 소통방식과 공론의 형성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원이 정치·사회적으로 그 역할이 커지는 것은 17세기 후반 무렵 붕당정치朋黨政治가 근본주의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념理念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명분과 의리 중심으로 전환됨에 따라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원은 중앙정파와의 밀접한 관련하에 운영되었다. 원래 산림학자山林學者가 하게 마련인 서원書院 원장직院長職을 중앙의 고관高官이 역임하게 되며, 또 서원의 유생儒生이 하기 마련인 유사직有司職에 향유사鄕有司와 진신유사縉紳有司의 구별을 따로 두어 향유사는 유생이 하고 진신유사는 중앙의 전당堂上 이상의 고급 관료에게 위촉되었다.
이러한 서원과 중앙관인과의 연결조직은 향촌사림의 공론과 특정 사안에 대한 여론을 서원을 통해 집약하여 중앙관인에게 전달함으로써 사림공론을 수렴하는 창구적인 역할을 서원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는 현종顯宗 때의 복제논쟁服制論爭을 통해 찾을 수 있다.
복제논쟁은 효종상孝宗喪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를 송시열宋時烈은 기년설朞年說, 윤휴尹鑴는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함으로써 비롯되었는데, 처음의 논란은 현종이 기년설을 결정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복제논쟁 이후 안동安東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유림세력은 의례에 대한 상세한 변정과 고증작업을 진행시키고, 거기서 나온 결론을 상호 검토하였으며, 열읍列邑에 통문通文을 돌려 예설禮說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여 1666년(현종 7년) 류세철柳世哲을 소두疏頭로 한 영남유생 천여 명의 연소聯疏를 올렸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영남유림의 예론禮論 자체가 향교와 서원조직을 통하여 연구되고 상호간의 의견 교환과 논란을 거쳤으며, 서원통문書院通文에 의하여 도내 유림의 여론을 수렴함으로써 연소가 작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연소를 올리게 되는 취회소는 향교가 되지만 처음 논의가 이루어지고 의견이 발의·수렴되며, 통문이 오고 가는 거점은 바로 서원이었다. 즉, 향내鄕內에 있는 각각의 서원마다 개별적으로 일차 여론이 수렴·조정된 후 향교로 다시 취합되면 이것이 한 곳에 개설된 소청疏廳에 전달되어 도내道內의 통일된 의논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원은 향촌여론의 발의와 수렴의 일차 거점이었으며, 조선시대의 정치, 특히 명분론과 학설 위주의 붕당정치에 있어서 서원이 갖는 정치적 역할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원이 향촌 여론을 공론화하는 장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기본적으로 사자士子들의 취회소였기 때문이다. 서원은 사자士子의 장수藏修와 교화敎化를 표방하여 학교임을 내세움으로써 관官의 간섭을 모면할 수 있으면서도 사자집단의 취회와 결속을 도모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향촌활동의 구심체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향약鄕約, 향교鄕校 등과는 달리 향촌사회의 유력한 사족들만의 취회소였다는 점은 향촌여론의 결집처로써의 서원의 위상을 결정지웠다. 또한 17, 18세기를 거치면서 향안·향약 등 사족간의 결속을 보장하던 자치조직이 쇠퇴하였던 현상은 향촌내에서 서원의 역할도 더욱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원을 거점으로 한 향촌여론의 공론화 과정에는 서원통문書院通文이 그 주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통문通文은 ‘서원書院, 향교鄕校, 향청鄕廳, 유생儒生, 결사結社 등에서 관계 기관 등에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 통고하는 문서’로써 조선시대 내내 사림뿐 만 아니라 문중에서도 공통된 의견을 모으거나 공동의 관심사를 공론화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통문의 작성과 발송의 과정을 살펴 보면, 먼저 통문 작성을 위해서는 유회儒會가 개설되어야 했다. 정례적인 유회는 춘추의 제례자리였다. 서원제례가 끝나면 유림들은 원임院任을 선출, 유생의 천거 등 서원 구성에 관한 일을 처리하였고, 서원의 수리, 중수, 이건 등 건물 유지 문제도 동시에 논의하였다. 이후 향촌의 제반 문제들은 논의하였는데, 춘추제례와 같은 정기적인 모임에서는 주로 서원의 관련된 사항들을 논의,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사문斯文과 관련된 중대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따로 날을 잡아 유회를 개최하였다. 유회를 열면 유림들이 의견을 모아 통문을 작성하고 각 고을의 향교, 서원에 발송하였다. 이런 통문 작성과 발송을 위해서 통문을 대표하는 통두와 통문 작성에 따른 제반 업무를 맡는 공사원, 직접 통문의 작성과 발송에 관여하는 제통, 사통, 발통 등의 직책을 따로 선출하였다. 작성된 통문을 도내의 계수관에 있는 향교나 중요 서원에 보내면, 그 곳에서 자기 고을과 다른 고을의 서원들에 개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통문 전달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시일이 촉박할 경우에는 고을 서원들이 통문을 접수하고 곧 다른 서원 에 전달하는 ‘비전飛傳’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언제 받았으며 언제 전달하였는지를 직접 기재해 넣으면서 통문을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접수한 곳에서 그 통문을 가지고 유회에 반납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통문연락을 받은 서원에서는 이를 원노院奴 등을 시켜 각 면리에 있는 유력한 양반문중들에 전달하여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를 회문回文이라고 한다. 회문을 할 때에는 향교와 서원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고을을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맡기는 것이 통례였다.
