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은 영천 선원마을이 본향이며 서울에 거주하시는 정 용득 종인님께서 집안의 선조께서 필사하여 전해 내려 온
책 내용의 앞 부분으로 '매곡묘우 상량문'을 비롯하여 당시 매곡,선원 자천 마을 일가 어른들께서 상호 교환하신 글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용득 종인님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부족한 이 사람이 나름대로 번역하여 올린 것 이오니
보시고 수정,보완할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梅社往復文蹟(매사왕복문적)
- 梅社廟宇上樑文(매사묘우상량문)-
*李彙載撰請文梅谷鄭凞奎往, 壬戌八月
(이휘재찬청문매곡정희규왕, 임술팔월)
百年之聲響未泯家學承承一畒之蔵修常存廟貌翼翼事禮增重襟紳聳觀菾惟涵溪梅山
實爲父作子述
(백년지성향미민가학승승일무지장수상존묘모익익사례증중금신송관첨유함계매산
실위부작자술)
闡敎弘道之毅古稱圃檼名家主敢致知之功遠紹陶山遺韻或問輯要之編次文質得宜橫
溪錦陽之徒遊講磨資益安樂窩
(천교홍도지의고칭포은명가주감치지지공원소도산유운혹문집요지편차문질득의횡
계금양지도유강마자익안락와)
裏探邵子之窟根山水亭中禮魯論之仁智學問純正鳴皐公稱爲老師禮製簡嚴訥隱翁讓
與文柄顧玆梅塢之社尙記
(이탐소자지굴근산수정중례노론지인지학문순정명고공칭위노사예제간엄눌은옹양
여문병고자매오지사상기)
杖屨之墟占地於奧衍之區跨遲巖而入曠谷托興於荒閒之境納灝氣而引淸風春寒雪殘
之時微吟緩步月落參撗之夜疎影澹香爰據滄洲紙牌之行
(장구지허점지어오연지구과지암이입광곡탁흥어황한지경납호기이인청풍춘한설잔
지시미음완보월락참광지야소영담향원거창주지패지행)
乃有士林戶祝之禮古家之徽猷克繼兩世淵源後學之宗仰罙心一堂俎豆祭式粗備惟效
奠萊之誠堂制未成實欠妥靈之擧所以新廟象設允矣
(내유사림호축지례고가지휘유극계양세연원후학지종앙미심일당조두제식조비유효
정래지성당제미성실흠타영지거소이신묘상설윤의)
舊社規模三架兩楹之靖湥建玆重屋阼堦神門之排置繚以周垣道之所存師第伸各尊之
義禮有可據父子無幷享之
(구사규모삼가양영지정돌건자중옥조개신문지배치요이주원도지소존사제신각존지
의례유가거부자무병향지)
舊社規模三架兩楹之靖湥建玆重屋阼堦神門之排置繚以周垣道之所存師第伸各尊之
義禮有可據父子無幷享之
(구사규모삼가양영지정돌건자중옥조개신문지배치요이주원도지소존사제신각존지
의례유가거부자무병향지)
疑迨此詢謀僉同遂見衆工齊事掛牌秉拂之地雲炯敃觀崇德報功之祠丹雘流彩大杗小
桷不但礱斲之咸宜左陽右陰可見方位之
(의태차순모첨동수견중공제사괘패병불지지운형민관숭덕보공지사단확유채대망소
각불단농착지함의좌양우음가견방위지)
克正敬陳短唱助擧脩樑抛樑東簷牙擎日海天空巖臺景物還如古認淂光明在卷中南臨
皐樹色暮雲含網常道學垂千古圃老遺徽若可探西公山佳氣到屳棲梅花社之洙
(극정경진단창조거유양포양동첨아경일해천공암대경물환여고인득광명재권중남임
고수색모운함망상도학수천고포노유휘약가탐서공산가기도선서매화사지수)
泗餘沠流不息上朗月流輝門有閌報祀于今禮不愆一家德學人皆仰下雲炯朝暮續山舒
匣琴寥落有餘徽更望永陽諸大雅伏願上樑之後學規更新
(사여조유불식상랑월유휘문유항보사우금예불건일가덕학인개앙하운형조모속산서
갑금요락유여휘경망영양제대아복원상량지후학규경신)
儒風益颺明天人性命之蘊認是傳習有由追鄕黨庠塾之儀豈曰文獻不足士多魯邦君子
周旋於一廟之中人稱鄭公名鄕興起於百世之下
(유풍익양명천인성명지온인시전습유유추향당상숙지의기왈문헌부족사다노방군자
주선어일묘지중인칭정공명향흥기어백세지하
매곡마을 사당을 왕래하며 후에 상고할 문서
-매곡 묘우(사당) 상량문-
*매곡마을 정희규(1812-1886)가 방문, 글을 청하여 이휘재가 짓다. 임술 팔월(1862년8월)
*이 휘재선생 인물소개
진성이씨 퇴계선생 후손으로 호는 ‘운산’ 1827년 생원시 장원
1842년 경산현령, 청풍부사, 홍주목사, 호조참의, 한성부우윤 역임
병인양요 때 어명으로 예안에서 모병, 의레변절 등 저서 있음.
