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면 구왕리의 지명유래
작성자 공주문화원 등록일 2001-11-22
지 명 : 구룡말(九龍말)〔마을〕
내 용 : [위치] 석정 동남[위 치] 구왕 2구 중앙.쪽.
[유래1] 관이 있었던 장소라 하여 관기 또는 관터라
[유래1] 지형이 마치 구렁이처럼 생겼다 해서 구룡말, 구렁말 또는 구룡촌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유래2] 용이 9마리가 살았다고 한다.
지 명 : 만학동(萬壑洞)〔마을〕
내 용 : [위치] 구룡말에서 갑사가는길 위쪽.
[유래1] 萬人이 구렁같은 지역에서 영화를 누린다는 뜻에서 만학동 또는 만학골이라 부른다.
[유래2] 학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 명 : 반송〔마을〕
내 용 : [위치] 흥룡 위.
[유래] 소나무가 많이 있어 반송이라 부른다.
지 명 : 아래용못(龍沼), 하청소〔마을〕
내 용 : [위치] 아래 용못 안 마을
[유래] 이 곳은 용못이 둘이 있는데, 아래쪽에 있는 못 근처에 자리한 마을을 아래 용못이라고 부르며, 일명 하청소라고도 한다.
지 명 : 용산(龍山)〔산〕〔마을〕
내 용 : [위치] 하청소 윗산.
[유래] 산의 모양이 용처럼 생겼다 해서 용산이라 부르는데 산 아래에 있는 마을도 산의 지명따라 龍山이라 부른다.
지 명 : 위용소(龍沼), 위용못〔마을〕
내 용 : [위치] 구렁말 동쪽.
[유래] 여기엔 용못이 둘이 있는데 위 연못에 자리한 마을은 위용소 라 부른다. 위 용못이라고도 부른다.
지 명 : 위청소(淸沼)〔못〕
내 용 : [위치] 위용못 위.
[유래] 위용못 위쪽으로 자리하고 맑은 못 근처에 마을이 있다 해서 위 청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 명 : 큰골〔마을〕
내 용 : [위치] 위청소 위.
[유래] 큰 골짜기라 해서 큰골이라 부른다.
지 명 : 흥용골(興龍골)〔마을〕
내 용 : [위치] 아래청소 서쪽.
[유래] 이 마을에 馬化爲龍形(마화위용형)의 대지가 있다 하는데 언젠 가 크게 흥해서 널리 알려질 마을이라 한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九旺里)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지형이 구렁이처럼 생겨서 구렁말·구룡말 또는 구왕(九旺)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에 공주군 익구곡면(益口曲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익구곡면 구왕리(九旺里)·이거리(二巨里)·하청리(下淸里)·흥룡리(興龍里)·반송리(盤松里)·용산리(龍山里)·양동(陽洞)·덕소리(德沼里)·만학리(萬壑里)가 통합되어 구왕리라하여 계룡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구왕리의 동부·남부와 서부에는 각각 해발 고도 400m와 300m, 그리고 200여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북서부에는 성화산(盛花山)[380m]이 솟아 있다. 북부에는 소하천들이 흐르고, 그 주변에 해발 고도 100여m의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황] 계룡면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9.49㎢이며, 2016년 3월 31일 현재 총 138세대에 264명(남 146명, 여 11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총 경지 면적은 134.88㏊로 면 전체 면적의 7.16%를 차지하고 있다. 연변의 평야는 벼농사 지대이며, 산기슭은 밭농사 지대이다. 하천을 따라 평야 지대에 하청소·구룡말·용잔 등의 촌락이 들어서 있다. 지방도 691번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북동쪽으로는 내흥리에, 남서쪽으로는 중장리에 각각 연결된다. 이외에도 곳곳에 소규모의 도로가 놓여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규왕리 용산 전설」
항목ID : GC01702392 |
한자 : 龍山傳說 |
용어의미역 : Legend of Yongsan Mountain |
이칭/별칭 : 「삼소지간이 마화구룡」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1리 |
집필자 : 이은칠 |
[상세정보]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1리에서 용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공주시 계룡면 구왕1리 마을회관에 있는 느티나무 정자를 끼고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용산(龍山)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계룡산 자락의 마을로 경치가 수려해 반포의 신소로부터 상창소를 하창소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예로부터 삼소지간이 마화구룡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곳이라 한다.
