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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1963)
<본문>
맺음말 : 목자의 격려사
48. 사회 생활에 참여할 의무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가톨릭 신자들에게 사회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무와 함께, 전 인류와 자기 정치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서 공헌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 격려하는 바이다. 사회 경제 문제들과 문화 및 정치 제도들을 그리스도 신앙의 빛으로 인도함으로써 물질적인 질서나 정신적인 질서에 있어서 사람들을 완성시키는 데에 그 문제들과 제도들이 장애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 참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이웃 사랑이 아닌가!
49. 학문적 능력, 기술적 역량 그리고 전문적인 직업 경험의 필요성
건전한 기준과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문명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의 빛으로 선을 촉진하려는 열성만 가지고서는 불충분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문명의 제도 안에 참여하면서 내부에서부터 효과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사실 현대 문명의 특징은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달에 있으므로, 누구든지 학문적 능력과 능숙한 기술 그리고 전문적인 직업 경험 없이는 그러한 제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공동선을 촉진하기 위하여 사회 생활에 참여해야 할 가톨릭 신자들은 학문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 그리고 전문적인 직업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능력이다!
50. 학문적, 기술적, 직업적 요소들과 영적 가치를 종합하라
그러나 위에서 말한 특성들, 즉 학문적이고 기술적이며 직업적인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과 제도들을 인간화시켜 사회의 공동선에 공헌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가? 진리에 입각하여 정의로 조정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는 힘으로 추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으로써 위에 말한 특성들이 활용되어야 한다. 요컨대, 공동선을 촉진하기 위하여 사회 생활에 참여해야 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자유라는 영적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영성이다.!
사실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권고를 받아 들이려면 매우 성실하게 노력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사회 활동을 실천할 때에 그 분야의 자율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그에 고유하고 특수한 규칙들을 존중하고 지켜야 한다. 둘째, 사회 각 분야의 자율성에 따라 이에 합치되는 고유하고 특수한 방법을 채용해야 한다. 셋째, 사회 각 분야의 고유성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반에 공통적인 보편성이 또한 있기 마련이므로 그 활동을 보편 관습상의 규율에도 적응시켜야 한다. 이는 마치 각 개인이 자기 권리를 행사하고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사회 보편의 관습을 존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지성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영적인 가치와 사회적인 특성을 조화시키는 일이다. 즉, 가톨릭 신자들이 인간 구원과 관계되는 하느님의 섭리적인 충고들과 계명들에 순종하고 양심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활동의 특성들인 학문, 기술 및 직업 경험의 전문성을 종합함으로써 영적인 가치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51. 종교 활동과 사회 활동의 조화
예로부터 유럽 대륙에서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진리로 감화된 정치 공동체들에서는 현대에 와서도 과학을 가르치는 기관들이 번영하고 기술도 발달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기관의 활동 내역에서 그리스도교적 자극 요소는 잘 드러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그리스도교 정신은 희박하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러한 결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한 기관들이 설립되는 데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적지 않게 공헌하였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이들로서는 실제로 자기 생활을 적어도 부분적이고 형식적으로나마 복음의 기준에 따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결함이 생겨난 원인은 그들이 활동하는 동기가 그들의 신앙과 조화되지 못하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의 기준은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내용에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에서 더욱 적용되어야 한다. 내용이 없는 형식,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만 복음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받아 들이는 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이 아닌가!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서는 종교 활동을 통한 신앙의 빛과 사회 공동선을 위한 사랑의 힘이 동시에 지배할 수 있도록 정신과 마음의 내적 일치가 쇄신될 필요가 있다.
