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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의 진산 불곡산(佛谷山)
- 위 치 : 경기도 양주시 양주1동, 백석읍
- 높 이 : 469m
1. 일 시 : 2013. 3. 7. 08:00 ~
2. 장 소 : 불곡산
3. 참석인원 : 23 명
4. 등산코스 : 양주시청 - 보루능선 - 상봉(정상) - 감투봉 - 임꺽정봉 -
암릉능선(악어능선) - 대교아파트
5. 다녀온길 : KBS앞 - 경춘국도 - 43국도 의정부방면 - 금산로 경기북부청사 방면 - 양주시청
6. 오늘활동 상황
○ 08:00 --- KBS앞 출발(북한강휴게소 경유)
○ 10:00 --- 양주시청 도착
○ 10:05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10:08 --- 들머리진입
○ 10:26 --- 1보루
○ 10:39 --- 2보루
○ 10:42 --- 양주별산대갈림길
○ 10:52 --- 임꺽정생가갈림길
○ 10:55 --- 백화암갈림길
○ 11:00 --- 5보루
○ 11:04 --- 6보루
○ 11:09 --- 펭귄바위
○ 11:17 --- 상봉정상
○ 11:43 --- 7보루
○ 11:45 --- 상투봉
○ 12:12 --- 부흥사갈림길
○ 12:26 --- 물개바위
○ 12:29 --- 악어바위갈림길
○ 12:32 --- 악어바위 우회등산로
○ 12:42 --- 8보루
○ 12:44 --- 임꺽정봉
○ 12:45 --- 점심식사
○ 13:34 --- 공기돌바위
○ 13:36 --- 코끼리바위
○ 13:44 --- 악어와 거북바위
○ 13:58 --- 삼단바위
○ 14:01 --- 복주머니바위
○ 14:04 --- 남근바위
○ 14:07 --- 쿠션바위
○ 14:35 --- 대교아파트 도착
○ 14:50 --- 대교아파트 출발
○ 15:37 --- 내촌휴게소 하산행사
○ 17:00 --- 행운닭갈비도착(2부행사)
7. 불곡산 살펴보기
☐ 개관
- 양주시청 뒤편에 솟은 불곡산(일명 불국산)은 대동여지도에서 '양주의 진산'이라 불릴 정도로 양주의 주산이다. '해동지도'(1760)나 '대동여지도' (1861) 에는 불곡산(佛谷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양주목지도'(1872)에는 불국산(佛國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 회양목이 많아 겨울철이면 빨갛게 물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국립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는 나라 국(國)자를 사용해 ‘불국산(佛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불곡산은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도락산과 더불어 둥글게 자리 잡은 양주분지의 중심부에 해당된다. 남쪽의 의정부 일대와 동쪽의 3번국도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보루성'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지형적 여건 때문에 고구려는 불곡산 능선을 따라 9개의 보루성을 쌓았다. 보루성은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돌로 쌓은 작은 산성. 불국산에는 9보루 까지 안내표지가 있는데 주봉인 상봉(468m)이 6보루, 상투봉이 7보루, 임꺽정봉(445m)이 8보루이다. 불곡산엔 조선시대 의적(義賊) 임꺽정이 태어나 활동하던 청석골과 임꺽정봉이 있다. 임꺽정봉, 상투봉, 주봉인 상봉은 암봉으로 밧줄이나 철사다리가 설치된 암릉구간이 여럿 있었으나 2009년도에 등산로를 일제 정비하여 위험구간에는 데크 계단이 설치되었다. 불국산은 1호선 전철이 의정부에서 소요산까지 연장되면서 수도권 전절산행지로 인기 있다. 양주역에서 산행이 시작되는 양주시청 등산로 입구까지 도보로 15분, 주봉인 상봉까지는 완만한 소나무 숲길로 1시간 30분이면 이른다. 상봉에서 상투봉, 임꺽정봉에 이르는 구간에는 스릴 있는 데크 계단과 초보자 코스의 암릉이 있어 바위 맛도 즐길 수 있다.상투봉과 임꺽정봉 사이에서 대교아파트 쪽으로 뻗어 내린 일명 악어능선이라고도 하는 악어바위가 있는 지능선은 암릉구간으로 밧줄이 매여 있기는 하지만 초보자는 위험하다. 릿지 경험이 있는 중급자라면 바위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불곡산 주능선에선 양주 의정부 동두천 등 주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남쪽으로 펼쳐진 도봉산과 북한산의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8. 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불곡산등산안내도>
- 불곡산은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2008. 12. 18일 유양초교 - 백화암 - 상봉정상 - 상투봉 - 임꺽정봉 - 부흥사 - 샘내주차장까지 4시간 일정으로 다녀온 후 한 해의 정기산행일정을 갈무리하는 송년의 밤 행사로 이어졌었다. 그 당시는 상봉 정상구간에 안전시설 공사가 한창 시공 중인데다가 같은 시간대에 몰려든 산객들로 혼잡을 이룬 가운데 정신없이 엉겁결에 다녀온 터이기에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찾아 불곡산의 새로운 진면목을 접해보는 한편 불곡산을 처음 다녀오시는 분들에게 처녀 탐방기회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봄철 산불조심 입산통제기간에 접어들면서 입산이 자유로운 양주의 진산이며 임꺽정의 얼이 서린 불곡산을 시작으로 계사년 봄이 오는 길목을 부담 없이 활짝 열고자 하였다.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위치한 불곡산은 대동여지도에서 양주의 진산이라고 표현되었던 산이다. 불곡산은 두 개의 암봉이 마주보며 솟아있고 그 사이가 암릉으로 연결된 듯 한 느낌을 주면 산세가 빼어나고, 정상과 군데군데 암벽 및 암봉에서의 전망이 뛰어나다. 불곡산에는 신라시대 효공왕 2년(80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당시 불곡사(佛谷寺)라 이름 붙였던 백화암이라는 고찰이 있다. 규모면에서는 아담하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는 도봉산 연봉의 풍경은 실로 장관이다. 백화암 밑에 있는 약수터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불곡산은 밋밋하고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정상 부근의 암벽은 평범 속의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또한 보는 시각에 따라 묘미가 다른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더불어 양주시에는 양주목사가 4백여 년간 행정을 펴던 동헌, 양주목사가 휴식을 취하던 금화정, 어사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전수회관, 양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143호),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의 생가 터 등 많은 문화재가 모여 있다.