서원 통문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다. 선왕 존호와 복제 등 예론 문제, 조정의 대신이나 감사, 수령 등에 대한 비판과 시비 등 정치적 사안부터 선현의 문묘배향이나 승출에 대한 찬반, 선현에 대한 변무와 규탄, 명현에 대한 증직, 증시, 시원, 삭직, 추탈 등 사문의리에 대한 것 등 사문斯文과 관련된 사항이 통문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서원의 건립, 사액, 승호, 이건, 중건, 추향, 위차 등 서원운영과 관련된 문제를 비롯하여 불교, 도교, 서학, 동학 등 이단에 대한 배격문제, 향전에 대한 찬반과 효자, 열녀 등 삼강에 모범이 되는 사람들의 추천과 포상 요청 및 향강 파괴자나 괴란자에 처벌 등도 통문을 거론되었다. 즉, 조정의 정치문제부터 향촌사회의 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에 걸쳐 양반사족들의 관심을 표명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 통문이었다.
특히 경상도 안동은 통문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으로서, 안동 지역의 대표적 서원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통문은 공론의 형성 및 향촌사회의 운영에 서원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배향配享한 서원으로서 퇴계가 조선朝鮮 유학사儒學史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퇴계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된 도산 서원 또한 전국적 위상을 누렸다. 특히 18세기 이후 영남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서인 계열에 밀리면서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기반을 확대해 갔고, 도산서원은 영남학자이자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를 배향했다는 점에서 영남 남인의 본산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정치적 진출이 막히면서 퇴계에 대한 존숭은 더욱 높아졌으며, 서원에 배향된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퇴계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졌기 때문에 퇴계를 배향한 도산서원의 위상도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안동 뿐 만 아니라 영남의 대표적 서원으로 자리잡았던 도산서원은 이 지역의 사론士論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를 수렴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통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소장된 도산서원의 통문 내용을 보면, 유림대회儒林大會 참가, 투장偸葬 건, 열녀烈女 선양宣揚, 문집文集 간행刊行, 사림士林의 분위기 쇄신 요청 등 다양하다. 이들 문서는 대부분 타 서원에서 도산서원으로 보내진 것들이며, 도산서원의 영향력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었다. 통문에 수록된 사안들은 당시 정치적 문제 뿐 만 아니라 양반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들로서 지역의 서원들은 통문을 활용하여 여론을 수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여타 서원들 간의 의견을 수합,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24 이와 같이 도산서원을 비롯한 조선의 서원은 중앙의 정치문제 및 향촌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통문이라는 소통방식을 통해 수렴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의 정치문제에 대해 향촌사회의 여론을 수렴하여 공론화하는 일차적 거점이 되었고, 한편으로 는 그들이 근거지인 향촌사회의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서원의 성립, 발전과정을 개관하고, 향촌사회의 지배질서와 관련하여 서원의 역할 및 소통방식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배층에 대한 교육과 선현先賢에 대한 제향祭享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조선의 서원은 이를 통해 지배층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고 성리학적性理學的 지배이념支配理念을 향촌사회에 전파하는 매개체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건립은 관학官學의 쇠퇴와 사림세력士林勢力의 교학진흥책敎學振興策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후 퇴계 退溪 이황李滉의 서원보급운동에 힘입어 조선의 서원은 국가적 장려 하에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특히 사액賜額이라는 형태로 국가적 공인을 받은 서원은 향촌활동에 있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교육과 제향이라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며 정상적인 발전의 면모를 보이던 서원은 17세기 후반 잦은 환국換局과정에서 자파自派의 세력 확장을 위해 각 정치세력이 경쟁적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급격한 수적 확대가 이루어졌다.
