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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나는 무엇에 대해서나 항상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공감이란 말 그대로이다. 즉 ‘같이 고통 받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본인의 안전을 망각하고,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는 정도로 말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성배의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와 뭔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성배 왕의 치료에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대방의 고통에 관한 질문을 망설이 없이 던지는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75
신화는 우리의 자녀들을 이미 과거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 또는 경건하게 미래만을 고대하는 사람들, 또는 최악의 경우에는 조급하거나 괴팍스러운 종파나 덧없는 유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연결해 주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그로 인해] 잘못 교육받은 사람은 결국 신화적 의미에서 이른바 황무지라고 일컫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는 세상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는] 단절이 일어나고, [그는] 정신적으로 파멸을 맞이하여, 결국 벽에 완충제를 댄 정신병원 독방에서 정신분열을 일으키거나, 또는 벽 없는 거대한 정신병원[이라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큰소리로 이런저런 구회를 외치는 편집증적 정신분열을 일으키기 딱인 것이다. 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79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99
성배 전설에서 말하는 황무지는 뭔가 [의례적으로]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또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과연 무엇이 그런 황무지인가? 나는 무엇이 나 자신에게 그런 황무지가 될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라든가, 나에게 대해서나 내 저술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는 사람과의 결혼일 것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야말로 황무지일 것이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 역시 내게는 황무지이다. 104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動機)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 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의 중심이다. 105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든지 옛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뱀처럼 허물을 벗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를 꽁무니에 그대로 남겨 놓고 싶다고 치자.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여러분은 그걸 떼어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거기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123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우리가 무엇을 의례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한 의례를 거행하려 하는가? 여러분은 차라리 자신의 삶을 위한 의례를 갖춰야 한다.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128
불교의 중심 사상은 집착 없는 공감이다. 151
제4차크라인 아나하타(Anahata)는 ‘부딪치지 않음’이고, 심장의 높이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며, 그 이름은 곧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소리를 지칭한다.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는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생겨난다. 그렇다면 어떤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소리란 어떤 소리일까? 그것은 에너지의 소리이며, 그 소리의 현시가 바로 우주다. 따라서 이는 사물보다 앞서는 소리이다.
심장 차크라는 영적 차원으로 가는 입구이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다. 모든 것이 신비의 은유인 그 지점에 일단 여러분이 도달하면, 이 하위의 힘들은 정화된다. 즉 처음 세 차크라들의 작용 그 자체가 제5, 6 그리고 7 차크라로 실현되는 것이다. 160
제7 차크라는 사하스라하, 즉 머리의 정수리에 위치한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이다. 이 차크라에서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곳엔 오로지 분화되지 않은 의식, 즉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제7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무감각 상태가 된다. 이른바 긴장성 의식불명이라고 일컫는 것이며, 여러분은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환원된다. 164
예를 들어, 제2 차크라의 경험을 통해서 - 만약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라면 - 여러분은 제6 차크라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진짜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여러분은 제2 차크라에서의 육욕 에너지를 사랑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제5 차크라의 훈련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육체적인 것을 통해서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암시를 전혀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의 육체적 사랑 속에서, 여러분이 관계하고 있는 것이 신성의 은총임을, 즉 그런 은총이 여러분에게 알맞은 형태를 취해 나타난 것임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이것은 곧 육욕적인 모험을 영적인 모험으로 변모시키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욕적인 것을 손상시키기 않는 -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합쳐지게 된다. 그러고 나면 여러분은 제6 차크라에서처럼 신을 보게 되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를 그 신성의 힘의 현시로서, 즉 세계를 형성하는 사랑의 현시로서 경험하게 된다. 165
오른쪽 길, 즉 사회적 부문은 우리가 염소로서의 성격을 배양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신화 - 은유로 이해해야 적절할 듯한 - 는 여러분이 호랑이로서의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끔 인도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여러분은 이 염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170
여러분은 법률이라는 겉옷을 입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적인 방법이라는 속옷을 입고 있다. 170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여러분은 답변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 모두가 호랑이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의 그런 측면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여러분의 기술을 통해 그들이 호랑이임을 깨닫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계시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는 우리를 보디사트바[菩薩]의 방법 - 즉 영원에 근거하되 시간의 장 속에서 움직이는 자의 방법 - 의 마지막 공식으로 이끌어 간다. .... 여러분은 - 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오는데 -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171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깨어난 의식의 상태에 있는 세계는 아움이라는 철자 가운데 아(A)와 동일시된다. 꿈의 의식상태(즉 천국과 지옥)는 철자 가운데 우(U)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깊은 잠의 의식 상태(아는 자와 아는 것 간의, 하나님과 그의 세계 간의 신비적인 합일 상태이며, 창조의 씨앗과 에너지를 배태하는 상태)는 음(M)과 동일시된다. 영혼은 이 아움이라는 철자에 의해서, 또한 이 아움이라는 철자에서부터 그 너머의, 그리고 그 주위를 온통 둘러싼 침묵 속으로 추진되어 나아갈 것이다. 그 철자를 발음할 때면, 그 침묵 속으로부터 비롯되어 나오고 그 침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느리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아움-아움-아움. 174
