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휴식을 취한 거창휴게소1
복지관 한문반에서 연례 행사로 산청 남사예담촌
조식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성철스님 생가.겁외사 등을 보았다.
산청 남사예담촌(사인보드)2
남사예담촌은 남사마을과 옛담마을을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산청 남사예담촌(사인보드)3
삶의 지혜가 소통하는 산청 남사예담촌(사인보드)4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된 산청 남사예담촌은 지리산
초입에 위치하며 표면적으로는 옛담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내면
적으로는 담장넘어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지리산 정기가 동으로 뻗은 곳에 예를 상징하는 尼丘山과 泗水가 닿아 만든
반달모양이며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숫용의 머리를 한 마을
앞 당산과 암룡의 머리를 한 니구산이 서로의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
를 이루는 곳에 연꽃모양의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맑고 어진 기운이 마을을 수
호하고 있다.신의와 청렴을 지키는 선비의 고장답게 단아한 기품과 예절을
품고 있는 전통한옥과 옛 토담.효심으로 심은 수령700년이 넘는 나무와 수많
은 역사문화자원들이 한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절세풍광이다.옛
것을 통해 겸손과 겸양의 지혜를 배워 감사의 마음을 알게하는 남사예담촌은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한국인의 멋과 맛을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이순신 백의종군 도보탐방로(제1코스 고난의 길)(사인보드)5
전망대로 오르는 일행6
전망대에서 본 남사예담촌의 풍광7
회화나무를 지나는 일행8
회화나무9
회화나무는 콩과식물로 국립산림과학원의 측정으로 약300년이 되었다고 한다.
회화나무의 다른이름으로는 학자수.양화목.출세수.행복수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나무는 사람의 마음과 머리를 맑게하는 일명 선비나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마을의 지형이 쌍룡교구로 용의 불을 막기위해서 두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어
불의 기운을 막았다고 한다.그리고 X형태의 회화나무는 부부나무로 나무아래
를 통과하면 금실이 좋은 부부로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마을은 풍수상 배산임수와 쌍룡교구형국 즉 용이 서로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문118호)(경남 산청 단성 남사리)10
산청 한방족욕 체험장이란 사인보드가 붙어있는 앞 문을 통과해서 이씨고가로 들어간다.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사랑채)11
이 고택은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다.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익랑채
곳간채가 있는 ㅁ자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곳간채 뒤에 있는 사당은 보이지 않게 배치
되어 있다.안채는 정면6칸.측면3칸의 구조이며 사랑채는 안채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4칸.측면3칸의 규모이다.수장기능을 할 수 있게 방의 뒤툇간을 넓게 잡아 집의 구조가
겹집형식으로 되어 있다.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사랑채의 고목)12
200년이 넘은 회화나무로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구멍에 손을 넣으면 임신을 한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사랑채)의 창(좌측).문(우측)13
개국공신교서(보1294호)는 태조가 경무공(이제)에게 내린 교서로
최초의 공신교서의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서이다.
남사리 이씨고가는 성주이씨 경무공파 이제의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고가로
남사리한옥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이제는 이성계의 사위로 기존
세력의 숙청을 돕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로로 조선건국후 개국공신1등에
책록되었다.이제(부인은 경순공주)의 개국공신교서가 보물1294호로 지정되어
있다.기록을 보면 고려말 진양하씨가 남사에 먼저 들어왔다고 하나 내용이
상세하지않다.그후 100년후 단종복위사건으로 처형당한 성삼문의 이모부인
이숙순이 위협을 느껴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성주이씨가 자리를 잡는다.이숙순은
이성계의 부마인 이제의 손자이다.병자호란 때는 박승희와 박승필이 외가인 이곳
에서 피난하면서 밀양박씨가 자리를 잡는다.이외에 전주최씨.연일정씨.재령이씨
이렇게 6성이 자리잡았고 현재는 30성에 가까운150여가구가 살고 있는 곳이다.
興安君 景武公 李濟(1365년-1398년)시호는 景武이며 태조 이성계의 사위로 慶順公主
(신덕왕후 강씨의 딸이고 무안대군 방범.의안대군 방석의 누나.이성계의 세째딸)의
남편이다.본관은 성주이고 어버지는 李仁立(이인임의 동생)이고 양자는 李潤이다.
