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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절-9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가나안 땅 국경선 넘어가면 세겜이 나옵니다. 세겜은 인명이 지명으로 된 겁니다. 이방인 하몰족 추장의 아들 이름입니다. 이 세겜 들의 한 편을 아들에게 물려준 거지요. 세겜동리로 바꿔진 겁니다.
34장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세겜으로 갈 때에 이 때 레아가 아들 세 명을 나았고 후에 또 둘을 낳고 일곱째는 이제 딸 디나가 되는 건데 요셉이 라헬의 소생 디나를 낳고 그 후에 요셉이 나온 거지요. 야곱이 초장이 좋은 곳에서 양의 대수를 계산을 했습니다. 계속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돈을 벌자고 세겜들에 있었다 그 말이요. 사업이 잘 되다 보니까 일 년 일 년 차일피일 하고 넘기다보니, 자꾸 본전 생각도 나고 그러다보니 십 한 오륙 년이 지난 겁니다.
결국 그 곳에서 머뭇머뭇하다가 세겜에서 다니가 당하고 말았어요. 귀한 외동딸이 먼지를 둘러쓰고 울고 들어오니까 아버지와 오빠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세겜의 남자들과 의논을 한 끝에 할례를 받게 하고 삼일 동안을 고통을 당할 즈음에 남자들을 죽여 버렸지요?
35장에는 고리들과 옷들을 상수리 모래 나무 밑에다 묻고 베옷을 입고 벧엘로 올라가는 이거 전부 다 신앙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세겜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중간쯤 되는 겁니다.
세겜에서 피 흘리는 죄가 있고 정조 빼앗김이 있고 그리고 기드온의 기생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권이 자기에게 오지 않음을 알고 형제 70명을 잔치에 초대해서 다 죽인 곳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이 시가행진을 세겜성에서 하다가 어떤 여인의 맷돌 윗짝에 깔려 죽고 말았지요. 호세아 6장에 또 보면 세겜 길에서 제사장이 강도노릇을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린 곳이기도 하고. 어쨌든 세겜이라고 하는 것은 인상이 좋지 않은 곳이다.
세겜은 성도 아브라함이 가는 길 앞의 방해물들인데 물질이라든지 권리라든지 유혹이라든지 신앙정조라든지 계명남용이라든지 살인이라든지 등등의 그런 고난과 고통과 역경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가나안 사람들이 거하더라.
사업적 사건적 세겜에서 이건 돌아서는 거. 세겜을 통과하느냐, 진리를 양보하느냐? 그대로 올라가면 언제든지 세겜을 통과하게 되는데 신앙의 전환기를 얻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거기서 다 돌아선다 그 말이요. 벧엘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런데 아브라함은 세겜을 통과해야 만이 벧엘로 가게끔 돼 있어요. 지식적 세겜. 지식적 세겜에서는 돌아서기가 매우 어렵다. 전화기를 넘어가면 벧엘인데, 그 때는 이제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는 곳이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사자굴이라든지 풀무불이라든지 빌립보의 감옥이라든지 이런 속에 들어가는 자들은 다 신앙의 전환기를 넘는 자들이다 그렇게 보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겜을 통과한 자들이다 그렇게 보아진단 말이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묘한 구원도리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지옥 갈뻔한 자를 천국 가게 하는 이것만은 아닙니다. 지옥 갈뻔한 그 자를 천국 가게 하는 그것만이 아니라 그 말이요. 더 나아가서 궁극적 구원 결과적 구원 영원적 구원이 있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구원이라는 뜻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택구원. 먼저 거기에 나오지? 사건선택. 무슨 사건선택이냐? 최종적 구원 결과적 구원 영원적 구원.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발동을 한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것을 전제하고 ‘이 좋은 곳을’ 하는 이거. 이것을 전제로 하고 기본구원. 이제 창조 속량 부활구원 입장구원 소속구원을 했고, 이것을 기초로 기본으로 하여 우리 성도들을 성화구원을 하는데 여기에서 최종적 구원 자체적 구원 영원적 구원, 즉 기쁨충만 쾌락충만 누림충만으로 느끼고 활용하고 지배하고 사용하는 이것이 구원이다 그 말이요.