52. 젊은이들의 온전한 교육과 발전
가톨릭 신자들에게 종교 신앙과 사회적인 활동 동기가 서로 매우 빈번하게 불일치되는 이유는,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적 도덕과 교리에 대한 교육으로 충분히 교화되지 못한 데 있다. 여러 지방에서 종교적 지식과 사회적 지식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문들에 대한 연구는 극도에까지 달하는데, 종교적 교육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기초적인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잇다. 우스꽝스런 불균형이 아닌가! 그러므로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종교와 사회 활동 모두에 있어서 온전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종교 문제들에 대한 신앙과 양심의 성실성이 학문 지식과 날로 발전하는 기술과 더불어 균등하게 실시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고 미래를 향하여 각자 자기 직책을 적절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의 지향을 두어야 할 것이다.(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 218-257항)
53. 항구한 노력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정의의 요구들 사이에 실제 관계가 무엇인지 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즉, 정확하게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 교리의 원칙들과 권고들을 인간 사회의 현 정세에 응용하느냐 하는 것을 확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은, 각자 국제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해야 하는 우리 시대가 더 민활하게 활동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회 조건들을 정의의 요구에 더 적합하게 적응시켜야 할 것인지, 또는 무슨 이유로 가톨릭 신자들이 이 적응 노력을 중지하는지, 또 이미 이룩하고 있는 영역에서 만족할 수 없는지를 매일 식별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현재까지 이룬 것들이 현실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더 중대하고 적합한 계획들을 세워야 한다. 즉, 생산 기관, 노동 조합, 직업 단체들, 시민들의 안전, 문화 시설들, 법률 제도, 정치 체제, 보건, 스포츠 그리고 기타 이러한 분야와 종류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세대가 희망하고 있으며, 거의 무한한 전망으로 전혀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 특별히 원자력을 발견한 이래 우주까지 탐험하게 된 현상이 그러하다.
54.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 문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선언하는 원칙들은 사람의 본성 자체의 요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자연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위에 말한 원칙들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청에서 분리된 그리스도 신자들과 혹은 아예 그리스도 신앙 바깥에 사는 그러나 지성으로 인도되고 자연법과 도덕을 성실하게 구비한 사람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양식으로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이런 이들과 협력할 경우에 가톨릭 신자들은 항상 자기 자신들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도록 극히 조심할 것이며, 종교 혹은 도덕이 손상될 위험이 있는 어중간한 타협에는 결코 동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 신자들은 타인들의 의견도 동등한 호의를 가지고 숙고 판단하여 모든 것이 신앙의 유익과는 무관하더라도, 바로 그 본질상 선한 것들이라든지 혹은 선에 유익한 것들을 신앙적인 노력으로 달성하는 데에는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 239항)
그리고 오류 자체와 오류에 떨어진 사람은 항상 구별하는 것이 옳다. 비록 종교와 도덕에 관하여 그릇된 진리나 혹은 불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류에 떨어지는 사람도 교육받은 사람으로 남아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므로 존엄성의 원칙은 항상 인정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의 본성에는 오류를 포기하고 진리의 길을 찾을 가능성이 남아있는 법이다. 이런 사정에 있어서도 하느님은 섭리하신다.
