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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소스: http://blog.naver.com/dunqq/220480543997
우치다 미츠코는 서양고전음악계를 이끌어가는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 정도의 음악인이라면 사치스런 호텔과 프라이빗 빌라에 묵으면서 이런저런 음악축제를 옮겨 다니며 여름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미국 버몬트 남부에 있는 작은 리버럴 아츠 학교인 말보로 칼리지의 캠퍼스에 머문다. 1951년 이후 이 학교는 말보로 뮤직 페스티벌을 주관해왔다. 여름의 이 페스티벌은 바깥에는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집회이다. 이 집회는 다양한 실내악 축제이자, 재능있는 젊은 연주자들에게는 신부수업을 끝내고 사교계에 입문하는 교양학교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음악계 지식인들의 비밀회담이기도 하다. 우치다와 피아니스트 리처드 구드는 한 해씩 번갈아 말보로의 공동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작년 여름 내가 이곳을 세 번째로 찾았을 때, 우치다는 7월말부터 8월초까지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 말보로 월드에서 대제사장, 여성지도자, 선동가, 광대, 말보로 스타일의 결정권자라는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다음 주에 59회째 세션이 열리는 말보로는 음악계에서 독특한 사건이다. 말보로 칼리지를 공동으로 설립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이다. 오랜 시간 이곳을 이끌었던 그는 예술가들이 돈을 잊고 온전히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는, "거의 유토피아에 가까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말보로 칼리지는 이스라엘의 키부츠, 히피 공동체, 제임스 힐튼 소설의 낙원인 샹그릴라,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컬트,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그리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구절이 쓰여진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비유되어왔다. 며칠 동안 이곳은 현실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게으른 여름캠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연주자들은 작은 연못에서 수영을 한다.
말보로 스쿨에서 우치다의 일과는 정해져있다. 아침 9시 30분과 10시 사이에 그녀는 캠퍼스 커피숍에 간다. 식당의 아침 뷔페를 놓친 사람들이 아침을 먹는다. 젊은 연주자들은 파란색과 자주색 긴 의자에 기대어 서있다. 우치다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걸음을 멈춘다. 베네치아 카니발 가면의 패턴을 본따서 안경테끝이 뾰족한, 밝은 청색 모델의 페기 구겐하임 선글래스를 쓴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편한 옷차림이다. 평소에는 위아래 모두 츄리닝을 입는다. 상의 츄리닝에는 말보로 글자가 뚜렷하게 박혀있다. 커피숍 스피커에서 'house of the rising sun'이 흘러나오던 지난 여름의 어느날, 음악이 스캇 조플린으로 바뀌자 우치다는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와 엉덩이를 춤추면서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넣었다. 보통 그녀는 버몬트 체다치즈와 버몬트 토마토, 베이컨, 계란 후라이로 만든 샌드위치인 에그 맥말보로를 먹는다. 대부분의 손님은 종이 접시를 받지만 우치다는 차이나컵에 담긴 카푸치노와 함께 나무 접시를 받는다.
이스라엘 출신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마탄 포랏은 눈에 띌 만큼 베토벤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우치다의 건너편에 앉은 그가 카푸치노를 봤다. "이런 세상에!" 그가 말했다. "카푸치노를 주는 줄은 몰랐네."
"다른 사람한테는 안 줘." 우치다는 말한다. "나한테만 주는 거야. 나도 이 정도 사치는 좀 필요하다구." 그녀는 해맑게 웃으면서 한 모금을 마셨다.
오보에 연주자 제임스 오스틴 스미스가 샌들을 신은 발을 탁자 위에 올리면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예일 음악 스쿨을 얼마 전에 졸업했다. 오보에 주자들은 실내악 레퍼토리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치다와 함께 공연하기를 꿈꾸는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 우치다에게 덜 시달리는 편이다. 스미스와 우치다는 서로 자주 장난을 친다. 스미스는 그날 밤 비공식적으로 연주자들이 모여서 공연하는 하이든 교향곡에서 몇가지 꾸밈음을 넣고 악보에 없는 연주를 자기 파트에서 하겠다고 선언했다.
"까불지마!" 우치다는 엄청 놀란 흉내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건 불법이야. 내가 용납하지 않겠어!"
우치다는 우치다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언어를 말한다. 1961년 그녀가 12살일 때 일본의 외교관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우치다는 사춘기를 빈에서 보냈고 덕분에 독일어가 유창해졌다. 20대 초반에 그녀는 런던으로 이사했고 지금 그녀의 집은 런던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말할 때면 일본과 오스트리아와 영국 액센트가 뒤섞여 나온다.(엘리자베스 여왕은 최근 그녀에게 부인(Dame) 작위를 수여했다) 말보로 칼리지에서 여러 번 여름을 보내면서 그녀는 미국 영어의 어휘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 "'ditzy'란 말은 무슨 뜻이야?" 그녀가 말을 멈추고 물었다. "똘똘하지 않다? 말은 많은데 별로 똘똘하지는 않다? 오케이, 알았어!" 그녀의 말은 속사포처럼 다다다 쏟아내다가 어떨 때는 연극배우처럼 어색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패턴을 반복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그녀는 다양한 이야기와 문학적 표현을 구사하거나 짤막한 비평을 덧붙이면서 모든 사람을 얼어붙게 만든다. 최근 잘 나가는 한 연주자에 대해서: "독일사람들한테는 카라얀 이후로 거물이 하나 난 셈이지. 카라얀이야 히틀러 이후로 가장 큰 거물이었고." 베테랑 가수 한 사람에 대해서: "머리는 텅 비었는데 학생들은 너무 잘 가르쳐." 유명한 한 지휘자에 대해서: "분명히 카리스마가 있지. 하지만 난 카리스마를 원하는 건 아냐. 카리스마가 아닌 어떤 것을 원해." 음악신동에 대해서: "스무살 천재한테 심장 수술을 받고 싶어요? 리어왕을 연기하는 십대를 극장에 가서 보고 싶나요?" 그녀가 그런 말을 던질 때면 올리비에 메시앙이 바로 악보로 옮길 법한, 한 무리의 새들이 크게 웃었다가 잦아들었다가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말로 다트를 던질 준비가 되면 그녀는 눈을 작게 하고 입술을 오무렸다. 누군가를 칭찬할 때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가슴에 한 손을 뻗으면서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7월의 마지막 주였다. 말보로 사람들 - 13명의 피아니스트, 43명의 현악기 연주자, 16명의 윈드 브라스 연주자, 9명의 가수, 사무직원들과 코치들, 일정관리자들, 사서들, 녹음기술자들, 피아노 조율사들, 안내원들, 인턴들, 요리사들, 베이비시터들, 그리고 라이프가드까지 - 은 한 주 동안 숙소에 모두 모여있었다. 그들은 기숙사 방과 아파트와 캐빈에서 묵었다. 몇몇은 욕실을 같이 쓰고 밤늦게까지 노는 대학시절의 생활로 되돌아간 자신들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말보로 칼리지에서 성공적으로 학기를 보내면 그들의 연주자 경력에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백 명이 넘는 말보로 출신들이 미국의 8개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으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만 22명이 연주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평가받는 현악사중주단인 과르네리는 올 연말 해산되지만 과르네리가 처음 결성된 것도 1964년 말보로에서였다. 에머슨, 줄리어드, 오라이언, 성 로렌스 사중주단 역시 말보로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머레이 퍼라이어, 조슈아 벨, 힐러리 한이 초창기에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루돌프 제르킨의 아들인 피터 제르킨은 1958년 11살에 말보로에서 데뷔했고, 그 뒤 착실히 경력을 쌓았다.