<불곡산등산지도>
- 불곡산 등산지도는 양주시청에서 안내하는 등산안내도 외에도 인터넷을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었다. 50,000/1지도에서부터 지역요도형태의 안내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등산지도 중에서 탐방로가 선명하고 바탕이 깨끗한 등산지도를 선정하여 나들목과 진행방향 정도만 표기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여 사용하였다.
- 양주시청에서 안내하는 등산로는 1구간(2.8km) : 양주시청-1보루-2보루(쉽터)-5보루-상봉(정상), 2구간(2.2km) : 별산대놀이마당-회양목자생지-5보루-상봉(정상), 3구간(1.8km) : 백화암입구-선유동천 쉼터-백화암-5보루-상봉(정상), 4구간(2.7km) : 백석삼거리-악어바위-코끼리바위-상투봉-상봉(정상), 5구간(2.6km) : 대교APT-김승골 쉼터-임꺽정봉(전망대)-상투봉-상봉(정상), 6구간(2.1km) : 청엽골고개-임꺽정봉(전망대)-상투봉-상봉(정상), 7구간(1.3km) : 부흥사-상투봉-상봉(정상), 8구간(2.3km) : 산북동(수색대앞)-작은산대 쉼터-5보루-상봉(정상) 등 8개의 등산로가 있다. 이중 1구간과 5구간을 연계하여 양주시청을 들머리로, 대교아파트를 날머리로 정하여 4시간 일정으로 준비하였다.
☐ 등산안내
<단체기념사진>
- 이틀 전 경칩을 지나면서 전형적인 봄 날씨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한겨울 심설산행 부담에서 벗어났나싶더니 산을 즐기시는 분들에게 단골손님이자 불청객인 “산불조심” “입산통제”라는 허울 좋은 굴레가 발길을 잡고 늘어졌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례행사처럼 홍역을 치러야만 하는 계절 특성에 이미 익숙해졌고 잘 길들여진 일상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산행일정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집행부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산행지 선정에서부터 당일 산행안내에 이르기 까지 건조주의보 발효에 따른 입산통제 상황의 변동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칫 방심하였다가는 당일 들머리에서 입산하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거나 당일일정을 조정하여 단축 운영하는 우발상황을 맞이하기 일쑤이고 그로 인한 비난의 눈살을 감수해야만 하는 계절이 바로 이번 주부터 5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암튼 어려운 시기 어려운 계절을 맞이하여 3 ~ 4월 정기산행일정대로 무난히 원만하게 운영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3월 첫 정기산행 문을 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산행하기 참 좋은 날씨였는데 오늘 오전 이른 시간대 비 소식에 미리 질겁한 분들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단출한 식구와 함께 춘천을 출발하였다.
- 주간날씨예보에 의하면 당일 날씨는 흐리고 눈 온 후 개이겠고, 기온은 -2 ~ 3℃분포를 보일 것으로 예보하였으나 어제 15:00기준 날씨예보는 오전 흐리고 가끔 비가 내리고, 오후 구름 많고 기온은 4 ~ 11℃ 분포를 보일 것으로 기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고무적인 것은 06:00에서 09:00 어간에 1 ~ 4㎜의 비가 내렸다가 그 이후는 구름 많은 것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일 일정운영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던 점이다. 최근 들어 연이어 맑고 포근한 날씨로 이어졌기 때문에 날씨걱정일랑 일찌감치 접어 뒀었는데 오늘따라 비온 후 갠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렇잖아도 눈이나 비가 온다면 고객의 발길이 뚝 했던 전력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날씨 변동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간간히 내리는 빗방울이 멈추지 않아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날씨가 예보대로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저조한 참석률에 아쉬움을 남겨야만 했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르면 KBS춘천방송총국에서 양주시청까지 114km / 1시간34분 소요되는 것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09:30경 들머리 입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었는데 예상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일상을 열었다.
