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이 지나고 全斗煥·盧泰愚 등을 포함해 당시 학살 책임자들이 법 의 심판을 받고 있는 오늘까지 張炯泰 전 全南지사는 5·18과 관련된 자신의 행적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全斗煥의 光州방문 등 5·18의 핵심 사안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로 일관하는 張씨는 언제 까지 철옹성 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것인가.
張씨는 특히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기 전 시민대 표들을 만나 시위대 앞에 직접 나서기로 했으나 이같은 약속을 어겼고 이 약속이 깨지면서 시위대가 더욱 과격해져 계엄군과 충돌, 피의 수요일로 일컬어지는 집단 발포로 이어졌다. 물론 이날 張씨가 군중 앞에 출현했다 하더라도 발포가 '필연'이었을지 모르지만.
21일 오전 도청 앞 錦南로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더이상의 희생자 를 막자며 全玉珠씨와 당시 朝鮮大 4년 金範泰씨 등 대표를 선정했다. 이에앞서 全씨는 도청앞에 진을 치고 있던 7여간 35대대장 金일옥 중 령에게 계엄사측과 직접 만날수 있도록 주선을 해달라고 요청, 우여곡 절 끝에 도청안으로 들어가 張씨를 만났다.
이들은 張씨에게 계엄군의 유혈 진압을 도지사가 1차 사과할 것, 연 행된 시민.학생들을 전원 석방하되 어려우면 소재 파악이라도 해줄것. 21일 정오까지 계엄군의 철수 등을 요구했다.
張씨는 그러나 상부의 지시없이는 어떠한 사과도 할 수 없고 특히 군작전에 대해서는 그 무 엇도 답변할 수 없다며 이들의 요구를 계엄분소에 전달하겠다고만 대 답했다. 全씨등은 이에따라 그렇다면 시민들 앞에 나서 이같은 상황을 직접 전달해 달라고 주문했다.
제 58회 미망인들의 회고 / "내 남편은 시민의 편에 섰다"
5.18 당시 光州시장으로 재직하며 시민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光州 가 진압된 뒤 시장직을 떠나야 했던 具龍相씨와 당시 全南도 경찰국장을 지내며 신군부의 강경 진압 지시를 거부, 합수부에 끌려가 가혹 한 조사를 받고 공직을 사직해야 했던 安炳夏씨. 이들은 지난해 말과 지난 88년 각각 세상을 떠 이미 고인이 됐지만 이들의 미망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일기와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한 변(辯)으로 남기고 있다.
故 安炳夏씨의 미망인 全任淳씨(64)는 지난 93년 7월 光州시에 5.18 피해자 추가 신고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安씨는 지난 88년 국회 에서 5.18 특위가 가동되면서 국회와 재야 관계자등 수많은 사람들이 5.18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해 줄 증언과 관련 자료를 확보 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고 접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全씨가 그 누구의 도움이나 부추김없이 자발적으로 피해 신고를 한 것은 5.18에 대한 새로운 사실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점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全씨는 피해 신고서에서 80년 5월 18일 光州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군중에 대해 발포 등 강경 조치를 통해 진압하라는 계 엄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남편은 수천명에 이르는 경찰이 총기를 사용 할 경우 시민들의 피해가 엄청날 것으로 생각, 오히려 경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회수해 따로 보관케 하고 경찰의 자중을 지시했다고 밝 혔다.