이제 급격하게 확산된 서원은 각 정치세력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한편 불법적인 양정모입良丁募入과 민전침탈民田侵奪 등의 폐단을 야기하였고, 그 결과 서원은 중앙정부의 규제대상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상당수의 서원은 개별문중個別門中의 위상강화를 위해 설립된 문중서원門中書院 위주로 존립하게 되었고, 후진에 대한 교육 및 교화敎化 라는 주요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서원에 대한 물질적 지원이 중단되고 거의 대부분 후손에 의해 운영됨에 따라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1871년(高宗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해 사액서원 47개소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서원이 훼철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족의 향촌지배에 있어 큰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었다. 임란은 조선왕조의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것은 향촌의 지배질서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 중의 의병義兵활동을 기반으로 전란 후의 향촌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강화된 사족권士族權은 관권官權과의 일정한 협력 하에 그들 위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사족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족간의 상호연결을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내지 취회소聚會所가 필요하게 되었고, 서원도 그러한 사족들의 필요에 적합한 하나의 집회소集會所 내지 매개체였다. 서원이 향촌 여론을 공론화하는 장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기본적으로 사자士子들의 취회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향약鄕約, 향교鄕校 등과는 달리 향촌사회의 유력한 사족들만의 취회소였다는 점은 향촌여론의 결집처로서의 서원의 위상을 결정지웠다.
특히 서원의 향촌사회지배기구로서의 역할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였다. 17세기 후반에는 종법제宗法制에 입각한 부계적父系的 친족질서親族秩序가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족을 중심으로 한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확산되었다. 그런데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한 동족집단들이 자기 동족의 현조顯祖나 입향조入鄕祖를 제향하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여기에 자제교육을 위한 동몽재童蒙齋나 양정재養正齋 따위의 건물이나 아예 서당書堂을 함께 부설하였다가 서원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성촌락내에 세워진 서원을 토대로 문중 엘리트들은 향중鄕中의 다른 문중과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일문一門의 엘리트들은 자기 문중을 대표하여 다른 문중의 서원에 참여함으로써 문중간의 연결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연적으로 향촌의 사족이 주도하는 향권 대열에 참여할 있게 되었다. 서원은 이제 유자儒子집단인 사림士林만의 장수처藏修處이며, 동시에 향촌에서의 그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7, 18세기를 거치면서 향안·향약 등 사족간의 결속을 보장하던 자치조직이 쇠퇴하였던 현상은 향촌내에서 서원의 역할을 더욱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원을 거점으로 한 향촌여론의 공론화 과정에는 서원통문書院通文이 그 주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통문 내용을 보면, 당시 정치적 문제 뿐 만 아니라 양반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들로서 지역의 서원들은 통문을 활용하여 여론을 수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여타 서원들 간의 의견을 수합,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도산서원을 비롯한 조선의 서원은 중앙의 정치문제 및 향촌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통문이라는 소통방식을 통해 수렴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의 정치문제에 대해 향촌사회의 여론을 수렴하여 공론화하는 일차적 거점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근거지인 향촌사회의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의 서원은 향촌사회의 지배층인 사족士族들의 취회소聚會所이자 향권鄕權의 주된 진원지였다. 따라서 조선의 서원조직이 구체적으로 기능했던 향촌사회 내에서의 상대적인 위상과 성격문제에 대한 이해는 조선의 사회구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주요한 매개체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