우치다가 항상 말보로 칼리지로 돌아오곤 하는 이유는 다른 기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방식으로 음악에 몰두할 기회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74년 아주 어릴 때 이곳에 처음 왔죠." 그녀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훌륭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는 그런 시간이 왜 소중했는지 잘 몰랐어요. 1992년 이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우치다는 비공식적으로 고문이 되었다. 1991년 루돌프 제르킨이 죽은 다음 해였다. 그녀는 1999년 공식적으로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 이해할 수 있었죠. 이곳에 빠져들었어요. 여기서는 세상을 보는 방식도 다르고 삶을 보는 방식도 달라요. 몇 주를 이곳에서 보내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함께 밥을 먹으면서 같이 앉아서 떠들고 맥주를 같이 마시고 그러다보면, 영감이 내려오죠. 음악을 한다는 게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본적인 감을 갖게 되요. 그건 이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베토벤의 '대공'을 한 시간 반 동안 연습한 다음 그냥 무대로 걸어들어가는 그런 생활과는 다른 거죠. 말보로 칼리지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깨닫게 되는 곳이예요. 우리한테는 연습을 하는 시간도 있고 그냥 생각을 하는 시간도 있어요. 하지만 항상 시간이 부족하죠. 천천히 느리게 가다가 또 갑자기 발걸음을 빨리 하는 것, 그것이 시간입니다."
아침을 먹고 우치다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다음 시즌에 연주할 곡들을 몇 시간 동안 연습했다. 악보를 이렇게 탐험해나가는 것은 그녀가 지금과 같은 연주자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차르트 전문가로 1980년대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주로 우아한 프레이징과 윤기가 흐르는 톤으로 주목을 끌었다. 몇 해가 지나면서 그녀의 레퍼토리는 넓어졌고 - 작년 카네기홀 리사이틀에서 그녀는 바흐의 몇 작품들과 헝가리의 현대음악가 죄르지 쿠르탁(Gyorgy Kurtag)의 이해하기 어렵지만 묘하게 끌리는 작품들을 함께 연주했다 - 그녀의 연주는 사색의 깊이를 더해갔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에서 그녀는 과장된 운영을 조금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찢어지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풍경을 불러낸다. 모차르트는 물론 그녀의 고향이다. 제임스 스미스가 하이든 96번 교향곡에 꾸밈음을 슬쩍 집어넣은 같은 날 저녁, 우치다는 소규모 말보로 오케스트라 연주에 참여했다. 그녀는 모차르트 12번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를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도입부에서 몇 가지 실수가 있었고 깔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부드러웠고 전개가 자연스러웠으며 사람 냄새가 났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연주를 들었다. 그런 친밀함 속에서 벌어지는 연주는 우리가 오늘날의 연주회장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연주보다 더 모차르트적인 공연에 가까울지 모른다.
수십 년 동안 말보로 캠퍼스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 옆에는 '주의 : 연주 중입니다'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연주자들은 그간의 빡빡한 일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대 옆에서 그들을 언제나 쳐다보는 매니저, 에이전트, 홍보인력은 없다.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작품들은 그들이 영감을 얻었던 전원의 환경을 닮은 이곳의 풍경에 녹아든다. 우치다와 연주자들은 언덕 위의 오두막에서 드보르작 5중주를 연습한다. 소리새들의 푸가와 벌레들의 오스티나토가 섞인다. 와이파이 인터넷은 없다. 연주자들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과 80대 노인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긴 테이블을 놓고 함께 밥을 먹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두 발로 걷는 근대 이전의 생활을 경험한다. 사실상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다. 우치다가 말하는 것처럼 말보로 칼리지에서는 무엇보다 시간이 수축하고 팽창된다. 만나는 연주자들마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 9월에서 5월까지는 2차대전 이후 만들어진, 개미 한 마리 없이 깔끔한 연주회장에서 1시간 2시간 연습을 하지만, 그리고 나면 눈을 감고 말보로 칼리지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루돌프 제르킨 - 아니면 말보로 칼리지의 사람들이 아직도 부르는 이름인 미스터 제르킨 - 은 여전히 이 캠퍼스에 살아있다. 그는 이 캠퍼스에서 죽기 전까지 마흔 번의 여름을 보냈다. 제르킨은 독일인 특유의 근엄함과 너무나 미국적인 무정부주의라는 두 가지 인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조증에 휩싸여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계속 악보를 연습했으며 앙상블을 연습할 때는 협연자들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디테일에 집착했다. 어떨 때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10대처럼 행동하기도 해서 어린애같은 장난을 곧잘 했다. 과르네리 사중주단의 제1바이올린주자인 아놀드 스타인하르트는 그의 차 엔진 뚜껑 안에서 장난감 폭탄이 터졌던 일을 기억한다.
아놀드 스타인하르트와 바이올리니스트 필립 내겔레는 말보로 스쿨이 시작된 첫 여름에 온 뒤로 50번 이상 이곳을 찾았다. "제르킨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필립은 말했다. "일단 에너지가 엄청났죠. 지저분한 길 옆에 농장을 갖고 있었는데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고 말, 닭, 뭐 농장에 있어야 하는 것들은 다 있었어요. 제르킨은 진흙과 소와 아이들과 개와 베토벤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갔죠. 제르킨의 에너지는 육체적인 근력에서 나오는 것이었어요. 구스타프 말러가 그랬던 것처럼 항상 산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등산가였습니다. 생김새도 조금 말러를 닮았죠. 보통 사람 손보다 두 배는 컸고 두 배는 무거웠습니다. 건반을 세게 누를 필요가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드럽게 연주할 수 있었어요. 장식이나 그림, 책들과 음식을 둘러보면 그의 집은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소탈한 유머를 즐겼죠."
