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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漢江)이여! 말 좀 해다오.
해담 조남승
토요일을 맞아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소란스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오늘은 우리나라 5대국경일중의 하나인 제헌절 날이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게 패배하여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1945. 8. 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의 상호이해관계의 대립과,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열의 방해공작 등으로 인하여, 남북이 하나가되어 민주주의국가체제로의 정부수립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가능한 38선 남쪽 지역에서만 국회의원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총선거에서 198명의 의원들이 선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됨으로서, 바로 헌법제정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대한민국헌법'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헌법에 담긴 헌법정신을 되새기고 공포일을 기리고자 제헌절이라는 국경일을 정하게 되었다.
아침에 국기를 꺼내달면서 몇 집이나 국기를 게양했는지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집은 우리 집을 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국경일에도 국기를 게양하는 집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이렇게 한집도 없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동안 민의(民意)의 전당이라 불리는 국회에서, 국민이 바라거나 동의하지도 않는 법안들을 다수결이란 미명하에 입법을 강행하면서 보여준, 국회의원들의 행태에 국민들의 냉소적인 마음이 표출된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엔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를 접하면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천칭저울을 쳐다보고 있는 대법원청사의 ‘정의의 여신상(Dike/디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선입견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여신상의 눈을 천으로 가려놓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여신상은 눈이 가려져있지 않다. 똑바로 뜨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의 두 눈이 공정(公正)한 판결을 위한 실체적 진실을 바로 보고자함이 아니라, 권력과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고자하는 눈이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사기관의 편파적 수사나,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지 못하고 권력자들의 눈치나 살피고 있다면, 사회의 정의와 법치주의가 무너져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용케도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이 법관들과 마찰이 생기자, 국회 연설을 통해 법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그 당시 초대대법원장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 법관은 대통령을 향해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며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의 발언에 정면으로 경고를 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유혹하며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라며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이런 유혹들에 넘어가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 아니라, 법관의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 법과 관련된 학문과 문화적으로, 또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정보의 공유화와 함께 시스템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왔다. 그럼에도 지금의 사법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과연 어떠한가?
정치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사법부의의지는 오히려 퇴보한 것만 같다. 전 부장판사였던 김태규 변호사의 절규어린 말에서 오늘날 사법부의 실태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법원이 정치판이 되고, 법관들이 저급한 정치꾼 흉내를 내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곤 “법원의 명실상부한 독립이 이루어지려면 법원의 정치화를 막아야 합니다. 국가에 대한 반역은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헌법적 기본질서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글을 보면서 그동안 검판사들에 대한 특혜성의 승진과 영전, 그리고 문책성의 좌천인사 등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의로운 양심을 잃지 않고 있는 법관들이 아직은 더러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졌다. 시원한 강바람이나 쏘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우리 오늘 응봉산에나 갔다 올까?’라고 하자, 아내가 흔쾌히 동의를 한다. 우린 곧바로 출발하여 응봉산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상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이 햇살에 그대로 노출되어 온몸에 땀범벅이 되었다.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길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속길이였다. 출발하기 전에 좀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사전에 면밀한 조사와 준비, 그리고 계획을 철저히 세우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정상중앙에 있는 팔각정은 코로나의 방역대책으로 올라갈 수 없게 통제되어있었다. 왕매미가 ‘와 왕~ 와 앙!’하며 귀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팔각정에 올라가보지 못하는 내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만 같았다. 정상의 사방에 심어져 있는 잘 생긴 소나무들이 서슬파란 바늘잎을 곧추세우고 팔각정을 호위하고 서있다. 우린 소나무 그늘에서 바로 산 아래에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혔다.
