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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준비교육이란?
-오진탁교수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장)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 적이 있는 유경씨가 몇 년 전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죽음 준비’와 관련된 강의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반응이 냉담해서 그는 당황했다. 어렵게 준비해 강사까지 모셨건만 끝내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이젠 다 살았지, 뭐.” “칠십이 넘었으니 덤으로 사는 거야.” “이만큼 산 것도 고맙지.”
아무리 이렇게 말씀하셔도 죽음은 피하고 싶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세상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까지 미리 생각해야 하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준비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례가 많다.
또 죽음 준비는 노인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관계된다. 죽음준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죽음 준비는 삶과 죽음 각각에 관련해 말할 수 있다. 죽음 준비는 삶과 관련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이다. 죽음 준비는 죽음과 관련해 평소에 죽음을 미리 준비해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 두라는 의미이다. 죽음 준비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비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다. 죽음준비는 죽을 준비가 아니라 삶의 준비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준비를 하지 않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죽음준비는 삶을 이치에 맞게 살아보기 위해 임박해 있는 죽음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죽음준비교육은 이 땅에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삶의 교육이다. 죽음을 평소에 준비하는 사람은 결코 자살할 수 없으므로, 죽음준비교육은 바로 자살예방교육이기도 하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달라이라마도 말했다. 삶을 이치에 맞게 살지 않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죽음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을 보다 단순하게 이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찮은 활동과 사소한 관심거리로 삶의 시간을 가득 채우게 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죽음의 임박성에 대면하지 않게 된다. 죽음의 임박성을 의식하면서 살게 될 때 “만일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 죽음준비교육 -> 죽음준비 교육이란 -> 죽음에 대한 오해 -> 죽음, 인식전환이 시급 -> 죽음준비 교육의 효과 ->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
안락사? 죽음문화가 없다 - 오진탁 철학박사
의학과 의료 기계의 발달로 무수한 생명이 구해지고 고통이 크게 경감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죽어 가는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의사들은 많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죽어 가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가 생명유지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그 장치를 제거해야 할까? 죽어 가는 사람에게 격심한 통증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의사는 그의 삶을 종결짓는 결정을 내려야 할까?
또한 길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생명을 이어가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곁에서 도와주어야 하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젠 대다수가 병원에서 죽는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생명유지 장치로 계속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다. 자신의 삶을 불필요하게 연장하지 않고 인간적이면서도 존귀한 죽음을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는 것은 한층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얼마 전부터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증가하게 되었다. 의료기계에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대, 60대에 자연사했을 사람들이 암, 당뇨병, 뇌졸증, 치매 등의 병을 지닌 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심장마사지 등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 할지라도,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생각하는 의료관계자가 응급실에서 ABC 조치(Air-Way: 기도 확보, Breathing: 산소인공호흡, Circulation: 혈액순환)를 취하면 몇 년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환자가 죽어 가는 순간 병원은 극도로 흥분된 광란에 휩싸인다. 환자를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수단을 취하기 위해 일단의 사람들이 침대 곁으로 달려든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무수하게 약을 투여하고 바늘을 찔러대고 전기 충격을 가한다. 그가 죽어 가는 순간 심전도, 피 속의 산소량, 뇌파 움직임 등등이 면밀하게 기록된다. 의사가 이제 그만 이라고 선언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히스테리는 막을 내린다. 따라서 현대 의학을 ‘사람을 죽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보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려는 환자의 가족으로서는,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의 방식일까라는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할지, 아니면 연명치료를 계속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붙들어 놓아야 할지 가족들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만일 회복의 희망이 조금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난리를 피우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최후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않을까.