제르킨은 1903년 보헤미아에 있는 동유럽의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티븐 리먼과 매리언 페이버가 피아니스트들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제르킨이 처음 자신의 재능을 보인 때는 여자형제들 중 한 명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전부 틀렸어." 아이는 눈물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9살이 되던 해 제르킨은 빈에 가서 공부를 했고, 빈에서 교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오이게니 슈바르츠발트의 영향을 받았다. 슈바르츠발트를 통해 제르킨은 아돌프 루스, 오스카 코코슈카, 칼 포퍼, 그리고 그를 통해 작곡을 배운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난다. 슈바르츠발트는 개성이 강한 사람들을 여름 산속의 피서지에서 불러모았고, 쇤베르크는 사적인 음악 공연회(Society for Private Musical Performances)를 통해 상업적인 공연문화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다. 두 사람의 이런 행적은 이후 제르킨이 말보로 칼리지를 만들어나가는 데 영향을 끼쳤다.
제르킨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부쉬였다. 아돌프 부쉬는 빼어난 연주자였지만 연주자가 거장으로 여겨지는 연주를 혐오했다. 수도사와 같은 자세로 독일 실내악과 솔로 레퍼토리를 완성해나가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제르킨은 그가 10대였던 시절인 1920년 부쉬를 만났고, 그의 음악적 신념을 함께 받아들였다. "정격연주(Werktreue), 즉 철저히 악보에만 충실한 연주를 고집하는 철학이죠." 15살에 말보로 칼리지에 처음 왔던 리처드 구드는 말한다. "요즘은 그런 접근방식이 갖고 있는 한계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이상주의가 굉장히 중요했어요."(구드는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을 연주하면서 그런 전통을 충실히 따른다. 연주자인 자신을 지우려는 그런 관점 때문에 구드는 항상 저평가되고 있다.) 제르킨은 부쉬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1935년에는 그의 딸 이렌(Irene)과 결혼했다. 제르킨과 부쉬는 유럽에서 듀오로 공연했고 실내악 연주의 기준을 만들어나갔다. 부쉬는 또한 부쉬 사중주단을 이끌고 있었다. 부쉬 사중주단의 베토벤, 슈베르트의 근육질 연주는 젊은 우치다 미츠코를 매료시켰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독일에서 제르킨의 경력은 갑작스레 끝났다. 부쉬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제르킨의 곤경을 보면서 자신의 독일 활동을 모두 취소했다. 두 사람의 그런 끈끈함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리고 부쉬는 나중에 이 결정의 댓가를 치른다. 1939년 미국에 건너온 그는 새로 경력을 만들어가려 했지만 큰 벽에 부딪쳐야 했다. 하이페츠나 크라이슬러의 달콤한 톤에 길들여져있던 미국의 청중들은 조금은 빡빡한 듯한 그의 톤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1940년 부쉬는 심근경색을 겪었고 그 뒤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길포드라는 버몬트의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딸과 사위인 제르킨은 옆집에 살았다. 스위스의 망명자들과 빈의 숲이 떠오르는 자연환경이었다.
부쉬와 그의 형제인 첼로연주자 허먼은 유럽에서 도망쳐온 연주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플루티스트 마르셀 모이즈, 모이즈의 아들 루이스, 그리고 루이스의 아내인 바이올리니스트 블랑슈 오네거 모이즈가 그들이었다. 이들이 모두 모여서 말보로 칼리지의 여름 음악 학교를 열었다. 가까운 낙농 농장 부지에서 열린 1946년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에 제르킨은 깊이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보로의 근본 정신을 만든 것은 부쉬였다. '장인들이 후진을 지도한다, 공연이나 홍보에 있어 연습과 대화를 중시한다.'(부쉬는 뉴욕의 음악가들이 "모든 작곡가를 다 소화하려 하고 악보를 기계적으로 연주한다...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연주가 드물다"며 안타까와했다) 부쉬가 죽은 뒤 1952년 제르킨은 말보로 스쿨을 넘겨받았다. 제르킨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보로의 디렉터로 일했다.
말보로 스쿨의 초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수선했다. 제르킨은 공연 수입의 대부분을 이곳을 운영하기 위해 기부했다.(토스카니니가 지원해준 덕분에 제르킨은 미국에서 부쉬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내겔레는 몇몇 유망한 학생들이 식당 - 본래는 마굿간이었다 - 에 걸어들어와서 다시 걸어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면서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 생면부지의 외국인들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음악가들은 말보로가 이름을 알리게 된 1960년대를 통과하면서 이곳이 다른 음악학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곧 이해하게 되었다. 컬럼비아 레이블을 달고 발매된 말보로 음악 시리즈의 레코딩은 베스트셀러였다. 첼로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는 1960년에 방문을 시작했는데, 그의 유명세 덕분에 말보로 스쿨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체질적으로 홍보를 좋아하지 않았던 제르킨은 취재나 인터뷰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이런 신중한 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말보로 스쿨 사람들은 한 유명한 젊은 피아니스트(날림 역자 주: 아마 랑랑을 일컫는 듯)에 대해 유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 피아니스트는 몇년 전 1-2주 정도 말보로 스쿨을 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도 이제 유명해지겠군요!" 그럴 필요는 별로 없는 곳이다.
요요마와 에마누엘 액스 또한 말보로 스쿨을 찾아오는 수백명의 연주자들이다. 1973년 8월 3일 두 사람은 브람스의 C단조 피아노 4중주를 이곳에서 처음 연주했다. 얼마전 링컨 센터 근처의 카페 론다에서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말보로에서 겪은 것을 말해주었다.
"우린 줄리어드의 카페에서 서로 알게 됐어요," 액스는 말했다. "그리고 말보로 스쿨에서 룸메이트가 되었죠. 요요마는 방에 거의 오지 않았지만요. 요요마는 항상 질(Jill)이랑 같이 있었죠."
"말보로에서 아내인 질을 만났어요." 요요마는 설명했다.
"기억해? 브람스 최종 리허설에서 제르킨씨가 들어왔을 때를. 악보에 뭐가 써있든 그걸 엄수해야 한다는 사람이었어. 예를 들어 높은 음역에 정말 어려운 음표가 있다 쳐. 그리고 더 쉬운 방법은 그걸 왼손으로 연주하는 거야.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액스는 베토벤의 해머클라비어를 예로 들었다. 이 소나타는 왼손이 매우 빠르게 음역을 높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쉬운 방법은 오른손을 쓰는 것이다. "오디션에서 누군가 오른손을 썼어요. 그걸로 끝이었지."
"코맙수다!(Zank you very much!)" 요요마는 제르킨의 억양을 흉내냈다. "시칸을 내주어서 정말 코맙수다!(Zank you very much for findink ze time!)"
