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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저, 양은모 번역
70년대에 학부생이었던 나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흥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음치요, 음악에 무관심한 나는 그 노래 작사자가 밥 딜런 인지 몰랐다.
2016년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노래 가사가 노벨문학상을 탈 만큼 위대한가? 감동적인가? 에 대하여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곧 바로 잊어 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그의 음악을 격찬을 하였다.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라고.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말은 시적이면서 음유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노래는 전쟁, 평화, 자유, 무고한 죽음 등 세상의 문제를 말하고 있으나 대답은 ‘바람만이 안다’는 은유와 풍자로 제삼자적, 관조적, 냉소적, 감상적인 입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노래가 나온 당시 미국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공항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기성세대와 1940년대, 풍요의 시대에 태어난 신세대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된 폭풍과 광란의 1960년대이다. 격렬한 학생 운동과 월남전 반대, 흑인 인권운동, 히피 운동과 신좌파의 대항문화, 쿠바 미사일 위기와 케네디 암살 등으로 미국의 대도시 어디서나 경찰과 대학생, 경찰과 노동자, 경찰과 반전 시위대, 경찰과 히피들의 대치를 볼 수 있는 시대였다.
밥 딜런은 신구세대와 이념의 대립으로 충돌이 끊이지 않는 60년대 사회적 상황 속에서 마치 우리나라 70년대의 ‘김민기’처럼 저항적인 노래를 불렀고 그리하여 ‘저항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호칭을 부여 받았다.
어쨌든 그는 전 생애를 걸쳐서 창조적인 치열한 음악활동으로 한 시대를 해석하고 대변하였으며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메시지를 던지는 예언자가 되기도 하였다.
2004년에 쓰여진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작된 그의 음악의 활동이 뉴욕으로 옮겨지고 몇 곡의 포크송이 월남전 반대시위와 흑인 운동의 상징이 되어 자신이 비평가들에 의해 문화적 좌파로 분류되고 저항문화의 기수로, 포크뮤직의 전설로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음악여정을 솔직하고 표표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본서를 쓴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기 미화, 자기 과장이 없었다. 미국 사회와 그 시대가 자신에게 부여한 위대한 호칭들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메시지를 강화하여 자기를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했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는 자기에게 붙은 ‘저항 시인’, ‘시대의 양심’ 등의 언론의 수식어를 혐오하였으며 자기에게 참여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부하였다. 그는 시대와 언론이 음악을 직업으로 가지고 사는 가수에게 부과한 역할의 부당성과 끔찍한 폭력성을 폭로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당시 신좌파의 상징이었던 마르쿠제나 놈 촘스키, 체 게바라를 혁명의 기수로 추종하거나 맹신하지 않았으며 단지 포크 음악인으로 자기 눈에 비친 ‘60년대 미국’이라는 세계를 포크라는 틀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의 자서전은 처음부터 자기를 선전하거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없으므로 시간이 뒤죽박죽이고 긴장이 없으며 산만하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수많은 가수들과 음악인들의 이름으로 곧 지루해진다. 그러나 그가 작사를 위해 쉬지 않고 고대 그리스 비극과 희극은 물론이고 현대의 시와 소설을 탐독한 어마어마한 분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포크송 가사의 소재와 영감의 근원이 되는 쏘스를 찾기 위해 날마다 신문과 잡지를 진지하게 읽으며 검토하며 메모하는 그를 만나며 그의 진지한 작업에 경탄하게 된다. 끊임없는 연주 훈련과 음악 청취로 자기의 음악 세계를 스스로 네 차례나 변혁을 시도했다는 평론가들의 말은 그가 음악의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사람이라는 증언이다. 그는 음악으로 아침을 열고 음악으로 잠자리에 들어간 음악에 헌신된 사제였다. 시대가 자신에게 부여한 공로와 가치, 의미를 거부하며 한 음악인으로 자연스럽게 자유스럽게 평범하게 자기답게 살기 원했던 ‘밥 딜런’의 자서전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부단히 부대꼈던 그의 마음과 정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발췌문으로 덧붙이기로 한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의 개요