이는 신군부가 계엄군을 光州에 공식 파견하기 전 이미 경찰을 통해 총기 등을 사용한 무력 강경 진압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이와함께 光州에 주둔했던 계엄군이 시민들의 무장시위에 대항 하기 위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했다는 점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全씨는 또 남편이 이같은 지시를 거부, 경찰의 발포를 막음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구실로 5월 26일 계엄사 합수부에 연행돼 11일 동안 구금 상황에서 협박과 고문을 당하고 특수 조사요원들이 光州 현 지에 파견돼 남편 개인 비위 여부까지 정밀 내사를 했다며 특정한 혐의가 밝혀지지 않자 치안본부로 인계돼 하룻동안 연금 당한뒤 사표 를 강요당하고 이에따라 6월2일 全南도경 국장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남편 安씨가 강제 사직 당한뒤 고향 襄陽을 잠시 다녀왔을 뿐 외부 출입을 하지 않은채 거의 두문불출 했으며 당시와 관련해 계엄사에 끌려가니 죽고만 싶더라라는 말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安씨는 그러나 光州을 잊지않았으며 光州 사람들에 대해 고마워 하는 한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고 전했다.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공직을 박탈당한뒤 이로인한 후유증으로 남편을 사별한 全씨는 지난 93년 남편의 체취가 남아 있고 5.18의 피해자로 光州시민과 똑같은 고통을 나누겠다며 光州로 와 光州시 光山동에 식당을 개업했으나 빚 만 진채 사업에 실패하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남편 具龍相씨를 여의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李 玗宣씨는 요즘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족들과 지내고 있다. 李씨는 5.8에 관해 누가 물으면 가급적 대답을 피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단지 다른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이에대한 느낌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李씨는 그러나 이같은 심경을 5월 15일 부터 도청이 진압된 5월 27일 까지 일자별로 일기를 기록했다. 이 일기에서 李씨는 5.18 기간동안 거의 집에 들어 오지 못한채 시청에서 날밤을 새우고 있는 남편 具씨에 대한 걱정과 함께 사태로 인한 光州 시민의 생필품 부족, 그리고 光州의 장래 등 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다.
18일. 따끈한 커피로 그이와 요사이 여러가지 시름을 달랬다.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오늘 오후 부터 학생들의 데모 양 상이 달라졌고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돼 데모대와 드디어 싸움이 벌 어지고 있다. 루머인지 모르나 경상도 군인이 투입되어 지역감정이 대 립돼 공기가 험악하다는 이야기들... 하오 6시20분 장형태 지사님 모친 께서 돌아가셨다 한다
李씨는 19일 일기에서 오전 시청 백합회 회원 몇사람과 張炯泰 前全 南지사 집에 문상을 다녀온 뒤 시민들로 부터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계엄군의 실상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적으며 광주은행 앞은 피바다라고 아우성이다. 시장이 없으면 부인이라도 나와서 직접 보라 한다며
도지사는 상주라고 들어앉으면 제일이냐는 전화. 아무것도 모르 는 나는 그저 떨리기만 하다고 해 당시 張前지사에 대한 시민 불만 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5월 21일 광주와서 어쩌다 이런 시련을 겪는지... 어제부터 광주 외곽과의 통신 단절도 또한 교통도 완전 마비, 시내는 온통... 이것이 생지옥인지. 그이는 헬리콥터에 타서 열심히 시민들에게 호소, 아니 절규하고 있단다. 가끔 헬리콥터에서 들리는 그이 목소리인지 분간조 차 안되지만 시민 여러분! 필사의 외침 뿐이다. 그이하고는 소식이 없다
李씨는 이처럼 시장 부인이기 전에 한 남자의 아녀자로서 생지옥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집에도 들어오지 못한채 시민들을 향해 울부짖는 남편의 생사를 크게 걱정했다.
또 연락이 왔는데 그 이가 도청앞 수 십만 군중이 모인 앞에 나갔다. 시민의 분노를 가라앉힐 작정으로 나 갔다 한다. 이따금 들려오는 말은 그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느니 인 질로 잡혔다느니 별별 무시무시한 소식뿐. 가슴이 오그라들대로 오그 라들었다. 오 하나님 그이를 구하소서!
5월 24일. 라면.분유 등이 동이 나서 없다. 영세민들은 쌀을 비축해 둔 것도 없고 얼마나 어려울까 걱정이다. 5월 26일. 날씨가 춥다. 정세 는 아직 유동적이다.
시내의 식료품 등이 유통 공급이 안돼 서민생활 에 큰 지장. 은행문도 5월20일 후 문을 닫고 자금융통마저 끊겨 하 루하루 일해 벌어먹는 사람들은 더욱 기가 막힐 것이고 양곡상 마다 쌀이 떨어졌고 오늘이 사태가 난지 9일째. 모든 것이 봉쇄되고 있으 니 정말 걱정이다
李씨는 25일 일기에서 남편이 다음에 (시장을) 그만두더라도 그는 결코 비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지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 하다고 기록, 張前지사가 5.18 기간 동안 사태 수습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또 26일 그이의 말에 의하면 오늘 저녁 혹 시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다는 부분에서는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당시 기관장들은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