암 말기 환자가 입원하고 있던 대학 병원 입원실은, 환자가 의식을 잃은 뒤 숨질 때까지 48시간 내내 초상집 분위기이다. 환자는 이따끔씩 괴성을 질렀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몸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운다. 가족들은 이를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의 가족은 “우리에게 곧 닥칠 일이라 생각하니 너무 힘들다. 어머니가 저 소리에 놀라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임종실이 거의 없어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임종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당사자와 가족을 보살펴주는 임종문화, 나아가 죽음의 문화도 없다. 근본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현대사회는 냉혹하게 편의주의에 빠져 어떤 영적 가치도 부인하기 때문에,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사람은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처럼 내팽개쳐진 듯한 느낌에 몸서리치게 된다. 그처럼 상처받기 쉽고 극단적인 순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죽어 가는 당사자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 가장 상처받기 쉬운 바로 그 순간, 그리고 삶으로부터 떠나는 마지막 순간,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통찰력도 제시받지 못한 채 차거운 병실 한 쪽에 내팽개쳐진다. 이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육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치료할 뿐이고 영적으로 보살피는 의식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결여되어 죽음문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로움에 지치고 아무런 영적인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커다란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느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세속적 성공만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허세는 공허할 뿐이다. 더구나 환자의 죽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의료관계자가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대학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간호사가 연구실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임종환자를 차거운 병실 한 구석에 마지막 순간까지 방치해 놓고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한 생명이 죽음을 맞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자신의 삶을 맺는 마지막 순간이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까지 관계된다. 따라서 그 순간에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너무도 피상적인 접근방식이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죽음,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 나아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대해 보다 공개적인 논의와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죽음준비교육: 죽음에 대한 오해- 오진탁 철학박사
“예전부터 자살에 관해 나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두 번쯤 자살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는 독립된 존재였다면, 아마 자살을 했을 것이다. 허무주의자의 자살,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허무, 이 세상에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여대생 김양)
허무하니까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김양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대목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굳이 애써 살려고 할 필요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게 아닌지, 자기 멋대로 자살해도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무자비한 힘과의 전쟁을 뜻한다. 죽음은 절망 그 자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포기’ 패배의 인정, 그리고 절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죽음을 무찔러야만 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허무하다 하여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거나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어떻게 해서든지 삶의 시간만 연장하려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숨을 멈추게 되어 남아있는 가족에게 안타까움만 남길 뿐이다. 우리가 죽음을 계속해서 피하려고만 하거나 죽음을 적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이 한층 고양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건강한 죽음뿐만 아니라 건강한 삶 역시 불가능하게 된다.
죽음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 삶의 과정, 혹은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은 죽음이라기보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죽음은 두려운 현상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을 두렵게 생각해 그렇게 굳어지게 되는 것 일뿐이다. 누구나 두려워한다면 죽음은 무서운 현상으로 확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죽어가는 현상을 감안해 보더라도, 죽음은 두려운 현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음의 수용은 결코 삶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죽음의 수용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삶의 포기가 아니라 삶을 보다 의미있게, 죽음을 보다 인간답고 품위있게 맞이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출이다. 죽음 수용을 통해 비로소 시작되는 죽음 준비는 바로 삶의 준비이기 때문이다. 삶의 포기와 죽음의 수용을 혼동해서는 안되고 죽음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요구된다. 죽음에 대한 무지, 오해 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정견을 갖추고 있지 못하니까, 다양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지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죽는 그 순간에, 그리고 죽은 이후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바로 지금 이 삶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금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삶은 황폐해지고 우리는 삶을 온전하게, 충분히 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자기 자신의 바로 그 상태에 갖혀 버리게 된다. 이러한 무지로 인해 우리는 끝없는 환상의 나락, 생사의 끝없는 순환, 붓다가 윤회라고 일컬은 고통의 바다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희망 혹은 절망, 어느 쪽으로든 볼 수 있듯이, 죽음 역시 희망 혹은 절망 어느 쪽으로든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희망 혹은 절망 어느 쪽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여 제대로 준비한다면 삶과 죽음 모두에 커다란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 죽음을 준비하고 수행을 닦은 사람에게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성취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준비교육: 죽음, 인식전환이 시급- 오진탁 철학박사
죽음만큼 오해를 자주 받는 현상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니고서 죽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과 둘이 아니므로, 죽음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지 못하면,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이 있을까. 인간답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이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 10여 가지가 있다.
죽음에 무관심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의 부음에 수시로 직면하게 되지만, 죽음을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심사숙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인들은 자동차 사고라든가 불치병 등에 대해 대비하기 위해 보험을 든다든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자기 자신의 죽음에 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의 타부
사람들 사이에 죽음은 알게 모르게 타부, 금기가 되어있다. 우리는 죽음을 일상 대화의 주제로 올리기를 꺼린다. 죽음을 입에 올리면,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타부시하여 아무 생각 없이 죽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금기시하여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면, 죽음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삶을 바람직하게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죽음을 타부시하면 죽음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역시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부정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 무관심한 척하거나, 죽음을 타부시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해 함께 나누었던 삶의 시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서 수용해 주위사람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겠다.
