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동구 그리고 사육신 묘에서~
☞사육신 묘에서
권영구 (80세), 안동이 고향
옛고개일대 전투 많이 했다
옹천역 일대에 전사자가 많았는데 인민군은 발 앞부분이 나오게 묻고 가더라
안동교가 폭파되어 많이 죽었다
피난을 가지않고 있었는데 어느날 인민군이 북으로 도망가는데 봉화쪽으로 가더라
000할머니(77세), 고향이 예산, 유복녀다
일제시대 아버지가 징용되어 태평양 사이판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으로 갔는데 태어 낳기전에 죽었단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제가하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 정말 고생했다
아버지가 많은 월급이 490여만원으로 통장에 있었는데 해방이후 돌려받지 못했다
이유는 65년도에 김종필씨가 일본과 의정서 맺으며 솔직히 다 받아다 국토건설에 사용해 버리고 30만원 돌려 주었다 한다
하지만 이미 배우지도 못하고 거지처럼 본가에서 살다 결혼해 아들 하나 두었다
그리고 지금 아저씨는 죽고 생활이 어려운데 기초수급대상자도 못되어 노인지원 일을 해야 20만받고 노인연금 20만원 받아 산다
호적에 신용불량자지만 자식이 있어 안된단다, 오히려 자식을 돌봐 주어야 하는~
이제 나라가 살만하니 돈을 돌려 달라고 소원을 여럿이 내어 5년전 2천만원를 위로금으로 받는데 과거에 30만원 받았다고 그 10배인 3백만원을 깍고 주더라,
아니 5백만원의 열배면 5억인데 2천 주면서
이런 짓을 하니 나라가 나라같지 않단다
그러면서 청년실업 수당 무조건 주고 노인 수당도 무조건 올려준다고 하니 누가 죽어서 받아온 돈으로 경제부강 됐는데 엉퉁한 사람들이 놀면서 받고 부자여도 받고 참 가찬 말도 안되는 이놈의~
사이판에도 아버지 찾아 가보았단다
전쟁의 상흔에 우리 현대에서 추모비를 크게 세웠고 일본도 조그맣게 세웠는데 말을 들으니 미군 폭격으로 다 죽어 치우되지 못하고 있다가 바닷물 조류에 밀려 한 곳에 몰려 있었는데 몰아서 묻었다고 한다
재판까지해서 승소하여 1억5천씩 국가가 보상하라했는데 막무가내로 안주고 있단다
~~~, ㅜㅜㅜ
작은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여해서 포로 되었다 탈출해 나와서 다시 검증받고 군에 들어가 오성산인가 어디에서 전사했단다
여기 조카들도 아버지 얼굴을 모른단다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DNA감식은 해 놓았다고 한다
지금 할머니 무릎은 물이 차서 가끔 빼주어야 걸으신다
발가락도 너무 고생해 비툴리어 있었다
어제는 8.15광복이었다
나라가 주권을 잃어 지켜주지 못한 국민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000아주머니, 안강 기계가 고향
기계 현내리에 국군이 많이 전사했다
어릴적에 산에 탄피나 흔적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일대에 가면 많은 이야기 있다
소나무숲이 있는 곳이 인민군 야전병원이고
지휘부도 있었다 하더라
000할아버지(90), 본동이 고향이다
철물점을 옛날부터 오래하고 대물림이다
가계에 찾아가 물었더니 잘 모르고 귀도 안좋고 건강도 좋지 않다고 한다
앞집 아주머니가 알려주고 다른 분들도 추천해 주었는데 헛빵이다
그래서 한신 아파트 , 그 밑에 아파트 경로당을 찾았는데 재개발로 토박이 어르신이 안계신다
경비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쓸쓸히 나오다 골목길을 보니 노인 한 분이 걸어 가신다
★내가 찾던 어르신이다, 나쁜 (?)아들~~
할아버지를 만나 물었더니 잘 모른다
철도 노무자로 있다 전쟁이 나서 그대로 따라다녀 사육신묘 일대 초기전투는 모른다
참전용사 모자를 쓰셨다, 충성 건강하십시요
☞인천 동구 6.25참전용사 지회다
정민선 회장님(89), 8240부대다 옹진고향
(용현면 송학리)
대수압도에서 침투임무했단다
6.25전에 더 고생했어요, 38도선에 살다보니 수시로 작은 전투가 은파산 국사봉 이런데서 벌어져 민간인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교통호 파는 일부터 지역 경계임무까지, 그러다 사람이 죽으면 모르는 사람은 직접 화장해서 묻는 일까지~~
그러다 전쟁나고 숨어서 살아야 했다
국군이 올라와 한 3개월 벆에서 치안대 노릇하다 다시 중공군이 나타나 섬으로 내려와 유격군이 되었다고 한다