밥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 이며 유대계 이다. 그는 1941년 미네소타주 슈피리어호에서 100여 키로 미터 떨어진 덜루스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의 실직으로 아이언 레인지의 히빙에서 성장하였다. 히빙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1959년, 음악활동을 위해 미니애폴리스로 나왔다. 그는 거기서 포크뮤직을 연주하는 존 쾨너를 만나 듀엣처럼 많은 곡을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였다. 그는 미니애폴리스에서 그의 음악 인생을 결정하는 엄청난 음악적 계시를 받았다. 그가 여배우 플로의 소개로 구전 민요를 예술 작품으로 격을 높인 포크 뮤직의 대가인 ‘우디 거스리’의 앨범을 들으며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과 광대무변한 우주의 세계를 체험한 것이다. 그는 우디의 노래 한 곡 한 곡이 다 바로 자신이 부르고 싶어 하는 노래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처럼 홀연히 자기 앞에 나타난 우디 거스리의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우디의 음반을 들으며 자신이 그와 노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가 자기에게 “나는 떠나겠지만 이 일을 네 손에 맡긴다. 네가 믿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어.”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거기서 우디 거스리의 연구가인 팬 케이크의 충고와 조언을 들으며 우디 거스리를 숭배하고 있는 포크 가수의 왕, 잭 엘리엇과 포크 가수의 여왕, 존 바에즈를 따라 배우고 익혔다.
1961년 겨울 그는 미니애폴리스를 떠났다. 그는 뉴욕으로 떠나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어느 눈 오는 새벽 쾨너와 내가 연주했던 피자 팔러의 뒷방에서 잠을 깬 나는 가방에 헌 옷 몇 벌을 싸고 기타와 하모니카 악보대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우디 거스리를 찾아 동쪽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변두리 길가에 서 있었다. 우디 거스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매사에 꾸물거리기는 하지만 내 마음을 정해졌고 단련이 되어 있었으므로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곧 나는 눈 덮인 위스콘신의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나타나나는 바에즈와 엘리엇의 그림자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향하고 있는 세상은, 많은 변화를 겪겠지만 실제로 잭 엘리엇과 존 바에즈의 세계였다. 존과 엘리엇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양손에 도끼를 들고 뭔가 더 약속된 삶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잘라내는 것이 필요했다. 내 목소리와 기타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게 해줄 것이라고 느꼈다.”
1961년 겨울에 뉴욕에 도착한 그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까페 와?❯에서 주간 쇼를 담당하는 프레디 닐을 만났고 그의 시간에 하모니카 연주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까페 와?❯에 음악적인 열정과 활기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출연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리 악사로 활동하며 포크 음악의 보루인 ‘민속학 센터’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문학서적을 읽으며 시를 공부하였다.
그는 음악으로 그리니치빌리지 지역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클럽 ❮개스라이트❯를 주목하였고 데이브 밴 로크의 알선으로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존 해먼드의 도움을 받아 콜롬비아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하였으며 21세의 나이에 첫 번째 앨범을 녹음하였다. 그 앨범의 대표곡은 ‘ Blowin’ In The Wind’이다. “얼마나 긴 세월 포탄이 날라야 사람들은 전쟁을 멈출 수 있나 오 내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라고 노래한 이 곡의 가사는 대단히 시적이면서도 저항정신이 충만하다.
그러나 그의 노래가 흑인민권운동과 월남전 반전운동의 구호노래로 열창되어지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항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리더가 되어 저항운동을 이끌어가라는 언론과 대학생들과 히피들의 요구에 직면하였고 그들의 침투와 개입으로 생활이 파괴되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음악인에 불과하다고 세상을 향해 항변하기도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끄도록 잠적하며 포크에서 록으로 음악을 전환하였다.