응봉산 왼쪽 밑으론 중랑천의 지류가 한강의 본류로 흘러들어가고 있고, 그 옆으론 ‘서울 숲’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한강 상류 쪽을 바라보니 높이 치솟은 잠실 롯데월드건물이 하늘과 맞닿아있고, 오른쪽으론 남산 타워가 서울의 중심을 잡고 우뚝 솟아있다. 그 사이로 파노라마처럼 아름다운경치가 펼쳐져 있다. 때마침 3호선 전차가 한강을 가로지르며 달려가고 있다. 나도 달리는 전차에 눈과 마음을 싣고 부의상징인 강남의 빌딩숲을 향해 달려가 보았다. 다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다보니 아주 짧은 구간인데도 적지 않은 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눈부시게 발전을 해온 증거이다. 한반도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흘러온 민족의 젓줄인 한강! 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대덕산의 ‘검룡소(儉龍沼)’가 발원지라고 국립지리원에서 공식 인정한바 있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크고 작은 개울들과 만나 시냇물이 되고, 여러 시냇물들이 하나가되어 강물을 이루며, 또 그 강물들이 합류하여 대하(大河)의 한강을 이루게 된 것이다. 한강은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희비애락이 담긴 수많은 전설과 역사적 사연들을 품에 안고 넓은 바다를 향해 쉼 없이 흐르고 있다. 검룡소에서부터 정선읍 방아리까지 먼 길을 재촉하여 흐르는 물을 조양강이라 하며, 조양강에서 영월까지 이어지는 강물을 ‘동강’이라 하고,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와 한반도모양을 이루며 흐르는 물을 ‘서강’이라고 한다. 서강에서부터 팔당댐까지 이르는 것이 남한강이며, 춘천 소양강에서 흐르는 것이 북한강이다. 이렇게 양쪽에서 흘러온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合水)되는 곳이 바로 일명 ‘두물머리’라고 하는 양수리인 것이다. 양수리에서 두 강물은 하나의 큰물줄기인 한강이 되어 서울의 도심을 가로 지으며 서해를 향해 흘러간다.
옛 조선시대의 한강은 푸르른 산과 들에 펼쳐놓은 한필의 새하얀 필목처럼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강변의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엔 정자들까지 곳곳에 세워져 있어 운치를 한층 더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오랜 세월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의 유역을 따라 역사적인 인물과 그들의 발자취들이 곳곳에 서리어있다. 영월의 청령포와 단종, 단양의 도담삼봉과 이황, 충주 탄금대의 우륵과 신립, 여주의 신륵사와 이색, 남양주의 여유당(與猶堂)과 정약용, 노량진의 사육신묘와 생육신인 김시습, 김포의 조강포와 이규보 등에 관련된 역사적인 숨결과 이야기들이 슬프고 애절하면서도 흥미롭다. 어디 그뿐이랴. 당장 응봉산 밑의 살 곶이 다리에 얽힌 조선 태조와 태종, 또 강 건너로 바라다 보이는 현대아파트자리에 있었던 압구정과 한명회,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
우선 남한강이 휘돌아 흐르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난 조선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에 대하여 살펴보자. 다산선생은 천주교 신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여 18년이라는 긴 세월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전혀 좌절하지 않고 독서와 학문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 오경사서(五經四書)를 되풀이하여 연구함은 물론, 수기지학(修己之學)을 강론 하면서 무려 500권에 이르는 역사적인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만년엔 유배가 풀려 자신이 태어난 본가로 돌아와 여전히 학문을 이어갔으며,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종명(考終命)을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자신이 주장하는 학설이나 당쟁에 몰려 억울하게 죽어간 선비들이나, 체형(體刑)을 받거나 유배를 당하여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학자들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실로 다산이 평생 저술한 많은 책들이야 말로 후세에 길이 빛날 큰 업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다산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 공직에 있는 사람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은 단연 목민심서(牧民心書)일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여러 선배들이 이미 목민지서(牧民之書)들을 남겼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자신이 지은 목민심서 역시 후세에 전해지겠냐면서 “주역에 가로되 전언왕행(前言往行)을 지식으로 삼아 덕을 쌓는다고 했으니, 이 책은 나의 덕을 닦기 위함이요, 굳이 목민(牧民)하려는 뜻은 아니다. 일러 심서(心書)라고 한 것은 목민할 마음은 있어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목민관이 되어 자신이 닦은 학문대로 뜻을 펼치지 못함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였다.
