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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시57:1~11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깊은 시름에 잠겨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왕의 추적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읊은 시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57편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가는 신세처럼 처량한 것은 없습니다. '도망자' 특히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하는 신세라면 더욱 더 그의 신세는 처량합니다. 애매히 당하는 고난, 억울한 누명, 더구나 그를 죽이려고 좇아오는 이 압박감 참으로 다윗의 신세는 너무나 참담합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하는 영화 중에서 '도망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리슨 포드는 시카고의 저명한 외과 의사 '리차드 캠블' 이라는 사람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 '헬렌'과 함께 시카고 근교의 고급 주택가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아내 헬렌이 괴한에게 살해되는 무서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 당일 밤에 그는 응급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어떤 외팔이 사내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아내 헬렌은 자기의 팔에 안겨 숨지고 말았습니다. 법정에서 킴블은 의수를 단 외팔이의 사내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상황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결국 살인범이란 누명을 쓴 채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수들과 함께 교도소로 향하는 호송버스 안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이 주인공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서 지금 극한 슬픔과 고통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앞날이 막막합니다.
그런데 호송버스 안에서 몇몇 죄수가 탈주를 시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버스가 전복되면서 지나가던 열차와 충돌하게 됩니다. 아비규환의 와중에서 킴블은 탈주에 성공하게 되는데, 사형수의 탈주 소식이 알려지자 미연방 경찰이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킴블과 경찰관 제랄드 사이에 쫓고 쫓기는 숨가쁜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무작정 도망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명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경찰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범인 외팔이 사내를 찾기 위해서 주력합니다. 그러나 집요한 경찰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그의 숨통을 죄어 옵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건물사이를 뛰어넘고, 차가 질주하는 도로를 뛰어드는가 하면, 하수구의 긴 터널을 통하여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 하수구가 댐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을 가다가 이제 막다른 길에 도달합니다. 바로 뒤에는 총을 든 경찰이 있고, 앞에는 떨어지면 죽는 밑이 아물거리는 댐의 아래입니다. 다급해진 그는 댐 아래로 뛰어듭니다. 경찰차가 좇아옵니다. 사냥개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계속해서 좇아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주인공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같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열심히 도망을 갑니다. 머리끝이 바짝 바짝 서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는 어느새 땀이 촉촉히 젖어 듭니다. 스릴이 더 하면 더 할수록 관객들은 그 아슬아슬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요, 현실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나오는 짜릿한 쾌감입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상황이고 그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웃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긴박한 상황, 이 억울한 누명, 이 참담한 신세 그 누가 나의 이 억울한 심경을 알아 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윗이 도망자의 주인공인 킴블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다윗은 이 재난은 지나간다, 이것을 굳건히 믿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절망의 반대말이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절망이란, 지금 내 앞에 길이 없다, 출구가 없다, 그래서 희망이 끊겼다, 그래서 끊어질 절, 절단할 때 절 자는 써서 절망입니다. 다윗은 살 길이 안 보이는 시간이 적어도 15년 정도, 사울의 칼을 피하여 쫒겨 다녔습니다. 오늘 소제목을 보시면 사울을 피하여 동굴로 도망했을 때에 지은 시! 이때가 10여년 정도 도망 다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역사적 배경은 사무엘상 24장,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동굴 안으로 숨었는데 사울과 사울의 군대가 동굴 입구에 모여든 상황입니다. 동굴 깊은 안쪽에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이 숨어있습니다. 충주 가시면 깊은 동굴이 있는데, 여러분 아시듯이 굴은 조금만 소리 나면 메아리가 공명이 됩니다. 그래서 자칫 조금 잘못하면 붙잡히기 딱입니다. 그런데 그 위급한 시간, 재난의 시간에 오늘 다윗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합니다. 저는 이 찬양을 절대로 소리 내서 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조그마한 소리가 나도 잡힐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거기서 절대로 무슨 소리 내어 찬양할 수 없습니다. 이 시편은 거의 혼잣말처럼 웅얼웅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말씀은 우리 생에서 두 가지 상황 속으로 들어갔을 때 묵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이 굴속에 갇힌 것처럼 나갈 방법이 없는 상황이거나, 내 눈앞에 대적이 나를 잡으려고 점점 가까이 오면서 위태로운 상황이 왔을 때, 이 시편이 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정도 위기상황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희귀하거나 낯선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왜 이 재난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뭘까요? 두 가지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 주님께 대피하면 길이 보인다! 다윗은 이것을 자기 경험으로 믿습니다. 둘째, 주님께 대피하면 절망은 사라진다!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출구가 꽉 막힌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은 길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난상황이 오면 절대로 정신줄 놓지 않습니다. 이게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살면서 일상이 부서지는 상황을 재난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중대질병이 찾아옵니다. 재난입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집니다. 그게 재난입니다. 인생에 빨간불! 이거 절대로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갑자기 찾아와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으로 재난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다윗은 대피훈련 많이 했습니다. 평소에 대피훈련을 해놔야, 재난이 왔을 때 재난을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께 대피하면 길이 보인다.
