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 작품집 해설
순수한 눈으로 쓴 행복론
신재기(문학평론가, 경일대 교수)
글을 쓴다는 것은 주체가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언어로 드러나는 ‘무엇’은 대상인 ‘어떤 것’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은 꼭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경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글의 갈래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상호 작용이 글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말하는 내용이 실재하는 것이나 직접 체험한 사실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글을 쓰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구성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때도 있다. 후자를 허구적이라 하는데, 이는 문학의 가장 기본적이 측면이다. 전자는 역사나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허구적이지 않다고 해서 전자의 경우를 문학의 범주에 넣지 않으려는 시도가 종종 있다. 물론 문학은 허구적인 상상의 세계다. 그러나 허구성만이 문학을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실제든 허구든 간에 대상을 바라보고 생각한 바를 어떤 양식에 적합하도록 구성하느냐 하는 것도 문학성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수필이 비록 사실이나 수필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의존하는 담론이지만 문학의 한 양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점에 연유한다.
문학은 세상과 인간이 삶을 읽어내는 관점이고 해석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나 작가의 눈이다. 어떤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느냐, 여기에 문학의 개성이 자리 잡는다. 전상준의 작품을 읽으면서 수필이 문학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필자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가 세계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그 나름의 독특한 시각은 어떤 것일까?
순수한 눈
잔상준의 수필은 일상과 과거 유년 시절의 잔잔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작품집 전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작가는 해방 직후에 태어나 전후 시절에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60년대 후반에 대학에 들어와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경북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교직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텍스트만을 두고 판단해 볼 때, 그가 걸어온 길은 대체로 평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의 삶이든 크고 작은 상처와 고뇌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전상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부침(浮沈) 없는 평탄한 길은 지금까지 그의 삶 자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순진한 눈을 가지고 있는 수필가다. 이 수필집의 표제작인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의 서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아름답게 보인다. 더 멀리 더 넓은 하늘을 보고 싶어 마을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언덕길 옆 풀숲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꽃이 피어 있다. 하얀색의 풀꽃이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비탈진 곳에서 혼자 가만히 웃고 있다. 가냘픈 모습으로 보일 듯 말 듯 숨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풀꽃은 한때는 비가 오지 않아 목마름도 참아야 했고, 때로는 비가 너무 많이 와 습하고 습한 곳에서 인내하며, 조용히 자신의 성취 의욕을 불태워야 했을 것이다. 가끔 바람이 몹시 불어 몸을 가누기 힘들 때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에게 몸을 밟히며 움직이지 못하고 한곳에 붙박여 살 수밖에 없는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가냘픈 모습으로 보일 듯 말 듯 피어 있는 하얀 풀꽃이 웃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말한다. 이 행복한 웃음을 머금을 때까지 풀꽃도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고 그것을 참고 견디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둡고 불행했던 시간보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 행복한 웃음을 찾는 풀꽃을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어려운 여건을 참아냈기에 하얀색의 꽃을 피울 수 있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행복한 풀꽃의 모습은 사실 그 자체가 아름답고 행복하기에 작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꽃을 보는 시선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존재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풀꽃의 이면에 잠재된 어두운 그림자나 아픈 상처까지도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감싸 안는다. 보는 사람이 아름다운 시선을 가질 때 그 대상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풀꽃의 아름다움과 행복은 풀꽃의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순진하고 아름다운 심안(心眼)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전상준이 아름답고 순수한 눈을 가진 수필가임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작가 대상을 아름답고 순진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순진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따뜻한 시선은 세계와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갈등의 상태로 보지 않고 ‘행복’을 최선의 가치로 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고 사랑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세상을 사랑해라.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라. 지난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외쳐 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도 좋단다. 자연과의 대화, 동물이나 식물, 사물과의 대화도 소중하게 여기라 한다.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 낸다. 넋두리 같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파도를 보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 「수평선」 중에서
‘세상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랑은 마음의 문을 열고 대상을 내 품 안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그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 안으로 끌어들여 마음 터놓고 대화할 때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처럼 전상준은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인간 삶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행복은 끝없이 추구하는 지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지속적인 행복의 추구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사회적인 제도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 개인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행복은 순간적이고 상대적이다. 우연히 그때그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행복감에 젖어 들 수 있을 따름이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쾌락이나 기쁨은 소모적이다. 소모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노력과 에너지의 지속적인 소모는 고통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추구했던 행복의 상태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혐오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얻는 순간적인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다. 우리에게는 행복의 순간들이 있고, 우리는 그러한 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즐긴다. 이러한 행복론에 의하면, 행복은 주체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 내부에서 만들고 느끼고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불만 없이 그대로 수용할 때 행복은 가능하다.