조물주 하나님은 이 구원을 위해서 창조를 했고 이 구원을 위해서 섭리를 하고 이 구원을 위해서 역사를 하고 이 구원을 위해서 사건동원을 하시는 겁니다. 이 구원 때문에.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그 성품이 자체적이 되도록 입히시는 겁니다. 죄에 감염된 성품이 탈색이 되고 신의 성품에 점점 감염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성화는 외부적 행복만가지고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술 끊었다. 담대 끊었다. 단순히 그런 것 하나가지고 성화구원으로 측정을 할 수 없다 그 말이요. 이종교의 감화로도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고쳐집니다. 그러니까 외부 행동가지고 단정을 지으면 안 된다.
성화구원 혹은 자체적 구원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는데, 옛사람을 벗고 이성이 새사람과 결합이 되어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천국 가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성품을 진하게 입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데 고린도후서 5장 2절로 보면 단번에 입는 구원이 있고, 덧입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면에서도 각각 다른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더 주고 덜 주고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후하박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의 제일 큰 유익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는 것. 물론 나의 순종과 거역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유익이나 손해가 있느냐 하면 아무런 손해나 유익은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에게. 순종 하고 안 하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에게 유익이 있고 없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것만큼 영생이고 영적 면이 예민해지고 민첩해지고 민활해지고, 입지 못하면 우리 인간의 용어로 천국에서 멍청이가 된다. 그 말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입게 하는 하나의 작업성적인 용어가 되는 거지요. 뭐 천국에 들어가면 보릿자루 꿔다놓은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그런 표현을 안 쓸 수가 없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 같이 예수 믿고 같은 교인인데도 영적인 면에 민감하지 못하니까 이 세상에서 멍청한 사람 많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표현을 쓰게 된다. 멍청한 사람은 졸기만 한다고.
바울이 탄식한 것은 천국을 못 갈까봐 싶어서 탄식한 것이 아니고 덧입고자 탄식을 한 거지요.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중보로서의 완성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인성을 사람을 붙잡고. 이 연결은 그리스도의 대형이 없이 대행이 없이는 안 되는 연결입니다. 중보의 연결은. 그러니까 중보사역을 바로 하려니까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오시는 거지요. 그것 때문에.
창조 당시의 인간 무죄성이 타락해가지고 죄에 정복을 당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연결이 안 되듯이 생명과 죽음은 연결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을 죄의 대가를 또는 모든 사람이 받을 죄의 대가를 형벌로 받은 것이 대형이고, 대행은 33년 계시면서 마귀와 죄와 싸워서 이긴 겁니다. 십자가는 나의 대신 형벌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의행입니다. 그 의행이 마태복음 5장 20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단코 못 들어간다.’ 그 주님의 의행이라야 된다 그 말이지요. 인간의 의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자들이 그 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꾸 예수 믿고 인간 공력 그걸 자꾸 강조를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인간의 행동 활동 그걸 사회에서 어떤 소금역할로 자꾸 말을 하고, ‘소금역할을 많이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자꾸 그런 식으로 멈추어져 있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의행이에요. 사실 그리스도의 의행, 기름부음 받는 의행, 그 본질적 의행이 아니면 안 되는 거지요. 우리가 성화구원을 입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돼야만 되는 거지 안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만든 의는 신성과 인성으로 만든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이루어 드린 의이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모두는 우리를 위함이고. 대형에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고, 대행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입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겁니다. 고로 대형에서 우리는 무죄인이 되고, 대행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으로 또 역시 하나님과 결합을 시킨 겁니다. 이게 중보사역이란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하나님도 마귀도 절대로 끊지를 못합니다. 못 끊어요.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있고,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성도들이 지옥은 갈래야 갈 수가 없는 것이고, 결국 얻어맞고서라도 천국은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입고 갈 수밖에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원수도 준비해놓고 가난도 준비해놓고 실패도 준비해놓고 성공도 준비해놓고 감옥도 전쟁도 모두 준비해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권장하고 있다. 싫지요? 좋은 것만 주면 좋겠지? 그런데 우리가 성화구원의 정신을 바로 가지면 그런 거는 하나의 재료감들로 확실히 와 닿을 텐데 그게 그렇지 않지요? 자꾸 그런 고통 전쟁 실패 부요 그런 게 우리 생활 속에서 마음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그 무게가. 느껴짐의 무게가. 그렇지 않아요? 구원이라는 게 명백하게 큰 줄기에서 딴 것은 자질구레한 이거는 우리를 바로 세우는 도구로 돼야 할 텐데.
