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차 중론 9. 삶과 죽음의 선후 관계에 대한 분석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언젠자 반드시 죽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근본 동기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경험해 보지 않았던 죽음이 나의 앞으로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닥치게 될 것이다. 부처님도 생사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하셨던 것 같이!!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죽음을 체험 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한도내에선 그렇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것보다 극심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죽음 후의 무(無)에 대한 공포는 허구(망상)라고 가르친다.
왜냐? 우리의 삶이 시작하기 이전의 무와 우리의 삶이 끝난 다음의 무,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테두리 짓는 무를 우리는 과거에 단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고, 미래에 단 한 번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허구의 무에 의거하여 지금의 삶을 유(有)라고 생각한 후 지금의 유가 사라지는 죽음 후의 무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 후의 무가 체험 될 수 없는 허구이기에 유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허구다.
우리가 배웠던 금강경에서도 ‘나라는 생각(아상)’과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중생상)’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는 착각이 발생한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는 말이 삶과 죽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 관계에 있는 개념들일 뿐‘이란 점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말인 것은 분명하지만, 중관논리의 조명을 받을 경우 모순이 드러난다.
만일 생(生)이 앞선 것이고,
노사(老死)가 나중의 것이라면
노사 없는 생이 되라라.
또 죽지도 않은 것이 생하리라.
<중론> 제 11 <관본제품:궁극적 토대9에 대한 분석>에서 삶과 죽음의 연기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가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앞선문제로 인식의 차원과 존재의 차원에서 서로 선행한다는 말이다. 두가지 다 모두 오류를 범한다.
첫째, 인식의 차원에서 ‘ 삶이 죽음보다 앞선 것’이라면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삶’이란 개념이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삶’이란 개념은‘죽음’이란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 없는 생’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존재의 차원에서 ‘삶이 죽음보다 앞선 것’이라면 전생에 죽어본 적도 없는 생명체가 탄생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윤회설에 위배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죽음과 탄생을 무수히 되풀이 한다고 가르친다.
전생없이 새롭게 탄생하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다.
‘삶’에 근거하여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삶’은 ‘죽음’과 무관하게 원래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죽지도 않은 것이 생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인데, 윤회설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일은 없다. 연기로 봐도 그런 것 없다.
용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생이 나중의 것이고,
노사가 앞선 것이라면
원인을 부정하는 말이다.
어떻게 생하지도 않은 것의 노사가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을 떠올리려면, 알든 모르든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죽음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지금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말이나 생각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삶’의 근거가 되는 ‘죽음’은 삶과 무관하게 실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다.
삶이 시간적으로 앞선 원이이고, 죽음은 시간적으로 자중에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삶과 무관한 죽음이 원재 존재한다면, 그런 죽음은 원인 없는 죽이이다.
생하기전에 사가 있다면, 그런 늙어 죽음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 늙어 죽음이다.
위 게송처럼 생하지 않은 것의 노사는 있을 수 없다. 악순환의 오류를 범한다.
그렇다고 해서 삶과 죽음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노사와 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생하는 순간 사망하게 되고,
양자가 원인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탄생하는 순간이 그대로 죽는 순간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서로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원인없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비단 윤회의 경우에만
궁극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의 경우도
그 궁극적 토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무한히 되풀이 되는 것을 ‘윤회’라고 부른다.
이런 윤회에서 삶이 주(主)가 되고 죽음이 종(從)이 된다고 말 할수 없다.
위 게송에서 말하는 궁극적 토대는 ‘주(主)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주가 되고 삶이 종이 된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양자 모두 주가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의 선행,후속,동시 관계가 모두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가지 관계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우만이 아니고,
‘눈과 시각대상, ’긴 것과 짧은 것’, ‘원인과 결과’ ‘가는자와 가는작용’, ‘비와 내림’
등의 연기적으로 발생한 다른 모든 개념쌍들 각각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것이 이런 세가지 관계중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고 규정할 수 없다.
세가지 모두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