나는 초록의 가을이 지나가도, 가능하면 내 삶의 여정을 좁은 길로 천천히 에둘러 걸어갈 생각이다. 좁은 길을 서둘려 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염려도 있고, 주위를 살펴볼 마음의 여유를 잃을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과 업(業)을 겸손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일 작정이다. 지명(知命)을 훨씬 넘겨 버린 지금 승진이 좀 더디면 어떻고 안 된들 어떻겠느냐, 푸른 내일을 위해 나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보다 풍요로운 삶이 계속되리라. 조급한 삶보다 때론 느리고 오랜 인내의 시간이 알찬 삶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가을의 끝에서 연초록의 은행나무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해 본다.
― 「무능의 변」 중에서
자신에게 주어짐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과도한 욕심을 버리는 일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가고 있는 삶의 길을 ‘겸손’하게, 그리고 ‘숙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유와 풍요로움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낮춤으로 높아질 수 있고, 적게 바람으로 많이 얻을 수 있으며, 비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고,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긍정함으로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수필가 전상준의 행복론이다. 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라 많은 선각자가 이미 반복해서 언급한 바다. 그렇다고 전상준의 작품이 담고 있는 삶의 철학과 지혜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작품에서 행복한 삶의 길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거나 도덕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일상의 고요한 경험을 통해 진지하게 말을 건넨다. 이 때문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수필이 삶의 철학적 인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작품은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물과 대상을 아름답고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순진한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법정 스님은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행복은 지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것이기에 그것을 찾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의 것이다. 전상준 수필에서 핵을 이루는 행복론도 이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어머니의 향기와 교사의 길
전상준 수필의 상상력은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관습과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197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해체되면서 첨단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전화되어 갔다. 그 속도에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은 얻을 수 있었지만, 우리의 고유한 문화나 아름다운 정서들을 적잖게 잃어버렸다. 그 아쉬움은 오늘을 살아가는 기성세대들이 느끼는 평균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가오는 사회문화의 거센 물결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억으로 남아 있는 욕망, 추억으로 재생되는 과거의 정서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전상준의 수필을 추구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기둥은 산업사회로 넘어가기 전의 전통적인 우리 농경사회의 인간미 넘치는 삶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것이 하나의 아련한 추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그의 수필이 지닌 또 다른 매력이다. 그것이 현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 동경으로 드러나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그 한복판에 바로 ‘어머니’가 놓여 있다.
아흔이 넘은 작가의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외아들인 작가는 그 어머니의 병구완에 정성을 다 바치는 효자다. 병구완에도 한계가 있는 법. 지금은 병원에 그 일을 위탁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작가는 남들이 어머니를 두고 치매가 심하다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남들은 어머니가 치매가 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치매가 아니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어머니는 아기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세 살쯤 된 아기다. 얼음이 어둔하여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매사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떼쓰고, 눈에 보이는 물건을 보면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나이다.” (「세 살 어머니」 중에서)
그 어머니는 한일합방,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4·19혁명, 유신 등 20세기 격변을 살아온 증인이다. 정치 사회적인 변화가 적잖게 삶에 영향을 주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무능 탓으로 녹여버리고 살아온 여성이다. 주어진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한국 어머니의 전형이었다. 가난한 살림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식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어머니다. 자식이 세상에 나가 제 몫을 다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교육열, 그러한 열의가 얼마나 강했기에 치매를 앓고 있는 지금에도 아들이 책상에 앉아 있으면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이 문맹자로 살아온 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자식의 출세를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일 수도 있고,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작가는 때로 애달픈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이며, 연민의 정으로 가슴 아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감정들을 성급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만약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픔을 여과하지 않고 상투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전상준의 수필은 삼류 신파와 같은 수준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삶과 현재에 대해 도덕적인 입장을 취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지나치게 미화하지도 않고,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미흡했던 효도를 의례적으로 반성하지도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자책과 고마움을 적절한 거리를 두고 말함으로써 그이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변잡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결과 한국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여인들의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개나리의 노란 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라일락 향기보다 더 향기로운 향을 풍기며 살아오신 어머니다. 살아온 과정은 무시당한 채 꽃을 피우지 못한다고, 향기를 내지 못한다고 피붙이들에게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노란 개나리꽃 속에서 어머니의 웃고 계신 모습이 오버랩 된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요즈음 어머니 기분이 참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다.