- 오늘 정기 산행일 이틀 전 경칩을 지나면서 완연한 봄기운이 감돌았기에 24절기 중 하나인 경칩(驚蟄)에 대해 살펴본다. 경칩은 일 년 중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날씨가 풀린다는 날이다.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로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에 있다. 춘분점을 기준으로 하여 태양이 황도(黃道)의 345도(度)에 이르는 때로 양력 3월 5일경이다. 경칩은 24절기의 셋째로 우수(雨水)와 춘분 사이에 있다. 양력 3월 5일경인데 황도가 345도이다. 경칩은 계칩(啓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풀과 나무에 물이 오르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 벌레들도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경칩에는 개구리 알을 먹으면 허리 아픈 데 좋고 몸에 좋다고 해서 이날 개구리 알 찾기에 혈안이 되기도 했었다. 지방에 따라선 도롱뇽 알을 건져 먹기도 한다. 단풍나무나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즙을 마시면 위병이나 성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약으로 먹는 지방도 있다.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이날 담벼락을 바르거나 담장을 쌓는다. 또 경칩 때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하여 일부러 흙벽을 바르는 지방도 있다고 한다. 빈대가 심한 집에서는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방 네 귀퉁이에 놓아두면 빈대가 없어진다는 속설이 전한다. 경칩 날에 보리 싹의 자람을 보아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옛날에는 경칩 날 젊은 남녀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써 은행씨앗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은밀히 은행을 나누어 먹는 풍습도 있었다 한다. 이날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수나무, 암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 불곡산이 소재한 관할행정구역을 이해하기 위해 양주시 유래를 살펴본다. 양주시는 2003.10. 19 양주군에서 시로 승격되었다. 양주시는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시이다. 동쪽으로 포천시, 서쪽으로 파주시 및 고양시, 남쪽으로 서울특별시 및 의정부시, 북쪽으로 동두천시 및 연천군과 각각 접해있다. 전반적으로 산지가 많이 발달해 있으며, 평지는 적은 편이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어 영산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악산(紺嶽山), 양주시의주산(主山)으로 작은북한산이라고불리우는 불곡산(佛谷山), 아름다운 일곱 봉우리로 이루어진 칠봉산(七峰山) 등이 있다. 주요하천으로는 조선시대 양주목의 중심 하천이었던 유양천(維楊川), 서울로 연결되는 중랑천(中浪川), 양주시의 남북을 길게 가로지는 신천(莘川), 장흥면을 굽이쳐 흐르는 곡릉천(曲陵川) 등이 대표적이다. 양주시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이자 수도에 근접한 거대행정구역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다. 당나라를 물리치고 신라가 통일 대업을 완수하는 무대가 된 매초성(買肖城), 조선개국의 두 주인공인 태조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물렀고 조선시대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회암사(檜巖寺), 중종의 첫째부인으로 비운의 역사를 산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무덤인 온릉(溫陵) 등이 모두 양주시에 있다.
- 이어서 양주동의 연혁을 살펴본다. 1395년 조선태조 4년‘양주’라 칭하였다. 1397년 조선태조 6년 견주(현 고읍동 일원)에 치소 이전, 1506년 중종1년 양주목을 복구 치소를 유양동으로 이전.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고주내면과 읍면동을 통폐합 주내면이라 칭하였다. 그 후 1922년 시둔면 일원까지 조선5백년(1506~1922) 목사의 마을로 집정하다가 1955년 현 양주1동사무소 자리로 이전(유양동 → 남방동), 2000. 10. 1 주내면에서 양주읍으로 승격 및 명칭 변경되었다가 2003.10. 19 양주군에서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양주1.2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양주동은 양주시의 7개 읍면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포천군 소흘읍, 서쪽으로 백석읍, 남쪽으로 의정부시, 북쪽으로 회천읍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양주목(楊州牧)의 중심지로서 동헌/사작단/향교/여단/객사 등과 같은 양주목의 주요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즉 양주산성이 읍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토대 위에서 통치와 생활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읍성취락(邑城聚落) 구조를 보인다.일제강점기인 1922년 군청과 경찰서 등 양주군의 주요기능이 의정부로 이전되면서 양주읍의 전신인 주내면(州內面)의 면소재지로 전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면소재지마저 경원선 주변의 남방리(南坊里)로 넘겨주었다.그러나 2000년 10월 양주군청이 다시 이곳 주변으로 이전되고, 행정구역명 또한 주내면에서 양주읍으로 승격되면서 21세기 양주군 행정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유양리 등 9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이 추진되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읍리 일대의 고주내평야(古州內平野)는 쌀 주산지이고, 경원선이 의정부로부터 이곳을 경유하여 동두천으로 연결된다.
- 기왕 내친김에 양주의 중요무형문화재인 “양주별산대놀이”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 양주별산대놀이 ♣
양주별산대놀이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다. 이 놀이는 약 25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및 기타의 사정으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여기에 불편을 느낀 고을 사람들 중 신명이 과한 자들끼리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떠 직접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 8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 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등장배역은 모두 32명지만 탈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있어 보통 22개 내외가 활용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하겠다. 다른 한국 가면극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묵극적인 몸짓과 덕담 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연희된다.
<불곡산 보루 >
- 불곡산에는 1보루에서 9보루까지 연이어 산재해 있다. 그러나 3, 4보루는 오늘 일정에 잡힌 등산로를 벗어나 있고, 9보루는 오늘 일정상 아주 멀리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보루에 관한 자료를 얻고자 관할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나 양주문화원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았지만 소개할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보루(堡壘)의 의미는 “지켜야 할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불곡산 보루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한 데일리안 최진연 기자가 쓴 보루에 관한 기사 원문을 소개하였사오니 관심 있으신 분께서는 오늘 일상을 연상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래 내용은 최 진 연기자의 기사 원문이다.