다산이 아쉽게 생각한 것은 벼슬을 탐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목민관으로서의 잘못된 관행들을 혁신하여 모범을 보이고자 하는 뜻이었음을 서문중의 다음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나라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국가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지형이 중심과 안정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잘못된 이념과 사상에 의한 안보의 불안,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시장경제원리의 훼손, 포퓰리즘에 의한 국가부채의 폭증, 불공정과 국민의 분열, 뒤틀린 정의와 몰염치한 내로남불의 병들을 다산의 말대로 ‘지금 당장 고치고 바꾸지 않으면’ 나라의 앞날이 어둡게 되고 말 것이란 생각에 걱정스럽기만 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많은 내용 중에서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해본다. 다산은 우선 사람을 인용(人用)함에 있어 그가 맡을 직책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위관택인(爲官擇人)을 해야지, 객관적으로 능력도 부족하고 윤리적인 면까지 흠이 있어 그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벼슬자리를 정해주는 위인택관(爲人擇官)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율기편(律己篇)의 청심(淸心)에서 “자고이래로 무릇 지혜가 깊은 선비치고 청렴을 교훈으로 삼고, 탐욕을 경계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면서 “청렴은 목민관의 본질적인 임무(廉者牧之本務/염자목지본무)로서, 만 가지 선의 근원이고 모든 덕의 뿌리이다.(萬善之源 諸德之根/만선지원 제덕지근)” 따라서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불렴이능목자 미지유야)”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淸)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청렴하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과격하고 정사가 각박하여 인정을 펴지 못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바가 아니다.”라며 청렴의 치밀성과 업무처리에 있어서의 중용지도를 강조하였다.
이는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교육자인 해롤드 래스키(Harold Laski)가 “가장 나쁜 공무원은 인정사정없이 모든 일을 법규대로만 처리하려는 공무원이다. 훌륭한 공무원은 대의(大義)와 명분을 지켜 청렴하되 인정과 세정(世情)의 기미(機微)를 잘 파악하여 융통무애하게 처리하는 공무원이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행정을 집행하는 기본적인 법과 규정들이 수시로 급변하는 사회발전에 대비하여 기준을 미리 제시하지 못하고, 뒷북을 치며 따라가기 바쁘다보니 관련법규가 미비 되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경우 관련 상위법의 입법취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민원사항의 현실에 부합하도록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행정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청렴하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현재의 법 규정에 맞지 않는다면서, 국민들의 절박하고 간절한 민원을 냉정하게 외면하거나, 일방적으로 묵살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산은 이러한 폐단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또한 다산은 목민심서의 형전(刑典)에서 “옥사를 처단하는 요령은 공명하고 신중히 하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신중함이 없이 공명만 내세우면 형(刑)이 급박하여 억울함이 생기게 되고, 공명이 없이 신중함만 있으면 결단이 더디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잘못 생각해서 오판(誤判)을 하였을 경우 빨리 뉘우치는 것이 군자의 도리다.”라면서 “법이 용서할 수 없으면 의(義)로써 결단을 내려용서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 와서 의(義)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 만약 다산이 살아있다면, ‘국론분열에 의한 국가의 에너지가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국민의 대화합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과 국가에 도움이 되고 이로울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대중적인 정서와 여론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맞는 말만을 내세워 결정을 하고자한다면, 그것은 공명하지도 않고 신중하지도 못한 처사다.’라고 말할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은 먼 후세에까지 지울 수 없는 한 페이지의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잘못된 역사란 언젠가 꼭 진실이 밝혀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역사의 두려움을 모르거나 진실을 벗어난 편향적인 논리와 사관(史觀)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반복과 윤회를 하면서 이어져간다. 역사를 바라볼 때는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사실을 통하여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넓고 깊은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 뒤틀리지 않고 올바른 역사를 남길 수 있게 된다.