여러분도 아움 소리를 듣고 싶으면 그냥 양손으로 귀를 막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듣는 소리는 모세관 속의 피 흐르는 소리이지만, 그것도 아움이다. 174
여러분의 신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 수준의 현시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나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 속에 들어 있다. 인도에서는 이러한 이해가 매우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신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176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176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 - 그 자체로는 완벽인 - 에서도 유독 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 나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191
따라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불완전에 대해 충실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다음, 여러분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192
여러분의 악덕을 포기하지 마라. 그 악덕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게 하라.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192
그렇다면 무엇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동산 바깥에 있게 만드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의 두려움과 욕망이다. 붓다는 이 두 가지를 초월했다. 두려움과 욕망의 유혹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붓다는 그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그 밑에 앉아서 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방이다. 붓다와 예수는 동등하다. 예수 역시 동산의 문을 통과해 나무로 나아갔고, 결국 그 스스로가 나무의 열매가 되었다. 20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5
성스러운 공간 또는 도피처를 갖게 되려면, 우선 여러분은 어떤 작은 행동의 땅, 또는 그럴만한 장소를 찾아야만 한다. 그곳은 황무지가 아니며, 거기에는 암브로시아의 작은 샘도 있다. 그것은 곧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것은 여러분 속에 기쁨을 넣어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의도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소망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작게나마 기쁨이 거기 있게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216
내가 열여섯 살 때, 그러니까 예비학교에 다닐 때 나는 이미 어린시절의 신앙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만 다녀야 할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는 카톨릭교회 출석을 그만두지 않기로,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상징을 풀어헤치고 그 상징들이 무엇을 지칭하며 의미하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내가 스물다섯이 되어 독일에 있을 때까지도 그 모든 일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다. 나는 그 모두를 정리하는 데 아홉 해가 걸렸고, 그러나 나자 그것은 마치 낡아 빠진 셔츠처럼 자연스레 떨어져 나갔다. 그것이 바로 뭔가를 아는 것이다. 그 상징이 도대체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명령으로서 거기 있을 뿐이며,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더 많이 지속될 것이다. 229,230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기독교를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토록 풍부한 상징에 일찍 노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종교를 포기함으로써, 그 너머로 나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강력한 힘도 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정말 그렇게 한다면 말이다. 이는 단순히 ‘내던진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약 이를 숙고해 본다면 - 즉 여러분이 만약 상징들의 의미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은유를 읽는 방법을 배운다면 -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왜 나왔는지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의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256,7
일상적은 삶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대립자의 쌍 - 가령 원인과 결과, 득과 실 등등 -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가령 돈이나 명성을 얻는 방식의 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 공간에 있는 어떤 것도 실용성을 그 주된 특징으로 지니고 있진 않다. 또한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여러분 자신의 삶의 조화를 위해 중요하다.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만사가 ‘여러분’ 원동력의 형태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의 원동력도 아니다. 258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엇이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늘어가는 기쁨이 된다. 259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259
여러분이 여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260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이야기하는 곳 말이다. 264
여러분이 일단 자기만의 성스러운 공간을 갖고 나면, 여러분은 [필요할 때면] 어느 장소든지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스러운 공간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우선 - 명상 훈련이라든지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성스러움이란 주위의 대상과의 은유적 관련성이다.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65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자의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놀이’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272
보디사트바[菩薩]가 자발적으로 세상에 돌아오는 것은 그 혼란을 알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게 즐거운 일에만’ 그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보디사트바는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279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 - 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 - 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靜點)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안에서 그렇게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행동은 운동에서나, 피아노로 어떤 곡을 연주하는 것에서나, 또는 다른 어떤 실천에서나 용이해지게 된다. 여러분이 그런 각각의 분야에 종사하는 동안, 스스로의 안에 있는 그 정적인 장소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실천은 명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사무라이가 바로 이런 식이다. 진짜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285,6
