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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2장 1-14절
오늘은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6절,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 하고
이곳 저곳 찾아 다니면서
빈 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양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배설한
그 오물들이 풍기는
악취가 가득하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으며
쥐들이 들락거리는,
고약하고 어두 침침한 그 마구간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출생할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냄새는 고약합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고,
거기에 눕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자신이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랑스런 파트너를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트너,
항상 보아도
사랑스럽고 기쁜 파트너,
하나님께서는 이 파트너를 가지고 싶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의도를 차 버리고
제 마음대로 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섬기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면서 살아도
나중에는 슬픔 밖에 남지 아니하는
허무한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산 죄 값을 짊어지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날마다 문 밖에 나와 기다리며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래 의도대로
우리 인간을 회복시키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들이 나를 섬기는 것을
가장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자들로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들이 나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생각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까?'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 원래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바꾸어
거룩한 자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세상으로 가야 될 일입니다.
저 높은 곳에 앉아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결단하셨습니다.
'내가 가야지.'
그리고는 그 거룩한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어의를 벗어 던지고
친히 베들레헴 말구유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 오셔도
누구나 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그도 흘려 보기를 원했고,
우리가 고통하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고,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임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절망이 아닙니다.
희망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낙담이 아닙니다.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는
거룩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주시는 이가 오셨으니
어찌 큰 기쁨이 아닙니까?
어찌 우리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천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로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 받는 사람이요,
무시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후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시대를 초월해서 어느 곳에서나
이 현상은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받아 들인 사람들이
벼슬 하던 사람들이었습니까?
갑부들이었습니까?
유교 학자들이었습니까?
세상적으로 기댈 언덕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저 하루하루 살고 있던 처절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잘 사는 것, 부유하게 사는 것,
하나님의 축복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인기를 누리고
또 사람들에게 유명해 지는 것이
나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 두십시오.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참으로 기뻐하면서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면
불가능합니다.
마음을 비우십시오.
설혹 많은 재산을 쌓고
걱정 없이 사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헛된 것이요,
때가 되면 모두가 썩는 것임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리고 낮아지십시오.
가난해 지십시오.
그러면
말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이고,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경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절대 크리스마스 100번을 보내도
사람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그늘진 곳에서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세상에 많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짓밟힌 사람, 피지도 못하고 꺾인 사람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세상 구석구석에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자들인데,
아직도 예수님이 오신
그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해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못하고
방치된 채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놀라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이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할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습니다.
이 소식을 꼭 들어야 될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데,
이들을 우리가 데리고 와서
함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
누가 예수님을 진정 기뻐하고
찬양하며 영접할 수 있습니까?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 모두가
평생 기도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기도입니까?
구원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안나와 시므온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들도
이 세상에서 기댈 언덕이 없었기에
오직 자기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오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러나 여러분,
참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장 태어나셨다고 해도
세상적으로 말하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목자였습니다.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30년 후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 일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구원자는 오셨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30년을 기다릴 동안
요셉도 죽었습니다.
사가랴도 죽었습니다.
엘리사벳도 죽었습니다.
목자들 가운데 여러 명이,
나이 든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얻지 못하고
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구원자가 오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구원자가
그들에게 베풀
그 마지막 천국의 영광을 그들은 내다보고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구원의 축복이 임하는 날을
날마다 기다리다가 그들은 갔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그 구원자를 찬송하고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로마서 8장24절, 25절 보십시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기다리다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다리다가 '예수님' 부르고 다 갔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구원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가 준비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들은 갔습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다가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특별한 사람들이 된 것 아니잖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금방 응답 받고
갑자기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병으로 인해 씨름하고
어떤 때는
탄식하고 잠을 못 자는
고통을 겪지만
기도했다고
금방 나아서
나병환자가 나은 것처럼
펄펄 뛰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
몇 명이나 됩니까?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갑자기 위로 하시느라고
더 높은 자리에 올려 주신 경험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놓고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이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이라도,
아무리 한 순간 우리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드는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다 없어집니다.
그런 것을 주려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헛된 것을
우리에게 안겨 주려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 없어지지 아니할 것,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자가 오신 것을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좋은 날은 앞에 있습니다.
가장 최고의 행복은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다 기다리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구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는 이렇게 감격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15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 구원하려고
말구유에 탄생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흥분하고 감격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을
우리가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다가
그는 목 잘림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이 볼 때에는 실패자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고,
그 예수님 때문에 내 앞에는
하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도 바울만의 신앙 고백입니까?
나 자신의 신앙 고백이지요.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
그 사람만이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낮아지십시다.
마음을 비우십시오.
말구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낮아지시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러면 그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구원을 기다리십시오.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기다리고
그 구원의 길을
날마다 날마다 인내하며 걸어 가십시오.
그러면 그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찬송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시간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겪어낸
한해 였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의 열매로
살아온 세월 같으나,
주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우리를 이 자리에 이르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성탄의 이 아침은
우리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는 시간이요,
평안히 놓임을 받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와 함께하시니,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주님의 빛과 영광을 따라 살아가는 길에,
은총의 기쁨이
가득하게 하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