역사를 말하자면 중국의 사관(史官) 사마천을 빼놓을 수 없다. 의리가 강했던 사마천(司馬遷)은 죄인을 변호하여 구하려했다는 죄로 치욕스런 궁형(宮刑)을 받게 되었다. 사마천은 “용자(勇者)라고 해서 모두 절의를 위해 죽는 것도 아니며, 겁자(怯者)라고해도 의(義)를 좇아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죄에 몰려 욕을 보고도 살아남아 있는 것이 나의 본지(本旨)가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끝끝내 죽기를 작정하지 못하는 것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함이 한스럽고, 이대로 내 문장이 후세에 나타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 까닭이다.”라며, 그 당시 자신의 억울하고 참담함을 구구 절절히 토해냈다. 그가 궁형을 받고서도 고난을 딛고 역사적인 성패흥괴(成敗興壞)의 이치를 구명해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로 글을 썼기에, 오늘날 사기(史記)가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마천은 실로 역경을 극복한 위대한 역사의 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부귀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월 따라 까마득히 잊혀 지게 되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인심이다. 하지만 치욕의 고통을 이겨내며 오히려 고난을 새로운 도전의 발판으로 삼아 뜻을 펼치고자 했던, 탁이비상(卓異非常)한 인물들만이 그 이름을 천추에 길이 남길 수 있었다. 중국 주나라의 문왕(周文王)은 은나라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복희씨의 8괘를 근거로 하여 64괘의 주역(周易)을 집대성하였고, 공자(孔子)는 진나라에서 곤액(困厄)을 당했을 때 춘추(春秋)를 만들었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나라로 귀양 가서 여람(呂覽)이라는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썼기에 오늘날까지 그들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다산 역시 귀양살이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귀한 책들을 아주 많이 저술하였기에 정약용이란 이름을 만세(萬世)에 드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가슴에 한(恨)이 켜켜이 쌓이고 맺히면, 그 한을 풀고자 후세에라도 진실과 진심을 알려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게 바로 역사가 되고 시대적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지금 이시간도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가슴에 쌓이고 쌓인 억울함과 한을 한편의 글로서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중의 ‘중니열전’에 자공(子貢)이 해진 옷과 관을 쓴 원헌(原憲)이란 사람에게 병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원헌(原憲)이 대답하기를 “재물이 없는 자를 가난하다고 하고, 도(道)를 배워 행하지 못하는 자를 병들었다고 한다. 나는 가난하긴 하나 병들어 있진 않다.”라고 하였다. 원헌(原憲)의 말대로라면 오늘날이야말로 공(公)과 사(私),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이미 다 배우고 익혀 도의(道義)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배운 대로 양심에 따라 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 정신적으로 병이 깊게 들어버린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소나무 그늘에서서 다산선생을 그리며 한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강 건너를 쳐다보니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압구정(狎鷗亭)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한명회가 만년에 이르러 정취가 빼어난 한강변에 지어놓고 즐기던 정자였다. 한명회는 조선조의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을 부추기고 앞세워 계유정난이란 피비린내 나는 유혈쿠데타를 일으켜 세조를 등극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에 따라 신분이 초고속으로 수직상승하였으며, 단종 복위운동까지 봉쇄시킴으로서 일약 도승지에 오르는 등, 명실 공히 최고의 공신대우를 받기에 이르러 후에 영의정을 세 번이나 하면서 권세를 휘둘렀다. 하지만 연산군시절 갑자사화(甲子士禍)때 간신으로 지목되어, 관작의 추탈과 함께 부관참시를 당하여 그 수급(首級)이 한양의 복판에 효수되었으니 죽어선 편히 쉴 수 없었다. 또 계유정난을 일으키게 하고 단종 복위운동봉쇄를 위해 그야말로 핏빛으로 물들인 참혹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으로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간신 중의 간신으로 평가 되어왔다. 그러함에도 오늘날에 이르러 세조등극의 성공적인 킹메이커로서 왕권강화를 주도한 참모이자 적극적인 경영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도외시하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신의(信義)의 정신을 저버린 올바르지 못한 사관(史觀)이라 할 것이다. 특히 인간의 가슴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인(仁)의 마음이 상실되지 않고선,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참혹한 사건을 일으키게 한 간신의 처사를 합리화 한다는 것은, 미래가 창창한 청소년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사고(思考)를 전해주는 것으로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선시대 간신배들이 드나들던 압구정자리를 지나는 강물은 그곳을 외면해버린 채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은 이제 동부이촌동을 감싸 안고 돌아가는지라 남산에 가리어져 보이질 않았다. 난 두 눈을 감고 한강을 그려보았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아래 흰 구름을 안아담고 유유자적하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눈을 뜨고 바라볼 때보다도 더 선명하고 생생하게 그려졌다.