진리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한, 하느님의 도우심은 충분히 사람들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비록 오늘은 명확한 신앙이 결여되고 혹은 그릇된 의견에 찬동할 수도 있으나, 그 다음 날에는 하느님의 빛을 받아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거나 혹은 오류 상태에서 올바르지 못하게 믿는 이들과 만나게 되면 이들에게 진리로 인도하는 기회나 자극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인간의 본질, 기원, 목적 등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경제, 사회, 문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되는 사회 활동은 마땅히 서로 구별해야 한다. 비록 이런 류의 활동들이 그들 사상에서부터 기원되고 재촉되었다 하더라도 상관 없다. 하나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규정된 다음에는 더 이상 변경될 수 없는 것이지만, 위에 말한 활동들은 어차피 변천하기 마련인 사회 문제들의 조건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이렇게 변천된 사회 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아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활동들 가운데에서 올바른 지성의 원칙에도 합치되고 사람의 정당한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있다면,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신자들의 사회 활동은 무신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이전에는 아무 데에도 유익하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실제로 유익하고 장래에도 그러하리라고 전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생기리라고 판단한다든지 또는 어떠한 양식들과 혹은 단체들을 통해서 경제, 사회, 문화 혹은 정치의 참된 유익을 공동으로 획득하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다스리는 모든 덕들을 조정하는 지혜가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경우, 이를 판단하는 것은 주로 사회 단체나 또는 그런 문제들의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러나 자연법의 원칙들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사회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해야 하고, 교회 당국의 지시에 순명해야 한다. 아무도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는 신앙과 도덕의 교리를 보호하는 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사회 문제들의 분야에 있어서도 같은 교리를 실행하는 데에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교회는 자기 자녀들에게 권위있게 개입해야 한다.(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 239항)
55. 점진적 활동
우리 사회에 의로운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그들은 정의롭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에 모든 것을 일신하려는 열성으로 불타며 마치 어떤 사회 혁명으로 보일 정도로 격렬하게 나아간다. 우리는 그들이, 모든 일은 본성의 필요성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자란다는 것과 사회 제도에 있어서도 내부에서부터 점진적으로 활동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더 좋은 것으로 향상시킬 수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비오 12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 바 있다 : "구원과 정의는 옛 규율에 대한 혁명보다도 잘 조화된 발전에 있다. 난폭한 마음은 모든 것을 항상 파괴하고 아무 것도 건설하는 것은 없으며, 욕망을 불타게는 할지라도 진정시키지는 못한다. 다음으로는 증오심과 파괴를 증가시킬 뿐이고 정론자들을 서로 화합시키기는 고사하고, 더욱 사람들과 정치적 당파들로 하여금 불화로 인하여 생긴 폐허 위에 이전 상태의 사업을 최고의 노력을 복구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기껏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다."(비오 12세, 성령강린 대축일 강론, 1943.6.13)
56. 광대한 과업
그러므로 선의의 사람들의 과업과 더불어 특히 추가해야 할 과업은 진리, 정의, 사랑, 자유의 지도와 지배에 의하여, 인간 사회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들 즉, 첫째 각 시민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둘째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들 간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개인들, 가정들, 중간 단체들과 인류 공동체가 맺는 관계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가장 고상한 과업이다. 이 과업을 이룩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의한 참된 평화를 창조할 수 있다.
이러한 일에 노력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 필요성에 비하여 너무 적으나, 인간 사회에 대한 훌륭한 공로자들이므로 우리는 공공연하게 찬사를 보낸다. 또한 우리는 다른 많은 이들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이 의무감과 애덕으로 격려되어 이들에게 가담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인간 사회에서 광명의 불꽃처럼, 사랑의 영양소처럼, 또는 전체 군중의 누룩처럼 활동하는 것이 매우 적합하니, 각자의 마음이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하는 만큼 그 활동은 더 잘 실현될 것이다.
사실 인류 전체에 있어서 평화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부터 확립되지 않고서는, 즉 하느님께서 명하신 질서를 그 자신 안에서 준수하지 않고서는 확립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 네 영혼이 정욕을 이길 수 있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높은 데 계신 분에게 순명하고 얕은 데 있는 것들을 싸워 이겨라. 그러면 네 안에 참되고, 확실하며, 가장 질서있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평화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영혼에게 명령하고, 영혼은 육체에게 명령한다. 이보다 더 질서있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
57. 평화의 왕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사회 문제는 인간 사회가 변천되어 오는 동안 생겨나서 현재를 매우 불안케 하는 것으로서, 우리 마음 안에 평화에 대한 깊은 갈망을 일으켰으니, 선의를 갖춘 모든 사람들도 역시 평화가 바로 이 지상에 있어서 확립되기를 갈망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예언자가 '평화의 왕'(이사 9,6)이라고 불렀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비록 우리가 그 직책에 부적합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심과 능력을 다하여 평화를 향한 이러한 인류 공동선을 촉진하는 데에 헌신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는 열렬한 희망을 가지고 바로 이 회칙에서 근본적인 원칙으로 시사한 문제들을 조정할 수 있는 질서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빈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이 질서는 진리에 입각하고, 정의의 기준에 의하여 성립되며, 애덕으로 생기를 찾고 또 완성되며, 끝으로 효과적인 자유에 의하여 실현된 질서를 말한다.