낮에는 주로 자거나 쉬고 잠이면 풍배를 타고 일정자역으로 침투해 들어가 부대배치나 무기 있는 곳을 알히면 미군이 비행기나 함포로 사격한다
본인은 보급담당을 하고 있는데 일부 유격군은 하룻밤에 소 2~3마리를 잡아 온다고 한다
소가 헤엄을 절쳐서 배에 줄을 매달고 당기면 물속으로 소리없이 따라 온다고~~~
사실 그러다 보니 유격군이 못된짓도 했다고 한다
좋은 것을 강탈해 갔게 되는데 맛이 들려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으려고도 한단다
들려보낼때는 먹을 것도 잘주고 술도 주고~
사지로 들어가는 모습이 지금도 안타깝기~
침투해 들어갈때 적에게 노출되어 배에서 지원사격하다 박격포 오폭으로 죽기도 하고
휴전 말엽에 165명이 들어갔은데 50여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기억에 크게 남는 것은 중공군 1명을 납치, 귀순시켜서 포상으로 알락미 200포를 받아 실컷 먹기도 했다
최수찬(85), 인천이 고향
피난을 못가고 공산치하에서 생활했다
인천에 바닥빨갱이(보도연맹)가 많아서 무직한 놈이 완장차고 3일간 인천시장 해먹고 죽은 사람도 있단다
김포반도로 들어온 북한군이 부평구치소를 들이닥쳐 무력화 다 풀어 놓았다
1.4후퇴시 50.12월 말에 국민방위군으로 차출되어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모였다가 문경세재를 넘어 낙동강을 건너 신령을 거처 대구 경산 청도 밀양을 지나 부산에서 배타고 재주도로 갔다
가는 도중에 일정 장소에 밥 주는 곳을 정해놓고 가야만 먹게 되는데 밥이 밥이 아니였다
문경을 넘을 때 한조는 바닥빨갱이가 엉터리 길을 알려주어 뱅뱅돌다 엄청나게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배를 타고 무려 2주가 걸려 북제주도에 내려 애월읍초교에 잠시 머물다 다시 한림으로 갔는데 이미 걷느라고 아사직전이라 이질등 열병으로 대열에서 죽어나갔다
★하지만 어디다 묻었는지는 잘 모른다
이럴바에야 현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되어 51.3.8일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위생병이 되었단다
"무척 재수좋은 놈이야, 그러니 살았지~!"
600명이 선발되어 300명은 야전으로 가고 다시 부산 금정산 밑 군의학교에서 재교육 받고 36육군병원에 배치, 병원이 서울로 올라와 지금 경복궁 좌측으로 왔을 때 근무
야전병원에서는 드럼통을 잔 잘라 화장함
전방에서 부상병들이 많이 오는데 하루에 25명이 전사하는 경유도 있는데 그때는 모든 화장을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홍제동 화장터에서 해서 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경희(82), 8240부대 옹진 창린도
옹진학도유격부대 출신이다
나이가 적어 연락병 역활을했다, 침투는 안함
대청도에서도 활동
그러다 53년6월21일에 육군 11사단13연대로 입대했는데 어리다고 귀대증 발급해 주어 복귀함
군번도 받아 참전용사는 되셨다
박기성(87), 출생지는 인천, 살은 곳은 평양?
아버지가 일제시대 평양등에서 활동(7년간)
그러다 다시 인천으로 와서 생활
전쟁이 났지만 피난은 못가고 있는데 송림초등학교로 모이라고 으르렁거려 갔더니 의용군을 모집한다고~~
나이 먹은 동네 아는 사람의 귀뜸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못하고 평양으로 간다고 하는 대열에 끼여 올라감
일부는 이김에 "평양구경하자"고 제의~~
올하가다 파주정도에서 배가 고파 인솔자에게 참외를 좀 따먹어야 한다고 속이고 밭에 갔는데 어두워서 잘 안보임
★그당시 이동은 모두 야간
그런데 2명을 만나 도망치기로 하고 대열에서 떨어짐
어둑한 밤에 어딘지도 모르고 남으로 이동
행주나루에서 나룻배 이용 도강하여 김포로
하지만 집에는 동네빨갱이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어 있기도 했음
그러다 50.12.26일 축현국민학교에서 군에 입개하여 배타고 부산으로 28일 도착
줄세워 놓고 한번 군번 불러주고 구포에서 1주일 교육받고 총도 쏘지 못했다
박격포 한발쏘고 구포에서 안동, 안동에서 차량타고 가다 차량이 굴러서 18육군병원에서 2개월 대구 27 육군병원 등으로 전전하다 결국 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