1이장경(李長庚)-아들(이백년.이천년.이만년.이억년.이조년)-
2梅雲堂 이조년(李兆年)시호는 文烈 -3성산후 이포(李褒)-아들
(李仁復.李仁任.李仁美.4李仁立.李仁達)-5흥안군 경무공 이제-6이윤(양자)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사랑채)14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안채)15
마당의 고양이와 캘리그래피16
봄은 해마다 반복되지만 꽃은
지난해 피었던 그 꽃이 아니었소.대복 손과 발 마음까지 쉬지마소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안채)(다과상)17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사당.밖에서 본 사당.안채.작은문)18
山淸 泗陽精舍(경남 문454호)(산청 단성 지리산대로)19
사양정사 편액은 惺堂 金敦熙(1871년-1937년)의 글씨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溪濟 鄭濟鎔(1865년-1907년)의 아들 정덕용과 장손 정종화가
남사로 이전한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정사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정제용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말의 유학자인 後山 許愈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를 작성
한 免宇 郭鍾錫의 문인이다.사양정사란 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哭阜에 있는 강이름인데,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라고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
정사라고 이름하였다.정사는 정면7칸.측면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
실하며 치목이 정교하고 수납공간이 풍부하게 지었다.그리고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넣은
솟을대문을 달아 사양정사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을 나타내었다.
사양정사(사인보드.현판)20
사양정사(화산서실.위당서실.존도재.선명당)(현판)21
花山書室(위 좌측)현판-
韋堂書室(위 우측)-계제 정제용의 아들 韋堂 鄭德永(1885년-1956년)의 글씨이다.
尊道齋(아래 좌측)-素筌 손재형의 아우 肯筌 손재복의 글씨이다.
사양정사의 옛이름으로 존도란 尊德性而道問學 즉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것)
이란 의미로 중용제27장에서 따온 두글자 존도로 이름을 붙였다.
善鳴堂(아래 우측)-隱樵 鄭命壽(1909년-2001년)글씨이다.
사양정사는 연일정씨들이 대대로 공부를 하던 곳이라 한다.
사양정사(주련)22
송림극지죽모당(松林隙地築茅堂)-소나무 숲의 공지에다 초가집을 지었으나
수성산심전묘망(水性山心轉渺鋩)-물의 성품과 산의 마음이 도리어 아득해지네.
남국간매시욕수(南國看梅時欲瘦)-남국의 매화를 보니 시 또한 여위어 지고자 하고
동풍취우일미량(東風吹雨日微凉)-동풍이 비에 부니 햇볕이 조금 쌀쌀해지네.
사양정사(주련)23
인정동야난위월(人情同夜難爲月)-사람의 마음 깜깜한 밤 같아 달되기 어렵고(달처럼)
세사여추이변상(世事如秋易變霜)-세상일은 가을과 같아 서리에 만물이 변하듯 쉬이 변하네
한래자유초연처(閒來自有超然處)-한가해지면 저절로 초연해 지는 곳이 있을 것이니
막파무료야자상(莫把無聊也自傷)-따분해졌다며 스스로 상심해 하지 말라.
사양정사(배롱나무.은행나무)24
배롱나무는 부처꽃과로 수령은 약120년정도 되었고 다른이름으로는 긴느릅나무
백일홍나무.간질나무.간지럼나무 등으로 불린다.여름내 무더위를 이겨내면서 꽃
을 피우는 나무로 이 꽃을 보면서 배를 주린 마을주민을 위하여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 주민과 함께 나누었다.항상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라는 마음으로 사양정사에
백일홍을 심었다.
단풍나무는 단풍나무과에 속하며 약220년
정도 되었으며 다른이름으로는 일본에서는 모미지나무 즉 단풍나무잎을 의미한다.
사양정사(선명당)25
사양정사(선명당)26
사양정사의 담벼락27
남사예담촌(사인보드)28
남사예담촌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敬和堂29
남사예담촌의 고즈넉한 옛담(등록문화재281호)30
남사마을의 옛담장은 마을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담장하부에 길이 50-60cm정도의 큰 막돌로 2-3층을 쌓은다음 그위에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다.담높이 2m정도로 높은 편이다.지리산 길목에 있는 남사마을은 18세기에서20세기
초에 지은 전통한옥 40여채가 남아 있어 담장과 한옥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풍경을 자랑한다.
