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56
화북면이장협의회 회장이라는 정기하 자천1리 이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산남의진 및 독립운동과 근대사에 관심이 많다고 본인을 소개하면서 열전3에 소개된 임용상 의사의 자훈(子訓) 족자를 들고 와서 보여준다. 붓글씨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기운이 넘쳐 보인다. 임용상 의사의 고향인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로 나를 안내하여 의사의 후손도 만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근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많은 문화재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 서고에서 잠자고 있는 이 자료들이 역사 이해를 돕는 학습도구로 활용되어지고 공공의 형태로 잘 보존 전승되었으면 한다.” 는 정기하 회장의 꿈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수곡(金水谷)
생존기간 1875~1910 / 출생지:경북 영천 / 운동계열:의병 / 훈격:독립장(1995)
공적내용 :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정환직(鄭煥直)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 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수곡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곧바로 같은 해인 1907년 정환직 의진에 들어가 경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기 관찰사를 지내고 중추원 의관을 제수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항전하여 적들을 사살하는 한편 헌병 분파소 등을 습격 방화하는 등 적극적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한 의병장이다. 김수곡은 정환직의 명령에 따라 동지 1백 수십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 경북 흥해군(興海郡)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소장 일본인 시원위태랑(市原爲太郞) 가족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3백여 원을 군자금으로 노획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방화 소각시켰다. 같은 해 11월 3일에도 그는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1백 수십 정을 탈취하고 경무분파소 및 친일 순검의 집을 소각하였고, 같은 달 4일경에는 의흥군(義興郡)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정을 탈취하고 분파소 및 순검 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1909년 12월 28일에도 그는 동지들과 함께 총칼을 휴대하고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서변동(西邊洞)에서 군수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인 처단, 식민기구 습격 방화, 친일파 단죄, 군자금 및 군수품 징수 등 다방면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9월 20일 대구공소원에서 동지 윤흥곤(尹興坤)·김일원(金日元) 등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523∼5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