그의 다양한 음악 여정은 그의 천재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지만 세상을 향해 자기가 저항 문화의 기수가 아님을 알리려는 치열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1962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로 2020년까지 총 39개의 정규 앨범을 냈다. 그는 그의 음악이 한계성에 직면할 때 마다 변신을 시도하였으며 혁신적인 음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포크에서 포크 록, 컨트리, 컨트리 블루스, 컨트리 락, 록, 가스펠, 블루스 록을 섭렵하며, 창작하며, 융합하며 소화해냈다.
그는 1965년 미국 내 순회공연을 하였고 1965년에는 3개월 동안 영국, 스위스, 독일 등 7개국에서 공연을 하였다. 그 후, 1974년부터 2019년까지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순회공연을 통해 새로운 타입의 음악을 선보이며 자신의 광대무변한 음악세계를 팬들에게 보여 주었다.
프린스턴대학은 그에게 명예문학박사학위 찬사를 하였다.
“그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것과 조직체들을 피하고, 가족의 단결과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좋아하며, 위험한 30대에 접근하고 있지만 핍박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변하는 젊은 아메리카 양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2016년에 그는 미국 노래의 전통에서 ‘시적인 표현’을 새롭게 만들어 낸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가수, 작사자, 작곡가이자 시인으로서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자신이 거부했던 모든 호칭과 수식어로 말미암아 노벨상을 받았으며 수많은 명예로운 상을 수상하였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의 발췌문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6쪽
나는 음반을 통해 노래를 들었던 가수들, 데이브 밴 론크, 페기 시거, 에드 맥커디, 브라우미 맥지, 소니 테리, 조쉬 화이트, 뉴 로스트 시티 램블러스, 게리 데이비스 목사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 누구보다도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를 찾아서 뉴욕에 왔다. 나의 운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뉴욕시는 현대판 고모라였다. 그 출발점에 있었지만 신참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25쪽
사실 그 무렵 나를 눈에 띄게 만든 것은 내 레퍼토리였다. 내 곡은 카페의 다른 연주자들보다 힘이 있었고, 끊임없이 기타를 크게 연주해서 받쳐주는 하드코어 포크송들이 내 노래의 원형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아예 쫓아내든가 아니면 도대체 이게 뮈지 하고 더 가까이 오게 만들었다. 중간은 없었다. 나보다 연주와 노래가 훌륭한 뮤지션과 가수들이 많이있었지만 사실상 내 음악과 유사한 사람은 없었다. 포크송은 내가 우주를 탐구하는 방식이었고,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말로 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생생한 묘사였다. 나는 사물의 내면적인 실체를 쉽게 가사와 연결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 스톡케이드⏌, ⎾비옥한 목초지⏌, ⎾한국의 형제⏌, ⎾실패해도 내버려두세요⏌와 같은 것들을 하나의 긴 곡처럼 줄줄이 부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연주자들은 노래보다는 스스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노래를 이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35쪽
사실상 50년대의 문화는 말년에 재판석에 앉아 있는 판사와 같았다. 그 문화는 막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10년 안에 꽝하고 추락할 것이다. 포크송은 신앙처럼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으므로 추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크송은 현재의 문화를 초월하는 음악이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43쪽
내가 부르는 포크송에는 편안한 것이 없었고 친절하거나 부드러운 맛도 없었다. 노래가 평온하게 들리지도 않았고 상업적이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스타일은 너무 변덕스럽고 냉정해서 라디오에서 분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에게 노래는 가벼운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노래는 나의 개인 교사였고 현실의 변화된 의식으로 가는 안내자였고, 해방된 공화국이었다. 음악역사가 그레일 마커스는 약 30년 후에 그것을 ‘보이지 않는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어느 경우가 됐든, 나는 안티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었고, 대중을 선동하려는 야망도 없었다. 주류 문화를 대단히 시시하고 큰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창밖에 펼쳐진 얼음 바다 위를 어색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역사시대에 속하는지 몰랐고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아주 잘하는 일이고 좋은 일이다. 포크송은 내게 그것을 가르쳤다. 어느 시대든 항상 새벽이 시작되었고, 나는 몇 국가의 국민과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가 언재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대의 어떤 시기에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번영하였다. 그리고 모범적으로 성숙한 지점에 도달한 후,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시대가 뒤를 이었고 퇴폐가 모든 것을 붕괴시켰다. 나는 미국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몰랐다. 확인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거칠고 투박한 리듬이 미국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완전히 틀린 생각일 수도 있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51쪽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연줄과 증명서였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뭔가 박탈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계획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처음 밴드를 구성했을 때, 악기 하나가 모자라는 다른 가수가 그 악기를 다루는 우리 밴드의 멤버를 빼갔다. 밴드를 구성할 때 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했다. 나는 그런 작자들이 나보다 노래나 연주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돈이 있는 연주회의 열린 문이었다. 밴드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공원의 가설무대, 장기자랑, 농산물 경진대회장, 경매장과 개어식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연주회는 경비 외에는 지불하지 않았고, 가끔 그것도 비불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중략
