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8
ㅡ 고구려 전성기 1 ㅡ
(전성기 직전, 미천왕과 고국원왕)
고구려 최전성기는 4, 5세기 17대 '소수림왕' 부터 시작하여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이라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15대 '미천왕' 시절부터 고구려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치세는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소수림왕 아버지 16대 '고국원왕' 때 엄청난 굴욕과 수모를 당한다.
미천왕은 국가로서 체계를 확실히 잡고 영토를 확장했다. 먼저 이러한 미천왕 ( 300년~331년) 주요업적부터 살펴보자.
1. 서안평 점령: 미천왕은 311년 서안평(현재 중국 랴오닝성 지역)을 점령했다. 서안평은 요동 지역으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 였으며, 이를 확보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경제적, 군사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2. 중국세력 축출: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해 313년 낙랑군을, 314년 대방군을 완전히 축출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3. 내정 강화: 미천왕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백성을 안정 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정복 활동으로 확보한 자원과 영토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 했다.
5. 외교 및 대외 관계: 미천왕은 외교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중국이 서진에서 동진으로 넘어가는 혼란기를 틈타 군사적, 외교적 활동을 통해 고구려 입지 강화했다.
미천왕이 이토록 많은 업적을 냈으나 그의 아들인 16대 고국원왕(314~331)시대에 들어서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고국원왕 초기에는 미천왕이 확보한 요동지역에서 '전연'과 대립하여 산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방어에 힘썼다. 나름 미천왕 업적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연 모용황'이 크게 발흥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구려 수도 국내성을 함락 시킨다. 이에 고구려는 동황성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이 전연의 침략으로 고국원왕 아버지 미천왕 왕릉이 도굴 당하고, 태후인 왕후 주씨와 왕비를 비롯한 50,000명 포로가 전연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고구려가 망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전연은 고구려를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신하국으로만 삼아 후환을 없애려 했다. 이런 전연 정책에 따라 고구려수도 국내성은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불행은 겹친다고 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백제 '근초고왕'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진출을 꾀했다.
백제는 고구려를 침략했고, 이에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근초고왕 백제군을 맞이하여 큰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만다. 고국원왕은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 측에서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기까지 했다.
우리 학창시절 국사선생은 고국원왕을 근초고왕을 '원'망 하면서 죽어서 고국'원'왕이라고 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故國原王 '원'자는 원망할 '원'자가 아니다. 그래도 고국원왕은 잊혀지지 않고 우리 머리 속에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사실, 고구려 초기 대부분 왕 호칭은 무덤이 묻힌 당시 땅 지명 이름이다. 고국원왕은 '고국원' 이라는 지역에 묻혔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는 고국원왕 시절에 최악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국원왕 두 아들(소수림왕, 고국영왕)때 다시 나라를 정비하여 불끈 일어선다. 고국원왕 손자 광개토태왕과 증손자 장수왕 때 이르러서는 '전연'과 '백제'에 복수를 제대로 하고 최고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럼 고구려 전성기에 들어가기 전 고구려가 악 조건 속에서도 불끈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알아 보자.
고구려는 태생부터 '전투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가 전투민족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리적,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크게 기인한다.
주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리적 위치: 고구려는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으며, 주변에 강력한 세력들이 존재했다. 북쪽으로는 유목민족인 흉노와 선비족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중국 여러 왕조들이 있었다. 이러한 주변 환경 때문에 고구려는 외부침입 을 방어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 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2. 자연환경: 고구려가 위치한 지역은 산악 지대와 험준한 지형 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이 어려웠다. 따라서 외부에서 자원을 얻기 위한 정복 전쟁이 중요해졌고, 이는 군사력 강화로 이어졌다.
3. 정복과 영토 확장: 고구려는 초기에 작은 소국이었으나,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영토 를 확장했다. 특히 고구려는 중국 혼란기를 틈타 요동지방과 만주 지역을 차지하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영토확장은 전투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구려는 항상 전쟁준비 상태에 있어야 했다.
4. 중국왕조와 대립: 고구려는 초기부터 중국 여러왕조들과 대립했다.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 대규모 전쟁을 겪으며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대외적 갈등은 고구려를 더욱 전투민족으로 만들었다.
5. 강력한 군사 제도: 고구려는 상비군과 예비군 제도를 갖추고 있었으며, 군사훈련도 매우 철저했다. 병사들은 전투능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훈련받았고, 이로 인해 고구려 군대는 높은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고구려는 외적의 위협을 막고, 영토를 확장하며 전투민족으로서 특징을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고구려 최고전성기 시작인 소수림왕 고국영왕에 대해 정리 하겠습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