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선사(1849 - 1912)는 생의 말년에 혼자 금강산 일대를 순례했다. 그리고 안변 석왕사에 한동안 머물렀다. 선사는 이후 종적이 감감하다가 문득 함경도 갑산에 나타났다. 스님은 선비 박난주로 변신하였다.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고 유생의 옷을 입은 선비가 된 것이다. 스님의 속가 성은 원래 송씨였으나 박씨로 개명했다. 어머니가 박씨이다.
박난주(朴蘭州)는 우연히 만난 김탁의 주선으로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유학자 김탁은 박난주의 언행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고장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교류하였다. 시와 글을 서로 나누는 것은 당시 선비의 일상이었다. 김탁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발족을 위한 국민회의 국민대표 250인중 한명에 포함 될 정도로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한 인물이다. 김탁은 유학자로 경험의 재가 제자인 셈이다.
경허스님은 김탁 집에 머물면서 정성들여 옷시중을 해 주는 김담여의 부인 박씨를 계수씨라 하고 한 집안 식구로 지냈다. 어느 날 스님은 부인 박씨에게 계수님은 강계에서 사실 분이 아니고 장차 충청도 수덕사 천장암 근처로 가서 살 것 같소이다.하는 예언도 하였다.
경허는 김탁에게 “여보게, 내가 죽거든 이 담뱃대와 쌈지를 함께 묻어 주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서 “마음 달이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광경을 모두 잊으니, 다시 이게 무슨 물건인고”라는 열반송을 써주었다. 김탁은 이를 고이 간직했다. 담뱃대와 쌈지는 만공이 오래 전에 스승 경허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경허가 목숨을 거두자 김탁 등 마을 사람들은 경허의 장례식을 유교식으로 거행하고, 시신을 무덤에 안장했다. 수월은 스승의 열반을 1년 4개월 뒤에야 전해듣고, 편지로 예산 정혜사에 있는 만공에게 알렸다. 만공이 달려가 관에서 담뱃대와 쌈지를 보고 스승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다비를 위해 시신을 살펴보니 시신 윗저고리 안주머니에서 고이 접은 종이가 간직되어 있었다. 거기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三水甲山長谷裏 (삼수갑산장곡리)
非僧非俗宋鏡虛 (비승비속송경허)
故鄕千里無人便 (고향천리무인편)
別世悲報付白雲 (별세비보부백운)
삼수갑산 깊은 골에,
비승비속 송경허라.
고향 천리에 인편이 없으니,
세상 떠나는 슬픈 소식 흰구름에게 부치노라.
이 시가 천화시(遷化詩), 곧 유시였다.
선비 박난주가 김탁에게 남긴 시는 실은 반산보적의 계송이다. 반산보적(盤山寶積 720 - 814)은 당나라 때의 스님이며, 마조(馬祖)의 법을 이었다. 반산의 게송은 일찍이 선사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이다. 경허 선사가 김탁에게 남긴 반산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마음 달이 홀로 둥그니,
빛은 만상을 삼켰다.
빛과 경계를 모두 잊으면,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心月孤圓 (심월고원)
光吞萬象 (광탄만상)
光境俱忘 (광경구망)
復是何物 (부시하물)
김탁은 1919년 기미 삼일절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 4월에 상해 임시정부 요인 중 한 사람으로 가담하여 경허스님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한편 그 부인 박씨 또한 스님의 예언대로 1945년 8.15해방 뒤에 장손 김홍국(金鴻國)을 비롯하여 자손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6.25사변이 일어나던 전 해에 보령 땅에서 별세 그 곳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