1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봅니다.“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두번 말합니다. 지금 이 기도는 절대로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지금 다윗의 무리가 동굴 안쪽에 숨어있고, 사울의 군대가 동굴 입구에 잔뜩 모여 있습니다. 동굴 안쪽에는 길이 없습니다. 동굴은 출구 입구가 하나입니다. 동굴인데 출구 입구가 양쪽으로 터져있으면 그걸 터널이라고 합니다. 이 동굴은 출구가 곧 입구여서 길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우리 인생은 이런 동굴에 갇히는 위기를 가끔씩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이런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일지라도 때로는 이런 위기 속으로 동굴 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집어넣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실패를 당하게 되면 일단 좌절의 동굴에 갇히게 됩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어떤 질병에 걸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로가 막막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우에도 동굴 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사역의 물꼬를 열어갈 때에도 때로는 동굴을 경험합니다. 교회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불안의 동굴에 갇히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의심의 동굴에 갇히기도 합니다. 분노와 증오의 동굴에 갇히기도 합니다. 좌절과 자포자기의 동굴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1절을 잘 보세요. 이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내 영혼이 이제 어디로 피해요?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내 영혼이! 주님께 피합니다! 주님은 내 피난처, 주님은 은신처, 이 상황에 내가 피할 대피소입니다. 아까 뭐라고 그랬죠? 주님께 대피하면 길이 보인다! 다윗은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고 그때마다 주님께 대피하는 연습을 합니다. 오늘 이 상황은 제가 볼 때 최고로 위급하고 극심한 재난상황이 벌어진 거지만, 그 전에도 크고 작은 재난이 많이 있었고 그때마다 다윗은 주님께 피했고 마치 요새 안에 들어간 것처럼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1절에 다윗이 이 말을 합니다.
1절에 이 재난이 어떻게 된다구요? 이것은 지나간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 저는 지금 다윗이 두려움과 안전감이 공존했으리라 봅니다. 무섭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하고, 이걸 양가감정이라고 합니다.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뒤섞이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의 감각이 전혀 없을 거다 혹 이런 생각을 하시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생명의 위협이 두렵습니다. 아 피할 데가 없구나, 무서워집니다. 재난이 눈앞에 닥칠 때 극심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다윗이 인간이 아니면 몰라도, 다윗도 우리와 성정, 감정이 똑같은 사람이어서 상당히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뭐가 다릅니까? 평소에 대피훈련을 많이 해봤습니다. 대피훈련 많이 해본 사람은 딱 실제상황이 왔을 때, 어디로 대피할지 알아요.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해서 초등학교 어린아이들 지진 대피훈련을 시킵니다. 강도 5.0이다. 그러면 교실을 나간다. 운동장 넓은 곳으로 달려 나간다. 강도 7.0 교실이 흔들린다 그러면 나갈 수도 없은 긴급상황, 그러면 곧바로 책상 밑으로! 이 훈련을 계속 시킵니다. 실제상황이 되면 훈련한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평소에 재난대피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게 뭘까요?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면 곧바로 주님께 대피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 날개 그늘 아래로!
여러분 이거 주님께 피하는 대비연습, 별거 아닌 거 싶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큰 일이 아니어도, 이거 좀 작은 일이긴 한데, 이게 좀 어렵다, 어려운 상황이다 싶으면 곧바로 주님께로 대피하는 것입니다. 골방으로 가든지, 예배당으로 가든지, 내 영혼이 주님께 피한다, 이것이 마음의 훈련, 믿음의 훈련, 경건의 훈련입니다. 이게 평소에 훈련이 되어야 그 인생 재난상황이 벌어질 때, 정신줄 놓지 않습니다. 이게 안 되면 갑자기 재난이 쓰나미 같이 몰려올 때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대형스트레스를 심리학자들이 말할 때,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별, 자살, 부도, 성폭행, 이혼, 배신, 이런 걸로 봅니다. 친한 친구의 배신, 이런 거 우리 마음이 잘 소화해내기 어렵습니다. 대형 스트레스만 오는 게 아닙니다. 작은 스트레스들, 과로, 부부싸움, 자녀와의 다툼, 재산분쟁, 직장상사, 마음이 그냥 툭 떨어지고 우울해지는 것, 고립감과 실패감에 아주 씁쓸합니다. 이거 주님 앞으로 가서 피하는 훈련, 그리고 아주 신뢰할만한 사람을 찾아가 털어놓는 연습, 이거 하는 법 모르면 그냥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가 찾아옵니다.