하지만 여러분이 그 정점을 잃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오로지 자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된다. 가령 여러분이 경기에 나서면 반드시 이겨야하겠다는 생각에 맨 앞으로 달려 나아고, 만약 그럴 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면 아예 마라톤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반드시 자기 힘의 4분의 3만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판별이다. 286
그런 정점에 도달하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그것에 관해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나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거기 도달하기 위한 갖가지 좌법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매우 쉬운 일이기도 하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계속 넘어지다가 일단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넘어지려고 해도 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287
어떠한 관념도, 어떠한 개념도, 어떠한 이름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어떠한 종교가 됐든 그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도 최후의 장애물이다. 내가 아는 한, 서구의 영적 스승 가운데 이 사실을 깨달은 유일무이한 사람은 바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뿐이다.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모두가 이러한 이미지에만 매달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그 신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점은 곧 신을 넘어서는 것이다. 288
젖을 다 마신 다름, 붓다는 그 사발을 강물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방이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나는 붓다가 되리라.” 그 사발은 정말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날 밤에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305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 305
만약 내 안에 이런 종류의 힘, 즉 역사의 물결에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는 그[역사의 물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때, 그 침이 [나한테 되돌아오지 않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누군가의 눈에 맞는다면, 여러분은 붓다가 될 수 있다. 305,6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동양에서 벌어지는 모든 충돌은 곧 초자아와 이드 간의 충돌이다. 여기에서 자아 원칙이라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없는 동양인은 개달음을 찾기 위해 이처럼 가족을 떠나 스승을 찾아가고, 자신의 자아라는 작은 공 또는 조개껍질을 가져가서는 스승에게 그것을 깨뜨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스승은 작은 망치, 즉 요가 훈련을 꺼내들고, 그리하여 - “퍽!” - 그의 자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은 스승을 찾아갈 때에도 자신의 한평생을 인도한 힘이었던 굳건한 자아와 함께 가져간다. 그리고 스승에게 그걸 깨뜨려 달라고 부탁하지만, 스승이 앞서와 똑같은 작은 망치를 꺼내 “퍽! 퍽! 퍽!” 하고 40년 넘게 두들겨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서양인은 점점 더 불행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307
여러분이 가치평가를 하는 정신을 지닌 사람이며, 이제껏 어떤 스승조차 해 본 적 없었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내 생각에는 라마크리슈나가 이른바 ‘원숭이의 길’이라고 부른 것이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른바 불교도의 ‘가운데 길[中道]’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자기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의 대응물 격인 중심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굳이 숲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 중심으로부터 여러분 자신의 평안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닐 수 있다. 결국 여러분은 그 중심에 근거하고 살아가면서, 여전히 이 세상과 관계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308
남성=사회의 질서
여성=자연의 질서
남성의 일은 생명과 관계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은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319
여성은 원래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도리어 남성 - 사실은 여성의 힘의 대행자에 불과한 - 의 일을 하는 2차적인 에너지의 지위로 이동함에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진짜 힘을 잃어버리고 분개하게 되었다. 슈팽글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다.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그 자체다.”320
남성의 기능은 행동하는 것이다. 여성의 기능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그것’이다. 여성은 어머니 지구이다. 320
따라서 여성은 ‘그것’이다. 가령 여성이 아이를 낳는 행위는 여성의 ‘존재’의 일부이며, 또한 여성의 몸 자체에 이미 존재하는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이 오로지 아이를 낳는 행위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여성이 상징하는 삶 속의 그 힘을, 그 특징을, 그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모두가 곧 생산이기 때문이다. 320
여신의 열렬한 숭배자인 하인리히 침머가 미국으로 건너오려고 할 때에 그는 융 재단에서 일하는 노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노부인들은 침머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고, 그의 아내가 집을 구하는 등의 일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들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네. ‘당신이 거기 계신 게 보입니다’하고 말이지.” 이처럼 여신은 모든 여성 속에서 작용하며, 이는 남신이 남성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빛나던 광채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거기 계신 게 보입니다.” 321
내가 일찍이 받았던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문필이나 편집이나 또는 그와 유사한 분야로 진출하겠다고 할 경우, 나는 그들이 완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편집 쪽 일을 도와줄 똑똑한 청년들을 고용한 바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독일어도 모르고 프랑스어도 모르고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젊어서 받은 교육의 혜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막대한 양의 공부가 [거대한 빙산처럼] 모조리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물 위에 나온 빙산의 일각뿐이다. 372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372,3