사실, 이러한 계획이 고상하고 숭고하다고 평가되더라도, 또한 비록 극히 칭찬받을 만한 선의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다만 자기 능력만으로 노력하여 성과를 낼 수는 없다. 즉, 인간 사회가 아무리 탁월하게 하느님 나라의 모상을 반영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은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 자체도 요구하거니와 이 거룩한 사순절에 기념하고 기억하는 바, 가장 가혹한 수난과 죽음으로써 불화와 불행과 불균형의 근원인 죄악들을 씻어 없이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혈로써 전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고 평화의 과업을 분부하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다. ...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다."(에페 2,14-17)
그리고 부활 시기의 거룩한 전례가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우리 주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당신 제자들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즐거워하였다."(마태 28,1-1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오셨고 평화를 남겨 주셨으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다."(요한 14,27)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우리는 그분께 최선을 다한 기도로써 청하고자 한다.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평화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없애 버리시고, 모든 이들로 하여금 진리와 정의와 형제적 사랑의 증인들이 되게 하신다. 그리고 당신 광명으로 위정자들의 마음도 비추시어 적합한 번영과 함께 시민들에게 평화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보장해 주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를 움직이시어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장벽들을 허물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도록 이끄시어 상호 유대를 공고히 하시며,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모욕을 범한 자들을 용서하는 데에 불타게 하신다. 이렇게 되면 확실히 저 평화의 창립자의 덕택으로 모든 민족들이 형제적 미풍으로 포용될 것이고 그들 안에서 갈망하던 평화는 언제고 꽃피우고 또 항상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이제 끝으로, 공경하올 형제들에게 이러한 평화가 여러분에게 맡겨진 신자들한테서 발전하기를 바라면서, 특히 특수한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들과 재속 사제들과 수도회 사제들,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자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 그리고 특히 우리의 이 권고들을 관대한 마음으로 따를 이들에게 교황 강복을 영구히 주님 안에서 내리는 바이다. 그리고 이 회칙이 해당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건강과 번영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기원하는 바이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 성목요일에
교황 재위 제5년
1963년 4월 11일
교황 요한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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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신자들의 의무(48-57항) : 공동선을 이룩하라
개인들의 의무와 권리에 입각한 공동체적인 질서를 관찰하고, 이 관찰된 바에 따라 정치 공동체 내부의 질서와 정치 공동체들 사이의 국제 질서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향한 질서까지 판단한 요한 교황은 이제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판단된 바를 실천하라고 격려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 생활의 공적인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을 달성하도록 공헌해야 할 의무가 있다.(48항) 왜냐하면 공동선을 이룩함으로써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요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톨릭 신자들'이란 교황이 보내는 회칙의 수신자 모두를 뜻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해야 한다.(57항) 즉,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이 사도직은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다 함께 이룩해야 할 과업인 것이다. 이 사도직은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요소와 자원들, 즉 전례와 교리와 조직과 활동 및 재원 등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쓰여지고 지향되어야 할 것인가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참여는 특정한 신자들만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요 또한 교회 활동의 일부로서 하면 더 좋은 부수적인 일인 것만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도직은 지상의 평화를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려는 교회의 사도직이다. 이는 사회를 각 단위에서 즉, 정치 공동체 내부에서와 국제 사회에서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이다. 사회를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것,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를 통하여 지상의 평화를 이룩한 일이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신앙이 겨냥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요한 교황은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평화가 사라진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함을 의식하고 있다. 이어서 이 사도직을 온 교회가 함께 수행해야 할 질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 사도직 질서에 있어서도 균형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2. 사도직 활동의 균형(49-53항)
요한 교황은 교회가 지상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한다.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종교는 그 사랑을 받아 들여 세상의 이웃들에게 나누는 질서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퍼질 때 세상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변화되게 된다. 교회는 세상의 공동체적 변화를 위해 먼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하고 모든 종교 질서는 공동체를 위한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순수한 종교의 모습이다.