죽음은 절망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은 절망 그 자체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충분히 알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의 섣부른 판단을 일단 유보해보면 어떨까.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백지상태를 가정했을 때,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긍정적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절망 혹은 희망, 어느 쪽으로 바라보는 편이 현명하겠는가. 삶을 절망 또는 희망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현명하겠는가.
죽음이 두렵다
마치 두려움이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되기라도 하는 듯이 죽음은 두려운 현상이라고 사람들은 섣부르게 단정한다. 만일 누구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면, 죽음은 응당 두려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두려움은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한다기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허무해진다
죽음을 생각하기만 하면 허무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허무한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되므로, 주어진 삶의 시간을 더욱 의미있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 모두는 이전 보다 자기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삶과 죽음을 한층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은 삶의 포기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허무하니까 삶에 소홀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죽음을 수용하자는 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삶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게 된다. 따라서 죽음수용은 결코 삶의 포기일 수 없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므로, 죽음수용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수용이다.
생명경시풍조
자기 생명을 자기 소유로 생각해 자살하거나, 자녀 생명까지도 자기 것으로 착각해 동반자살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자주 벌어지고 있다. 자기 생명이든 자녀의 생명이든 자기 소유로 생각해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자살은 생명을 살상하는 행위로, 불교의 제1원리 불살생의 계율을 범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바로 “죽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죽어버리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일 뿐이므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이다.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일 뿐 영혼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를 향해 다음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단절
죽으면 끝이라는 오해에는 죽음으로써 삶과 단절하겠다는 기대도 깔려있다. 우리의 삶, 죽어가는 과정, 그리고 죽음 이후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어제는 이미 지났으므로 죽음에 해당된다면, 오늘 우리는 살고 있으므로 삶에 해당된다. 어제 우리의 삶은 사라졌지만, 어제의 삶은 오늘의 삶에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자기존재와 오늘의 자기 자신이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의 연결을 전제로 해서 우리 존재는 성립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 이후까지 추론해볼 수 있다.
죽음준비는 삶의 준비
죽음이란 말이 오해를 많이 받듯이, 죽음준비란 말 역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죽음준비란 말을 사람들은 마치 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듯싶다. 그러나 죽음준비는 삶과 죽음 각각에 관련해 말할 수 있다. 첫째 삶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죽음준비는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주어진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살라는 말이다. 둘째 죽음과 관련해 말하면,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으니까, 죽음이 불현듯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를 하자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준비는 주어진 삶의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자는 의미이므로, 죽음준비는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한 마디로 삶의 준비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늦게, 실제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죽는 사례가 많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가 많고, 자살 사망률이 최근 들어 급증하는 상황이고, 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 속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죽음에 대한 인식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바르게 영위하도록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죽음준비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보다 의미있게 살도록 하고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의 준비교육이고, 자살예방교육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준비교육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또 성인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교교육과 평생교육의 형태로 눈높이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
죽음준비교육: 죽음 준비 교육의 효과-오진탁철학박사
대학에서 10여 년간 죽음을 주제로 강좌를 개설해 20대 대학생들에게 죽음준비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강좌 명칭을 보고 우연히 수강 신청한 학생들의 첫 반응은 20대가 왜 죽음준비를 해야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찾아오고, 죽음준비란 곧 삶의 준비를 뜻한다는 설명에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에 임한다. 필자가 강단에서 철학을 15년 정도 가르쳐 보았지만, 철학이나 불교 강의 보다 죽음과 관련된 강좌에 학생들은 훨씬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이번 1학기에는 전국의 대학생 60명을 상대로 직접 강의실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인터넷을 통해서만 강의를 했는데, 죽음준비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이전과는 적지 않게 바뀌었다.
