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두 손에 움켜쥐고 있었나!
『분서(이탁오/한길사)』와 『이탁오 평전(옌리 에산, 주지 엔구오/ 돌베게)』을 읽고
최은희
뜬금없이 예전에 읽었던 책의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순간 왜 그 책의 그
장면이 내 머릿속을 스쳤는지는 조금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바로 그 책(음식
만화책^^)의 그 결정적 장면을 잠시
소개해본다.
S하라는 ‘만화가 Y나가’의 사무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Y나가는 일반잡지에 실릴 만화를
그리게 된다. 그런데 콘티를 거의 다
완성할 무렵 아무리 연락을 해도 감감무소식이던 잡지사 편집자가 팩스를 보내왔다. 마감일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콘티를 완전히 수정하라는 지시다. 만만한 대상을 얕보는 행위가
분명하다. 높은 잡지사가 아쉬운
만화가에게 부리는 만행에 분노한 어시스턴트 S하라! 말리는
Y나가를 뿌리치며 잡지사
편집자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사실 Y나가가 그를 그토록 말렸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 잡지사가 바로 S하라가 취직할 회사였기 때문이다. Y나가의 만류를 뿌리치며
S하라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이럴
때 자유롭기
위해서 지금까지
빈손으로 살아온 거라고!”
(『사랑이 없이도 먹고 살 수
있습니까?』요시나가 후미/서울문화사/128쪽)
S하라의 당당한 분노는
Y나가의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취직도 깨끗이 물 건너가게 만들었다. 어라, 어쩐지
S하라의 깡다구가 누군가와 참
많이 닮았다. 그래, 바로 ‘이탁오’다.
“부귀를
위해 남에게 굴종하느니 빈천할지언정 꿀릴 것 없이
뜻대로
살자.”
(『이탁오 평전』
/60쪽)
명나라 말기, 부패한 관료제도와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한 유교가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던 시절! 이탁오의 전통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독창적인 견해는 기득권을 움켜쥐려는데 혈안이 돼 있던 관료들에게 매우 불쾌하고도 위험한 소리였다. 공자의 사상 중에서
생기발랄한 부분은 없애고 그 중 일부분만을 취해 영구불멸의 교조로 만들어 놓은 당대 지식인들과 관료들을 지적하는 이탁오가 환영받을 리
만무했다. 이탁오를 비난하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들은 그가 위대한 스승인 공자를 모욕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탁오는 공자를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고정되고 도식화된 공자에 대한 사고를 비판했던 것이다. 공자님 말씀이라 모두 옳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감정에서 나온 말이라면
저절로 마음을 찌르고 사람을 감동시키며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통곡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말 어떠한 자리
없이도, 어떠한 근거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이탁오는 그렇다고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이탁오처럼 빈손이 아닌
움켜쥔 두 손을 가지고도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역시나 움켜쥔 두 손을 지닌
나에게도 이탁오는 불편한 존재였다. 빈손으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걸까?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내가 믿는 것을 계속 믿을 수 있을까?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나만 불편했던 건 아닌가
보다. 절친하던 두
사람, 이세달과 이탁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세달은 이탁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아야
학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탁오는 이세달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편안하고 배부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품성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는 오직 학문 한 가지
일이 중요한 까닭에 때로 서둘러 그것을 추구하느라 저절로 배부름과 편안함을 모르게 된 것이지, 그런 것들의 추구에 마음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 이세달은 이 욕망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만 진정한 학문이 가능하고 말하고, 이탁오는
학문(배움)이 그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만국의 자유롭고 싶은
자, 배우라!”)고
말한다. 이들의
논쟁, 그 한가운데 내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인정할
것, 사람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사람(人卽道也, 道卽人也
,〈심학〉)인 공부를 할
것!
나는 여태껏 이탁오를 오해하고
있었다. 기성 주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관직에서 물러나 세상을
주유하며 진정으로 배움을 함께 할 벗들을 만나고자 했던 열망이, 자신의 이익을 과감하게
버리고 포기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거다. 쥐꼬리 만 한 이익을
바들바들 떨며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쿨한 척 하던 나에게 그는 멋지게 한방을 날린 셈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했던가? 달을 보라고 했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고 했던가? 내가 완전히 그
꼴이다.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마주
볼 때에만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뼈아픈 진실.
심난한 마음을 달랠 땐 뭐니 뭐니 해도 달달한
사랑이야기가 최고다.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을 마친‘성균관
스캔들’이다. TV 다시보기 버튼을 꾹
누르자 ‘김윤식’과 ‘이선준’, 그리고
‘문재신’, 꺄악
~ ‘구용화’가 나를 달콤한 도피처로
안내한다. 그래, 도망치는 거야, 나만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닌데
뭐! 우여곡절 끝에 성균관에
들어온 신입생 윤식과 선준이 첫 수업을 듣는 장면이다. 논어를 열강중인 정약용이
갑자기 마술 개인기를 보여주던 항아리를 냅다 바닥에 던져버린다. 당연히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윽고 박사 정약용의 말과
함께 화면에 논어 위정편의 한 구절이 자막으로 떠오른다.
君子不器(군자불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군자는 한정된 용도가 정해진 자가 아니란다. 물론 ‘나는 군자가 아니고 또 군자가
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달달한 도피처를 꿈꾸던
나에게 또 한방 날리는 이탁오 선생!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스스로 묻는 자가 답을
구한다고 했던가? 손에 쥔 걸 다 놔 버리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쥐고 있는 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망일 뿐이라는 자기합리화,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억지로라도 포기해야 한다는 죄책감, 조금만이라도 움켜줘야겠다는
욕망이 한데 뒤엉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거다.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들
앞에서 깨트린 그릇이 어느새 스크린 밖으로 나와 ‘나의
그릇’을 깨트리고
있었다. 배부름과 편안함만을 구하지
않을 것, 행동할 만큼만 말할
것(말 한만큼 행동할
것), 모르면 물을
것, 밤낮 없도록
타인(타자, 책, 영화, 드라마, 음악 기타
등등)과 더불어 즐겁게 공부할
것!
자신의 욕망을 알아내려면 먼저 그 욕망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알아가는 게
바로 공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수시로
‘돈도 들지
않고, 돈도 되지 않는
공부’를 하기위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댓글을
달고, 간혹 찾아오는 당첨의 기쁨을
연료삼아 광화문(강연)으로, 예술의
전당(사진전)으로, 국립중앙박물관(문화축제)으로, 혜화동(연극)으로 달려갔던
이유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부, 여기에 사람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악물고 어쨌든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세상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욕망에 솔직해 지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금단의 것을 얻으려 애쓰고
싶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이탁오 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움켜쥔 두 손을 펴도
괜찮다고, 움켜쥔 두 손은 누군가를
위협하고 때리는 주먹이 될 수도 있다고, 주먹을 펴야만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다고, 그러니 활짝 편 두 손을
내밀라고, 그래서 자유롭고
행복해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