나의 밴드를 꼬드겨서 데려가는 네는 늘 돈을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나는 함께 살던 할머니에게 불평을 터뜨리곤 하였다. 우일한 상담 상대였던 할머니는 늘 그것을 나에게만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마라‘ 고 충고했다.
“세상에는 네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냥 내버려 둬라. 제풀에 지쳐서 떨어지게 말이야.”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94쪽
사건을 다룬 곡들은 저항 노래가 아니었다. ‘저항 가수’라는 말이 없었고 ‘싱어-송 라이터’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주자거나, 혹은 연주자가 아닌 것, 둘 중 하나인 것처럼 포크 가수거나 혹은 아니거나 였다. 사람들은 ‘반체제 곡’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도 드물었다. 나중에 나는 스스로를 저항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디 거스리의 곡들이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이상 내가 저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우디를 저항 가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저항 가수라면 슬리피 존 예스테스와 젤리 롤 모턴도 저항 가수였다. 정기적으로 많이 들었던 것은 반란에 대한 곡들이었고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26쪽
1968년 비틀스는 인도에 있었다. 미국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대학생들이 주차된 자동차를 파괴하고 차문을 산산이 부수었다. 베트남 전쟁은 국민들을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도시가 화염에 휩싸였고, 곤봉이 난무했다. 보수 노조원들이 학생들에게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멕시코에서 온 수상한 떠돌이 약장수 가짜 돈 후안이 새로운 자의식 열기를 일으켰고, 새로운 단계의 자각과 생명의 힘을 벌채용 칼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책들이 서가를 휩쓸었다. LSD(환각제) 복용이 절정에 달했고, 환각제는 사람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관이 사회를 변화시켰고 모든 것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스트로브 섬광, 자외선이나 적외선처럼 불가시광선, 환각 상태가 미래를 흔들고 있었다. 학생들이 국립대학들을 장악하려 했고 반전 활동가들은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카스트로 지지자들과,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을 읽은 좌익 대학생들이 경제를 몰락시키려고 했다. 케루악이 물러나고 조직적인 언론이 광란의 불을 부채질하면서 상황을 자극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면 전국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매일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소요가 일어난 것으로 보였고, 모든 것이 위험과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미국이 밀림들이 개간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흑백에 길 들어 있던 것들이 이제 강렬하게 밝은 빛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27, 128쪽
나는 모터사이클 사고로 부상을 당했지만 회복되었다. 사실,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들을 가진 것이 내 삶을 변화시켰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과 사람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켰다. 실제로 가족 외에는 관심이 가는 것이 없었고, 다른 안경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었다. 케넫 형제, 킹 목사, 말콤 X…… 등이 총격으로 쓰러지는 끔찍한 사건도 지도자가 총을 맞고 쓰러진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받은 가족을 남겨둔 아버지가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 나는 자유와 독립의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므로 항상 평등과 자유의 가치와 이상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 위버스의 멤버인 로니 길버트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자, 여기 그가 있습니다. ……그를 가지세요. 여러분은 그를 잘 압니다. 그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나는 그 소개하는 말에 들어 있는 불길한 조짐을 느끼지 못했다. 엘비스도 그런 식의 소개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를 가져랴, 여러분의 것’ 이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나라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에게 속해 본 일이 없다. 내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언론에서 나를 대변자라느니 심지어 시대의 양심이라느니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새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 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대변하게 되어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불과 10년 전에 고향을 떠났고 누구에게도 큰 소리로 내 의견을 외친 일이 없었다. 앞날의 내 운명은 삶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었고, 무슨 문명을 대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다. ~중략~
하지만 언론에는 내가 엉뚱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다. 거짓말이 얼마나 심한지 놀라웠다.