이 세성에서 물론 가난보다야 부요가 좋습니다. 그래서 ‘너는 영원한 부요자가 될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실지로 부요를 당하게 하고 또 부요를 보게 하고 그렇게 누리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깨닫고 가는 것이 큰 수입인데 내가 출생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내가 부요로 못 살고 가난하게만 살다가 가는데 남이 부요자로 사는 것 보고 깨닫고 가면 그 수입은 다 본 거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그래도 부요자로 살고 싶지? 그게 솔직한 심정이지.
(부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욕심도 대단하네. 그 말도 일리가 있고 뭔가가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그러면 남이 잘못해가지고 얻어맞는 거, 그것보다도 쉽게 얘기합시다. 흔히 볼 수 있는 거. 길 가다가 ‘저 자가 교통법규를 못 지켜가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눈알이 빠졌구나. 교통법규만 잘 지켰다면 되는 건데.’ 남이 당한 거 그거 보고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남이 당한 것보다 자기가 직접 더 보고 느끼려고 교통법규 위반해가지고 자기 팔다리 부러지고 눈알이 빠지면 더 진하겠지요? 난 그런 건 안 진해도 되겠어.
(잘못된 길을 가다가 매 맞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깨달으면 더 많이 진한 거 아닌가요?) 그건 안 당해도 돼요. 남 당한 거 보고 뼈저리게 느끼면 됐지 뭐.
그런데 안 그런 사람도 많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 당했으면 다음 며느리한테 아주 사랑스럽게 잘 해 줄 텐데 그게 또 안 그렇다나? 더 지독하데요. 그 참 희한하지.
부요자를 우리가 또 한 번 생각하면 예수 믿던 안 믿던 물질부요자는 있지요? 그러면 기독교가 아닌 이종교 이방종교도 물질부요자는 있지요? 그리고 기독교 박해자들도 물질부요자는 있지요. 그러면 예수 잘 믿어 부요자가 됐다고 한다고 하면 뭔가가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이상하지. 그 천하 쉬운 걸 왜 모르지? 아이, 이거 모르니 멍텅구리가 아닐까?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자기 집에 뭐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거, 그런 가르침, 그렇게 믿는 거. 뭔가가 정신병자들 아닐까요?
그건 다 사기요. 알겠어요? 그거 사기성들입니다.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세상 좋은 것 잔뜩 이렇게 말하는 거 그 사기꾼입니다. 알겠어요? 이름 있는 사기꾼들 많지. 그 사기꾼들이에요. 우리 전도지 이런 거 하나 만들어야 돼요. 전도지 이거 만들어. 쉽게 알 수 있고 그건 뭐 즉각적인 진리 아니요? 깨달음이 되고.
그리고 예수 믿던 안 믿던 육신 건강자는 많습니다. 이방종교인들도 육신 건강자 많습니다. 기독교 박해자들도 육신 건강자 많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어 건장해졌다고 하는 그거 좀 이상하단 말이요. 이치에 안 맞는단 말이요. 사기꾼이다. 사기다. ‘사기다’ 하는 그 말이 실감이 나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물질부자 만들어주고 마귀는 가난뱅이로 만들어주고 하는 그런 식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 사기꾼이라고 그러지요? 물질부요 세상적인 세상성 그거 간구 갈구하느라고 그 시간에 노력 시간 다 보내느라고 영적인 면에 깡그리 이룰구원 면에 손해를 왕창 보고 간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 면에 대한 손해가 엄청난 거지요. 이건 영원히 보상 받을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기꾼이란 말이요. 그러니까 그거 도둑질해가는 것보다 그걸 못 이루게 한 그 면에 성화구원 이룰 시간 이룰 재료 성화구원을 싹 빼가버리는 사기꾼들이란 말이요. 이해가지요? 그 사기꾼들이에요.