- 양주지역은 서울의 북동쪽에 접해 있으면서 서울과 경기북부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다. 이런 이점 때문에 아득한 옛날부터 영토다툼이 많았던 지역이다. 삼국시대 쟁탈전의 상징인 성곽유적이 지천에 널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조사된 유적 중에서 고구려보루만 양주에서 24개소가 발견됐다. 국내 최대 규모다. 양주일대 고구려성터들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98년 한국토지박물관(관장 심광주)이 경기북부지역의 관방유적을 조사하면서 부터다. 이들 중 대부분의 성터들은 고구려 유적으로 확인됐다. 보루는 도락산과 불곡산의 산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열을 지어 구축했다. 시야가 확트인 봉우리에 자리 잡은 양주지역 보루는 대부분 100~200m의 작은 규모로, 거리는 500m 간격을 두고 구축됐다. 불곡산 보루는 총 9개소가 있다. 이 가운데 2보루와 5보루, 그리고 9보루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됐다. 나머지 보루는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보루 축조형태가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곽유적은 어림잡아 70여개소다. 조사결과 고구려 유적의 분포지역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 양주와 의정부, 수락산과 아차산, 그리고 한강유역 일대다. 그중에서 불곡산보루가 가장 잘 남아있다.
- 양주는 원래 고구려 (삼국사기 기록) 땅이었다. 삼국시대 양주일대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백제, 고구려와 신라간의 쟁탈전에서 고구려는 이 일대 많은 보루를 쌓았다. 하지만 훗날 신라가 이 지역을 공취하면서 260여 년 간 신라의 영토가 됐다. 보루를 구축한 초기세력은 고구려였지만 신라가 빼앗아 성터들을 보수해 사용했기 때문에 신라 군병들이 쓰던 유물의 발견은 당연하다. 150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 불곡산 보루는 대부분 붕괴됐다. 일부지만 원형의 성벽을 볼 수 있는 구간은 3보루와 5보루, 7보루와 8,9보루 등이다. 나머지 각 보루는 성 돌이 여기저기에 너부러졌다. 불곡산 보루들이 파괴되면서 고구려의 혼이 무너지고 있다. 선조들이 목숨 받쳐 지켜온 성벽이다. 양주시에서 고구려 유적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지만 몰지각한 등산객들의 발길에 성벽이 부서지고 깨지고 있다. 일부 등산객의 무지의 소행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곡산보루를 조속히 사적지로 지정 보호해야 한다고 한다. 양주시에서는 불곡산 일부가 개인 사유지로 돼있어 문화재지정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 문화재지정 구분은 참 묘하다 특히 성곽은 역사성의 가치 유무를 떠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으면 파괴되고, 멸실된 상태로 방치진다. 문화재 지정이 안되면 보수, 복원의 쓰일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한다. 현재의 문화재지정은 각 지자체 기관장의 힘에 따라 좌우되는 실정이다.
- 불곡산은 양주시청 뒤편 여러 개의 암봉이 솟아있는 산이다. 산행은 양주시청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산행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이다. 크지 않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1시간 정도 오르면 무너진 성돌 장소가 1보루다. 두 개의 봉우리를 연결한 1보루 전체둘레는 175m, 성벽은 거의 붕괴됐고, 서쪽성벽 일부가 2~3단으로 남아있다. 성내부에는 저수시설로 보이는 웅덩이가 파여 있다. 보루가 축조된 곳은 어느 지역이든 조망권이 압도적이다. 1보루에서 남쪽을 보자. 의정부시가 한눈에 잡힌다. 3번국도가 흐르는 동쪽주변도 훤하게 뚫려 있다. 여기서 500m 더 오르면 2보루다. 2보루는 등산객들이 보루 중앙을 관통하면서 성벽은 반질반질한 길이 됐고, 성돌은 계단처럼 발길에 무수히 짓밟히면서 파괴되고 있다. 통행하는 사람들조차 이곳이 고구려 유적인지 알지 못한다. 관할지자체는 등산로를 보루외곽으로 내고, 유적 보호조치를 시급히 해야 한다.
- 2보루는 산봉우리 정상을 감았다. 전체둘레는 76m의 작은 규모이며, 성돌은 흙속에 묻혀있지만 2m 정도의 높이로 추정된다. 보루 내부는 긴 의자 두 개가 놓인 널찍한 공터다. 공터에 5m 크기의 저수시설이 또렷이 보인다. 2보루에서는 고구려 토기 저부편과 신라 토기가 출토됐다. 2보루 정상도 조망권이 뛰어나다. 오른쪽은 양주 첨단 산업단지지가 들어설 고읍지구, 대규모 아파트단지인 옥정지구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지금 그곳은 건축물 공사가 한창이다.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면 불곡산 정상인 상봉이 눈앞에 와있다.
- 3보루는 2보루에서 서쪽으로 500m 떨어진 봉우리에 축조됐다. 둘레는 달걀모양으로 100m 정도를 돌로 에워쌌다.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으며 일부구간은 2m 높이로 남아있다. 불곡산 전체 보루중에서 성벽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곳이 3보루다. 3보루 답사는 산 중턱에 있는 백화암 입구쪽에서 30분 정도 오르면 볼 수 있다.