남사예담촌(최씨고가)31
남사예담촌(최씨고가의 한방족욕장.홍살)32
남사예담촌(최씨고가)(문117호)(경남 산청 단성 지리산대로)33
이 고택은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다.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사랑채 좌우에는 중문이 두곳 설치
되어 있다.안채는 정면6칸.측면3칸이고 사랑채는 정면5칸.측면3칸의 규모
이다.사랑채는 팔작지붕이며 안채와 마찬가지로 겹집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사예담촌(최씨고가의 화장실.문의 거북잠금장치)34
최씨고가 화장실은 2층구조에다 문도 없다.
거북잠금장치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무병장수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남사예담촌에서 보지 못했던 문화재
(1)이사재(尼泗齋)(경남 문328호)는 1597년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시 유숙한 곳이다.
난중일기에는 1597년(정유년)
6월1일 권율도원수가 있는 합천(율곡)으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유숙한 곳이라고 적혀있다.
이사재는 정면5칸.측면2칸의
홑치마 팔작지붕이다.이곳은 박씨선조 송월당 박호원(호조판서)을 기리며 학문연마의 강학장소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이사재 입구에는 충무공백의종군비가 있으며,산청백의종군로 첫코스이다.
(2)망추정(望楸亭)(경남 문632호)은 1560년경 초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재실로
그동안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1967년 최후의 보수를 한 것이다.조선후기의 전형적 재실의 구성
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이다.
(3)이동서당(尼東書堂)(경남 문196호)은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를 통하여 우리나라 광복운동
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면우 곽종석선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에 설립
한 서당이다.
(4)사효재(思孝齋)는 1706년(숙종32년)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永慕
李胤玄(본관은 성주)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효자비를 내렸으며 후손들이 사효재를 지었다.
사효재란 효를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같이한다는 의미이다.
입구의 歸厚門이란 돌아가신 분을 소중히 하면 후덕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5)하씨고가는 원정구려(元正舊廬)라고 쓴 현판이 있으며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라는 뜻이다.
(6)기산국악당은 기산 朴憲鳳(1906년-1977년)선생을 기려 2013년 개관했다.
(7)유림독립운동기념관은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경상도.충청도137명의 유림들이 작성해 보내려고 한 사건이다.
당시 유림대표는 免宇 郭鍾錫(1846년-1919년)과 지산 김복한 등이다.곽종석은 이마을 출신
으로 다산 정약용선생 다음으로 많은 165권의 책을 쓰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구한말 대학자이다.
(2017.11.14)
첫댓글 계속 남사예담촌.덕천서원.겁외사의 모습들을 차례로 올리겠구나. 수고 많겠네.
남사예담촌에서는 특히 이성계의 사위이고 경순공주의 남편인 성주이씨 경무공파 이제를 처음만났다네~방범과 방석의 손위처남이더구나...왕자의 난 이후 위험을 느껴 손자인 이숙순이 이곳으로 와서 처음 터를 잡았고 그후 여섯성씨(진양하씨.밀양박씨.전주최씨.연일정씨.재령이씨)가 살게되었는데 현재는 약30성씨가 산단다~~이순신이 백의종군시 하루를 묵은 곳도 있다네~~^^
문화재를 샅샅이 찾아 사진을 찍어 올리는 정성이 정말 대단하도다. 이렇게 상세히 올릴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구나.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때 하룻밤을 묵은 문화재에 가지 못해서 좀 아쉬웠다네~~문화재를 올리는 시간이 요즈음은 많이 든다네~
옛날만큼 빨리하지를 못하네^^
나이가 나인민큼 몸이 힘들어 하겠지. 그래도 대단하이
시간이 부족해 못본 곳이 많아 아쉬웠다네~역사적인 사실에
조금만 관심을기울여 본다면 재미나는 이야기를 많이 얻을 수 있다네^^
오래전에 산청 대원사 계곡으로 잠시 피서를 간 적이 있었는데 산청은 문화 유적도 많고 지리산을 낀 고장인지 풍광이 매우 수려한 고장으로 기억이 납니다. 시천면 사리에는 업무상 출장을 갔다온 곳인데 순박하고 따듯했던그 지역 민심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남사예담촌은 이번에 한문반에서 시행한 행사에서 처음 가 봤는데 역사적인 사실들이 많더군요~~시간이 부족해서 반정도만 본 것 같아요~~태조 이성계의 딸인 경순공주와 남편인 경무공 이제의 후손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과 이순신이 백의종군시 하루를 유숙한 곳 또는 면우 곽종석의 유적등이 있어서 좋았는데,모두 보지를 못해 아쉬웠답니다.댓글 감사합니다.건강한 일상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