재난의 충격을 그냥 이겨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론가 피해야 합니다. 폭탄 떨어지는데 용감하게 앞으로! 그러면 그 삶이 끝나버립니다. 견뎌낼 수가 없어요. 가장 안 풀리는 스트레스 증상이 뭐냐하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거지? 이겁니다. 이건 내 인생에 오지 말아야 하는 건데, 왜 온거야? 이게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감당이 안 되는 대형 스트레스를 오랫동안 해결을 못하면 그 마음이 체해요. 그게 중대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 대피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제대로 해놓은 사람은 재난이 왔을 때 어떻게 소화를 할까요? 그래 이런 일도 온다고 했지. 다윗에게 왔었고, 요셉에게도 왔었지. 욥에게도 왔었고, 바울에게도 왔었지. 성경에 신앙 좋은 사람은 재난이 피해간다고 한 적이 없었지. 아 이번 일은 감당하기 어렵네! 그러면 곧바로 내 영혼 주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3절 4절을 보십시오.“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
다윗의 재난상황을 살펴봅시다. 나를 괴롭히는 자들입니다. 사울에게 15년 정도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가장 무서운 날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꼭 있습니다. 안 만나고 싶고 정말 피하고 싶은 이들입니다. 그들만 보고나면 우리 에너지가 소진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정말 피하고 싶은데 계속해서 달라붙어요. 괴롭히는 사람들이 흔치않게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이구요, 바울사도에게는 유대인들이구요. 어디 가나 따라와요.
아이돌 스타들은 사생팬이라고 있습니다. 문 앞에 서있고 매일 문자하고 일정 다 체크해서 어디나 나타나고, 창문 열면 앞에 서있고, 그러면 미쳐버립니다.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생팬도 미쳐버릴 정도로 괴로운데 지금 다윗은 사생팬이 아닙니다. 4절을 보세요. 내가 사람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웠다. 언제 잡혀 먹힐지 모르니 무섭고 두렵고. 그 사자들을 보니 이빨이 창날 같고 화살촉 같고 낼름거리는 혀는 날카로운 칼같고. 다윗은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옛 속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 말 누가 만들었을까요? 하늘이 무너지는 사태가 났다는 것은, 이것은 눈사태 산사태와 차원이 다릅니다. 청천벽력이라고 하지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재난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는 시간에도 가만히 정신차려보면 솟아날 구멍이 있더라는 겁니다. 절대로 빠져나갈 출구가 안 보이는 것 같아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는 겁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금 하늘이 무너진 상황인데 거기 솟아날 구멍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주님께 피하는 사람에게는 꼭 이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신다, 이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시험당할 즈음에 하나님은 능히 피할 길을 주신다!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에도 나옵니다. 다윗이 주님께 대피했는데, 주님 날개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울의 군사들이 동굴 입구까지 와서, 굴 안쪽 수색을 중단한 겁니다. 그리고 뭘 합니까? 기록에 보면 사울이 발을 가리우러 들어왔다 그렇게 됐습니다. 이게 뭐냐?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발을 가리우다 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볼일을 본다, 그래서 새번역에 뒤를 보러 들어왔다, 그랬어요. 그런데 또 하나 해석은 굴에 들어와 낮잠을 잤다 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근동지방은 한낮 12시부터 3시까지 너무 뜨거워 씨에스타라고 해서 다들 낮잠 잡니다. 저는 이 해석이 더 적절하다 봅니다. 다윗이 보니까 사울이 동굴 안쪽에 들어와 드러눕고, 사울의 부하들도 전투복 벗어놓고 다들 자요. 다윗이 이때 살금살금 동굴을 빠져나가고 그때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살짝 베어 나옵니다. 다윗 혼자 나온 게 아니고 다윗부하들도 같이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그렇다면 이게 사울이 볼일 보고 있는 중에 다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요? 저는 사울이 낮잠을 잔 사이, 다윗에게 출구가 열렸다 라고 해석해야 얘기가 된다고 봅니다. 주님께 대피하면 출구가 보입니다.
둘째, 주님께 대피하면 절망이 없다.