삼소지간에서 말이 용으로 화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곳이니 명당터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당대 충청남도의 갑부 김갑순이 현몽하여 명당자리에 어머니의 묘를 써서 삼군수(노성군수, 아산군수, 공주군수)를 지냈다는 전설이 이곳에 전한다. 용산전설은 용산에 전하는 전설을 말한다.
[채록/수집상황]
공주시 계룡면 구왕1리에서 『공주의 전통마을』를 참고로 이은칠이 채록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제보자는 구왕1리에 거주하는 계룡면 노인회장 양태석(남, 79세)이다.
[내용]
공주시 계룡면 구왕1리 용산에서 왼편 야산(동그락산)으로 약 15분 정도 산기슭을 타고 올라가면 한때 공주 갑부로 알려졌던 김갑순과 그의 어머니 묘소가 있다. 김갑순의 어머니 묘소가 특히 명당이라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김갑순의 어머니 묘소는 먹방산 뜬치날에 있는데, 김갑순의 어머니 묘에 오르는 계단 옆 한구석으로 김갑순의 장손 묘가 있고, 그 아래로 김갑순의 묘가 있다. 이렇듯 먹방산 뜬치날은 명당터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뜬치날은 ‘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즉 이곳에 조상을 모시면 인물이 뜬다는 것이다.
김갑순의 어머니 묘소가 명당 터로 알려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김갑순이 어머니의 유구를 모시고 명당을 찾아 이곳에 와서 헤매다가 너무 피로하여 지금의 어머니 묘소자리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 꿈속에서 “이 곳 명과나무 밭을 두고 어디를 헤매고 다니느냐?”라고 하는 선몽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정말 모두 명과나무 밭이었는데, 그때가 2월이었는데도 명과나무의 새싹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어머니의 유구를 안장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묘소가 당대 발복하는 명당이었기에 김갑순은 노성군수로 발탁된 후에 아산군수와 공주군수의 관직을 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거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까지 증직되었던 김갑순이 사망했을 당시 묘소까지 찾아와 문상한 사람들의 수가 3,000여 명에 달했고, 그의 묘소 사성(沙城)을 만드는 데 드는 흙을 10여 일 동안 인력으로 날라서 조성하였다고 하니 당시 그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갑순이 사망한 후 그의 묘소 아래에 영정각을 지었는데 영정각은 담까지 설치하고 앞에는 홍살문까지 설치한 한편, 경학원 대제학이 글을 지은 송덕비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송덕비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 홍살문은 제멋대로 쓰러져 영정각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으며, 영정각 전체가 잡초로 덮여서 흉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영정각 내부는 영정을 모셨던 고급 자개틀과 천정 부분만 일부 남아 있고, 영정도 오간 데 없이 폐각의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제보자의 이야기로는 현재 김갑순의 묏자리가 며느리의 묏자리로 어머니는 명당에 잘 모셨으나 본인은 묏자리를 잘 못써 그렇다고들 전한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조상의 묘가 명당이면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야기는 많다. 당대 갑부였던 김갑순이 어머니를 명당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효자였기 때문이다. 원조자가 현몽하여 어머니의 묏자리로 명당을 잡아준 이유도 바로 아들이 효자였기 때문이다. 김갑순의 어머니의 묏자리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역시 명당이 조상을 지켜주고 자손을 번영하게 해준다는 자연숭배의 실천적 행위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위 글 작성 : 萬壑 梁承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