"그런 친구가 호로비츠처럼 연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 말보로 스쿨에는 오지도 않았을 수 있었을 거야." 액스는 계속했다. "그날 브람스 마지막 악장에 정말 끔찍한 음표들이 있었지. 딱 한 음을 연주해야 하는데 내 손을 거기까지 뻗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대충 넘어갔지. '어!' 제르킨 왈, '그 음에는 아르페쟌도가 없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나.' '나도 압니다 제르킨씨. 하지만 내 손이 작은 걸 어쩝니까.' 그러자 말하는 거야. '걱정말게! 실제 공연에 들어가면 조금 커질 걸세.'"
요요마는 액스에게 물었다. "손이 커질 거라고 했다구?"
"응, 조금은 커질 거라고 했어.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 난 그 음을 제대로 연주했어. 게다가 앞뒤로 이어지는 모든 음들도 다 연주해냈지. 괜찮았어. 제르킨씨는 만족했지."
액스에게는 제르킨이 우상이었던 데 반해 - 그 여름, 그는 제르킨이라는 거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액스에게는 더 길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용기가 없었다 - 요요마는 파블로 카잘스의 위엄 앞에 서있었다. 요요마가 어린 시절 카잘스는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연주했고 요요마가 만난 90세 즈음에도 여전히 정정했다.
"수업에서 카잘스를 앞에 두고 연주를 했지." 요요마는 말했다. "카잘스는 계속 말했어. '자네 첼로 소리가 안 들려! 도통 안 들린다구!' 그게 내가 받은 피드백의 전부였어. 하지만 카잘스와 함께 연주한다는 건 대단한 경험이었어. 특히 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는. 베토벤 4번이었을 거야. 카잘스는 무대 뒤에서는 산소호흡기 같은 걸 써야 했어. 무대에서 데리고 나가려면 두 사람이 부축을 해야 했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었어. 그리고는 음악이 시작됐지." 요요마는 나이를 먹은 채 구부정하게 있던 카잘스가 생명을 얻어서 몸을 곧게 펴고 두 팔을 하늘에 높이 든 다음 오케스트라에 나지막히 지시를 내뱉는 모습을 흉내냈다. "아아니야!...베토벤!...으으음악!...점점 세게!" 요요마는 계속했다. "그때 나는 내가 음악을 계속해야 할지 확신이 없을 때였어. 음악에 모든 것을 내던질 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지. 그때 그런 사람을 본 거야. 은퇴를 몇 번이고 했을 나이의 사람이 베토벤 4번을 연주한다니까 몸을 일으키는 거지. 이런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리고 그때 깨달았지. 음악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말보로 스쿨의 시니어들은 다들 가르치는 방식이 다르다. 파리 음악원의 학장인 플룻 연주자 모이즈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오페라의 아리아 악보를 읽게 시킨다.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미예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는 말수가 거의 없다. 악보의 한 소절을 가리키고 때때로 웃는 것이 전부다. 빈의 윤택한 환경에서 바이올린을 익힌 펠릭스 갈리미르는 실내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연주자들을 가르친다. 액스에 따르면 갈리미르의 수업에서는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따라가는 사람도 없다."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알렉산더 슈나이더는 러시아 액센트를 쓰면서 화산처럼 칭찬하고 나무란다. 보자르 트리오에서 오랫 동안 연주해온 바이올리니스트 이시도어 코헨은 독자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담배를 한 대 피면서 똑바로 날 쳐다보죠. 그리고는 말해요. '어떻게 생각해? 데크레셴도가 필요할까?' 코헨은 스스로 고르라고 압박하죠." 요요마의 말이다.
"말보로 스쿨에는 친구들과 리듬을 즐기는 클럽처럼 실내악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액스는 덧붙였다. 액스는 능글맞고 싫은 선배의 연주톤을 떠올렸다. "'저 친구가 연주를 잘 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실내악(cha-a-a-a-amber music)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구만.' 그렇게 한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결국에는 뭐가 옳다 그르다 그런 것도 없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지." 요요마가 말했다. "전부 다른 방식으로 열정적이고 전부 다르게 가르치고 성격도 전부 다르니까 그런 걸 보고 나면 뭐가 옳다 그르다란 게 있을 수가 없죠."
우치다와 구드는 부쉬와 제르킨이 만들어놓은 가치를 존중한다. 그리고 그 틀을 바꿀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말보로 스쿨에 자신들의 혼을 불어넣고 있다. "92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루디(제르킨의 애칭)는 그렇게 안 했다', '제르킨씨라면 그렇게 안 할 거예요'란 말들을 지칠 정도로 들었어요." 우치다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하죠. 리처드와 나는 그런 식의 생각을 다루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어요. 이제는 좀 더 개방적이 됐죠. 정말 그래요. 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항상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요. 좀 더 신경써줘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고요. 알잖아요, 재능이 꽤 있지만 천재는 아닌 그런 친구들. 그래서 항상 커피숍에 가요. 냄새를 맡죠. 누가 누구랑 어떻게 친한지 다 알아요. 그런데 구드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구드나 나나 둘 다 별종이잖아요. 하지만 우린 열심히 음악을 해왔어요. 그게 제가 어린 친구들한테 해줄 말이예요. 내가 여기까지 해왔다면 누구든 다 여기까지 해올 수 있다고 말이죠."
과거의 말보로 스쿨에는 좀 더 뛰어나보이기 위해 다들 남성적으로 경쟁했고 마초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우치다는 성격에서든 연주에서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행사한다. 메조 소프라노 레베카 링글은 지난 여름 모차르트 A장조 협주곡의 리허설이 끝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우치다가 한 소절에 대해 말했죠. '여기에는 행복하지만 힘이 있어요. 오늘날 여성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 그래요. 행복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힘차고.' 그 얘길 들었을 때 왠지 울 뻔 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우치다 자신이 그런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녀는 정말 요정같이 가냘프지만 매우 힘차고 아주 여성적이고 모든 면에서 지적인 사람이예요."
우치다가 책임을 맡는 여름과 구드가 책임을 맡는 여름은 색깔이 아주 다르다. 구드는 좀 더 느슨하고 자유롭다 못해 방탕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유도한다. "구드는 그만의 세계 밖에서는 정말 자상한 사람이예요." 한 연주자가 내게 말했다. "그는 그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음악을 생각하죠. 구드는 리허설에서 너무 재미있어요. 때때로 그는 한 번 더 연주해보자고 말해요. 그 소절을 연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소절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듣고 싶은 거예요. 미츠코는 더 집요하죠. 그녀는 항상 지켜보고 있고 항상 듣고 있어요. 그녀가 '벤 바일먼은 꽤 잘해'라고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벤을 주목하죠.(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 19세의 바이올린 주자 벤 바일먼은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다.) 구드와 미츠코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보완하면서 이곳에서 부모 역할을 완벽히 하고 있습니다."