그러나 현실의 종교는 사회악 현상에 맞서지 못하고 물들어 있다. 종교의 오염 현상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사회 생활과 격리시켜왔고,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빛이 되는 데 장애가 되어 왔다. 이 종교 오염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도직 활동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요한 교황은 가르치고 있다. 이 균형의 두 축은 사회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이다.
요한 교황은 먼저, 신자들이 사회를 공동체적으로 변화시켜서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 그리고 전문적인 직업 경험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49항) 이 능력은 사회 활동에서 전개되는 이웃 사랑의 능력인가 하면 또한 사회적 애덕의 능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활동은 진리에 입각해야 하고, 정의로 조정되어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는 힘으로 추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이자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질서이다.
그렇지 못하면 학문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과 전문적인 직업 경험도 세상을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이웃 사랑의 도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 활동이 이웃 사랑의 도구가 되려면 그 활동의 동기가 하느님 사랑의 질서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인간 구원과 관계되는 하느님의 섭리적인 충고들과 계명들에 순종하고 양심을 소홀히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활동의 특성들인 학문, 기술 및 직업 경험의 전문성을 종합함으로써 영적인 가치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50항) 이것이 사도직의 균형이다.
현대의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가고 있으면서도 사회악 현상을 드러내는 결함을 보이고 있는가 하면 빈익빈부익부와 정경유착의 새로운 병리현상마저 나타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신자들의 사회 생활이 바로 사도직이라는 인식이 없어서 이러한 사도직 균형이 잡혀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신도들 자신에게나 성직자, 수도자 사이에서 이는 마찬가지이다. 전반적으로 사도직에 대한 교회 전체의 인식이 대단히 비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만 편향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서는 종교 활동을 통한 신앙의 빛과 사회 공동선을 위한 사랑의 힘이 동시에 지배할 수 있도록 정신과 마음의 내적 일치가 쇄신될 필요가 있다.(51항) 사회 활동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사도직 균형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여 교육하여야 한다. 하느님 사랑에 바탕한 신앙 질서를 배우는 종교적 교육과 사회적 애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사회적 교육 사이에 균형이 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 교황은, "젊은이들에게 대한 교육이 종교와 사회 활동 모두에 있어서 온전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종교 문제들에 대한 신앙과 양심의 성실성이 학문 지식과 날로 발전하는 기술과 더불어 균등하게 실시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고 미래를 향하여 각자 자기 직책을 적절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의 지향을 두어야 할 것"(52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3. 편향된 사도직 활동의 이유
요한 교황이 사도직 활동에 적용하고 있는 균형의 영성에 대해 신학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러하다. 요한 교황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현실은 사도직 활동이 균형 잡혀 있기 보다는 비사회적이고 종교일방적으로 편향된 사도직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요한 교황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에 대한 식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회 조건들을 정의에 요구에 더 적합하게 적응시켜야 할 것인지, 또는 무슨 이유로 가톨릭 신자들이 이 적응 노력을 중지하는지, 또 이미 이룩하고 있는 영역에서 만족할 수 없는지를 매일 식별하여야 한다.(53항)
⓵ 중용(中庸)의 길
교회의 현실에서 사도직 활동의 균형이 잡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선, 사랑에 대한 신앙의 오류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가르침으로써 이웃 사랑을 통한 하느님 사랑을 가르치셨다. 이웃 사랑이 바로 사회적 애덕이다. 그런데 사회적 애덕이 결여된 하느님 사랑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만일 감행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의 뜻은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공동체를 사회 속에 건설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지상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길이다. 바로 이것이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마태 4,17)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받는다. 이 사랑의 힘은 이웃들에게 나뉘어져서 사회 전체를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 점점 하느님 나라를 널리 확장시킨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나오는 사랑의 힘을 받지 않고서는 이웃을 서로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하여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에 대한 신앙으로서 중용의 길이다. 이는 요한 교황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질서를 통하여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는 태도를 말한다.