― 「어머니의 향기」 중에서
어머니의 삶은 개나리의 노란 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라일락 향기보다도 더 향기롭다고 한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수사적 찬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러나올 수 있는 말이다.
수필가 전상준에게 있어 어머니는 마음의 안식처며 궁극의 고향이다. 고향은 그의 유년에 대한 그리움이며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생성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자기의 육신이 태어난 곳은 있어도 영혼이 회귀할 수 있는 마음이 보금자리로서 고향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고향은 봄이 되면 뒷산에 종달새가 우짖고 진달래 만발하며, 마을 앞 냇가에는 많은 물이 흐르며 온갖 물고기가 노닐고,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며, 겨울이면 온 산천이 흰 눈으로 뒤덮여 동화의 나라였던 그런 곳이 아니다. 그이 수필에서 그리워하고 유년의 기억으로 가득 찬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물리적 차원이 아니다. 유년 시절 고향에서 체득되어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순수하고 인정미 넘치는 삶의 의미들이 그의 고향이다. 작가는 기억 속에 자리잡은 고향의 의미들을 오늘의 수면 위로 부상시킨다. 그의 고향은 마음의 고향이고, 과거가 아닌 오늘의 고향이다. 그것이 철들고 어른이 되어 이성에 의해 개념으로 규정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으나 삶을 바라보는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유년 시절의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삶이 지금은 고향을 떠나 도시의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과 가치관은 농경사회의 순박하고 순수함에서 생성된 것이다.
여기서 전상준의 삶의 철학은 더불어 살고 함께 나눔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바로 유년 시절에 고향에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유년과 고향은 지난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그 생명력을 왕성하게 발산하는 살아 있는 가치이다.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발견이다. 손에 들고 있는 삭정이 묶음의 마른 가지들은 서열이 없고, 높낮이가 없다. 잘난 체하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껏 같이 있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것과의 차별화를 위해,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과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지 모른다. 비록 가진 능력이 부족하여 남들로부터 부러움이나 존중받는 위치에 있지 못하더라도, 능력과 모습이 다른 것들과 함께 섞여 있을 때 의외로 내 존재가 더욱 값어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 「함께하는 삶」 중에서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답고 섞여 있을 때 내 존재가 더욱 빛난다는 생각은 설득력 있는 하나의 아포리즘으로 와 닿는다. 낱낱이 따로 있을 때는 의미를 지니지 못하던 것도 한자리에 모아 함께 어우러지면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킬 수 있고, 어울림을 통해 각자 상승작용을 불러일으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모아 함께하고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새로운 가치와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그것은 바로 인정이다. 인정은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를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작가는 세상을 탓하거나 남을 비난하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낮출 때 서로가 화합할 수 있음을 수차 말한다. 전상준의 삶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수필가 전상준은 30여 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후세들을 가르쳤다. 그것이 생업이지만 천직이라 생각하고 제자를 사랑으로 가르치고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그래서 경북 지방의 구석구석 여러 곳을 근무하면서 도시화 된 산업사회로부터 소외되어가는 농촌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면서 교사로 의무를 다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그의 생활철학이 굳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난 현재의 내 모습이 좋다. 학생들이 좋다. 수업 시간에 나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좋고, 이슬처럼 투명해 보이고 순수해 보이는 모습이 좋다. 나는 학생들한테서 천사를 본다. 그리고 희망을 본다. 학생들을 통해 내 어릴 적 부모님의 기대 속에 공부하던 그때를 떠올리며 현실과 타협하느라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순수함을 찾는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동안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오늘도 학생들에게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눈과 가슴을 갖게 해 주기 위해 즐겁게 교실을 들락거린다.