내친김에 4보루도 이곳에서 가는 것이 유리하다. 3, 4보루 사이에 백화암이 있다.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 앞에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 유명한 약수가 현재도 있다. 지금의 백화암은 6,25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6년 중건한 것이다. 대웅전 앞에는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그 나무 아래는 조선헌종 때 양주목사 서염순의 선정비가 서있다.
- 4보루 가는 길은 백화암 대웅전 앞마당을 지나 요사채 뒤편으로 가야한다. 절에서 10분 거리이며, 3보루에서 500m 떨어져 있다. 전체둘레는 105m로, 남쪽성벽 일부구간이 6단으로 남아있으며 그 외 성벽은 무너져 10m 정도 흘러내렸다. 성내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며 저수시설의 흔적이 이곳에도 남아있다. 주둔하는 군사들의 식수를 위해 파놓은 시설이다. 여기서 살필 것은 길 하나 건너에 신라의 최대전승지인 매소성으로 주목받았던 양주대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4보루는 불곡산 보루 중에서 도로와 가장 인근에 접해있다.
- 여기서 5보루 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며 깨 바윗돌로 인해 난코스다. 시청 뒤쪽으로 가면 1,2,5,6,7,8,9 코스는 쉽게 갈 수 있다. 2보루를 지나 5보루로 까지는 가파르지 않는 산등성이를 타고 길게 이어진다. 능선 사거리에서 정상이 가까워지고 굽어진 소나무와 어우러진 산세도 점점 수려해진다. 산길 왼쪽으로는 아득히 펼쳐진 벼랑이 이국적이다. 여기서 불곡산 5보루기 시작된다. 이곳 보루 중 성벽을 쌓은 석재들이 가장 크다. 암벽 공간과 암릉 위로 가지런히 쌓인 성벽을 볼 수 있다. 5보루 전체 둘레는 100m 정도다. 암릉에는 문지방돌로 추정되는 구멍 수개가 파여 있고, 옛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인 성혈자리도 보인다. 5보루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발견됐다.
- 불곡산 정상 상봉(470,7m)에 6보루가 있다. 정상입구에는 건물을 세웠던 돌구멍이 노출돼 있다. 상봉암벽아래 서쪽으로 길이 10m 가량 바깥 성돌 흔적이 보인다. 형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1.5m 높이의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남쪽과 동쪽성벽은 자연암벽이 성벽이 됐다. 6보루 전체 둘레는 220m, 성벽으로 사용한 암벽높이는 4m 된다. 정상으로 올라 갈 때는 암벽 때문에 사다리를 타야 한다. 등산객 중 절반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가파른 암벽을 쉽게 다닐 정도의 등산 마니아들도 있다. 여기서부터 불곡산의 백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면서 북서쪽 9보루까지 이어진다. 불곡산 정상에서 본 일대는 거침없는 조망권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터져있고. 북쪽으로 감악산과 마차산, 동두천 주변이 한눈에 든다. 남쪽은 사패산과 도봉산 줄기가 실루엣으로 살아나 절경이다. 그 옆을 장식한 수락산과 불암산 산맥도 눈앞이다. 불곡산을 찾는 사람들의 감탄사를 여기서 볼 수 있다.
- 7보루는 6보루에서 서북쪽으로 150n 떨어져 있다. 성벽은 두 봉우리를 연결해 쌓았으며 동과 북은 자연암벽을 성벽으로 삼았다. 보루전체 둘레는 110m다. 보루정상부 암벽사이에 온전한 성벽이 보존돼 있는데 길이 3m, 높이 2m다. 이 성벽도 등산객들 통로로 사용되면서 파괴되고 있다. 보호조치를 하지 않으면 붕괴는 시간문제다. 성벽서쪽에도 무너진 성돌 사이로 2~3단 정도의 성벽이 보인다.
- 8보루 초입부터 9보루 까지는 가파른 암릉 지대다. 등산로는 로프를 잡고 돌계단을 올라야한다. 정해진 길 외에는 위험한 구간이다. 8보루 정상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적 임꺽정과 관련된 전설로 임꺽정 봉으로 부른다. 정상에서 남서쪽의 풍광은 장관이다. 벼랑사이사이 공기돌 바위, 코끼리 바위, 복주머니 바위 등 기암들이 줄지어 섰다. 8보루는 1보루에서 2,300m 떨어져있다. 전체둘레는 140m, 서쪽은 자연 암벽이며, 동쪽은 불곡산 보루에서 유일하게 보축한 성벽이 보인다. 북쪽구간 절벽위에는 높이 1m, 길이 2m 정도의 성벽이 완전하게 남아있다. 8보루는 암벽상부로 성벽을 쌓은 구간이 많아 전체 높이는 3m 이상이다.