⓶ 미신(迷信) : 유물론적 무신론
하느님의 사랑은 이러한 중용의 길과는 달리, 두 가지 형태로 왜곡될 수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태도이다. 비종교적이거나 심지어 무신론적으로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세속화된 물질 문명 속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태도이다. 하느님의 사랑 없이, 하느님의 뜻을 받듦이 없이 사회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결국은 자신의 뜻으로 하겠다는 것이므로 이는 하느님 아닌 피조물을 그분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에 해당된다. 사회적 활동에 투신하되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질서를 벗어나서 행하는 것은 미신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⓷ 불경(不敬) : 현실도피적 종교
둘째는 이웃을 사랑함없이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회적 애덕을 발휘함이 없이 오로지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종교인들의 태도가 그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주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고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이는 대단히 이기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웃과 사랑을 나눔이 없이 즉 사회적 애덕을 발휘함이 없이 하느님의 뜻과는 다르게 자기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려든다면 이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유다교가 범했던, 사회악에 오염된 종교의 모습이다. 사회적 애덕을 실천함이 없이 종교 생활을 영위하려는 태도는 불경스러운 모습이다.
사실,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 역시 미신과 불경의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사도직의 균형이 잡히지 않는 현실은 교회와 신자들이 미신이나 불경의 유혹에 종종 빠지기 때문이다. 늘 깨어 있는 자세로 교회는 중용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사도직의 균형을 회복해야 하고, 신자들은 교회의 이러한 질서 안에서 자신의 종교 생활과 사회 생활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4.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54항)
요한 교황은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레오 13세 교황은 이들을 단죄하였고 비오 11세 교황 역시 과격한 공산주의자들과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을 구분하기는 했지만, 온건한 사회주의도 가톨릭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온건 사회주의로 돌아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권유한 바 있었다. 그런데 요한 23세 교황은 이보다 더 진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오류 자체와 오류에 떨어진 사람은 항상 구별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공산주의라는 오류에 떨어진 사람들과도 협력할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지성으로 인도되고 자연법과 도덕을 성실하게 구비한 사람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양식으로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그만큼 사회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실천 의지가 이전보다 더 적극적이 되었고, 또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더라도 신자들의 '개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톨릭 교회의 사회 문제 실천 역량에 있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 세력 안에서도 '지성으로 인도되고 자연 도덕을 성실하게 구비한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목헌장에서도 천명하듯이, 공산주의적 무신론이 발생한 데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책임도 있다는 교회 내 여론에도 힘입었을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가톨릭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함으로써 종교나 도덕이 손상될 위험이 있는 어중간한 타협에는 동의하지 말아야 하되, 그 본실상 선한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신앙적인 노력으로 활성화시키는 데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 교황이 보여 주고 있는 전향적 자세는 대단히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것이다. "만일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 않거나 혹은 오류 상태에서 올바르지 못하게 믿는 이들과 관계하게 되면 이들에게 진리로 인도하는 기회나 자극을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까지 요한 교황은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이전과는 달리 요한 23세 교황이 가르치는 사회교리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우익 세력과 제휴해 왔다. 그런데 교회를 우익으로부터 떼어내고 좌익 세력에게 개방하고자 하는 낙관적 태도를 요한 교황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 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남한 자본주의 세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요한 교황의 이러한 가르침은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사상이 비록 유물론적 무신론이라고 하더라도 협력은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주와 인간의 본질, 기원, 목적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경제, 사회, 문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되는 사회적 활동은 구별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회 문제들과 관련된 사회적 활동은 사회 문제들의 조건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 조건이 변하면 그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요한 교황이 가르치는 대로, 가톨릭 사회교리에 입각한 신자들의 사회 활동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자신감이 담겨져 있다. 즉,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신자들의 사회 활동은 무신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혹은 오류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지 않는 이들과 만나게 되면 이들에게 진리로 인도하는 기회나 자극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의 사회 활동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지성의 원칙에도 합치되고 사람의 정당한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레오 13세나 비오 11세와 요한 23세가 다른 낙관적 사회론이다.