그러니까 벌써 여러분들이 말씀 딱 들을 때에 뭐요? 기복주의 나오고 신비주의 나오고 하면 이건 사기꾼이다. 세상주의 나오면 ‘사기꾼이다’ 해야 돼요. 뭐 돈 뺏어가니까 지금 그런 의미로서 말하는 게 아니고. 그런 건 해석 하나마나예요.
백성과 성민의 배를 채운다는 그 말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고 육신에 만족을 자꾸 채운다 그 말이지요. 육신적인 면에 만족을 채운단 말이요. 이게 배를 채우는 거란 말이요. 고깃덩어리란 말이요.
천국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영적 영원한 부요가 있는 겁니다. 이 영원한 부요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임시적인 부요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십일조 떼먹는 자와 십일조 바치는 자와 영적 면에 있어서 그 마음의 상태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까? 확실합니까? 여러분들, 실감 있게 한 번 느껴 봐요. 한 번은 바쳐보고 한 번은 떼먹어 봐요. 자기 속에서 어떻게 느껴지는가?
우리가 말씀을 못 깨달을 때에 자연계시로 통해서 우리에게 특별계시를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적인 부자는 하나님의 주권섭리에서 되어지고 천국의 부자는 자기가 힘쓰는 것만큼 됩니다. 정확합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희로애락에 관한 모든 재료들이 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보게 하고 체험을 시키고 경험을 하게 해서 영원한 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지옥이 나쁩니까? 지옥이 왜 있습니까? 지옥이 나쁩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지옥은 고통인데 고통이 왜 있습니까? 지옥을 열려주려고. 그러니까 알게 해주니 좋습니까, 나쁩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구만. 자, 이 말을 잘 새기세요. 듣는 귀가 있어야 되겠는데 지옥은 안 믿는 자 벌주기 위해서 만들어 놨다? 두 번째는 지옥을 만들어 놓은 것은 성도를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어느 거요? 안 믿는 사람 벌주기 위한 목적으로 지옥을 만들어 놨다? 손들어 봐요. 안 들어요? 성도를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 놨다? 틀림없습니까?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뭐요? 하나님이 화장실 만들려고 지옥 구덩이를 파놨나? 그러면 더 쉬운 예로, 그래, 어려우면 자기 집 방문 위에 아버지가 채찍을 탁 만들어 놨어. 벌을 줄 목적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올려놓은 건가, 공부 잘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기 올려놓은 건가? 어느 거요? 두 번째? 그럼 아까 거는?
세겜을 통과하면 벧엘을 경험하게 된다. 천국을 경험한다. 벧엘천국. 이 세상은 변질된 천국을 보여주는 축소판인데 하나님의 역사는 소극적보다도 적극적인 역사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이 천국에 우리를 오도록 해놓고는,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온다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지요? 행여나 천국에 와서 우리가 못 먹고 못 누릴까 싶어서 그것을 염려하는 겁니다. ‘천국 올까, 못 들어올까’ 하는 그걸 염려가 아니고. 생명과는 암만 먹어도 질리지 않고, 성품은 순종하는대로 입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맛을 못 닮아놓으면 생명과실은 맛이 없다. 생명과는 무형의 과실인데 생명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담배가 더 맛이 있을까요, 생명과 맛이 더 맛이 있을까요? 만일에 천국에 올라가서 생명과를 하나 딱 따먹었는데 ‘아이고, 맛이 왜 이렇게 없을까’ 했다면 하나님 마음이 어떨까요?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가 최고의 맛이에요. 둘째 가는 맛은 없이 전부가 최고 맛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부가 우리를 염려하는 겁니다. 우리를 염려해서 아브라함을 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준단 말이요. 천국에는 이 세상 것보다 사용할 게 참 많습니다.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영적인 면에 실력이 없으면 하나도 사용을 못한다. 그 참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살까? 무재미로 사는 것도 재미로 사는 건가? 무취미 무재미.