- 불곡산의 마지막 9 보루는 봉우리두개를 연결해 쌓았다. 길이 10m, 높이 2m의 성벽이 잘 남아있다. 이곳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됐다. 현재 군 시설이 들어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다.. 중략 [자료출처 : 데일리안 = 최진연 기자]
<백화암 갈림길>
- 백화암은 백화암갈림길에서 0,4km 벗어나 있다. 왕복 0,8km이기 때문에 혼자라도 내려가 대웅전 사진이라도 한 컷 담아볼까 하고 망설이다가 진로선도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핑계로 그냥 지나쳤다. 그전 같았으면 후기 자료 확보차원에서 경유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오늘은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컨디션 난조를 보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을까? 어찌되었든 그 바람에 다리는 편안하였으니 궁색하지만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아마도 부회장님이 동행하였다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후렴이 남았다.
- 불곡산 백화암(白華庵)은 신라의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했다고 전하는 고찰인데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봉선사본말사지」에는 그 창건 시기를 효공왕 2년(898)으로 적고 있다. 창건 당시의 절 이름은 불곡사(佛谷寺)였다고 하는데 이후 언제인가부터 백화암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백화암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 뚜렷한 이름에 비해 그 후 천수백년 동안의 중창이나 보수 등에 관한 기록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동여비고(東輿備攷)』(1682),『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양주군읍지』, 최근의 향토지 등에도 그 이름만이 보일 뿐이다. 나이 드신 어르신네의 기억 속에도 백화암에 대한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봉선사본말사지」에 1868년 축성루(祝聖樓)를 세웠다는 기록과 1923년 당시 주지인 월하(月河) 스님에 의해 사원 전부가 중수되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백화암은 6·25 전란 중에 전소된 것을 후에 다시 지어올린 것이다. 운허 용하(耘虛龍夏, 1892∼1980) 큰스님께서 쓰신「백화암중수기(白華庵重修記)」역시 그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월하 스님의 중수에 관해서 해은(海隱) 스님과 더불어 1922년 7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당우와 요사를 일신하는 중창불사를 비교적 의미 있게 서술하고 있다.
<상봉 정상석>
- 11:17분을 넘기면서 상봉 정상에 도착하였다. 들머리에서 2.8km/1시간10여분 정도 소요되었지만 펭귄바위에서 지체한 시간을 감안하면 1시간대 운영이 가능하였다. 들머리에서 백화암갈림길까지는 전형적인 육산의 편안함을 맛보았지만 이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정상 0,1km전방부터는 본격적인 암릉길의 연속이다. 정상에 오르기 전 계단이 끝나는 지점 오른쪽 펭귄바위를 시작으로 불곡산 바위 시리즈가 연출된다. 여기서 잠시 머물면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구간에 설치된 나무사다리 두 개 중 아무 곳이나 오르면 상봉 암릉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서는 양주일원의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비라도 멈춰 준 것으로 감지덕지였기 때문에 조망에 대한 미련은 일찌감치 접어두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 불곡산은 양주시 양주1동(옛 양주군 주내면)에 있는 산으로, 산 남쪽에 양주향교 · 임꺽정생가터 · 양주별산대놀이공연장 · 백화암, 산 동쪽에 양주시청, 산 북쪽에 부흥사 등을 품고 있다. 불곡산 북서쪽의 청엽굴고개 - 임꺽정봉밑 봉우리 - 369봉 - 오산삼거리를 거쳐 도봉산 쪽으로 뻗어가는 한북정맥은 임꺽정봉 일대의 군부대와 훈련장을 지난다. 불곡산은 불국산 이라고도 한다. 상봉은 불곡산의 정상이다. 불곡산은 부처 佛 골 谷 자를 쓴다. 아무래도 佛谷寺라 불리던 백화암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이름에 얽힌 유래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인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곡산은 대동여지도에서 양주의 진산이라고 표현되었던 산이다. 불곡산은 상봉과 임꺽정봉 두 개의 암봉이 마주보며 솟아있고 그 사이가 암릉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산세가 빼어나고, 정상과 군데군데 접근하지 못할 암벽이 도사리고 있고 전망좋은 암봉에서의 조망이 빼어나다. 전체적으로 불곡산은 밋밋하고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정상 부근의 암벽은 평범 속의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어 산객들의 사랑을 받는 듯 싶었다. 양주의 진산이란 표현의 적절성에 한 표를 던졌다.
<상투봉 정상석>
- 11:45이 넘어가면서 상투봉 정상에 이르렀다. 상봉에서 0,4km(0,3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상봉에서 계단을 따라 곧바로 내려오거나 펭귄바위 방향으로 0,1km 되돌아 내려가 올라와도 된다. 예전에는 능선 계단이 없었기 때문에 양주별산대놀이공연장 갈림길까지 0,1km 되돌아 내려가서 상투봉방향으로 진입했었는데 탐방로 상황이 많이 좋아진 셈이다. 상투(上頭)란 예전에 성인 남자의 머리털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 삐쭉하게 틀어 감아 맨 것을 이르던 말이다. 상투봉이란 이름은 정상의 상투 외형을 닮은 바위에 연유한 듯 싶었다.