말보로에 입학한 대부분의 젊은 음악가들은 2~3회 연속으로 여름 학기를 이곳에서 보낸다. 해마다 겨울에는 몇 안 되는 자리를 놓고 수백번의 오디션이 열린다. 우치다와 구드에게 어떤 자질을 중시하느냐고 물어보자 구드가 대답했다. "일정한 기술적인 재능은 필수죠. 하지만 또한 얼마나 절박한가, 어떤 감정을 정말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가를 봅니다. 음악을 하려면 결국 후자가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놓고 아마 '음악다움(musicality)'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겁니다. 때때로 그런 음악다움이 단번에 들릴 때가 있어요. 머레이 퍼라이어가 말보로 오디션을 봤을 때의 일화죠. 슈베르트 C 단조 즉흥곡을 연주했는데 이 곡은 포르티시모 G로 시작합니다." 구드는 소리를 흉내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호르초프스키는 제르킨을 쳐다보면서 '입학시킵시다'라고 했다고 해요." 우치다는 이를 알기 쉽게 그녀식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이 좋은 친구들은 테크닉이 모자라고 테크닉이 좋은 친구들은 직관이 없죠.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분포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친구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가려내려고 노력합니다."
말보로 스쿨의 취지가 이렇기 때문에 어린 세대의 대표주자들은 그보다 더 나이든 세대의 연주자들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시니어'들은 말보로 스쿨에 몇년씩 참여해온 베테랑들이다. '주니어 시니어'들은 그보다는 더 젊은 세대에서 활약하면서 윗 세대와 아랫 세대를 이어주고 있다. 앤서니 체키아(Anthony Checchia), 프랭크 샐로먼(Frank Saloman), 필립 머네벌(Philip Maneval)은 모든 세대를 이어주면서 말보로 스쿨의 사무를 맡고 있다. 이들은 말보로 스쿨의 전통을 충실히 관리한다. 예를 들면 말보로 스쿨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이나 역할에 관계 없이 줄을 서서 식당의 식탁을 잡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샐로먼은 말한다. "19살이나 21살 된 친구들이 여기에 처음 와요. 그리고 그들이 우치다 미츠코나 아놀드 스타인하르트, 혹은 그들이 십여년 동안 우상으로 생각해온 사람들을 바로 옆에서 직접 만나는 모습을 보거나 '뭘 마실 거예요?'라고 물어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여기서 일하는 묘미 중의 하나죠."
지난 여름 말보로 스쿨에서의 레퍼토리는 70명의 작곡가가 만든 221개 작품을 망라했다. 한 주 동안 스투디오와 교실과 캠퍼스 주변의 흔한 장소들에서 2백회를 넘는 리허설이 있었고 모든 활동은 여러가지 색깔로 표시하는 일정판으로 조정되었다. 현대음악도 제법 많은 양이고 색다른 메뉴들도 섞여있지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드보르작, 브람스와 같은 중부 유럽의 황금기 거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두 명의 작곡가들은 여름에 줄곧 숙소에 머문다. 작년에 독일 작곡가 요르크 빗만은 그의 '헌트 사중주단'을 지도했는데 연주자들의 활은 열심히 허공을 헤맸다. 처음 3주간 말보로의 참가자들은 오직 리허설만 한다. 7월이 되면 그들은 630명이 앉을 수 있는 홀에서 입장료를 받는 주말 공연을 열기 시작한다.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시니어 멤버들은 수요일 밤에 만나 연주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그룹을 위해 일정을 조정한다. 모두들 공연보다 리허설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경쟁이 없을 수는 없다.
어느 무더운 토요일 나는 여러 개의 리허설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해피 밸리'라는 이름의 기숙사에는 삼각형의 처마가 있고 자주빛과 회색이 섞인 카펫이 깔린 공용 공간이 있는데 여기서 여러가지 활동을 볼 수 있다. 아침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세 명의 연주자들 - 바이올리니스트 비비안 해그너, 첼리스트 프리실라 리, 피아니스트 조나단 비스 - 가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opus 1 no. 2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하고 시적인 연주자인 비스는 16살에 말보로에 처음 왔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긴 해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 생각을 많이 말했다. "나는 꾸밈음을 조금 더 빨리 연주할까 하는데. 싫어? 어떻게 생각해?" "네가 크레셴도로 가면 나는 유쾌하게 널 무시하고 내 갈 길을 신나게 갈 거야." 소절을 반복해서 연습하면서 처음에는 소리가 밝았지만 나중에는 어두워졌다. 프리실라 리는 첫번째 소리를 듣고 악보에 :)(스마일 아이콘)을 그려넣었다. 그러자 연주자들은 다른 연주자들에게 큐를 줄 때("나야!(ME!) 혹은 큐(Q))나 숨겨진 추가 페이지를 펼칠 필요가 있을 때("페이지를 열어 멍청아!"는 극단적인 예지만) 그것을 떠올리기 위해 각자 악보에 적는 메시지에 관해 떠들면서 이야기는 샛길로 나갔다.
뉴 프레서 빌딩에서는 4명의 관악기 연주자들 - 플루티스트 조슈아 스미스, 오보이스트 재런 필레오, 클라리네티스트 루미에 드 기즈-랭글루와, 그리고 바수니스트 윌리엄 윈스테드 - 가 엘리엇 카터의 '8개의 에튜드와 환상곡(1950)'을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 곡은 대체로 무조음악의 어법을 따르고 있으며 매우 난해하다. 윈스테드와 스미스는 신시내티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 수석연주자이며 기즈-랭글루와는 최근까지 카네기 홀의 엘리트 아카데미 프로그램과 줄리어드의 멤버였다. 필레오는 루이지애나 필하모니에서 연주한다. 방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연주자들은 악보가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힘겨워했다. 윈스테드는 5개와 7개의 그룹으로 쪼개지는 8개의 노트를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고민했다. 보통 이런 소절들은 반드시 둘 셋의 작은 유닛으로 쪼개져야 하지만 윈스테드는 어디서 쪼개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다.
"78의 뒷부분을 3과 2와 3으로 연주해보면 어떨까?" 윈스테드가 말했다. "아냐 잠깐만. 2와 2와 3은 어때?"
연주자들은 몇 번씩 다르게 해봤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각 파트가 어떻게 하면 딱 맞아들어갈지를 알기 위해 작은 악보를 서로 돌려봤다. 한 번 더 연주를 해보고 쪼개봤지만 '에잇!' '제길'을 번갈아 내뱉을 뿐이었다.
말보로에서의 시간은 느리다. 윈스테드는 그 느린 시간 속에서 그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새롭게 본다. 그는 순회 공연에서 카터를 연주했지만 "이 작품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서로 모여서 해나가는 데 정신이 팔려있는 거죠. 이 정도로 디테일을 들여다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스미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헤매고 있을 때는 플룻 안에 답이 있더라구요."