~ 중략 ~ 나는 실제로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슴프레한 안개를 응시하며 지적인 몽롱함 속에 떠도는 노래를 작곡하는 포크 뮤지션 이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이 상황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29, 130쪽
나도 나중에 집을 한 채 샀는데 그것이 지금 침입자들이 밤낮없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이 집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평화가 깃들기 어려웠다. 한 때 우리 집은 조용한 안식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길이 50개 주의 낙오자와 갱들과 마약 중독들이 보는 도로지도에 표시된 것이 틀림없었다. 멀리 캘리포니아에서도 부랑자들이 순례하러 왔고 폭력배들이 밤새 침입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단지 집 없는 방랑자들이 불법으로 들어오는 정도였고 큰 손실은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점점 그게 아니었다. 저항운동의 왕자를 찾는 과격한 악당들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괴상한 모습의 계집아이들, 누더기를 걸친 초라한 사람들, 빈둥거리는 부랑자들이 파티를 하려고 우리 집 식품저장실에 침입했다.
~ 중략 ~ 너무 불안했다. 나는 그자들을 불 지르고 싶었다. 이 불청객들, 도깨비들, 불법침입자들, 선동자들은 모두 우리의 가정을 파괴했고, 내가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나 그들이 밀어붙이는 것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긴장 속에 살고 있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세상은 부조리했다. ~ 중략 ~ 내 신분을 감추려는 생각에서 잠시 뉴욕으로 이사했지만 별로 나을 것이 없었고 도리어 상황이 악화되었다. 시위자들이 우리 집을 찾아냈고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치면서 집 앞을 오르락내리락 행진했다. 그들은 내게 이 새대의 양심으로서의 임무를 회피하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한번은 시의 어가를 받아 거리를 차단하고 우리 집을 횃불로 둘러쌌다. 시위자들은 고함을 지르며 으르렁거렸다. 이웃 사람들은 우리를 증오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31,132쪽
나는 스스로 인터뷰를 제의해서 문을 때려 부수는 일을 예방해야 했다. 대개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문제죠?”