진리대로 붙잡고 살다보면 필요한대로 아버지가 아시고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은 외계의 제재가 없다. 천국은 자체의 실력대로 사는 곳이다. 아브라함이 이 구원을 붙잡고 사니까 벧엘을 경험을 하는 겁니다. 만족과 기쁨이 있고.
이 벧엘은 원리원칙대로 말하면 무서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솔로몬의 궁궐보다도 나은 곳이 들판의 벧엘이고, 야곱의 벧엘은 천사가 올라가고 내려오고.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들판인데 그렇단 말이요. 그렇지요?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니까 야곱의 무서움은 다 달아났지요? 신비로움을 체험을 하는 곳이고. 그러니까 벧엘은 만족의 절정이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즐겁겠어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런 상태는 이성이 완전히 영에게 연결이 되고 접선이 되고 결합이 된 생태인데 은혜 받는 그 때가 벧엘 경험이 되는 겁니다. 벧엘 밖의 기도는 육의 기도고 벧엘 안의 기도는 영의 기도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부르더니.’ 잘 나가더니 점점 남방으로. 잘 믿다가 잘 믿더니 슬슬슬슬. 누구 말따나 삼천포로 슬슬 빠져버려. 이거 참 보면 알아요. 우리가 이제 뭐 다 눈치박사들이 돼놓으니까 웬만하면 다 알잖아요?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어때요? 이 진리 만났을 때 그 마음에 착 달라붙더니 지금까지도 안 식고 있습니까, 지금 많이 식었습니까? 그래서 졸음도 오고 그럽니까? 슬슬슬슬 식어 들어가면, 그 식는 거요. 그러면 이제 자동적으로 남방으로 슬슬슬 빠지게 돼 있어요.
그 당시는 자기가 감지하기가 어려워요. 어느 정도 한참 가서야 ‘아이고, 내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그거 참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끄집어 자꾸 올라와야지요? 그 가만 내버려두면 큰일 나지요.
자기가 남방으로 가는 거 어느 정도 짐작하지요? 못합니까? 어느 정도는 짐작해요. 그러니까 남방으로 가다보니 뭐가 왔어요? 기근이 왔어. 벧엘생활을 하면 기근이 올 수가 없습니다.
기근은 여러 가지 기근이 있을 수가 있어요. 돈의 기근도 있고 명예의 기근도 있고 생활의, 그러니까 자기에게 목마른 게 참 많아져요. 그러니까 자기가 못 가졌다 지금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고 자기의 마음이 그 쪽으로 틀어져서 그 쪽 면에다 애타게 목마름이에요. 그게. 애타게 목마름을 갖는 거. 그게 기근이지요. 그럴 때에는 자기가 어디로 간 거다? 남방으로 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을 이탈하면 반드시 기근이 온다. 기근은 벧엘에서 점점 더 멀어질수록 그 기근이 심합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사람이 이제 기근을 만난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돈에 배가 고프면 돈 있는 데로 가게 되고 진리의 말씀에 배가 고프면 진리가 있는 데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배가 고픈 데로 방향을 잡게 되고 그리고 찾아가게 되지요. 물론 벧엘을 떠나갈 때는 그곳에 가면 행복해질 줄 알고 가는 것입니다. 만족하고 배부를 줄 알고 갔는데 그러나 기근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뭐 그대로 되는 거예요. 벧엘신앙에서 이탈하면 그건 뭐 기근은 이미 들어가는 거 아니요? 방향적으로 벌써.
애굽의 국경이 점점 가까워지면 어떻게 되느냐? 두려워진다. 두렵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목숨 생명 세상 사는 것. 이제 안 죽으려니까 거짓말을 하게 되고, 배가 고프니까 양심을 팔아먹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뭐냐? 아브라함이 누굴 팔아먹었지요? 마누라 사라. 양심은 사라요, 또 아브라함의 사라는 신앙정조 팔아먹는 것, 진리 팔아먹는 것. 곧 사라 팔아먹는 거요. 그게. 이해가지요? 신앙정신적 면에.