해피 밸리로 다시 돌아와보자. 우치다는 두 개의 리허설을 앞두고 제습기가 말을 듣지 않아 낑낑거리고 있다. "흔들고 밀어보고 발로 차고 그러다 보면 멀쩡히 작동해요." 그녀는 피아노의 상태에 예민하다. 피아노가 있는 모든 방에는 제습기를 설치해놓았다. 첫번째 리허설은 슈베르트 E플랫 피아노 3중주. 절제된 표현으로 우치다와 호흡이 잘 맞는 33세의 김수빈, 대부분의 커리어 동안 과르네리 사중주단에서 첼로를 연주해온 실내악계의 전설 86세의 데이빗 소여가 함께한다. 소여는 피아노 주자가 실내악에 참여하면 언제나 너무 크게 연주하는 것이 못 마땅하다. 그는 또 그만이 쓰는 악보 스탠드를 갖고 있는데 거기에는 '데이빗 소여의 사유물 스탠드임. 손 치울 것!'이라고 쓰여있다.
세 연주자들은 슈베르트의 느린 악장에 이르렀다. 이 악장은 실내악에서 가장 유명한 인벤션의 하나로 시작한다. 피아노는 부드럽게 행진하는 코드를 연주하고 첼로의 멜로디는 반복되는 트릴을 써서 슬픔을 띤다. 소여는 부드럽게 저음을 연출하면서 절제된 톤을 유지했고 리듬에 맞춰 재빠른 프레이징을 선보였다. 그는 고요한 코다로 이어지는 한 쌍의 트릴에 매우 집중했고 C장조가 C단조로 급격하게 바뀔 때 두 번째 트릴을 더 늘이고 싶어했다. 김수빈은 조금의 실수도 없이 연주 전체가 정확했다. 너무 정확했기에 우치다와 소여는 때때로 좀 덜 정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금 더 빈의 감수성이 느껴져야 해", 소여는 연주를 잠시 멈추고 말했다. 그리고 생각없이 발을 질질 끄는 것처럼 음표와 음표 사이를 미끄러지는 연주를 직접 해보였다. "에이 그건 또 너무 느슨하다!" 우치다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김수빈은 자신은 사실 느슨하게 연주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는 좀 더 감성을 넣으면서 다시 연주를 시도했다. 우치다의 피아노 소리가 크다는 말을 들은 것은 한 번 뿐이었다. 반주하는 소절에서 그녀는 거의 피아노 소리가 사라지는 듯이 연주했다. 현 소리들만이 떠다니는 와중에 피아노는 비구름의 음색을 띠었다.
소여와 김수빈이 나가자 젊은 소프라노 샬롯 돕스가 들어왔다. 그녀는 쇤베르크의 '공중정원의 책'을 연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 작품은 독일 상징주의 작가 슈테판 게오르게의 시를 딴 연가곡이다. 우치다는 이 곡들을 연주해본 적이 없었기에 음악은 물론 게오르게의 시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돕스는 밝은 성격이다. 속사포처럼 말을 빨리 한다. 얼마 전 영문학 전공으로 예일을 졸업했다. 셰익스피어와 조이스에 대해 논문을 쓴 그녀는 나름의 소양을 갖고 있다. 우치다는 두 사람의 남자 연주자들과 있을 때와는 다르다. 돕스와 있으면서 눈에 띄게 신이 난 모습이다. 킥킥대면서 말장난을 하기도 하고 못마땅한 자신의 연주를 비판하기도 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이 진짜 빈이예요," 우치다는 말한다. 가사가 'schnäbel kräuseln(황새의 부리가 물결을 일으키고)'에 이르자 그녀는 "빈의 나잘 사운드가 들리죠. 어때요? 그리고 'klagend(슬픈)'가 아니고 'kl-a-a-a-gend'예요." 그녀는 돕스에게 리듬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몇 개의 자음에는 강세를 주고 몇몇 부분에서는 딕션을 뚜렷하게 할 것을 주문했다. 우치다는 또 독일어와 다른 언어의 차이를 강조했다. "지금은 프랑스말로 노래하는 것처럼 들려요. 프랑스말은 아주 빠르고 억양이 단조롭죠. 예를 들면 '대통령이 오늘 발표했다 어쩌고저쩌고(l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a annoncé aujourd'hui dah-dah-dah-dah-dah.)' 이런 면은 일본어랑 비슷하기도 해요."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일본의 민요 한 소절을 불렀다. "그에 비해 독일어는 억양의 높낮이가 심하고 더 흘러가는 느낌이 있어요."
돕스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reichsten Lade(가장 비싼 궤),'를 부를 때 톤이 흥분해버리는 것 같아요. 좀 매끈한 느낌이 나게 가볼께요. 목소리에 윤기를 넣어서. 좀 더 템포를 이어볼 수 있어요?"
"맞아요, 내 템포가 너무 느린 것 같아요." 우치다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사이클의 절정에 이르렀다.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노래였다. 돕스의 말마따나 이 노래는 충족감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wahr(참된)'이라는 단어 밑에는 이상할 만큼 오싹한 온음표가 있다. 이 온음표는 C#이 붙어있는 B장조 장삼화음으로 구성된다. 쇤베르크는 여기에 크레셴도를 붙여놓았다. 기술적으로는 연주를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치다는 솜씨있게 페달을 밟으면서 악보에 표시된 마디가 연주되는 동안 소리를 구현해냈다.
오후가 끝나갈 무렵 햇살이 폭우로 바뀌었다. 우치다를 아파트에 데리고 갈 SUV가 한 대 왔다. 돕스와 나는 우치다와 함께 차에 탔다. "거기서 그런 장조는 너무 지독하긴 해." 우치다는 그 이상한 B장조 음표를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좋아요. 정말 어둡고 정말 아름답고. 재밌지 않아요? 연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말보로의 가장 유명한 전통은 종이냅킨을 뭉쳐서 던지는 전쟁이다. 저녁을 먹는 대부분의 밤에 던진다. 이 관습을 제르킨이 시작한 것인지는 기록에 없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맹렬히 참여했다. 어느날 밤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나갈 때 레온 플라이셔는 여왕이 종이냅킨볼에 맞지 않게 우산을 들어서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우치다는 이 전쟁에 끼어들지 않는 편이다. "내가 하는 척 시늉을 잘 해요."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방법이 있어요. 구석에 잘 눈에 띄지 않게 섞여서 있는 거에요. 내가 진짜로 던지면 안 돼요. 내가 던지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나한테 다들 던져댈테니까."