“죽음과 만났던 이번 강의를 통하여 평소에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하나의 관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신선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올바르게 알고 접근할 때, 우리는 보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보다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을 들어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막가파의 최정수, 김인제를 비롯하여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을 수업과 동영상 자료를 통해서 살펴본 것에 따르면, 정말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과연 저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들 정도로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형수들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보았을 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뒤에 후회한다 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죽음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 보았다면, 아마 그런 잔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준비라는 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해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보다 가치있게 살라는 의미이다. 가능하면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있게 사는 것은 건강한 삶과 건강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자살사례를 살펴보면 경제적, 사회적인 것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살행위를 전적으로 사회에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자살로 인해 잃은 것은 결국 자신의 생명이다. 만약 나의 친구가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나는 우선 말보다 꼭 한 번 안아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힘든 일이 있니?" 물어보고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겠다. 대부분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친구도 자살을 초래하는 상황이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금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자살을 생각해 자살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고 자신은 편안해 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을 강행함으로써 불행한 삶과의 단절을 바라겠지만,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이력과 자살행위로부터 무관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9있다. 자살한다고 해서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친구가 심적으로 안정되고 정서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이 들 때는 언제나 내가 옆에 있음을 기억해." 라는 말도 덧붙여 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삶에 의지와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준비교육: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 오진탁철학박사
사형수의 마지막은 죽음준비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 준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1997년 12월30일 여의도 자량질주 사건의 김용제, 경찰관 총기난사 사건의 김준영 등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두 1634명이 사형당했다. 사형집행당한 범죄자들은 이윤상군 유괴 살해범 주영형을 비롯 안성 농협 카빈총 강도살인 사건의 최은수, 지존파 일당과 서진 룸싸롱 범인들 같이 세상에 공포와 전율을 안겨 주었던 희대의 살인범들이었다.
폭력조직 막가파 두목 최정수는 사형수 신분으로 수감되어 있는데 공범 2명과 함께 96년 10월5일 새벽 2시 서울 강남구 포이동 빌라에서 일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단란주점 주인 김경숙씨를 훔친 승용차에 태워 수원으로 납치했다. 범인들은 이날 낮 12시쯤 경기도 화성군 송산중학교 염전 내 소금창고에 너비 3미터, 깊이 1.5미터의 구덩이를 판 뒤 그를 산 채로 밀어 넣고 흙을 덮어 살해했다. 가족의 가출신고를 받은 경찰은 28일 오전5시쯤 경기도 광주에서 범인들을 검거, 추궁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 29일 오후 시체를 발굴해냈다.
범인들은 모두 편부와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고 청소년기에 본드 등을 흡인했던 폭력 전과 2-6범이었다. 최정수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 할머니 손에서 컸고 어머니는 그가 사형수인지조차 모른다고 한다. 최정수가 경찰에 체포된 직후 가진 일문일답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막가파’란 막가는 인생이란 뜻으로, 어차피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면 평생 못사는 것 아니냐, 구차하게 살기 싫었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98년 3월9일 SBS ‘추적, 사건과 사람들’에 방영된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인 사형수의 48시간’을 통해 사형이 확정된 기결수들의 교도소 안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프로에 등장한 사형수들은 막가파 최정수를 비롯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의 윤용제, 아버지를 살해한 김진태, 변심한 애인을 살해한 김인제, 애인을 위해 강도살인 사건을 저지른 김종화 등이다. 윤용제, 김종화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몇 달 전인 97년 12월3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미 확정된 죽음 앞에서 잉여의 삶을 사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흉악범 시절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화면을 통해 변한 모습을 보게 되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더라도, 그것은 한때의 실수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구속 당시에는 표독스럽던 흉악범이더라도, 1백명 가운데 99명이 종교에 귀의해 짧은 기간이나마 반성하면서 착하게 살다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선량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사형수들은 참회와 함께 불우이웃을 위해 영치금을 맡기는가 하면, 몸뚱이를 통째로 기증하고서 마지막 길을 떠나는 감동을 숱하게 보여준 바 있다.