다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사도직 활동을 전개할 경우에 있어서 실천할 방법이다. 요한 교황은 신자들에게, 공동선의 원리가 지켜져야 하고 사회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해야 하며 그리고 교회적 일치를 존중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교회 당국도 이러한 신자들의 사도직 활동을 책임있게 조정할 의무가 있으며 권위있게 개입할 권한이 있다고 지적한다. 민족 분단으로 겨레가 갈라져 대립함으로써 평화가 사라진 우리 민족의 현실에 있어서, 이 방법상의 원칙은 공산주의자들과도 협력해야 한다는 목적상의 원칙 못지 않게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남한 내부에 있어서도 빈익빈부익부와 정경유착의 사회악 현상은 사회 내부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반평화적인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민족의 평화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사회적 평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둔감한 편이다. 하지만 지상의 평화는 민족 내부에서는 물론 사회 내부에 있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남과 북이 한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하듯이, 빈부도 형제적 결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 때야말로 지상의 평화가 우리 사회와 민족의 현실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의 평화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력에 대한 이같은 원칙은 사회의 평화에 있어서 필요한 자본주의자들과의 협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교황은 이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사도직 활동의 방법과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5. 정확한 목표, 점진적 활동(55-57항)
가. 정확한 목표 : 평화를 위하여 투신하라
요한 교황의 판단 역시 전임자인 레오 교황과 비오 교황과 다르지 않았다. 즉, 빈익빈부익부와 정경유착의 사회악 현상은 "인간 사회가 변천되어 오는 동안 생겨나서 현재를 매우 불안케 하는 것으로서, 우리 마음 안에 평화에 대한 깊은 갈망을 일으켰으니, 선의를 갖춘 모든 사람들도 평화가 바로 이 지상에 있어서 확립되기를 갈망하고 있음이 확실하다."(57항)고 요한 교황도 확인한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민족 내부의 차원에서 이념으로 갈라져 있는 남과 북의 정치 공동체들 사이에서나, 사회 내부의 차원에서 빈부로 갈라져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나, 지상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공동선을 촉진하는 데에 헌신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사도직 활동의 목표이다. "이 질서는 진리에 입각하고, 정의의 기준에 의하여 성립되며, 애덕으로 생기있고, 또 완성되며 끝으로 효과적인 자유에 의하여 실현된 질서"(57항)를 말한다. 요한 교황은 "의무감과 애덕으로 고무된" 가톨릭 신자들이 이 사도직 활동에 투신하기를 희망하고 격려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노력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 필요성에 비하여 너무 적으나, 인간 사회에 대한 훌륭한 공로자들이므로 우리는 공공연하게 찬사를 보낸다. 또한 우리는 다른 많은 이들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이 의무감고 애덕으로 격려되어 이들에게 가담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인간 사회에서 광명의 불꽃처럼, 사랑의 영양소처럼, 또는 전체 군중의 누룩처럼 활동하는 것이 매우 적합하니, 각자의 마음이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하는 만큼 그 활동은 더 잘 실현될 것이다.(55항)
그러므로 선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과업들과 더불어 특히 추가해야 할 과업은 진리, 정의, 사랑, 자유의 지도와 지배에 의하여, 인간 사회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들, 즉 첫째 각 시민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둘째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들 간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개인들, 가정들, 중간 단체들과 인류 공동체가 맺는 관계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가장 고귀한 과업이다. 이 과업을 이룩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의한 참된 평화를 창조할 수 있다.(56항)
사실 인류 전체에 있어서 평화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부터 확립되지 않고서는, 즉 하느님께서 명하신 질서를 그 자신 안에서 준수하지 않고서는 확립될 수 없다.(57항)