집안 대대손손 이어져온 학문의 명성이 오래토록 소멸되지 않았고, 근신하고 또 근신하여 예를 받드니 일무(넓이단위로 30평)의 잘 손질된 곳간처럼 묘당을 변함없이 보존하였도다. 관직에 나섬에 있어 날마다 새롭게 옷깃을 여몄고 사유(생각)는 신선하고 외관은 공경스러웠으니 어버이는 만들었고 아들은 펼치니 함계와 매산 선생이 근본이 되었도다.
예부터 칭송되어온 포은명가로서 굳센 도덕을 널리 펼치고 가르침을 밝혀, 치지(사물의 이치를 밝힘)의 업적을 주도적으로 감행하였고 도산(퇴계선생)이 남긴 여운을 오래토록 이어왔도다. 가례혹문과 가례집요를 편찬하였으니 이 책들의 바탕은 횡계와 금양(안동)의 선비들과 어울려 학문을 닦았고 안락와(함계선생 書屋)에서 자료를 보탬으로써 마땅히 얻었도다.
소강절 학문의 근본적인 내면을 탐구하였고(함계선생의 학문업적을 지칭), 산수정의 중용의 학문은 노나라 논어의 인(어짊)과 지(지혜)순수한 올바름이며(매산선생의 학문업적을 지칭), 명고공(정간선생)을 노사(공경하는 스승)라 칭하니 대쪽 같은 엄정한 학문을 창출하였도다. 어눌하게 은거하는 늙은이(이 휘재 선생 자신을 지칭)가 석양에 머무르며 학문의 근본을 회고하면서 이에 매곡마을의 사당을 숭상하며 기록하노니
지팡이와 짚신으로 언덕을 점령하고 깊숙한 구획을 넉넉히 지나 바위를 더디게 넘으니 거친 숲과 인적 없는 지경이라. 청명한 기운이 감돌아 흥에 의지하여 황량한 골짜기에 접어들었는데 때마침 잔설이 남아있는 이른 봄이라 맑은 바람이 인도하기에 입 안의 소리로 시를 읊고 완만하게 걸어가니 밤이 채움을 다했는지 달이지고 형상이 멀어져간다. 마침내 푸른 물가에 자리하니 지패(종이로 만든 게임기구)놀이와 같구나.
무릇 유림들에게 있어서 집안의 경사스러운 의례는 오래된 가문의 훌륭한 공적이라 위아래 두 세대가 극복하여 이어가야하니 후진학자에게는 근본의 연원이요. 더욱이 앙모하는 마음으로 제사의식 때 크게 갖추어 함께하여야할 나무그릇과도 같아 오로지 이를 본받고 명아주를 안치하는 정성으로 집안의 도리를 갖추지 않으면 열매 또한 없으니 마땅히 신령스럽게 받들어야하는 것인바 그런 까닭으로 새로운 모습의 사당을 건립함은 당연하도다.
옛 사당의 구조는 2개의 기둥에다 횃대 3개를 도모하여 돌출되게 지었으며 또한 지붕을 겹으로 하고 층계를 두루 에워싸게 하여 신위(神位)를 안치함으로써 어버이와 아들이 나란히 함께 향유할 수 없음에 근거하여 존엄하고 신령스런 영혼을 각각 순서대로 질서 있게 배열하는 의례를 도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이에 의혹이 들어 모두가 모여 논의를 도모하여 마침내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하나 되어 단정하게 사업을 시공하여 잘못 자리 잡은 위패를 높고, 빛나고, 힘차게 보이도록 하여 높은 덕행의 공로에 보은하고 사당에 붉은 선박무늬가 흐르게 하였다. 다만 큰 들보와 작은 서까래는 갈거나 깍지 않고 좌양우음(左陽右陰)방위가 현출되도록 마땅히 정성을 다했도다.
짧은 창가를 부르며 들보를 씻어 동쪽처마에 들어 올리는 것에 힘을 보태어 공경함을 올곧게 극복하였으니 끝없는 하늘에는 바다의 해가 떠오르고 바위돈대의 경치는 옛날로 돌아와 책속에 광명이 있음을 깨닫도다. 남쪽 임고에는 저물녘 구름이 머물고 아름다운 나무 빛에는 변함없이 도학으로 다스린 포은어른의 훌륭한 유업이 천년을 드리웠도다. 서쪽을 바라보니 팔공산의 아름다운 기운이 신선의 보금자리에 도달하여 매화꽃 피는 사당은 물가인데
남아도는 물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그 위에 맑고 밝은 달이 함께 흘러가는데 빛나는 문은 솟을대문이라 지금까지 은혜에 보답하며 제사를 지내왔으니 예법에 허물이 없었도다. 학덕을 갖춘 집안이라 구름아래 머무르는 사람들 모두가 우러르니 조석으로 빛이 나고, 이어진 산들은 상자를 펼쳐놓은 것 같은데 거문고 소리 쓸쓸하게 울러 퍼져, 영양(영천)땅 바라보니 훌륭함이 남아넘치도다.
유림의 풍속은 천성과 천명을 쌓아 수양하는 사람의 풍채를 고결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것을 전하여 받아 익히고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꽤하는 것이니 향교와 서당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어찌 말하지 않으랴. 서적은 부족했으나 일개 묘당의 사람들이 주선하였기에 노나라에는 많은 선비들이 군자가 되었다하니 정공(鄭公)의 훌륭한 고향이 백대에 걸쳐 내려지고 감동이 되어 일어나기를 일컫노라.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시의 바람이 지금까지 이어지나 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문중에 흥(興)한 기운이 계속 이어지길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