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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탐방
돌샘 이재영
새벽 6시에 대구박물관 주차장에서 리무진 버스 일곱 대가 박물관 회 회원 300여 명을 싣고 힘찬 출발을 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캄캄하니,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 없다. 차가 휴게소에서 서기에 밖으로 나가니 진주휴게소이다. 커피 한잔으로 기분 전환하여 차에 오르니 전에 답사했던 곳의 빼어난 경치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땅끝 마을에 도착하니 정각 12시다. 버스 일곱 대에 300여 명이 바다 횟집인 종갓집에 다 들어간다. 대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큰 식당이라 깜짝 놀랐다. 점심 후 차에 올라 부두로 갔다.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날씨도 해가 뚫린다. 여기는 옛 청해진, 장보고 호 배는 엄청 크다. 타고 간 버스와 사람이 한배에 다 탔다. 바다는 맑고 잔잔하여 쾌적하다.
섬과 섬 사이라 내항으로 기르는 수산업 구조물들이 온 바다를 가득 메운다.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18.3km 뱃길을 출항한 배는 40분 정도 달리니 섬마을에 도착했다. 여기가 노화도(奴火島)이다. 차에 올라 서남쪽으로 3.8km 달려 우뚝한 보길도 대교 위를 지나간다. 보길도에는 12절경이 있고 면 전체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섬 전체가 아름다운 볼거리이다.
보길도는 전남 완도군 서남해역에 위치한 면지역으로 주도인 보길도를 비롯하여 예작도, 장사도 등 여러 섬으로 구성된 4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인조 때 고산윤선도선생이 머물렀던 유적과 애송리의 상록수림, 감탕나무 등 천연 기념물, 황칠 목인 전남기념물 등이 볼거리이다.
우리는 먼저 고산 윤선도 선생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유배지였던 부용동 유림으로 달려갔다. 여기는 그가 1637년 51세 때 귀양에서 풀려나 죽을 때까지 기거했던 곳이다. 고산 선생은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려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아 부용동이라 불렀다. 내륙 깊숙한 산속 경관이 수려하다. 그가 이곳에 들어온 뒤 죽을 때까지 일곱 차례나 드나들었다 한다.
그는 여기서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경관을 기반으로 별서를 짓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면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다. 고산 선생은 일찍이 섬 속에 모든 경치를 평하기를 석실(石室)은 신선에 비교한다면 당연히 그중에 제일이 되고, 세연정(洗然亭)은 번화하면서도 청정한 낭묘(廊廟)를 겸비한 기구이며, 곡수(曲水)는 정결하여 자신을 지키는 자(者)라고 하였다고 했다면서 해설자의 설명이 끝났다.
차가 부용동 주차장에서 멎었다. 차에서 내리니 입구엔 울창한 나무숲이 길을 연다. 여기는 부용동, 인파의 행렬은 고산 선생이 살았던 낙서 제(樂書霽)로 갔다. 이 집은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쫓아 집터를 잡고 지은 집으로 학문이나 글을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움이란 뜻을 지닌 초가삼간 집이었으나 기와로 바꾸었다. 집 둘레엔 바위로 인공연못과 도랑을 축조하여 사시로 맑은 물이 흐른다.
낙서 제 앞 계곡 가에 있는 곡수당(曲水堂)은 그의 아들 학관이 조성한 것으로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石亭), 석가산(石假山), 연못, 화계(花階), 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이다. 특히 보를 막아 계단을 조성한 그의 기발한 조원 안목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원리(苑籬)조성의 높은 경지를 엿보이게 한다.
경내에는 낙서 제 외에도 무민당, 동와, 서와가 있었으며, 소은병이라는 바위가 뒤뜰 정원에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 남쪽 산기슭에 있는 석정을 둘러보고 사자바위에 올라 건너편 산 중허리에 조각품처럼 서 있는 동천 석실을 바라보며 사진기에 전경을 담았다.
동천 석실은 낙서 제로부터 약 1km 떨어진 해발 100~120m에 위치하고 있어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고산 선생은 부용동 제일의 명승이라 절찬했으나 가 볼 시간이 없어 참으로 아쉽다.
동천 석실(洞天石室)은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다. 동천이란 신선들의 거처인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연유된 것으로 수시로 찾아와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다. 때로는 골짜기와 격자봉, 낙서 제를 보며 아름다운 낙조를 즐기기도 하고, 사건이 생기면 무민당에 기를 달아 연락하였다.
동천 석실에는 정자 오른쪽 암벽 사이에서 퐁퐁 솟아나는 맑은 석간수(石間水)를 받아 모으는 연지(蓮池)가 있으며, 벼랑 쪽의 것을 석담(石潭)이라 하고, 바깥쪽 연지를 석천(石泉)이라 한다. 이들은 모두 인공이 닫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그 모양에 따라 명명했다. 여기를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애틋하다.