나. 점진적 활동 : 불균형을 지속적으로 바로 잡아라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공동선의 질서는 균형 잡힌 질서임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이는 중용의 질서로서 미신과 불경에 빠지지 않는 질서이며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이다. 이렇듯 균형 잡힌 사회는 균형 잡힌 조화로운 활동으로만 가능하다. 그 균형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자유에 입각한 종교적 활동과, 학문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과 전문적 직업 경험 등의 사회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어 사도직 활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불균형은 죄악의 결과이므로 사회적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불균형을 시정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이 노력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려는 급진적 행동은 이미 내부에서 그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태도이다. 참으로 급진적이어야 할 것은 그 깨달음이다. 정확한 목표란 바로 급진적 목표를 말한다. 왜냐하면 '급진적'(radical)이란 말은 본시 '근본적'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급진적 목표 아래 점진적으로 활동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목표를 지속적으로 성취하는 태도이다. 여기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개량적 목표와 급진적 활동이라 할 것이다. 구원과 정의는 급진적이고 정확한 목표와 점진적 활동에 있다. 이것이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사도직 활동의 방법상 원칙이다.
끝으로 나오는 요한 교황의 당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호소인데, 지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신자들의 사도직 활동에서 그 열매를 기원하는 요한 교황은 평화가 사라진 까닭으로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면서,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도 협력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민족 내부의 분단과 빈부격차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이 때에 57항에 담긴 교황의 호소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회칙 '지상의 평화'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는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1회기(1962.10.11-12.8)가 끝나고, 제2회기(1963.9.29-12.4)가 시작되기 전인 1963년 4월 11일에 반포되었다.
가. 냉전의 극치로 치달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
1960년대 초반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 체제의 이념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1961년에는 동서 진영 간의 물리적이고 정치적 분단을 상징하는 장벽이 베를린에 세워졌다. 1962년 10월에는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하자, 미국이 해상 봉쇄로 맞서며 핵무기를 사용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요한 23세 교황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쵸프 서기장 사이에서 비밀리에 라디오 메시지와 서한을 통해 평화 중재 노력을 펼쳤다. 다행히 이 위기를 간신히 넘긴 후, 교황은 단순한 외교적 중재를 넘어 전 세계에서 지속가능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지침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 공의회에 미친 영향과 회칙의 역사적 의의
요한 23세는 1958년 10월 28일에 교황직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연말에 로마 교구 회의에서 추기경단에게 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하였다. 3년 간의 준비 끝에 교황청 관료들이 의안 초안을 준비했는데, 이는 프러시아 - 프랑스 간 전쟁이 발발하여 회기 중간에 종료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연장선 상에서 가톨릭 교회 내부의 문제들 가운데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마련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1962년 10월 11일에 첫 회기가 소집되자 불과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5백 명 이상의 주교들이 발언하였고, 다른 5백 명 이상의 주교들은 의안 초안 대신 수정 의안을 서면으로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제1회기 동안에는 교황청 관료들이 준비한 보수적인 의안들 중에서 의안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자체가 첫 회기의 커다란 성과였다.
그런데 쿠바 미사일 위기로 촉발된 미소 냉전과 이에 대한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가 반포되면서 공의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교황은 1963년 4월 11일에 이 회칙에 서명하고 반포한 후 두 달만에 선종하였다.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한 각성이 일었던 것이다. 이 회칙은 공의회 제4회기 동안 치열하고 격렬한 토의를 거쳐 채택된 사목 헌장의 바탕이 되었다. 진리와 자유 그리고 정의와 평화에 기초한 사회 질서를 재건하고자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려던 요한 23세의 취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사목 헌장에 크게 반영되어 그 이후의 사회 질서 재건에 관한 사회 회칙들에도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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