- 상투봉에서 임꺽정봉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상투봉에서 안전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따라 곧바로 내려가도 되고, 0,1km 되돌아 내려가 감림길에서 오른쪽 방향사면 길을 거슬러 따라 내려가면 부흥사 갈림길 직전에서 합류한다. 예전에는 암릉 능선길을 없었는데 안전시설을 설치하면서 새로 개설되었다.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이 부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는 바람에 암릉길로 직진하지 못하고 우회로로 진로를 안내하는 우를 범하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이 구간에서 제대가 흐트러지면서 선. 후미가 뒤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임꺽정봉 정상석>
- 12:44분이 넘어가면서 임꺽정봉에 도착하였다. 상투봉에서 0,7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오르기 전 악어바위방향 진입로가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웠는데 정상 0,2km 와 0,1km 전방지점에서 연이어 나타났다. 0,2km 지점 갈림길에서는 악어바위 능선으로 곧바로 진입하는 길이고, 0,1km 지점 우회등산로는 임꺽정봉 정상에서 하산하면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악어바위 능선길로 접근하는 길이다.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임꺽정봉 정상에서 0,6km 정도 되돌아 내려와서 악어바위능선으로 진입한다는 정보를 얻은바 있었으나 이는 믿을 수 없는 정보임이 오늘 입증된 셈이었다. 그 바람에 오늘도 원뻥의 헛뻥으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 정상 0,2km 지점부터는 난이도 높은 암릉구간의 연속이었다.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군부대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하였다.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뒤에서 밀어 올리거나 앞에서 손을 잡고 끌어 당겨야만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밀어주고 당겨주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연출되는 바람에 인정이 넘치는 훈훈함을 맛보았다.
- 임껵정봉 정상 안부에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 시간을 갖았다. 정상적인 점심식사 시간대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으므로 여기서는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투봉을 지나 능선안부에서 점심식사를 할 요량이었지만 임꺽정봉 암릉 오름 구간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미뤄왔던 것이다. 후미 팀 7명을 제외한 16명이 한자리에서 오붓한 시간을 갖았다.
- 정상 정망 좋은 암릉 안부에 전망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 좌에서 우로 광백저수지, 감악산, 도락산, 서정대학교, 덕정역, 칠봉산, 회암사지, 회암사, 회암고개, 덕계역, 회천지구, 옥정지구, 어하고개, 천보산(맥), 자이아파트, 고읍지구가 안내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도 시원한 조망은 접어야만 했다. 다만 출입이 통제된 9보루가 아련히 내려다 보였을 뿐이다.
-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하면서 정상 0,2km 지점 진행방향안내판 설치지점에서 컨디션 난조를 보인 일부 일행 분의 안전 하산을 위해 총무님을 비롯한 일곱 분을 계곡길로 하산을 권고하였다. 이 지점에서 계곡방향으로 진로안내표식은 없었지만 산객들의 발길 한 흔적이 역역한 것을 확인한바 있었다. 그렇지만 진행방향으로 봐서 계곡 하산 길로 짐작될 뿐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지점에서 하산하는 산객 한 분으로부터 자문을 받아 신속히 결정할 수 있었다.
- 임꺽정봉 정상에는 아래와 같은 장문의 안내문이 설치되어있다. 안내문을 영상자료로 갈음하고자 하였으나 원문을 옮기는 것이 내용을 읽어보는데 편의를 도모할 것 같아 그대로 옮겼다.
♣ 임꺽정봉 ♣
불곡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이곳은 일명 “임꺽정”봉으로 부르고 있다. 양주 유양리는 임꺽정의 태생지 전설등 임꺽정과 관련된 많은 일화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는 지역이다. 이 주위의 골짜기는 청송골(소나무가 많아 붙인 이름), 청소골(소나무가 웃는다하여 붙인 이름), 천골(골짜기가 많아 붙인 이름)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남아 전해지는데, 이곳 지명과 소설속 임꺽정의 소굴인 “청석골”과 유사하여 이를 연관 지워 말하는 주민도 있다. 이 지방에서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난 임꺽정은 조선시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3대도적으로 조선왕조 명종 때 약3연간에 걸쳐 황해도를 중심으로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지방까지 활동했던 도적집단의 우두머리이다.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인 그는 우리에게는 소설속의 인물, 괴력을 지닌 전설적인 인물로 더욱 익숙해 있으며, 천대받던 백정의 신분으로 당시 집권세력의 탄압 등 사회적 모순 속에 살아남기 위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우리는 한낱 도적의 괴수로서가 아니라 영국의 로빈 훅과 같이 민중에게 대리만족을 시켜준 의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임꺽정은 일반도적무리와는 달리 조직적인 집단을 형성하여 엄청난 세력을 갖추었으며 조정에서는 체제유지의 불안을 느껴 그를 체포하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과 그를 옹호하는 민중의 도움 속에서 조정에서 파견한 남 치 근에 의해 체포되기까지 무려 3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 임꺽정의 얼이 서린 불곡산 정기산행을 계기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일명 임거정(林巨正)·임거질정(林居叱正)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 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마저 잡아 죽였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이서(吏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 점이었다.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악어바위>
- 임꺽정봉 정상에서 0,1km내려오면서 우회등산로로 진입하여 암릉능선(악어바위능선)으로 접근하였다. 대교아파트 방향으로 뻗어 내린 약 2km 지능선은 일명 악어능선이라고도 한다. 악어바위가 있는 지능선은 암릉구간으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짜릿한 릿지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마치 설악산의 지능선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아마도 불곡산의 공룡능선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 싶었다. 이 구간의 풍광은 오늘 일정 중 단연 엄지로 꼽을 만큼 압권이었다. 공기돌바위를 시작으로 코끼리바위, 악어와 거북바위, 삼단바위, 복주머니바위, 남근바위, 쿠션바위로 연이어 늘어서 있다. 어느 바위 하나 이름값에 모자람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이름을 그럴 듯 하게 잘 붙였는지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위에서 열거한 바위와 바위로 연결된 구간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구간이었다. 악어바위를 지나면서 암릉 사이를 가로질러 하산을 시도하다가 발길을 돌려 안전시설이 설치된 코스로 우회하여 하산하기도 하였다.
