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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사랑을 간구하는 선지자
이사야 63:15-19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여호와여, 이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소서! 주님의 높고 거룩한 보좌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소서. 나라도 망하고 성전도 불에 탔습니다. 우리를 불같이 사랑하시던 주님의 열성이 이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주님의 엄청난 권능이 이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뜨거운 사랑과 자비가 이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여, 이제는 우리를 감싸주던 그 긍휼을 거두셨습니까?)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여호와여, 주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를 도와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님은 우리의 진짜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본래부터 우리의 해방주이십니다.)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우리가 물론 주님의 길에서 떠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주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돌과 같이 단단하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집만 부리며 살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소서! 그래도 우리는 주를 섬기는 종들이요 주의 백성으로 성별된 자들이 아닙니까?)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어찌하여서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하고 산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원수들이 와서 주의 성전을 유린합니까?)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이제는 우리가 멸망해서 마치 주께서 우리의 통치자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의 거룩한 백성이 아닌 것처럼 되었습니다. 오 주님, 어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세상의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소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으나 대적에 의해 주의 성소를 유린당했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한 자같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15-17)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그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반문의 형식을 통해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또한 이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신명기 32장 6절과 병행하는 구절로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40년 광야생활 기간 중에도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사랑과 관계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모르고 이스라엘(야곱)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구속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을 지불하셨습니다. 또한 17절의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나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도 심판받을 자들의 죄를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이사야 뿐 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18-19) 18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명기 4장 25-26절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써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맞이하게 될 상황을 예고해 놓았습니다. 계속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하였다는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성소가 이미 유린당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64장 11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6년에 패망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기도 하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패망한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일어난 것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내용 즉 ‘다스림을 받지 못한 자’, ‘일컬음을 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민족적 현실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게 합니다. 성소가 유린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차지했으나 오히려 성소는 유린당했습니다. 성소가 유린당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라는 단어는 신뢰와 의지 그리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주관자로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아버지로서, 또한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분으로, 수많은 위험과 악의 영향력에서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유업을 물려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 설 교 >
부흥을 위한 기도
서 론
이사야 63장 7절로 64장까지는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민족을 위해서 드린 기도입니다. 그리고 65장부터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처했던 현실은 밝지 않았습니다. 왕들은 부패했고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두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낙망과 한탄, 그리고 탄식의 기도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는 역사관은 그렇게 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먼 과거인 출애굽을 바라보고 또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건져 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세계만방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까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서 부흥을 준비하는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세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과거에 베푸신 자비를 감사하는 기도
먼저 이사야 선지자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크신 자비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자비에 대해 세 가지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다양한 자비를 베푸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는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 보면 ‘모든 자비’, ‘그 많은 자비’, ‘큰 은총’이라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 단수처럼 번역되지만, 사실은 ‘모든 자비들’, ‘그 많은 자비들’, ‘큰 은총들’과 같은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자비는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국면(multi faced)을 가진 자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회상해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와 긍휼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육신적, 경제적, 가정적, 국가적, 사회적, 직업적인 축복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다양한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서 11장 1절에는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교회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예표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양자(national adoption)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녀삼아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의 상속권자가 되어 만유를 상속하는 후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세상은 우리 믿음과, 우리 영혼의 감사와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마귀의 핵심전략은 우리에게 있는 좋은 걸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8절 중반에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했으면 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있어도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버티지 말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 말씀이 옳고 나는 허물이 많습니다”라면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원수의 적장에게 매달려서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에게 “힘과 용기와 부흥을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될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 144편 15절에는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심은 우리가 만유를 상속할 상속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곧 없어지는 현세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만유의 상속권을 받게 되는데 소망을 두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환란에 동참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에는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환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도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난에 동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주석에서 ‘이 말씀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비교할 수 없는 사랑(incomparable love)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란에 동참하시며 우리 앞에 하나님의 얼굴을 나타내는 천사(the angel of His face)를 보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의 금송아지를 섬겨서 하나님께서 “너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 나는 안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주의 백성이지 우리만 올라가면 어떻게 우리가 주의 백성입니까?”라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간절히 바랄 때 보통 져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져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져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환난에 동참하시고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도와주시며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생활 중에도, 홍해바다 한가운데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고난 중에서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으며 가나안땅의 전쟁 중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병들어 수술 받을 때, 슬픔과 고통을 당하여 어두운 데서 눈물 흘릴 때, 사업에 실패하여 헤매고 방황할 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큰 위로와 축복이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전반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연약을 체휼(體恤) 즉, 몸으로 친히 체험하여 불쌍히 여기는 분이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이 온 것을 감사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해 주시고 앞서 행하시며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한 것을 회개하는 기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녀 삼으시며 환란에 동참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반역이었습니다. 이사야 63장 10절 전반에는 ‘그들이 반역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고의적인 반역(Willful Rebell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연히, 어쩔 수 없이, 누가 억지로 강요해서 반역한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질서에 반역했습니다.
