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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정조의 무덤인 화성 건릉.
노론 벽파가 세손 정조를 해치려는 음모를 막은 홍국영은 정조 즉위초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렀다. <자저실기>는 그런 홍국영이 뚱뚱했지만 인상은 날카로웠다고 전한다.
노론 벽파가 세손 정조(1752~1800·재위 1776∼1800)를 해치려는 음모를 막았던 홍국영(1748~1781)은 정조 즉위 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여기까지는 역사 문외한이더라도 다 알고 있는 바다. 심노숭(1762~1837)의 <자저실기>는 홍국영의 외모를 언급하면서 "키는 작았지만 몸집은 비대했다"고 말한다. 이는 심노숭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심노숭은 기해년(1779)에 둘째 외삼촌 집을 방문했다. 때마침 홍국영이 이곳을 찾았고 심노숭은 창문 틈으로 홍국영의 인상을 살필 수 있었다.
모습은 전체적으로 날카로웠다. 얼굴이 모나고 뺨은 좁았으며 얼굴이 항상 불그레했다.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가까이 있으면 쏘는 듯한 기운이 있어 잠시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자저실기>는 기술한다. 홍국영은 몸집이 뚱뚱했지만 인상은 날카로웠는가 보다.
홍국영의 권세는 실로 막강했다. 홍국영은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직하면서 늘 궁중에 거처했다. 그의 처소는 임금의 침전과 불과 열 걸음도 안 됐으며 사옹원(임금의 수라를 준비하는 관청)에서는 홍국영이 먹을 음식까지 만들어 바쳤다.
방에 높은 평상을 놓고 그 위에 눕거나 앉아 지냈다. 집안어른이나 조정 대신들까지 모두 그 평상 아래에서 그를 만났다. 인사가 있을 때마다 이조참의는 홍국영에게 먼저 묻고 상의했다.
<자저실기>는 홍국영의 최후도 상세히 소개한다. 홍국영은 권력을 남용하다가 정조의 눈 밖에 나 쫓겨난 뒤 온 집안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이주한다. 서울에서 갖고 온 종이, 부채, 환약, 향을 어류와 술로 바꿔 먹었으며 시골 무지렁이와 들사람을 만나 왕의 총애를 받았던 과거 일을 하나하나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쫓겨난 지 일 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감기에 걸려 죽었고 그의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고 <자저실기>는 전한다.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최후와 관련해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투 도중 가슴에 흉탄을 맞고 운명한 것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의병장 정경운의 <고대일록>이 묘사하는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은 좀 차이가 난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망쳤다. 그를 쫓던 숭정대부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이순신이 죽었다. … (중략) … 통제사가 사졸들보다 앞에 서서 종일 혈전을 치르던 중 철환을 머리에 맞아 전사했다." 종일 전투를 치렀고 철환을 가슴에 맞은게 아니라 머리에 맞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순신과 그를 추천한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유년기부터 같은 동네(서울 건천동)에 살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으로 이해한다. 성대중(1732∼1809)의 <청성잡기>는 이와는 다른 일화를 제시한다. 둘의 첫 만남은 유성룡이 관직에 막 진출했을때 라는 것이다.
서애가 홍문관 관리로 재직중 고향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사람들이 앞 다퉈 배에 오르려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한 취객이 홀로 말을 끌고 배에 탄 평복 차림의 사내에게 새치기를 했다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머리를 숙이고 싸움을 피했다.
유성룡은 속으로 '나약한 자'라고 생각했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말을 몰던 남자가 먼저 내렸고 취객은 뒤따라가면서 또다시 욕을 퍼부었다. 그러자 평복 차림의 남자가 취객 목덜미를 움켜잡은 뒤 쏜살같이 칼을 빼 목을 베고 강물에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 크게 놀라 넋을 놓고 있는 틈에 평복 차림의 남자가 말에 올라 곧장 사라졌다. 서애는 훗날 군영에서 그를 다시 만나는데 그가 바로 이순신이었다. "서애가 공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이 일에서 비롯됐다"고 <청정잡기>는 적었다.