4절도 그렇고 6절도 그렇고, 다윗의 동굴 안쪽의 상황을 보시면 절망적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 보면 딱 끝난 것입니다. 나는 사자들 가운데 누워있습니다. 6절보세요.“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그들은 내 목숨을 노립니다. 내 발 앞에 그물을 쳤습니다. 내 앞에 함정을 팠습니다. 다윗은 기침소리 한번만 나면, 한 발만 삐끗하면 곧바로 붙잡힙니다.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의 무장군사들이 굴 앞에 너무 많이 모여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사울이 날 죽이려 하는구나 직감한 것이 10년 전이고 그때 다윗이 요나단한테 뭐라고 했냐면, 나와 사망의 거리가 한걸음 뿐이다 그랬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도망 다녔는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이 무서워,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보고하는 단계에 와버렸습니다. 그러면 뭐죠? 현상수배범입니다. 그래서 6절에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내 기가 꺾였다고 했습니다. 기가 꺾였다는 게 뭘까요? 이제 포기할 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대안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이 상황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1절에 서두에 말하기를 이 재난은 지나가는 재난이라는 것입니다. 왜 지나가요? 주님께 대피했으니까!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했으니까!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주님께 대피했더니, 길이 열렸으니까! 다윗은 절망이 없습니다.
이게 끝이구나 싶은 상황인데, 다윗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딱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렇지 않다, 왜요? 이미 여러 번 경험을 했습니다. 주께 대피하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상황이 왔을 때 곧바로 그 영혼이 주님을 찾고 주님께 피합니다. 그게 아무리 무서운 함정이고 촘촘한 그물이라도 하나님이 그 함정에 빠져 망하도록, 그 그물에 걸려 인생 끝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 드라마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 피하는 사람, 주님께 피하지 않는 사람,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긴다구요? 백전백승입니다. 사무엘상 26장부터 31장 마지막까지 여러분이 두 사람의 인생의 흐름을 살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말이 완전히 대비됩니다.
사울과 다윗, 둘다 대단히 다급하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계속 쫒지만 사울은 한번 더 다윗에게 당합니다. 다윗이 사울이 자고 있는 틈에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갖고 달아납니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울은 또 한번 망신을 당합니다. 그리고는 사울이 무당 찾아갑니다. 죽은 사무엘의 혼령이라고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다윗도 지쳤습니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사울에게 잡혀죽겠다 싶어요. 블레셋에 망명을 신청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에게 거부당하고 아말렉 공격을 받고 아내와 자녀들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결말이 어떻게 납니까? 계속해서 주님께 피한 다윗은 끝까지 살아남아 유다지파의 왕이 됩니다. 주님께 피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은 사울은 마지막 블레셋과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살로 그 인생 끝납니다.
이것이 여러분 6절의 뜻입니다. 저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팠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누가 인생에서 절망을 합니까? 극심한 재난을 만나 힘든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다윗은 뭘 하는지 보세요. 7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보세요. 마음에 절망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 확정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7절이 유명한 찬송이 됩니다. 이 설교 후에 우리가 부를 찬송이 이 구절입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정했어요.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무엇을 확정했다는 걸까요? 내가 지금 당한 재난은 모두 다 지나가는 재난이다! 재난이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을 마음에 확정한 것입니다. 나는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다윗의 찬송은 굴속에서, 재난의 한 가운데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습니다. 속으로 웅얼웅얼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속에는 이미 재난은 사라졌습니다. 절망이 사라지면 재난은 힘이 없는 겁니다.
8절은 소리 없이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입니다. 왜요? 상황이 아직 동굴 속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마음은 이미 승리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절망은 하나도 없는데 눈앞에는 사울의 군사들이 잔뜩 보입니다. 그런데 노래가 흘러나와요. 누가 보면 지금 노래가 나오냐?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 이상한 상황 맞습니다. 그래도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어떡해요?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그 영혼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8절 다같이 읽어봅니다.“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지금 동굴입니다. 지금 캄캄합니다. 사울의 통치 40년 바로 캄캄한 밤! 그런데 이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오리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것을 마음에 확정하고 지금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재난은 지나간다? 영원하다? 예 지나간다, 맞습니다. 재난의 한 가운데 있을 때, 내가 사자들 틈에 누웠을 때, 내 원수들이 내 앞에 함정을 파고 그물을 칠 때, 이제는 끝이야 생각될 때에 뭘 하면 됩니까? 주님께 대피한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구요? 두가지를 기억합니다. 길이 보이고 절망은 사라진다. 오늘 다윗은 가장 큰 재난을 이렇게 이겨냅니다. 오늘날 성도는 무슨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게 재난을 당한 우리 인생에 유일한 대책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도 다 이렇게 재난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내 앞에 찾아온 재난을 지나가게 하면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