― 「무능의 변」 중에서
학생들이 좋고, 교실이 좋으며,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전상준의 순수함과 제자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그이 작품 도처에서 발견한다. 이순의 나이가 되도록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하지도 못하고 시골 학교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작가는 스스로 무능하다고 했는데, 그 무능은 제자를 사랑하고 교직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마음의 자세를 대변해 주는 겸손의 순박한 언어이다. 그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교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는 교사로서 자신의 희망을 이렇게 말한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제자가 바람이 벌을 대신하여 꽃가루를 운반해 주고, 지렁이가 땅속에서 꿈틀대며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해 주듯이 급변하는 사회의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물들여 주는 가랑비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교사로서 그의 꿈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지한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교사관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철학과 유년 시절 농경사회에서 체득된 순박한 정서에서 출발되었으리라.
실험정신을 기대하며
이 작품집은 전상준의 첫 작품집이다. 이 수필집에 수록된 글은 최근 3~4년간에 쓴 작품들이다. 다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창작에 적극성을 가진 수필가였다. 그의 작품이 수필로서 품격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선 잘 정제되고 정확한 문장에 있다고 판단된다. 국어학도이기에 당연하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문장은 튼실하다. 미려하거나 날렵하지 않으나 신뢰감을 주는 어휘와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억지스럽고 어색한 장식이 없다. 그래서 작가의 생각과 정서가 막힘없이 전해진다. 수사를 통해 언어를 뒤틀지도 않고, 난해한 어휘나 낯선 고유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다. 물길 따라 물이 흐르듯이 의미와 정서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그대로 둔다. 작가가 문장을 잡고 통제하려고 들면 글은 어딘가에 불협화음을 내기 마련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그 글의 길을 따라 스스로 흘러가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만큼 독자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전상준의 수필 문장은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돋보인다.
이러한 문장은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고 형상화하는 데 적격이다. 세계와 인간 삶을 보는 그의 눈이 순수하다고 했다. 작가는 대상의 빈틈이나 상처를 들춰내기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과 조화롭게 맞물려 있는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운 융합을 삶의 근원으로 파악한다. 그러기에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분석하거나 해석하여 주관적인 고집을 내세우지 않는다. 화해, 상생, 나눔, 조화를 지향하기에 작가의 태도는 겸손하고 말의 공간을 최대한 비워 두고 있다. 이 점이 전상준 수필이 앞으로 성숙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전상준 수필이 막힘없이 편안하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일면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독자가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은 작품이 독자에게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나 작가 자신의 심미적 입장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스스로 돌아보는 자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와 청중을 의식하지 않고는 작품 생산을 할 수 없다. 독자와 청중이 있기에 예술가는 긴장하고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이때 자의식이야말로 치열한 예술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엘리스 플래허티는 『하이퍼그라피아』(휘슬러, 2006)라는 저서에서 예술가에 있어 자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루는 옆을 지나가는 지네를 보고 거미가 말했다. “자네가 걷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네. 난 다리가 8개뿐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나?” 그러자 한 번도 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지네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쓰러져 버렸다.
자의식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제약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은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자기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수필 창작이 무엇이며 글쓰기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끊임없이 반문함으로써 수필가는 스스로 단련시킬 수 있다. 전상준 수필가의 취약점은 이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성싶다. 물론 그의 창작 과정에서도 무수한 자의식이 활발하게 발동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없고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의식이 작품에 묻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미덥지 못하다. 그의 수필에 나타나는 형식의 단조로움, 실험적 시도의 미흡 등도 이러한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전상준 수필은 앞으로 추구해야 할 부분은 강한 실험정신의 발현이 아닌가 싶다.
이른바 오늘날 대중적 글쓰기 시대에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양식이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계가 활기를 띠고 있는 분위기는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렇지만 수필인과 수필 전문지의 양산, 자격 미달 작품의 범람은 수필의 부흥기를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 수필이 이 시대의 주요 글쓰기 양식으로 부각 되고 수필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작품의 질적 수준의 제고이다. 수필이 문학의 영역 안에서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임이 틀림없으나, 수필 창작의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고는 그것은 불가능하다. 문학 외적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 방향성을 상실한 창작 방법 등 오늘날 수필 문학이 안고 있는 문제는 적지 않다. 수필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왜곡된 국면을 노출 시킨다면 다시 주변 문학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창작 방법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런 때일수록 수필 본래의 진정한 모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원칙을 존중하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수필 문단에 새로 등장한 세대들은 오랫동안 관습으로 굳어진 창작 방법을 새롭게 개선하는 데 앞장서면서 동시에 수필의 고유한 성격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수필가 전상준이 앞으로 보여 줄 작품 세계도 이 지점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