강물은 이제 ‘국립서울현충원’ 앞을 흐른다. 공산주의사상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세계 최빈국의 나라에서 오늘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대국을 이루어놓은 ‘박정희 근대화국부(近代化國富)대통령’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들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의 묘소들을 바라보며 읍(揖)을 하듯 잠시 머문 다음, 한시도 멈추어있을 수 없는 게 물의 이치라면서, 여전히 한강철교와 노량진 사육신묘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이문구 소설가가 쓴 ‘매월당 김시습’이란 책에 보면,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천석(千石)’이라는 가동(家僮)과 함께 비가 내리는 한 밤중에, 갈대가 무성한 노들나루의 새남터근처에 버려진 절개의 상징인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강을 어렵게 건너 노량진에 안장시킴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육신묘를 수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을 이은 문종은 병약하여 고작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문종은 생전의 어느 날 편전에서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친히 학사들에게 술을 따르고 대작을 하며 이르기를 “이제 내 수명이 오래지 못할 것 같아서 특히 경들에게 부탁하노니 장차 이 어린 세자를 잘 보호하여 주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또 붕어(崩御)하기에 이르자, 재차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하였다.
문종을 이어 겨우 12살의 나이에 즉위한 어린 단종은 한명회의 사주를 받은 공신들의 겁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보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왕권을 수양대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성삼문은 하필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전달해야 하는 예방승지를 맡고 있었다. 승지는 옥새를 전달해 주면서 절통(切痛)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통곡을 하였다. 성삼문은 그때부터 부친인 성승을 모시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사가 실행되기 전 김질이 동지들과의 굳은 신의를 저버린 채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거사의 계획을 고변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수많은 관련자를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큰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참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의비정(不義非正)하고 참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시켜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가 폐서인시킨 다음, 17세의 어린나이에 시살(弑殺)하고 말았으니,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은 청령포의 한 서린 고혼이 되고 말았다.
계유정난에서부터 단종이 승하하기에 이르기까지 선혈로 물들인 이 비극적인 사건들은 원죄자인 세조보다도, 한명회의 간교함과 세종에 대한 신숙주의 불충,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과의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김질의 배신이 더 추악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시대나 사악한 사람들의 추악한 배신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죄 없는 사람이 고초를 겪게 되고, 세상이 어지럽게 됨으로서 역사가 얼룩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신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변함없이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동안 추위의 고통 속에서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桐千年老恒臧曲 梅一生寒不賣香/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연 자신만의 영달을 위하여 한명회나 김질과 같은 간신배로 살아갈 것인가? 사육신이나 생육신처럼 신의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며, 국가와 국민들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게 할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마음이다. 불현 듯 현대판 옥새파동과 그 후유증의 전말이 떠오른다.
한강의 강물은 사육신묘 앞에서 여섯 충신들을 우러르며 숭모(崇慕)의 예를 갖춘 다음, 63빌딩을 바라보며 이내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여의도에 이른다.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흐르는 한강의 물결은 다소 수다스럽게 수근 거리며 일렁거린다. 불만스러움에 할 말이 많은가 보다. 한강물은 말한다. ‘국회는 국정을 통제하고 입법 활동을 하는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국가 최고기관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안별로 충분한 토론을 통하여 여야의 이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루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올바른 입법을 하여야 함에도, 오직 정권의 유지와 당리당략(黨利黨略)만을 위하여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쓸데없는 입법을 하거나, 불필요한 정부조직을 만들어 예산을 낭비케 하고 있다.’며 쑥덕거린다.