여러분이 학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374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과 ‘예술로서의 예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 치료요법은 한 사람을 인간적이게 만들고, ‘예술로서의 예술’은 그 사람을 인간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데려간다. 그 차이란 치료요법에 있어서는 기술과 예술적 대상이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치료요법에서 여러분은 그저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을 그 궤도 위로 다시 돌려놓으려 노력하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한 치료요법의 실시는 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 놓는, 그를 조화로운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연과 평행한 조화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아직 자연에 평행하지 못하다면, 예술은 그 사람을 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한 치료요법에 불과하다.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은 이른바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실시하는 사람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예술이 아니다. 374,5
성스러운 춤은 신들을 위한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378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러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 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379
내 조언은 이렇다.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381
예술가는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의 동력을 발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 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며,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뭐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통과 표현, 즉 예술 작업의 두 가지 요소에 관한 명상이다. 이후 벌어지는 일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점차적으로 - 그런 일은 이번 주나 다음 주 또는 올해 안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 여러분에게 주어진 책임이 줄어들고, 여러분의 예술을 연습할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여러분의 작업 - 즉 여러분의 예술- 과 여러분의 직업이 서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81,2
내가 글을 쓸 때, 나는 모든 학술계를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이 재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고, 내가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들의 방식과 같지 않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단두대로 내려치든가 말든가. 그래도 당신들은 이 메시지를 갖게 될테니까.”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부딪히는 바위’를 지나가야 하고, 그 바위는 이제 곧 닫혀버릴 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압도되어 버리기 전에 어찌어찌 거기서 벗어나곤 했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과정이다. 말 그대로 문을 계속 붙잡아 두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이 일찍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384,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 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될 수 있다. 385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386
글을 쓸 때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6
인도에는 두 가지 종류의 미술이 있다. 하나는 심미적인 미술이고, 또 하나는 사원 미술로서, 후자는 그 목표에 있어서 심미적이지 않다. 사원 미술은 사람의 눈을 붙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미술가와 관람자의 영적 변화에 영향을 주는 것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종류의 미술 속으로 접어든다. 이미지의 원천은 환상이다. 유럽인들은 한동안 인도 미술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인도의 시와 철학은 [비교적 쉽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미술은 아니었다. 인도인들이 구현하는 이미지는 사물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변화를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394
성스러운 공간이란 다시 말해 사물이 그 어떤 실용적 용도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공간이다. ‘그렇게 오는[如來]’ - ‘성스럽게 넘쳐나는’ - 어떤 것에 관한 명상을 통해, 즉각적인 실용적 용도가 없는 우리 자신의 측면이 앞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유기체의 성장도 그런 식으로 오는 것 같고, 실용적 활동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오는 것 같지는 않다. 399
일단 여러분이 상징을 이해하게 되면, 여러분 역시 어디에서나 상징을 볼 수 있으리라. 404
경이로운 사실은 깊은 창조의 중심을 어루만지고 거기에 영감을 제공하는 특유의 효력이 가장 하찮은 어린이 동화 속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404
“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 토마스 머튼 404,5
때로는 상징조차도 우리의 눈을 열어주지 않고, 오히려 닫아 버린다. 우리가 상징을 구체화하면 우리는 거기 집착하게 된다. 405
분명한 교훈은 (....) 삶의 경이와 수수께끼의 지고하고도 신성한 상징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은, 삶의 괴물 같은 성격과 그런 특징에 있어서의 영광을 인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원래의 모습이며, 이는 지금이나 나중이나 결코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우주를 지금의 모습보다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또 자신들이 그걸 만들었다면 어땠을지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 그들의 이름은 군대다 - 의 경우에는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시간도 없고, 삶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에 적헙하지 않다. 또는 ‘우선 사회를 바로잡고 나서, 그런 다음에 나를 바로잡겠다’고 생각하는 자들 -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듯 - 은 심지어 하나님의 평화의 저택의 출입문에서조차 입장을 금지당할 것이다. 모든 사회는 악하고, 슬픔이 가득하고, 불공평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여러분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떻게 그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지식에서 비롯되는 즐거움 슬픔과 서러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몸소 체득하지 못한 사람을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413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413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420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주관적 의미’에서 보자면 오래되고, 영원하고, 끊임없는 신화이며, 기억되는 과거나 투사되는 미래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견지에서 시적으로 갱신되는 신화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즉 특정한 ‘민족들’의 아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각성할 수 있게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즉 개인이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행성 표면의 특정한 장소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자아로서뿐만 아니라 거대한 정신 - 각자 자기 나름대로, 모두와 (경계 없이) 하나가 되어 - 의 중심으로서 각성하도록 호소하는 신화인 것이다.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