차에 올라 10여 분 달려가니, 세연정(洗然亭)이다. 넓은 주차장과 수목으로 둘러싸인 길은 마치 서울 어느 궁궐로 들어가는 듯하다. 남쪽 지방 아열대의 희귀수종 고목들이 빽빽이 들어차 겨울에도 생기 띈 잎들이 반짝인다. 그 속에 규모가 엄청 큰 연못 속에 자연석인 듯한 것을 인공으로 옮겨 꾸며놓은 듯도 한 큰 바위 들이 조화롭게 잘 조성된 연못 저편에 하늘 날아오를 듯 서 있는 정자는 마치 선경(仙境) 같다.
세연지는 우리나라 정원유적 중에서 조형처리가 가장 화려하고 광대한 연못으로 계곡의 물을 잘 이용한 연지이다. 또 농토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담(潭)을 이루고 있는데, 연지 북쪽의 인공적인 직선형과 남쪽의 자연적인 곡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연지 내부에는 암석과 축판(築板) 등을 볼 수 있다. 세연지에는 항상 맑은 물이 찰랑거렸고 작은 배를 띄워 어린아이들이 뱃놀이하면서 어부사시사를 읊조리는 것을 고산이 감상하던 곳이다. 인파의 행렬 속에서 나도 벗과 나란히 수목 속으로 연지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읊조리며 옛날을 회상한다. 지금도 고산이 정자에 앉아 있고 어디선가 뱃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고산 선생은 살아서 선계를 넘나들며 온갖 향락을 다 누리면서 시가와 군무, 활쏘기 등으로 즐긴 것이 오늘날 국문학의 기틀을 만들었으니, 그는 당대를 주름잡은 풍운아로 행운을 잡은 천복(天福)을 받은 사람이다. 세연정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연회(宴會)와 유희遊戱)의 장소로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대표적인 곳이다.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깨끗하고 단아하여 여기 오르면 기분이 매우 쾌적하고 단아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세연정은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세운 정방형 정자로 문을 사방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개방형 구조다. 세연정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고 사방에 각기 다른 편액을 걸었으나 지금은 중앙에 세헌정(洗然亭) 편액만 남아있을 뿐이다.
세연정은 담양의 소세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조선조에 민간 3대 정원으로 이름나 있지만, 그들과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연정과 세연지의 조감도를 보면 그 내용이 충실하다. 이 작은 연지 속에 아기자기한 많은 볼거리들 하나하나가 다 예술품이다. 그 당시의 사람이 그 당시의 기술로 지금도 하기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하였는가 생각할수록 신기할 뿐이다.
고산 선생은 정철 송강과 더불어 시조와 가사 문학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조선 문학을 빛내었다. 그가 없었다면 조선 문학의 한 축이 없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가 보길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것은 우리 조선조의 문학으로 보나 고산 자신의 삶으로 보아 참으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고산은 귀양살이를 한 사람이 세도와 많은 재산으로
노화도(奴火島) 백성들을 데려와서 자신의 영달을 위해 보수 없이 사역을 많이 시키면서 왕보다도 더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한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역을 당한 사람들의 울분과 분노는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 씁쓸하고 측은하다.
세상사 요지경이라 하더니,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지탄받는 폭군이었건만, 지금은 중국 사람들아 만리장성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많은 수입을 얻어 잘 산다. 보길도 사람들도 옛사람들은 윤선도 때문에 죽을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은 보길도가 우리나라의 일류 관광지가 되어 풍요로운 것은 윤선도 때문이다. 이것도 인과응보라 할까? 앞일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고 하더니 인생사는 정말 요지경이다.
일행은 차에 올라 세연정을 아쉬운 마음으로 이별하고 예송리 상록수림과 감탕나무 천연기념물을 보기 위하여 몽돌해변으로 갔다. 해변 따라 섬 한 바퀴를 일주하는 도로를 따라가니 다도해 해상공원이 한눈에 빨려온다. 가슴이 뻥 뚫리며 상쾌하다. 한여름 더위에 다정한 벗 함께 승용차 갖고 와서 못 가본 곳 둘러보면서 한 없이 멤 돌고 싶다. 몽돌해변에서 정차하여 차에서 내려 바닷가로 내려갔다.
해변은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숲 향기 가득한데, 한없이 푸른 바닷물이 파도를 몰고 와서 하얗게 부서진다. 바둑알 같은 까만 몽돌이 연인의 눈빛처럼 반짝인다. 한 줌 집어 배낭 속에 넣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돌을 갖고 가지 말라는 부탁 때문에 마음뿐이다.
해변 따라 2Km 를 걸어오라 하고 버스는 먼저 가서 기다린단다. 발자국 뗄 때마다. 몽돌이 미끄러지면서 속삭인다. 마치 첫사랑 애인의 촉촉이 젖은 음향같이 향기롭고, 발은 쿠션으로 무척 편안하다. 혼자라도 끝없이 걷고 싶은데 누가 와서 살며시 손을 잡는다. 돌아보니 뜻 밖에도 동문수학한 시조 시인 이다. 지기 상통하는 미모의 여성을 만나니, 마음은 하늘 날아오른다. 말없이 걸어가도 몽돌 소리가 연인의 속삭임으로 들린다는 말 실감하며 우리는 하얀 파도 속으로 끝없이 걷는다.