국회의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과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고 흉을 보는 것 같았다. 난 한강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한강물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국회의 입법과 정부의 정책을 국민이 스스로 믿고 따르며 지지하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국가가 집행하고 추진하는 법과 정책이 입법의 과정에서, 한쪽 진영의 의견이 완전히 무시되지 않는 국회의 윤리적, 도덕적정당성과 논리적 합리성이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국가발전에 꼭 필요한 것으로서 실현가능해야 하며, 그로인한 이익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실리적인 법과 정책이어야 한다.’며 그저 여여히 흘러갈 뿐 이었다.
쉬지 않고 흘러온 강물은 이제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바다에 가까워진다. 한강하구에 맞닿은 임진강하류부근엔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반구정은 고려 말에서 조선의 세종 때까지 오랜 기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방촌 황희정승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한가롭게 즐겼던 정자이다. 황희 정승은 대범하고 강직한 성격과 넓디넓은 도량을 갖춘 현인(賢人)과 같은 인격자로서 재미있는 일화들을 많이 남긴 명재상이다. 한명회의 압구정(狎鷗亭)이나 반구정(伴鷗亭)이나 갈매기를 벗 삼겠다는 뜻만은 같을 터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관직에 있으면서 살아온 궤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한명회가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위한 간신의 삶을 살았다면, 황희 정승은 오직 국가를 먼저 생각한 청백리였던 것이다.
한강물은 드디어 한탄강과 합류하여 흘러온 임진강과 만나 조강(祖江)을 이루어 김포와 강화의 앞바다인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북한의 금강산에서부터 시작되어 흘러온 물길이 한탄강과 임진강이고 보면 남북의 물이 하나가 되어 서해바다에 안기게 되는 것이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치 않는다고 하여 해불양수(海不讓水)라 하였거늘 어찌 남과 북의 물을 가리겠는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해불양수(海不讓水)의 철학이야말로 지도자로서의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응봉산에서부터 한강의 물결을 따라 물과 함께 흘러간 생각이 한강하구에 이르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떠올라 눈이 번쩍 떠졌다. 그건 바로 지난 2018.11.5일부터 35일간 남북한의 해군이 주축이 되어 ‘한강하구남북공동수로조사’를 실시한일이었다. 조사에서 수심과 조석관측을 통하여 물속의 위험물인 암초 21개를 발견함과 함께 그 위치와 크기 등을 확인하였다. 우리정부에선 이를 토대로 한 해저지도를 만들어 북한 측에 제공하였다. 이를 두고 보수우파들이 안보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는 그동안 남과 북이 결의한 합의사항들의 불이행은 물론, 갖가지 만행을 끊임없이 저질러온 북한의 과거사 때문일 것이다.
물이야 남북에서 각각 따로 흘러와 서로 얼싸안고 한 몸이 되어 바다에 안길 수 있겠지만, 70여년이나 국가의 이념과 정체성이 공산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물과 기름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한 몸 한마음이 될 수 있겠는가? 남북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우선적이고 궁극적인 필요조건으로서 국가의 정체성이 먼저 통일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에 맞추어 국가의 정체성을 바꿀 순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북한이 자체적으로 국가의 체제를 변화하고자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북한이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절실히 느끼게 되어, 자기들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철도니, 도로니, 수로니 이러한 국토통일인프라구축과 경제적 지원 및 군사적 긴장완화에 대하여 검토해볼 시점에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그들이 수없이 저질러온 만행에 대하여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보상과 원상복구를 시행하겠다는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대화나 협상도 무의미한 것이며 신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쪼록 우리 민족의 앞날이 지나온 과거보다 더 희망적으로 밝고 빛나게 되기를 서원(誓願)하는 바이다.
