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땅 독도가 어떻게 불려 왔는가.
우산도----------삼봉도----------가지도----------석도----------독도
512 1470 1794 1900 1906
우산도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입니다. [고려사] 와 [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
등 옛글 속에는 동해상의 두 섬을 우산과 무릉 또는 우산과 울릉등으로 표현하고 있어
독도를 '우산'으로 불렀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산이란 명칭은 천산, 자산등으로 표기
되기도 하지만 이는 우산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삼봉도
1470년 (성종 1년)부터 사용된 명칭입니다. 특히 1476년 (성종 7년)의 실록 기록에는
"섬 북쪽에 세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는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모두 바닷물이 서로 통한다"
라고 하여 지금의 독도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가지도
1794년 (정조 18년)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1747~?)의 울릉도 보고서에 "갑인년 4월 26일에
가지도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 나왔다"는 내용에서 확인할수 있습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의 우리말인 '가제'를 음역하여 부른 것으로 가지도란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란 뜻입니다.
독도에는 얼마전까지 강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며, 서도 북서쪽에는 가제바위라 불리는 바위도 있습니다.
석도
석도는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 (고종 37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울릉도의 관할구역을 '울릉 전도와 죽도 및 석도'로 규정하면서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근처의 작은 섬인 죽서를 지칭하고, 석도는 독도를 가리킵니다. 석도가 독도를 지칭하는 것은 석도의
한글 표현이 '돌섬'이고 돌의 사투리가 '독'인 점을 감안하면 석도가 독도로 변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독도
일본 군함 나다카호의 1904년 9월 25일자 보고에 의하면 "리앙코르토바위를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일본 어부들은 리앙코섬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독도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울릉군수 심홍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 서양사람들의 눈에 비친 독도
서양인이 만든 고지도에 우리나라가 등장하는 것은 세기 중반부터입니다. 그리고 서양 고지도에 독도가
표기 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전반의 일입니다.
독도는 프랑스의 지리학자 J.B.B. 당빌(1697~1782)이 1737년에 제작한 서양 최오의 한국전도인 조선왕국지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후 영국,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지리학자들이 만든 아시아 지도나 한국지도에 강원도
동해안에 거의 붙어 있는 섬으로 울릉도와 나란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독도의 위치 표시는 울릉도의 서쪽에 있어
착오가 있으나, 두 섬이 나란히 그것도 한반도에 거의 붙여 표시 된것은 서양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였다라는 증거라 할수 있습니다. 이는 이들 서양 지도들이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2,300여개나 되는
수많은 섬들을 매우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에 비해 동해안에 2개 밖에 없는 독도와 울릉도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수 있습니다.
독도의 명칭은 대부분 '찬산타오 Tchian Chan Tao'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산도의 또 다른 명칭인
천산도를 중국어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외에 일부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는 유럽식 명칭인
'다즐레 Dagelet' 나 '리앙쿠르바위(Li Ancourt Rocks)으로 표기 되기도 합니다.
3.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독도
일본인이 만든 지도속의 독도는 1748년 제작된 조선경도일본대판서국해변항로지도에 우산도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1785년 하야시 시헤이가 한국과 일본 주변 3국의 위치와 관계, 각 나라의
영역과 경계 및 주변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소개한 [삼국통람도설]의 삼국접양지도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특히 이 지도에는 울릉도(다키시마)를 그리고 그 오른쪽에 독도인 작은 섬
하나를 그렸는데 우리나라와 같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후 일본 지도에도 1936년 만들어진 육지측량부발행지도구역일람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우리
영토로 표기됩니다.
지도에 표기된 독도의 명칭은 대부분이 송도입니다. 하지만 우산도.리앙코르토바위. 또는 죽도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우산도는 조선국세견도등 19세기 말의 일본지도에서 많이 관찰되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독도를 우리나라의 영토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4. 독도를 지킨 사람들
신라장군 이사부
성이 김씨요, 나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 13년 임진(512)에 이사부는 아슬라주[현재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가 되어 우산국[현재의 울릉도]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력으로는 항복받기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복속시킬 수 밖에 없다 생각하고,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곧 항복하였다고 전합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독도와 우리 민족이 역사기록에서 만나는 때는 남한에서는 서기 512년
신라 하슬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대목부터 시작됩니다. 북한에서는 서기전 500년에
이미 독도에 관한 기록이 시작된다 하니 기록상으로는 남한보다 1000년 이상 올라갑니다. 서기전
500년이면 단군조선 시기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록으로 보더라도 독도는 아득한 옛적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굽다리접시
뚜껑받이턱이 있는 굽다리접시입니다. 이 굽다리접시는 533년 창건된 황룡사 초창 당시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여 6세기 중엽경에 만들어져 울릉도로 유입된 토기로 볼수 있습니다. 이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 후 신라와 할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입니다.
독도를 지킨 울릉군수 심흥택
심흥택(1855~?)은 독도란 명칭을 공식문서에 최초로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는 1897년 독립협회
창립 당시 후원금을 내는 등 독립협회의 창립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시킨 후, 1906년 3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이에 놀란 심흥택은 그 다음날인
1906년 3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에게"본군 소속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라는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에 이명래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게 되고 이 보고를 받은 당시 참정대신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자세한 사정을 다시 조사하라"는 지령을 내렸답니다. 이 처럼 심흥택은 일본의
독도 영유 주장을 신속하게 보고하여 대응할수 있도록 조치한 독도 지킴이였습니다.
심흥택과 일본 관리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 관리들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찍은 사진입니다. 심흥택 울도군수
(점선 내 관복을 입은 사람)는 깃대에 태극기(오른쪽 원 점선)가 걸려 있는데도 어린이들에게
대형 태극기를 들게 한 뒤 그 옆에 서 있습니다.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가이니시 사무관이고
여섯번째는 전임 울릉도 군수입니다.
이명래 보고서
일본은 1906년 3월 시마네현의 지방관리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독도가 1905년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음을
통보합니다. 이에 울릉군수 심흥택은 이를 급히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되고 강원도 관찰사는 조정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게 되는데 이 보고서는 당시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가 작성한 것입니다. 독도의 명칭이
오늘 날처럼 '독도'로 사용하게 된 것은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우산도, 가지도, 삼봉도
등으로 불리웠습니다.
성호사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1629~1690)이 쓴 글을 정리 한 백과사전식의 책입니다. 이 중 천지문의
울릉도편에는 일본을 두차례나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안용복의 활약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안용복은 영웅에 비길만 하다'라고 하여 안용복의
울릉도, 독도 수호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