2. 알고하는 반역(Knowledgable Rebell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행했습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율법이 출애굽기 20장으로 31장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입니다. 그리고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운지 얼마 안 돼서 금귀고리를 다 가져다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여호와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경을 다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흥회에는 하나님께 제가 더 알게 해주시라고 기도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3. 비뚤어진 반역(Perverse Rebellion)입니다. 하나님께서 굶어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가 넘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께 이런 맛없는 것을 주시느냐고 불평하며 먹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성품이 편벽되면 아무리 좋은 걸 줘도 좋다고 안하고 언제나 비뚤어진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반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반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반역으로 인한 세 가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① 성령을 근심케 했습니다. 이사야 63장 10절에는 ‘주의 성령을 근심케 하였으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령이 도장 찍듯이 우리 마음에 내주해 계시는데 우리가 의도적인 반역을 계속하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② 하나님께서 대적이 되셨습니다. 10절 후반에는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도적인 반역을 계속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 편에 가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대편에 가 계시면 우리는 인생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③ 하나님의 임재감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를 체험해야 됩니다. 예배드릴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11절에는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라고 기록되었고, 13절에도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15절 중반에도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임재를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임재를 거두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좌절과 공포를 갖고 소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 어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가 그 손을 놓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 동안이나 울면서 집을 찾아 헤매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어머니를 잃고 우는 아이 같은 심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회를 맞이해서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게 한 반역된 행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회개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회개가 있어야 참된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뭘 반역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그것들을 회개하는 부흥회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부흥을 위한 간구
이사야 선지자는 부흥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본문 17절에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흥이란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돌아오시옵소서(Return for the sake of your servants)'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은혜, 축복, 능력, 거룩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오셔서 “내가 원수 편에 있다가 다시 네 편으로 왔다”라고 하시며 얼굴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편으로 돌아오시도록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 가지를 근거로 해서 부흥을 간구합니다.
①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내게 복을 주신 것은 내가 잘 해서, 자격이 있어서, 공로가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자비로 주신 것이니 지금도 자격 없고 공로 없지만 내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후반에는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자비와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할 때에 “제가 자격이 있고, 교회에서 이만큼 헌신을 했으니 복을 주십시오”라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는 자격이나 공로가 없고 지금도 죄악과 반역이 많은 것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보다 더 잘못할 때 저에게 은혜를 주시고, 부활과 영생이 있는지 알지도 못할 때 저를 부리시고 은혜주신 것이 하나님의 자비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내게 자비를 주십시오”라며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해야 됩니다.
②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 되시니 내게 돌아오시고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③ 현재 처한 곤경으로 인해 호소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로 19절에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곤경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보통 부모님은 아무리 미운 자녀라 할지라도 그 자녀가 곤경에 빠졌다면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곤경에 빠진 우리에게 자비를 안 베푸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자격 없고, 공로 없을 때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자격 없고, 공로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위치에서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에 강사 목사님이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는지 구경이나 해본다는 자세로 교회에 오지 마시고 하나님을 만나러 오십시오. 그리고 “내가 진실로 하나님 만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나 곤경과 반역에 빠졌으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게로 돌아오소서. 내가 자격 없을 때 내게 은혜를 주셨으니 지금도 자격 없지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지금 곤경과 반역에서 건져 주시길 원합니다. 은혜와 자비를 가지고 내 편으로 돌아오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