94년 친구와 함께 자신의 변심한 여자친구를 납치, 살해한 뒤 여자친구의 부모에게 몸값 1억원을 요구했던 김인제(35)씨도 95년 7월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뒤, 불교에 귀의해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중 7년 만에 사형수의 멍에를 벗게 되었다. 3대 독자였던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9년 전. 대기업에 입사해 재벌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이 화근이었다. 약혼식 날 심하게 무시를 당한 그는 끝내 약혼녀를 살인하기에 이르렀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는 불안감에 매일매일 시달리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로 다가선 것은 불교 가르침에 접하면서부터. 불교에 귀의하면서 비로소 참회했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기도를 하다가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는 바램에서 2002년 9월 1000일 기도에 입재했다. 정권말기에 사형이 집행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그는 짧았던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1000일 기도 중 200일 회향을 마친 며칠 뒤 무기수로의 감형소식이 날아들었다. 지금도 그는 매일 108배 기도정진을 하면서 참회의 시를 쓰고 있다. 죽음준비의 중요성과 관련해 사형수들의 마지막 증언을 우리는 다음같이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첫째 특별한 사람만 사형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째 죽음은 사람을 크게 변하게 한다. 세째 인간 행위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네째 죽음에 임해서 바뀌면 너무 늦는다. 다섯째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다.
1. 사형선고 받은 최정수나 사형이 집행된 김대두가 범행 당시의 모습에서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볼 때 그가 과연 그렇게 흉칙r한 범행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심마저들 정도이다. 김대두가 수형 생활 중 행했던 많은 선행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처형 직전 남긴 유언 역시 많은 사람들의 마슴을 울렸다. “사회 출소자들에게 따듯한 관심을 가져서 갱생의 길을 열어 주기 바랍니다. 다시는 저같이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 없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형수들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절감하는 사실은 특별한 사람만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순간적인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욱 하는 심정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뿐이므로, 누구나 사형수가 될 수 있다.
2. 죽음은 사람을 크게 변하게 한다. 사형이 선고된 막가파의 최정수는 “사람을 살해한 저는 더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진짜 미친놈이 할 짓을 내가 왜 했는지 아직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변심한 애인을 납치해 살해한 뒤 체포된 김인제도 불교에 귀의해 죽은 애인의 영가를 위해 기도하면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기쁘게, 환하게 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살인을 저질렀을 때에는 매우 포악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을 언도받을 무렵에는 지극히 선량한 모습으로 바뀌어 동일한 사람의 행위일까, 같은 사람의 말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일반인의 경우에도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크게 변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살았을 때 익숙했던 주위사람과 환경으로부터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평생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놓아둔 채 빈손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가 크게 바뀌게 된다.
3. 최정수는 김경숙씨를 흙으로 파묻으면서 범행이 발각될까봐 옷을 벗겨 알몸으로 묻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를 흙으로 덮어 매장하는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런 그가 화면 속에서 선량한 사람의 얼굴표정을 지으면서 “미친놈이 할 짓을 자기가 왜 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화면을 통해 우리가 직접 볼 수 있지만, 그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른 그가 어떻게 저처럼 선량한 표정을 지울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그렇게 대조적인 언행을 할 수 있을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최정수처럼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지극히 악하게 될 수도 있고 지극히 선하게 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사형수들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헬렌 프리진 수녀가 사형수 패트릭을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가 살인자인 줄 알고 있었기에, 만나기 전까지 수녀는 불안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선량한 사람,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수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의 경우에도 행위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인간으로 태어나 동일한 시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사람도 있고, 잔인한 살인을 저질러 사형당하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4.죽음에 임해서 바뀌면 너무 늦는다. 사형수는 사형선고를 계기로 크게 바뀌었지만 사형이 언도된 다음에 바뀌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잔혹한 살인행위를 저지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사형수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처럼, 일반 사람의 경우도 평소에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자 후회해야 소용없기는 마찬가지. 건강하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죽음준비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점검하는 편이 훨씬 의미있다. 죽음준비는 죽음에 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보다 일찍,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죽는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사형수의 경우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더라도, 그가 저지른 행위는 결코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형수는 형집행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되지만, 그 행위의 피해자와 가족의 상처는 지워질 수는 없다. 죄는 용서될 수 있고 잊혀질 수는 있어도, 그 행위는 결코 없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죽음 이후의 삶은 논외로 치더라도, 죽은 이후에 일생동안 행했던 행위가 용서되거나 잊혀질 수는 있겠지만, 그 행위는 업의 형태로 저장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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