- 오늘 하산예정시간은 운영시간을 4시간으로 보고 14:00 예고하였었는데 임꺽정봉에서부터 악어능선 구간에서 여유를 부린 탓에 20여분 상당 지체하였다. 계곡 길로 하산한 후미 팀 7명은 하산예정시간 내에 홈인하여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 오늘 하산행사는 현장의 여건상 상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간단히 목을 축이는 정도로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하산행사 준비를 위해 준비했던 찌개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정부시 내촌휴게소에 자리를 펴고 이슬이를 나눴다.
- 또한, 오늘은 우리 모두의 살림 꿈이신 오경희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2부 행사가 거하게 치러졌다. 춘천시내 행운닭갈비집에 마련된 축하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신 몇몇 분을 제외하고 전원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산행하지 못하신 분들께서도 시간을 할애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셨다. 축하연을 통하여 모두가 하나 되는 뜻 깊은 행사로 이어졌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 본다.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오늘 날머리가 소재한 백석읍을 살펴본다. 백석읍(白石面)은 경기도 양주시 서부에 있는 읍이다. 읍소재지는 중앙로이다. 산성에 흰 돌이 있다고 해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도락산(441m)일대를 제외한 북부에는 100m 이하의 낮은 산이 대부분이며, 남부에는 은봉산(380m)· 챌봉(516m) 등 대체로 200~500m의 산이 솟아 있다. 도시 근교의 도농 복합형 농촌지역으로 아파트 및 다세대 주택이 증가하면서 인구도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기산 지역은 향토 마을 관광지로 발달했다. 군사시설 보호구역, 상수도 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 등 개발 제한 요인이 많은 지역이다. 연곡리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전투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곳인 해유령전첩지가 있다.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신각(申恪) 장군은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당시의 승리를 기념하고 억울하게 죽은 신각 장군을 기리기위한 해유령진첩비가 해유령 고개 아래에 있다. 방성·오산·복지·가업·홍죽·연곡·기산 등 7개 법정리와 34개의 행정리가 있다.
☐ 산행을 마치고
- 경칩을 지나면서 양주의 진산이며 임꺽정의 얼이 서린 불곡산을 두 번째 다녀오면서 계사년 봄 산행의 문을 활짝 열었다. 3월부터 5. 15까지 국립공원 일부 탐방로와 아울러 전국 이름 있는 대부분의 명산 입산이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기 때문에 3 ~ 4월 산행지 선정이 만만치 않았다. 요즘 들어 입산 통제라는 복병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산행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계층별로 다양한 고객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일정 짜기가 녹녹치 않았지만 새 봄을 맞이하면서 계절특성을 감안하여 매화축제, 벚꽃축제, 섬 여행과 더불어 울산바위, 도봉산 Y계곡 등 새로운 탐방로를 선정하여 산행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고자 노력하였다. 지금까지 한겨울 엄동설한에 몸을 움츠리셨지만 이제는 기지개를 활짝 펴시고 활동무대를 산으로 돌려 눈이 와도 좋아! 비가와도 좋아! 바람 불어 더 좋아! 좋아 좋아 모두가 좋아! 산이 좋아, 모두가 좋아! 를 읊조리며 파이팅을 외처 보시기를 소망해 본다.
- 모두님들 세상사 살다보면 어찌 화창한 날씨만 있을 수 있나요? 바람 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눈. 비 오는 날도 있고, 견디기 힘든 태풍이 불어올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의 섭리가 아닐까요? 나쁜 것은 짧게, 좋은 것은 길게 가져갈 줄 아는 지혜로운 일상을 산다면 아름다운 삶으로 엮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산을 매개로 한 시대를 함께 살면서 그만큼 더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보듬는 삶을 누리시는 모두님들 되소서!
- 겨울을 이겨낸 새봄의 파릇한 새싹과 꽃들을 피어내는 그 강인함처럼 우리네 영혼 샘에도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과 용기를 우리 모두님들에게 아낌없이 불어넣어 주십시오! 앞으로 희망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감사하는 마음을 수놓아서 늘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 좋은 삶으로 엮어서 봄이 오는 길목을 찾아드는 아지랑이처럼 끈기 있게 살아갈 활력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또한 우리네 옷깃을 파고드는 화사한 햇살만큼 사랑하는 모두님들의 얼굴도 늘 화사했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첨언한다.
- 오늘 양주의 진산 불곡산을 다녀오시면서 안전산행해 주시고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과 민들레 찐빵과 회무침 안주를 협찬해 주신 이영국님, 막걸리를 현장에서 협찬해 주신 오경희님, 안주(두부)를 현장에서 조달해 주신 최정규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컨디션 난조를 보인 가운데에도 전 구간 소화해 내신 정을철 자전거님과 오경희님께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불곡산에서의 일상정리를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