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은 한국 최초 여류 피아니스트로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였던 김원복(金元福·1908~2002)의 선친이다. 김형준은 한국에 서양음악이 도입된 초기에 음악교육가 · 관악주자 · 성악인으로 활동하였다. 많은 곡을 편곡하고 작사를 하였다고 한다.
봉선화는 서양 음악 기법에 의한 한국 최초의 창작 가곡이라고 한다.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 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 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봉선화’를 ‘봉숭아’로 표기한다. 그리고 가사도 ‘울 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된다.
이 노래가 한국민(韓國民)에게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에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1919~1995)가 일본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 일본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여 처음 무대에서 불렀고, 귀국 후 일제 강점기에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공식 무대에서 불리는 노래였다.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홍난파의 곡 중, <그리움(이은상 시)>, <봄 처녀(이은상 시)>, <사랑(이은상 시)>, <사공의 노래(함호영 시)>, <옛 동산(이은상 시)> 등을 비롯한 많은 곡이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곡이 이은상(李殷相)에 의해 작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연주가로서의 홍난파는 피아니스트 보다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느낌으로는 대부분의 홍난파 곡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선율(旋律)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진다.
홍난파는 동요(童謠)도 많이 작곡하였는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민 애창 동요 제1번곡이라 할 <고향의 봄(이원수 요)>과 <낮에 나온 반달(윤삭중 요)>, <퐁당퐁당(윤석중 요)> 등이 대표적이다.
경기도 수원시(水原市)에는 ‘고향의 봄 노래비’가 악보와 함께 세워져 있다.
난파기념사업회(1954년~ )에서는 난파음악상(1968~ ), 난파음악제(1969~ ), 난파콩쿨(1978~ ), 난파예술단(2013~ )을 운영하고 있다.
- 이 글은「한국보학문화연구회(회장 차정연)」가 매년 발행하는 「보학연구 제34집」에 등재된 필자의 원고 ‘한국가곡 이야기’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박상휘.-
첫댓글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국민학교 입학 전에 처음 이 노래를 귀로 듣고 익힐 때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라고 가사를 익힌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