그래, 이제 사랑하는 아내를 궁중에 시집을 보내놓고 나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편할까요? 양심의 고통스러운 것을 사건화 시켜서 실감이 나도록 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그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웠겠어요? 그러면 그게 누구의 계획대로 된 거지요? 자기 계획대로 한 거란 말이요. 자기 계획대로 됐단 말이요.
그래, 그 날 밤에 잠이 올까요? 잠이 올 리가 없습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하면 없어지게 하겠느냐? 그 고통이 밖에서 오는 거요, 내발적이요? 내발적이지. 내발적이니 어떻게 없앱니까? 어딜 간들 그 고통은 자기 마음속에서 노상 따라붙어서 따라가는 건데.
물론 사람마다 오는 고통은 다르지요. 그러나 신앙 면에 민감할수록 영적 그 고통은 진합니다. 양심의 고통이라든지 진리 팔아먹은 면의 고통이라든지 그 고통이 아주 진해요.
육신이 아파서 오는 고통이 있고, 마음이 아파서 오는 고통이 있고. 어쨌든 고통은 즉시 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러냐? 고통이 빨리 오면 회개하는 것도 빠르니까. 그렇지요?
신앙정조 팔아먹고 진리양심 팔아먹고 사라를 팔아먹으면 배가 부르고 만족이 올 줄 알았지만 이 내발적 고통에는 외부적으로 오는 기쁨이 소용이 없어요. 외부적으로 기쁨이 아무리 와도 소용이 없어. 내발적 고통이니까. 생각을 해봐요. 그게 되겠는가? 아브라함을 낙원동산에 갖다놓은들 고통이 없어질까요? 벧엘생활을 잘하게 되면 내부의 고통은 해소가 돼요.
사도바울은 외래적 고통이 그렇게 심한데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수록 기쁨이 왔고 내발적 발생적 기쁨이 되니까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고 착고와 쇠고랑이 잘려져 나가고 옥문이 열리는 거지요.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귀향이 아니라 예수님과 신혼여행을 한 겁니다. 거기서 하늘 문을 열어 젖혀놓고 하나 하나 비밀을 다 본 거지요. 사실 밧모섬의 사도요한을 보면 우리보다도 신령한 천국테레비를 먼저 봤어요. 그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지금 뭐 있는 테레비는 이미 지나간 걸 보여주고 또 추상적인 그런 것을 보여주지만 요한이 본 천국테레비는 앞으로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거. 참 얼마나 실감이 났을까? 보고 싶지요? 안 보고 싶어? 보고 싶기는 한데 사도요한처럼 될까 싶어서 말을 안 해? 그런 걸 보여주더라도 젊었을 때 실컷 멋대로 살고 늙어 죽을 만할 때 걸음도 못 걸을 때 그 때 보고 싶어?
현재 보고 경험케 하고, 경험케 하면서 미래의 고통을 덜게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래, 이제 덜게 한다는 것은 회개를 시킨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그리고 현재적으로 오는 것은 전부 다 신호다. 즉 미래의 것을 깨닫게 하는 신호다 그 말입니다.
이만하면 신앙생활 만족하게 해 갈 수 있지요? 그 때는 계시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아브라함을 들어서 우리에게 등용을 시켰지만 우리는 경험을 안 했지만 아브라함을 보고 신앙의 차원적으로 아브라함이 실수한 것은 안 할 수도 있지요? 안 그럴까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아브라함을 들어서, 계시등용의 인물로 들어서 우리의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이 말씀에 피동된 것이거나 또는 벧엘신앙을 이탈해서 점점 남방으로 갔을 때 일어난 일 당한 일, 아버지 하나님, 그 때야 물론 역사적으로 사건적으로 당했지만 오늘날 저희들은 영적 신앙 면에 심적 상태를 더 깊이 깊이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면에 자극성을 갖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면에 가난이라든지 부요라든지 하나님의 성품이라든지 등등의 그런 면에서 조금도 자극을 별로 느끼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영적인 면에서 민감해질 수 있도록 저희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말씀을 깊이 깊이 깨닫게 해주셔서 저희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원적 순종으로 잘 순종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원 없이 입고 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