이제는 좀 시들해진 또 다른 말보로의 의식은 해마다 열리는 스퀘어 댄스다. 전세계의 저녁요리라고 할 만한 행사인데 연주자들은 다양한 문화의 요리를 저녁으로 직접 만들어온 다음 짤막한 코미디를 선보인다.(연주자들은 우치다를 단골로 흉내낸다) 물론 제르킨식의 농담도 빠지지 않는다. 작년 여름에 가장 재미있었던 일은 데이빗 소여의 악보 스탠드에 붙어있는 경고문구를 갖고 장난을 친 것이다. 어느날 아침 사람들은 일어나자마자 캠퍼스 안의 수백개 물건에 그것들이 데이빗 소여의 물건이라고 말하는 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알게 됐다. "깜짝 놀랐죠. 모든 물건에 붙어있었어요. '데이빗 소여의 유아용 의자(사유물)' '데이빗 소여의 물주전자(사유물)' '데이빗 소여의 출구 표시(사유물)' 주차장의 모든 차에도 식당의 모든 의자에도 붙어있었으니까. 커피숍의 형편없는 그림에까지도 있었어요. '데이빗 소여의 형편없는 그림(사유물).' 한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몇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몇 시간을 거기다 썼을지 말이죠. 아직도 누가 그랬는지 안 밝혀졌어요. 짐작은 가요. 그런 비밀은 이곳에서 나만 알아요." 우치다는 말했다.
몇몇 신참들은 말보로의 이런 관습에 당황해하기도 한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점잖은 플루티스트인 조슈아 스미스는 스퀘어 댄스를 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처음에는 힘들어했다. "이런 걸 해야 하나요?" 그는 어느날 밤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술의 산 같은 이곳의 분위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클리블랜드로 되돌아갈 때는 여기서의 이 느낌을 어떻게든 담아서 가져가고 싶어집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르킨의 전설을 너무 많이 듣는 데 싫증을 내기도 하고 소풍에 많이 끌려가는 것도 싫어하며 독일음악만 줄창 연주하는 걸 불평하기도 한다. 어떤 젊은 연주자는 광고를 패러디해서 농담을 적어놓기도 했다. "오직 독일음악만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그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풀렝은 금지되었던 그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말보로 스쿨에서 여러분들은 그 시절을 다시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불평분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나무를 쳐다보면서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기쁨에 취하게 된다. 물론 풀렝도 말보로에서 가끔 연주된다.
사실 말보로의 이런 별난 전통은 의도하고 계획한 것이다. 말보로 스쿨은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연주자들의 생체 리듬을 바꾸는 실험을 오랫 동안 해왔다. 제르킨은 그의 동료들을 버몬트에 부르면서 그들이 속세의 모든 것을 잊기를 원했다. 좀 더 느린 리듬에 빠지기를 바랬다. 우치다 역시 그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녀는 말보로의 이런 이상한 짓거리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우치다의 말. "어린 연주자들은 좀 더 헐렁해질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이라 해도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에는 느리고 서툴고 비어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뭐겠어요. 산, 나무, 새, 풋사랑, 그런 거죠. 물론 그보다 훌륭한 것들이 있다 해도 그런 가치가 겉으로 연주되어 나올 때는 단순해야 해요."
저녁을 먹고 연주자들은 커피숍에 하나 둘 모여든다. 보통 여기서 밤늦게까지들 있다. X세대, Y세대의 빠르기로 이야기하고 그들만 쓰는 단어가 가득한 대화가 오간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같은 세대 친구들에게는 낯선 것들이다.("니 바이올린도 1717년에 만든 거야? 헐 황당하네.") 공연이 끝난 다음 몇 사람의 청중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경험도 있다.("헤어스타일을 바꿔보면 어떠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 레베카 링글의 말.) 비행기에서 악기를 갖고 여행하는 위험을 이야기할 때도 있다.("공항사람들이 비올라 케이스를 체크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비올라 케이스를 갖고 비행기를 탔지. 애기 엄마처럼 비행 내내 무릎에 앉혀놓았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카일 암브러스트의 회고.) 올해 여름은 남녀 스캔들이 줄었다는 얘기도 나왔다.("작년 여름은 사포(Sappho)의 여름이었지.") 연주자들은 도플갱어같은 슈페르트 가곡들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수들은 쾨헬 번호에 따라 모차르트 협주곡들을 어떻게 이름붙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누군가 우치다에게 뵤크(bjork)를 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우치다는 조금 일찍 커피숍에 갔다가 커피숍을 나와서 잠을 자러 간다, 아니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커피숍에서 빠져나온다." 하루는 밤에 취재를 위해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여기가 말보로에서 제일 좋은 숙소 중의 하나예요." 그녀는 시원찮은 자물쇠를 몇 번 돌리다가 익살과 자랑을 섞어서 말했다. "이래보여도 욕실이 있다구요." 침대가 하나 놓여있는 반지하 아파트. 하얀색 시멘트 벽이 보인다. 가구는 많지 않고 조명은 침침하다. 우치다는 여기서 혼자 산다. 그녀의 파트너인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쿠퍼는 마지막 주에 그녀를 찾아왔다. 피아노 위에는 우치다가 공부하는 악보들이 수북히 위로 쌓여져있다. 책꽂이에 보이는 책들은 무더운 여름에는 읽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햄릿, W. G. 세발트의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 예이츠와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전집들, 슈테판 츠파이크의 자서전. 모두 독일어 책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우치다는 그녀가 그녀에게 허락하는 두 가지의 작은 사치 -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 차와 피에르 마르콜리니 초콜릿 - 를 내주었다.
어떤 면에서 우치다는 제르킨보다 훨씬 관용적이다. 제르킨은 제르킨과는 정반대의 연주철학을 갖고 있었고 거장의 쇼맨쉽을 보인 호로비츠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오프 더 레코드는 있었지만 우치다는 지금 음악계를 주도하는 몇몇 거장들에 대해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야기해요." 그녀는 라두 루푸를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라두 루푸는 "그녀가 만난 가장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루푸를 말보로에 데려오려고 애쓴 얘기를 들려주었다. "난 정말 흥분했어요. 여기 말보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오직 음악만 하루 종일 하는 곳이라고 설명을 해줬죠. 하지만 루푸는 거절했어요. 이유가 정말 웃겼죠. '미츠코,' 그러더니 그러는 거예요. '난 당신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아니오.'"