응봉산 정상에서 매미소리를 벗 삼아 내려오는데 지렁이 한 마리가 숲에서 나와 흙을 이탈하여 시멘트길 위로 기어오른다. 아직은 살아서 꿈틀대지만 그냥두면 뜨거운 햇볕에 데어 생을 마감하게 되고 말 것 같다. 난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지렁이를 숲속으로 던져주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과 함께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미물짐승들보다 하나도 낳을게 없는 인간답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점점 혼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존재하는 동물의 세계에선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잔인하게 잡아먹긴 하지만, 자기새끼를 굶기고 때려죽이진 않으며, 정의(正義)니, 공리공익(公理公益)이니 하는 깃발을 휘두르며 거짓의 헛소리를 지껄여대지는 않는다. 또 쇠똥구리나 구더기가 자신들이 더러워 보일 진 몰라도, 사실은 청청고고(淸淸高高)하다고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진 않는다. 그들이 언제 염치없는 인간들처럼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내로남불을 일삼는 일이 있었던가. 하찮은 미물짐승이라 하여도 그들은 편 가르기를 하면서 내편은 잘못이 있어도 무조건 옹호하고, 남의 편은 언제나 비판을 일삼는 비양심적인 삶을 살진 않는다. 또 정신적으로 집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동료들을 배신하고 다른 무리를 돕는, 야누스와 같이 두 얼굴을 가진 신의(信義)없는 삶을 살아가지도 않는다.
난 산에서 내려와 인근의 서울 숲으로 갔다. 강변의 난간에 서서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글을 쓰는 문학이란 것도 시대상을 표현해내는 하나의 기록일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외면한 글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 같이 문학적 소양도 부족하고 우약(愚弱)하기만한 사람이, 어찌 우둔한 글로 세상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국조(國祖)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흘러온 한강에게 넋두리하듯 물어보았다. 한강은 강물에서 가엾게 목숨을 잃은 어느 대학생의 죽음에 대하여도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시대의 고비마다 누가 국가에 충성을 하였고, 누가 해악을 끼쳤는지도 다 알 것이기에 물어보고자 함이었다.
‘한강이여! 말 좀 해다오.’ ‘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어찌해야 옳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다행스럽게도 한강이 기꺼이 말해준다. ‘우리의 물들은 뒤나 돌아보면서 과거에 매달려 한풀이나 하는 일들은 하지 않네. 오직 순리적으로 낮은 곳을 따라 앞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꿈이 있는 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갈 뿐이지...’ ‘단 한 방울의 물일지라도 모두가 다 예(禮)와 정도(正道)를 따라 흐르고 흘러 결국엔 광덕대해(廣德大海)를 찾아가지 않나? 서로를 갈라놓고 분열시켜 불화 속에 따로따로 다른 길을 가게하지 않고, 화합으로 하나가되어 한 방향으로 말일세...’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어종들이 자유롭게 먹이를 찾아먹도록 그들의 먹이시장인 물결에 맡겨놓을 뿐, 의도적으로 통제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먹이를 그냥 나누어주려 하지도 않네.’ ‘무엇보다도 국가의 안보가 무너지거나 자유민주주의의가치가 훼손되어선 절대로 안 된다는 걸 잊지 마시게.’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네.’ ‘또 바람이 좌우상하(左右上下) 어디에서 불든 국민각자가 세풍(世風)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나 하나만이라도 바른 생각을 가지고(정(正思/정사), 세상을 올바로 보고(正見/정견), 바르게 판단하여(正判/정판), 바르게 행동하겠다(正行/정행).‘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실천을 한다면 나라가 잘되어가지 않겠나?‘ ’노자(老子)는 “하늘의 도(道)인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는 친하고 안 친하고의 사사로운 정이 있지 않고(天道無親/천도무친),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할 뿐이다(常與善人/상여선인)”라고 하였네. 이 어려운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천도(天道)에 따라, 바른 마음을 가지고 올바르고 착한 사람들과 뜻을 함께한다면, 나라의전체가 분명 개운(開運)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세.‘란 말을 가슴에 던져주고는 물결을 일렁이며 바다의 광대한품을 향해 유유히 흘러갈 뿐이었다. 코로나와 싸우느라 모두가 지쳐있는데, 올해의 광복절엔 국민이 대화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나라의 기운(氣運)과 기력(氣力)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2021년 제헌절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