기자들은 질문을 퍼부었고 나는 어떤 주의나 누구의 대변인이 아니고 음악가일 뿐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들은 버번위스키를 마셨거나 소량의 마약을 복용한 증거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내 눈을 들어다 보았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자신이 대변인임을 부인하는 대변인❯이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가 시중에 나돌았다. 나는 누군가가 개들에게 던진 고기 한 점처럼 느껴졌다. ❮뉴욕타임스❯는 내 노래를 엉터리로 해석해서 신문에 실었다. ❮에스콰이어❯잡지는 나와 말콤 X, 케네디, 그리고 카스트로의 얼굴로 네 얼굴의 괴물을 만들어 표지를 장식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나는 세 살 끝에 있는 것 같았다. ~ 중략 ~ 음악인들은 내 곡이 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가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마음을 돌려서 외부세력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닦으며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반체제 문화가 무엇인지 충분히 보았다. 내 가사가 멋대로 추정되고, 그 의미가 논쟁에 휘말려 타락하고, 내가 반군의 대형, 저항운동의 대사제, 비국교도의 총책, 불순종의 대가, 식객의 리더, 배교의 황제, 무정부 상태의 대주교, 얼빠진 사나이로 공식 선정된 것에 진저리가 났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사람들은 끔직한 호칭들을 붙이고 싶어 한다. 모두가 무법자를 암시하는 말들이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136, 137쪽
대중의 눈을 의식한 나는 가능하면 목가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꾸려갔다. 실제로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이었다. 리틀 리그시합, 생일 파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 캠핑 여행, 보트 타기, 뗏목 타기, 카누, 낚시 …… 등이 모두 중요했다. 나는 로열티를 받아 생활을 해나갔다. 실제로 내 이미지에 어떤 변화가 왔다고는 감지할 수 없었다. 전에는 가끔 작곡을 하고 연주를 했다. 그 곡들은 대부분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있었다. 다시 그렇게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토니 커티스는 내게 세상의 소문은 본래 심심풀이에서 나온 것이고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적절한 말일 수가 없었다. 과거의 이미지가 천천히 사라지고 시간이 흐른 다음 나는 더 이상 악의적인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결과적으로 시대착오적인 다른 호칭이 강요되었다. 더 크게 보이긴 했지만 덜 심각학 들렸다. ‘전설’, ‘상징’,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참을 만했다. 이런 말들은 무해하고 진부해서 그런 호칭을 가지고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가 쉬웠다. ‘예언자’, ‘메시아’, ‘구세주’ 라는 말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호칭이었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245쪽
나는 리드 뮤직과 손잡게 되었다. 존 해먼드에게 나를 리드 뮤직으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확신을 주었던 것은 뛰어난 노래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운명의 출발점을 지적해 주었던 위대한 인물 우디 거스리에게 존경을 표하는 가사와 멜로디였다고 할 수 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와 함께 노래를 썼고 그의 옛 노래로부터 멜로디를 가져왔는데, 그것이 내가 쓰게 될 천여 곡의 첫 번째 곡이 돌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의 인생은 오래전 미니애폴리스에서 전축으로 우디의 곡을 처음 들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백만 톤의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261, 262쪽
엄청난 존경심과 호기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우디 거스리라는 인물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중략 ~ 비트족 데이브 휘태커가 우연히 우디의 자서전 ⎾바운드 포 글로리( Bound for Glory)⏌를 가지고 있다가 내게 빌려주었다. 나는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그 책은 내게 라디오처럼 노래를 불러주었다. 거스리는 회오리바람처럼 써내려갔다. 책에서는 단어의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집어서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그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디 거스리는 누구인가? 그는 오클라호마에서 왔고, 전에는 일을 잘하는 간판장이였다. 성잔하는 동안 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대공황기와 1930년대에 미 중남부를 휩쓴 황진 피해를 겪었고, 서부로 이주해서 가엾은 어린 시절을 보낸, 인생에 맣은 고난을 겪은 반유물론자였다. 그는 노래하는 카우보이였지만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우디는 강렬한 시적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데 딱딱한 외피 속에 말랑말랑한 찰흙이 들어 있는 시인이었다. 그는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세상을 나누고, 인류 해방에 관심이 많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바운드 포 글로리⏌는 굉장히 놀랍고도 멋진 책이었다.
우드 거스리를 음악의 스승으로 모신 밥 딜런은 폭풍우처럼 몰아친 시대의 저항 문화의 요구와 억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 문화에 저항하는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며 음악 인생을 살았다. 그는 자기를 영웅으로 부추기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음악에 정직하며 충실하였다. 그가 저항 문화의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한 것을 이기적이며 보수 반동적이라고 매도할 수는 있으나 그의 삶은 그의 것이므로 존중해야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직면하게 된 모든 갈등과 고뇌를 그에게 가져온 노래는 ⎾바람만이 알고 있는 대답⏌이다. 첫 소절을 양은모의 번역으로 읽어본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야
백사장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2021.8.7.토
우담초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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