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모두 옛적에 찍은 자료 파일임]
점필재 선생 관영 함양다원 조성지
함양 고을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 앞 옛 엄천사(嚴川寺) 터 북쪽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목민관으로서 고을 백성들 고통을 덜기 위해 조성하였다는 관영(官營) 함양다원(咸陽茶園) 유적이 전한다. 함양군청에서 오도재, 지리산제일관, 지리산 전망공원 지난 후 칠선계곡 입구에서 휴천면, 유림면 경유 생초면 가는 길로 들어 만나는 남호삼거리라는 곳인데 군청에서 대략 26KM, 승용차로 약 40분 거리이다. 점필재 선생은 1431년(세종 13) 6월에 밀양부(密陽府) 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이고, 어머니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아버지는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선산(善山)에서 밀양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29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종9품)에 제수되었다. 34세 때 제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기에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40세 때 고향으로 돌아가서 71세 된 노모를 모시겠다고 청하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경상관찰사로 도임한 유자광(柳子光)이 이 고을에 와서 놀다가 최고운(崔孤雲) 선생 족적(足跡)의 학사루(學士樓)에 시를 지어 현액(懸額)을 걸었는데, 이를 보고 곧 떼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42세 때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75년 함양을 떠나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조선시대에 차가 생산되지 않았던 함양군에서는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공납(貢納)하여야 했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전라도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차를 사서 바쳤는데,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는 큰 부담이었다.
선생은 함양군수로 부임해 온 초기에 그 폐단을 발견하고는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차 공물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군의 돈으로 사서 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함양이 이 지리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선생은 몸소 여러 늙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차에 관해 물었다. 이곳저곳을 수소문한 결과 엄천사(嚴川寺) 인근 북쪽 대숲에서 몇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했다. 그곳을 땅 주인에게 사들인 뒤 관전(官田)으로 차밭을 만들었다. 몇 년 뒤 정성으로 가꾼 차나무가 무성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차세(茶稅)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선생은 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된 기쁜 마음을 담아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선생의 애민정신과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그 시는 기념비 뒷면에 다음처럼 새겨져 있다.
'茶園 二首 幷敍’(다원에 대하여 두수를 짓다)
欲奉靈苗壽聖君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新羅遺種久無聞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如今得頭流下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且喜吾民寬一分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竹外荒園數畝坡 (대숲 밖 거친 동산 일 백여 평의 언덕에)
紫英烏紫幾時誇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但令民療心頭肉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不要籠加粟粒芽 (무이차 같은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유자(儒者) 연관 어떤 일로 염천(炎天)을 무릅쓰고 함양 고을을 가게 되었는데, 중식(中食) 끝낸 어름에 다행히 임무가 끝이 났다. 거창(居昌)을 들려서 귀구(歸邱)할 시간 여유가 충분해서 상림공원(上林公園), 학사루(學士樓), 함양초등학교 교정(校庭) 점필재 선생 나무, 이은대(吏隱臺) 유적, 선생이 애민(愛民) 위해 조성하였다는 휴천면의 관영 함양다원 유적 등을 오랜만에 택시로 돌아보았다.
선생의 애민정신이 베여 있는 다원 터를 돌면서 요즘 백성 다스리는 사람들이 선생의 애민정신을 조금이라도 본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지리산(地異山)을 드는 숱한 길손들이 무심코 지나치기도 하는데, 함양군에서는 그곳이 조선조 영남학파의 종조 점필재 선생의 애민정신이 깊이 깃들인 곳임을 널리 알려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