사진2. 광주광역시 소재 충장사.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김덕령의 사당이다. 왜적에 맞서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무고를 당해 억울하게 옥사했다. <고대일록>은 그가 완력이 뛰어나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전투에 임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은 왜적에 맞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지만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후손 김만식이 고종 27년(1889년)이 지은 정자로 이몽학의 난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술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김덕령이 술에 취하여 불렀다는 '취시가'에서 <취가정>이라 하였다
정경운이 쓴 <고대일록>은 그가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문인이지만 무인을 능가하는 압도적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훈련을 하거나 전투에 나설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쇠로 만든 갑옷을 둘렀다. 다음의 <고대일록>의 내용이다.
"장군이 남문 밖에서 진법을 익히도록 명령하였다. … (중략) … 쇠갓(철립)을 쓰고 두 겹의 갑옷을 입었으며, 쇠신(철혜)를 신었고 쇠치마(철상)을 둘렀다. 7척의 장검을 쥐고 말 위에 올라 성을 나섰다. … (중략) … 장군의 사람됨이 매우 침착하고 무거워 말이 적었으며 완력은 뛰어났다."
서산대사 휴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승려이지만 많은 시를 남겼고 문집도 냈다. 그런데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이를 보고서 솜씨가 별로라고 폄훼했다. 김만중은 중국 고승들의 설법을 대충 본떠 시늉만 냈다고 했다.
서산대사 휴정의 초상화
사진3. 보물 제1667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서산대사가 중국 송나라 승려 4명의 법문을 발췌해 적은 서첩이다.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은 서산대사의 글솜씨가 형편없다고 혹평했다. 해남 대흥사 소장
"승려 휴정의 문집을 보니 그 제자들에게 설법한 문장은 대혜종고(북송의 선승)와 고봉원묘(원나라 승려)의 해묵은 이야기를 여기저기 취해다 늘어놓아 사람의 눈을 가린 것이다. 정말로 대충 모양을 본 떠서 시늉만 내었을 뿐이다."
중국 승려의 글을 가져다 배낀 것으로도 모자라 대충 시늉만 냈다는 것이다. 매우 혹독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남이 장군 사당에 보관된 남이 장군 무신도이다.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남이(1441~1468)의 옥사는 예종조 최대 정치적 사건으로 꼽힌다. 남이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손자이고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남이는 이처럼 화려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무인적 기질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스물여덟의 나이에 정2품 병조판서로 승진했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예종은 세자 때부터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남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종은 즉위하자 마자 남이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으로 처형해버렸다.
남이는 국문장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다리뼈가 부러지자 "병신이 됐으니 살아 있은들 무엇하랴"며 역모를 시인했다. <연려실기술>은 "남이의 죄명은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으나 그의 옛 집터는 이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채소밭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남이 집터는 한국방송통신대와 서울치대병원 사이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가 죽은뒤 조선후기까지 빈터로 방치됐다.
작자 미상의 <좌계부담>은 재물에 눈이 멀어 외국의 세자를 살해한 정신 나간 종친을 소개한다. 효령대군의 후손 이기빈(?~1625)이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유구국 세자가 대정에 표류했다. 처음에는 후하게 접대를 했으나 유구국에 보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변해서 세자 일행을 잡아다가 보물을 달라며 갖은 방법으로 협박했다.
유구국 세자는 시를 지어
"떠도는 혼이 고국에 돌아가도 위로해 줄 친척 없어라.
교린의 옛 정의는 어디 있단 말인가"라며 이기빈을 꾸짖었다.
이에 이기빈은 세자를 살해한다. <좌계부담>은 "이기빈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부유하게 사는 것은 아마도 이때 유구국의 보물을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건은 광해군 3년(1611) 발생했으며 이듬해 들통난다. 국가 간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큰 사건이었지만 이기빈은 뇌물을 써서 극형을 모면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9.온몸을 쇠로 두른 철갑장군, 누명에 죽다(예상밖의 위인史2) / 매일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