요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곡가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바뀌었다. "베토벤은 전적으로 위대하죠. 모차르트는 위대한 천재고요.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녀는 숨을 잠시 들이쉬었다. 눈을 크게 떴다. 머리를 뒤로 조금 젖혔다. "가장 아름다와요.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듣는 음악이예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친구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엄청난 고통을 겪는 와중에 친구는 몰핀을 맞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었지만 맞지 않겠다고 했단다. "자기가 단 한 번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를 보고 싶었던 거죠.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다시 살아돌아와서 그게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말보로의 여름은 8월의 일요일 오후에 끝나는 것이 관례다. 피아노, 코러스, 오케스트라가 함께 축제 분위기로 베토벤의 코랄 판타지를 연주한다. 제르킨은 피아노와 복도와 벽들과 가능하면 그린 마운틴(버몬트에 있는 산)까지 흔들어 댈 기세로 엄청난 볼륨으로 연주하곤 했다. 베토벤은 5번과 6번 교향곡의 초연을 포함해서 공연시간이 아주 길었던 것으로 알려진 자선 공연을 위해 1808년에 코랄 판타지를 썼다. 급하게 작곡한 나머지 베토벤답지 않게 꼼꼼하지 않은 결과물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이 이어지는 작품이다. 중심 선율은 누가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듯이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예고하고 있다. 코랄 판타지의 가사는 예술의 위력을 찬양하며 일상 생활의 고민과 괴로움을 날려버린다. 필립 내겔레의 번역을 인용해보자.
신비로운 소리가 울려퍼질 때
장엄한 말이 선포될 것이니
영광스러운 일이 나타날 것이며
밤과 폭풍이 빛으로 바뀔 것이라
어떤 면에서 코랄 판타지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영원히 미뤄지고 있는 인간의 해방'이라는 세계사적 부담만을 덜어낸 작품이다. 음악이 스스로를 찬양하는, 음악이라는 나라의 국가(anthem)가 코랄 판타지인 것이다. 제르킨이 이 곡을 사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구드는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르킨이 연주한 코랄 판타지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연주였다는 것을 느꼈죠. 제르킨이 죽은 다음 그 연주도 사라졌고 저는 그게 맞는 결정이라고 여겼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사람들이 '근데 우리도 역시 코랄 판타지를 연주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는 놀랐죠. 카타르시스가 필요했어요."
이 연주는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제르킨은 학교의 스탭과 후원자들, 음악을 좋아하는 이웃이 코러스에서 함께 합창할 수 있게 초대했다. 말보로의 성악 프로그램 연주자들이 솔로 파트를 맡기 때문에 몇몇 노래들에서만은 제대로 된 고음과 힘찬 박력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항상 이런저런 잡소리는 섞일 수 밖에 없다. 말보로의 여름에서 마지막 유머로 여겨지는 행사였다. 가수들 중 한 사람, 음악적 식견이 넓은 테너인 윌리엄 퍼거슨은 내가 코러스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피아노나 오보에는 쭉 연주해왔지만 노래를 불러본 경험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리허설에서 바리톤 파트에 끌려들어갔다. 나는 두 명의 위협적인 가수 앞에 섰다. 바리톤 존 무어와 베이스 바리톤 제레미 갤련이었다. 그들은 정말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내가 그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당신이 노래 부르는 게 들리더군." 나중에 퍼거슨은 내게 여러가지 의미를 던지듯이 말했다.
단상 위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이그낫 솔제니친이 있었다. 그는 말보로에서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버몬트의 캐번디쉬에서 자랐다. 소설가인 그의 아버지는 지난 주에 죽었고, 그는 모스크바의 장례식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오케스트라에는 말보로 출신 주니어와 시니어가 섞여있었다. 아놀드 스타인하르트는 객석의 뒷쪽에 불평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콘서트마스터는 김수빈이었다.(스타인하르트는 그의 등에 "데이빗 소여의 사유물"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있었다.) 연주자들은 베토벤 작품에 대한 생각을 활발하게 나누면서 여름 내내 서로가 맺어온 음악적 관계를 음미하고 있었다. 연주자들이 돌아가면서 주선율을 맡을 때마다 우치다는 웃으면서 눈썹을 움직였다. 커피숍에서 에그 맥말보로를 먹으면서 시작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대단하죠." 레베카 링글이 리허설 중간에 잠시 쉬는 동안 내게 말했다. "이제는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이 같이 연주하는 거예요. 로미(Romie)가 끌고 나가고 그 뒤에는 제임스가 끌고 나가죠."
연주홀이 가득 찼다. 말보로 스쿨의 오래된 친구들이 많이 왔다. 우치다는 연주가 시작되는 불길한 C단조 속에서 그녀의 전능한 왼손의 힘을 모두 쓰면서 공연의 긴장감을 되살려냈다.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평소보다 더 낭만파의 화려함에 취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몇 군데에서 음표를 정확하게 연주하지 못했다. 그것은 정확함을 뛰어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제르킨의 음악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고, 가장 귀하고 정직한 노력이 낳는 진실이었다. 합창의 절정은 "사랑과 힘이 서로 만날 때"라는 가사를 기쁨에 넘쳐 계속 부르는 대목이다. "Und Kraft(그리고 힘!) Und Kraft! Und Kr-a-a-a-a-ft!" 나는 엄청난 파도에 실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근사할지라도 그것은 모두의 목소리가 만드는 힘에 더해질 뿐이었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기쁨은 나날의 노력이 쌓여서 나오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래도 감동적이었어요." 우치다는 나중에 말했다. "깔끔하진 않았지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州) 경계를 향해 9번 도로를 따라가다 나는 핸들을 돌려 길포드의 하얀 작은 교회 앞에 차를 세웠다. 루돌프 제르킨은 이 교회의 묘지에 묻혀있다. 그 옆으로 몇 피트 떨어진 곳에 아돌프 부쉬가 묻혀있다. 부쉬(Busch)와 제르킨이 미국에 와서 이룬 것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르킨의 이름은 울창하게 자란 나무(bush)들에 가려져있다. 히틀러가 음악을 진흙탕으로 끌고들어가던 시절, 두 사람의 순수한 영혼은 그들의 전통을 훌륭하게 버몬트에 옮겨심었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말보로 스쿨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서 수입하는 전통을 상징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미국의 새로운 어린 세대에게 그녀가 이해한 모차르트와 쇤베르크를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말보로 스쿨은 매혹적인 곳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대단한 것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대단한 것은 가는 곳마다 뿌리를 내리는,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일 뿐이다.
알렉스 로스, [음악의 산(the music mountain), the new yorker, 2009년 6월 29일자)]
첫댓글 '더불어 빚어내는 삶으로서의 공부'라는 옛 생각이, 그리고 추억이, 문득, 그리고 아프게, 다시 떠오른다.
이 정도로 긴 글을 한 블로거가 친절하게 한글로 해석해 두었다. 크게 복받을 일이다. 뉴요커에 실린 원문도 일독해 볼만하다.
“She said of one passage, ‘It’s happy but it’s powerful. It’s the way women can be now—happy, good, beautiful, powerful.’ And I almost cried when I heard that, because that’s what she is. She’s so elfin but really powerful and definitely feminine and totally intellig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